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경이 쓰는 리뷰시 단평]
시경(詩經)에 들다
양선규
삶의 이력과 바람, 물을 잘 반죽하여
국수를 뽑으면서 시를 쓰는 노 시인은
이제 몸과 마음이 그렁저렁하다.
굽은 길과 좁은 길 울퉁불퉁한 고갯길도
젖은 국수 가락처럼 휘어 넘는 시인은
삶이 시이고 시가 삶이 된 지 오래다.
마음과 몸, 이제는 야윌 대로 야위어
가을 타작하다 남은 뒷목처럼 가볍고
실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햇살에 드러난 실핏줄과 하얀 뼈는
비울 것 없어 영혼처럼 홀가분하다.
한 오십 년 하얀 국수를 뽑아내던 세월
가만가만 뒤돌아다보면
시가 국수 같고 국수가 시 같은 생
따사로운 햇살 머무는 오후
듣고 보고 생각하는 일 한가로운데
툭, 오동나무꽃 떨어지는 소리에 젖다
어린 손자와 툇마루에 마주 앉아
뜨끈뜨끈한 막국수를 먹는다.
―『불교문예』 2009년 가을호
가끔 시를 쓰는 이유를 스스로 되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의 시작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도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느 책 한권의 글귀에서 시작하였다고 믿어보고, 누구나 가슴 뛰는 한 줄의 시 구절을 품고 산다고 두루뭉술하게 에둘러보기도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시집을 펼쳐들고 먹먹할 때가 더 많았다. 시 한편이 갖고 있는“삶의 이력”앞에서 시를 쓰는 이유는 무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경(詩經)’이라는 제목 앞에서 아직도 ‘시경(詩境)’을 보려하는 내게 이 한편의 시는 또다시 나를 먹먹하게 만든다.
시(詩)를 국수에 비유한 시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이제 몸과 마음이 “그렁저렁”한 노시인에게 시란 한 끼의 국수같이 소박한 것이면서 그 순간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이 시인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한가로운”시간의 틈,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전부를 살다간다. 즉 시인에게 삶이란‘순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오동나무 떨어지는 소리”에도 한 생을 살다가고, “어린 손자”와 마주 앉아 생의 순환을 절감하기도 한다. 그러니 야위도록 국수 가락처럼 시를 뽑아내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허기를 달래기도 하는“비울 것 없어 영혼처럼 홀가분”한 시인의 마음이 시경(詩經)이며, 시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
세한도
오승근
1.
겨울 산을 오른다
누가 화선지 한 장을 펼쳐 놓았을까
수묵화에 낙관처럼 찍히는 발자국
표절자로 여긴 것일까
시퍼런 칼날을 휘 두른다
칼바람을 맞은 길은 뚝뚝 끊기고
화선지 위에 묵색(墨色)으로 찍힌 나는,
누대의 산맥을 지켜온 주목나무 아래서
눈보라를 다스려온 가지의 절개와
뿌리가 더듬었을 수맥의 등고선을 그려본다
2.
굽은 등만큼이나 가파른 능선을 따라
여기! 흑과 백이 나란히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년의 뿌리로 아호를 찍어 내고 있는가
솔잎의 천년 향을 더듬고 있는
주목에게 눈보라는 하얀 수의를 입혀주고 있다
피륙 두어 조각으로 아랫도리를 감싼 채
비둘기의 빈 집을 떠받고 있는 주목나무
설경에 등 푸르게 휘호하며
나에게 넌지시 목적지를 물어 오는데
산은 양질의 질문을 골고루 공급 했으리라
뿌리와 잎의 절개를 바치고 저들은,
원근이 각각 다른 수묵화를 이 땅에 새겼으리라
흑과 백의 등고선을 지우며
빙점의 온도는 일치하다는 듯 눈보라가 쌓인다
3.
묵색의 입성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삼각점을 향해 발자국 찍는 동안에도
전설의 뿌리로 휘호하는 주목
파릇파릇한 봄날이 돋아나길 기다리며
비둘기 한 마리 옛 집을 찾아와 구구―국 이정표를 긋는다
꼭지점에 서면 그 곳이 곧 하늘이라고
―『유심』 2009년 9, 10월호
장엄한 풍경위에 ‘나’라는 존재는 “화선지 위에 묵색으로 찍힌” 풍경속의 풍경이자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화선지의 묵색풍경 위로 눈이 쌓이고, 눈보라는 “흑과 백의 등고선”을 지운다. ‘나―눈보라의 풍경’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묘사하던 시의 구조는 “눈보라”를 통해 수묵화의 안과 밖 즉, ‘나’와 ‘풍경’ 그리고 ‘수묵화’의 공간을 살아있는 자연의 일체로 묶어낸다. 화선지 위로 번지는 흑과 백의 조화로움 그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나’의 발자국은 자연과 하나 된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눈앞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시각적 영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림 속 풍경을 재현하기라도 하는 듯 실재의 모습을 넘나든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단절되었거나 시작과 끝이 있는 그림 속 자연의 풍경으로서가 아닐 것이다. 세한도의 풍경 앞에서 주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시야 범위 내에 들어찬 풍광이 아닌, 자연의 영속성(永續性)이 아니었을까. 화선지 위에 한 점 “묵색(墨色)으로 찍힌 나” 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이자, 세한도를 완성한 주체였을 것이다. 자연의 풍경을 넘나들듯 그림을 그리는 이의 마음과 자연의 마음을 오고가는 것, 그것이 시인의 마음인 것이다.
