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重根 將軍의 유묵(遺墨)
2012. 10. 26 안중근 장군의 103주년 의거일을 맞아 요즘 국내외에 걸쳐 어렵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 형편을 생각하면서 자료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의병장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우덕순, 조도선 등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각 역 근처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저격을 준비하였으며, 체포 후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라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청나라 길림성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 사살했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의병장들의 거사에 영향을 주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10시 사형이 집행(향년 32세)되었으며, 유해는 현재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1972. 8.16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순국15분전 사진.
내(안중근)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 第二次韓日協約 / 乙巳五條約 또는 乙巳勒約)과 7조약(* 第三次韓日協約 / 丁未七條約)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장군의 어머니

안중근 의사가 다섯 차례의 공판을 받았던 여순감옥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의 두 동생을 급히 보내 편지와 함께 명주 수의를 전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그 수의를 입은채 형집행을 당했다.
“응칠(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이름)아!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를 세계만방에 보여 준 것이다. 이 분노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억울하더라도 상고를 하지 말고 우리 민족의 대의를 위해 거룩한 죽음을 택해야 될 줄로 안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이 그른 사람들에게 재판을 다시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너를 일본 놈들이 살려 줄 리가 있겠느냐.
혹시 자식으로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상고하겠다면 그건 결코 효도가 아니다. 기왕에 큰 뜻을 품고 죽으려면 구차히 상고를 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남기지 않기 바란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
 어머님이 지어주신 옷으로 갈아입고...순국 5분전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서예를 통해 본 그의 생의 哲學
지금까지 50여 점의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작품을 통해 그의 서도와 그곳에 나타난 정신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의 儒家 사상과 거기에 나오는 격언들을 많이 적었다. 예를 들어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人無遠慮 難成大業)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둘째로 하늘을 노래한 내용이 많다. 例를 들어 敬天, 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이 있다. 그리고 百世淸風이 그의 대표작인데 안 의사는 가톨릭교도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의 作品에서 나타나 있다.
셋째는 조국강산을 사랑하고 끝없는 애착심을 표시하였다. 例를 들어 第一江山, 靑草塘,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마다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한다는 뜻이다.
넷째는 일본정부의 침략 행위의 질책이 중요한 항목이다. 弱肉强食 風塵時代. 약한 자를 강한 자가 잡아먹는 풍진시대이다. 이런 글을 안 의사는 사형집행이 되는 그 해 3月까지 썼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다섯 번째는 조국을 위해 한국 사람들이 헌신할 것을 당부하는 글들이 많다.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라든지,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 无難事)와 같은 글은 당시 게을렀던 우리 民族을 일깨우는 글이라고 본다. 그 외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白日莫虛渡 靑春不再來). 참으로 중요한 충고의 말씀이다.
유묵(遺墨)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 보물 제569-1호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중국 당(청) 고종이 운주 장공예(張公藝)의 집 당호(堂號)로, 9대가 한집에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 준 글이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보물 제569-2호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연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 보물 제569-3호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보물 제569-4호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 할 수 없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인용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보물 제569-5호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보물 제569-6호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庸工難用 連抱奇材(용공난용 연포기재) 보물 제569-7호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통감(通鑑)』에 자사(子思)가 위왕(魏王)에게 말한 내용에서 인용

人無遠慮 難成大業(인무원려 난성대업) 보물 제569-8호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 (오로봉위필 삼상작연지 청천일장지 사아복중시) 보물 제569-9호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푸른하늘 한 장 종이 삼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歲寒然後 知松栢之不彫(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보물 제569-10호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인용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보물 제569-11호
임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수사심여철 의사림위기사운) 보물 제569-12호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도다.

博學於文 約之以禮(박학어문 약지이례) 보물 제569-13호
널리 글을 배우고 예법으로 몸단속을 한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第一江山(제일강산) 보물 제569-14호
38.6㎝×96.6㎝, 원 김양선 목사 소장으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 보물 지정일: 1972. 8. 16.

靑草塘(청초당) 보물 제569-15호
37.6㎝×67㎝, 민병기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孤莫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보물 제569-16호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39.7㎝×74.9㎝, 한중호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仁智堂(인지당) 보물 제569-17호
어질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의 당호. 37.6㎝×6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忍耐(인내) 보물 제569-18호
26.8㎝×72.1㎝, 김성섭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極樂(극락) 보물 제569-19호
33.2㎝×68.2㎝, 원 강신종 소유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 보물 지정일: 1972. 8. 16.

雲齋(운재) 보물 제569-20호
32.8㎝×67.8㎝,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追悔何及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 보물 제569-21호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때를 놓쳐 실기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보물 제569-22호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유묵 오른쪽에 증(贈)안강(安岡)검찰관이라 씌어져 있다. 이는 친절하게 대해 준 당시 뤼순법원 검찰관 야스오카에게 증정한 것이다. 야스오카 사후 장녀 우에노(上野)가 소장하다가 1976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거쳐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보물 제569-23호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의사를 경호했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 준 유묵이다. 제대 후 지바는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하여 이 유묵을 일본에 가지고 가 사진과 함께 정성으로 모셨다. 그의 사후 미망인과 양녀 미우라(三浦)가 봉안하다가 구리고마의 다이린지(大林寺)를 거쳐 1980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었다.

天與不受 反受其殃耳(천여불수 반수기앙이) 보물 제569-24호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춘추』 의전(春秋義戰)의 ‘천여불취 반수 기구(天與不取 反受其咎)’와 같은 뜻이다.

言忠信行篤敬 蠻邦可行(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 보물 제569-25호
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臨敵先進 爲將義務(임적선진 위장의무) 보물 제569-26호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것이 장수의 의무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