이웃 마을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가볍지만은 않은.....
부산에서 49.5km, 후쿠오카에서는 142km 거리에 위치한 대마도.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백두산으로 머리를 삼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의 대마(대마도)와 호남의 탐라(제주도)는 양발이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 사다모리(宗貞盛)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에 “역사의 진실은 어쩔 수 없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천명했다. 6·25 직전(3년 동안)까지 60여 차례나 요구했다.
11월 16일 오전 7시 50분경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 히타카츠항에 도착후
점심
점심후 이즈하라로 이동
1811년 제12회 조선통신사 366명은 에도까지 가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조선통신사의 국서를 접수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건너온 ‘통신사 접반사’가 13군데 임시거처를 마련했던 곳에 세운 碑가 '朝鮮通信使幕府接遇の地' 碑이고 금석성 안에 있다.
고종황제의 딸인 덕혜옹주(德惠翁主)와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인 ‘李王家宗伯爵家禦結婚奉祝記念碑’
리본을 보니 부산의 모 여성단체에서 헌화한 듯...
금석성의 대문격인 야쿠라몬(櫓門)은 1990년 복원한 대마도에서 일본색이 가장 짙은 건축물이다.
금석성은 도주 자리를 노린 친척이 야밤에 이께신사(池神社) 부근의 島主官衙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불길을 뚫고 도망친 곳에 쌓은 성이다.
하치만구 신사(八幡宮神社)는 이즈하라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부와 병사들을 보호하는 신사이다.
일본 5000엔 권에 삽입된 사진의 인물인 유명한 여류 문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1872.5.2~1896.11.23)’의 스승이자 ‘히구치 이치요’ 연모를 받은 덕에 더 유명해진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문학기념관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는 의사였던 부친이 부산 초량왜관에서 개원의(開院醫)였기 때문에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내게되어 한국어에 능통했다. 1881년에 아사히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조선에 건너왔고, 그 다음해에는 한국의 고전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해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다.
대아호텔 석식
대아호텔의 뷰가 일품입니다.
수평선에 구름만 없었다면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었을텐데 아깝습니다.
호텔 조식
트윈룸 창밖 뷰
만제키세토(万関瀬戸)와 만제키바시(万関橋).
만제키세토는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대마도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1900년 개설한 운하이며, 그 위에 건설된 다리가 만제키바시이다.
러 ·일전쟁 때 만제키세토에서 대기하던 일본 함대와 9개월에 걸친 항해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러시아 발틱함대가 동해상에서 격전을 벌여 알본 함대가 승리했다.
이하 에보시다케 전망대(烏帽子岳展望台)에서 둘러본 전망
이하 슈시의 단풍&삼나무, 편백나무길
이하 미우다 해수욕장(三宇田海水浴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