-----------------------------------------------------------------------------------------------------
물결
원무현
마디를 가진 대나무는 위로 흐르는 물결을 가지고 있다
마디가 없는 수목도 물결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불 때 푸른 잎사귀가 강물처럼 반짝이는 것은
발아에서부터 백년 이백년
나무의 몸속에 세월의 물결이 흐르기 때문이다
암수가 한 몸 되어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에도 물결은 있다
신라 땅 경주 흙으로 구운 저 기왓장은
굳이 손이 아닌 눈으로만 쓰다듬어도
달빛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아사달 아사녀 뜨거운 숨결이 만져진다
그 숨결, 천년을 넘어 예까지 흘려보낸 물결이 내 안에 밀려온다
열손가락 끄트머리마다 일어나는 파문이 저릿저릿하다
―『신생』 2009년 가을호
물은 대나무, 수목, 기왓장, 나(내 안)를 흐른다. “마디를 가진”것들은 물론“마디가 없는”것들도 “물결”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물은 시간이자 사물의 근원이며 내력인 것이다.
시인은 물의 이미지를 자연의 신성한 순환의 힘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은 생명을 키우고 나무와 잎사귀를 탄생시키지만 물결의‘내력’은 과거로 향하고 있다. “발아에서부터 백 년 이백 년”을 거슬러 오르거나, 사랑이 시작되는“아사달 아사녀”의 뜨거운 숨결로 비유된다. 이렇듯‘흐르는’물의 이미지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생명의 역동성과 기원을 떠오르게 하며 또 다시 “내 안”에 밀려와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생명에게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의 이미지를 간직한“물결”은 지나온 삶의 이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문”으로 밀려나“물결”을 새긴 모든 존재들은“저릿저릿”한 통증을 절감한다. 삶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고통의 주체인 것이다.
-----------------------------------------------------------------------------------------------------
제비꽃 2
유순예
구부리지 마,
나 같은 앉은뱅이한테도 줏대는 있어
서 있는 그 곳에서
그냥 내려다 봐,
구부리다 허리 다치면 어쩌려고
겸양하다고?
능글능글한 시선들이
나를 이 산중으로 시집보냈어, 아니
퀭한 잔풀들이
내 발목을 꿰차고 놓아주질 않아
소박하다고?
수뇨관 막힌 놈, 종기난놈, 설사난놈
황달, 간염, 수종으로 시달리는 놈……놈들,
내 겨드랑이에 숨겨 둔
꿀주머니가 탐난다고?
와,
내 보라색 스카프를 풀어
연두색 스커트를 뜯어
네놈들 상처가 하는 말을 거둘게, 다만
뿌리까지 캐고 싶은 놈,
바닥을 기어보지 못한 놈,
오지 마!
―『스토리문학』2009년 9월호
‘높다’, ‘솟아오르다’, ‘일어서다’와 관련된 사유가 익숙해져버린 요즘이다.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을 위무하는 시들도 이런 희망을 품고 있는 가운데 유순예 시인의 「제비꽃 2」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앉은뱅이 꽃에게 “구부리지마”라고 말하는 화자는 “겸양”과 “소박”을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을 그런 비천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대상에게 ‘겸양하지 않은’, ‘소박하지 않은’ 세상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
세상 앞에 제비꽃으로 비유된 주체는 나약하다. 그것마저 갈취하려는 세상은 강력하지만 저마다 모두 막혀있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시인은 그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놈들 상처가 하는 말을 거둘게”라고 말한다. 겸양과 소박의 진정한 의미들이 “뿌리까지 캐고 싶은 놈”, “바닥을 기어보지 못한 놈”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높고 화려한 것은 가장 낮고 비천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
봄, 석남사
이가은
청매화 꽃잎 한껏 부풀어 오른 거 있죠.
꽃받침이 기지개 켜는 찰나
찰칵, 대궁에 달린 셔터 눌러요.
참았던 웃음 터뜨리며 포즈 취하는 꽃 좀 봐요.
사람도, 작별도 엇박자로 오가는 날들 속에서
때를 아는 이 꽃들 좀 봐요.
가슴 속 골짜기 하나씩 안고 사는 사람들,
그 나란한 어깨뼈 맞닿는 소리가 다정한 아침이죠.
나는 오르는데 계곡물은 아래로만 흐릅니다.
자꾸 바라기만 하는 내 마음
뜨거운 물에 던져진 물고기 같아
한시도 고요할 날 없었어요.
흘려보내야 할 마음들이 기어이 거슬러 오릅니다.
허공에 기대는 산새 번갈아 앉히는 돌배나무가
법당 문이 되는 이 길.
점점 가까워지는 목탁소리에
명치 끝 연분홍 등(燈)같이 내걸린 욕심들이
무더기로 켜질 것 같은 길이에요.
마음의 수평(水平) 맞추는 일은
갈수록 까마득한 산중(山中)같죠.
쉿, 바람이 청매화 향을 처음 받아준 순간이에요.
어때요, 이걸 봄이라고 부를까요.
―『시에티카』2009년 창간호
살아가면서 “마음의 수평(水平)”을 맞추는 일이란 얼마나 힘이 드는가.
석남사를 오르는 길, 청매화 꽃잎이 열리기 시작하는 봄, 오를수록 발아래로는 “골짜기 하나씩 안고 사는 사람들”이고 “계곡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오르려는 ‘나의 마음’과 ‘흘려보내야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사이로 ‘봄’은 오고 있다. 시인은 오르려는 마음과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묘사의 시적 구조를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자신을 내어주고 또 다시 채워나가는 것이며, 시인이 말하는 마음의 수평(水平)일 것이다.
삶은 시인의 말처럼 희비가 엇갈리는 “찰나”의 순간뿐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엇박자”로 어긋나기만하는 세상에서 “때를 아는” 마음이란 쉽지 않다. 언제나 부족하거나 넘치는 마음의 소란함을 “뜨거운 물에 던져진 물고기”라고 표현한 시인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기만 한다. 이 시에서 ‘봄’은 비움과 채움의 조화일 것이다. 즉 내어주고 채워주며 흘러가는 계절처럼 우리의 마음도 차고 기울며 수평을 맞추어가는 것이 아닐까. “허공에 기대는 산새 번갈아 앉히는 돌배나무”가 법당 문이 되는 까닭도 그러하리라. 화자는 석남사를 오르는 길에서 이미 수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테니스 치는 여자
이순주
새들을 하늘로 날려 보낼 건 뭔가
공 높게 띄워 라켓으로 허공을 휘두르다
일탈을 넘어 떨어지는 공,
그녀는 테니스를 친 많은 날들로
보이지 않는 날개를 가졌을 것이다
공원이 환해지는 이유는 무언가
발걸음 경쾌히
짧은 스커트 자락을 팔락였을 뿐인데
풀과 나무들에 물오르고
꽃망울졌다
탁탁,
고요가 엎질러지는 순간이다
날아드는 남자들의 시선 라켓으로 받아치는 그녀에게
바람은
날개 본을 떠가고
―『시에』 2009년 가을호
이 시에서‘허공’은 텅 빈 공중의 이미지와 그녀가 휘두른 테니스‘공’을 동시에 연상시킴으로서 무(無)의 공간을 새롭게 재탄생시키고 있다. ‘공’을 높게 띄우거나‘허공’을 향해 라켓을 휘두르는 그녀의 행위는 일탈의 의미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보이지 않는 날개”인 허공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공을 높게 띄워 ”올리는 그녀는 “허공을 휘두르”는 것이며, 이것은 곧 “일탈을 넘어 떨어지는 공”이 된다. 이러한 시적 구조로 인해 동음이의어인“공”의 의미는 ‘구(球)’에서 ‘공(空)’의 의미를 오고 가며‘비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러한 의미를 다음 행“풀과 나무들에 물이 오르”는 생명의 차오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고요가 엎질러지는 순간”이기도한 일탈의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라켓을 휘두르는 경쾌한 발걸음을 통해 비상과 허공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비상의 욕망은 어쩌면 자신을 비워야 하는 공(空)의 의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
김시습의 집에 들다
이영희
금오봉* 용장사지 바위틈에서
소나무가 돌베개를 괴고
의뭉스럽고 설분 시간을 엿본다
야곱이 베었던 돌베개
한송(寒松)이 춘송(春松)인 양
저 유독 시리도록 보드라운
푸르르 푸른 흙을 버렸다
뒤척일 수 없는 근본에 뿌리내린
나이를 먹지 않은 얼굴
오백 년 세월이 곱살스럽다
툭 불거진 근육을 당겨
작게, 자그마하게 몸을 말다
바람이 그의 고개를 받쳐주었을 때
계곡의 시린 바람을 개킨다
하늘로만 늘이던 고개
거북이 모가지마냥 집어넣었다
좌대 팔방 좁디좁게 잘라내어
내뻗는 다리조차 접었다
콕! 점찍어 앉은 자리
큰 바위로 굳어갈 뿐이지만
그는 결가부좌 틀고 앉아
여린 예닐곱 살 엉덩이로 산다
―『시선』 2009년 가을호
* 경주 남산 금오봉
출가인으로서의 삶을 더 오래 살다간 김시습은 탁월한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시의 제목인 “김시습의 집에 들다”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 의미로 작용한다. 금오봉 용장사지 바위 곁에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한가로이 바라보는 “얼굴”에서 “뒤척일 수 없는 근본에 뿌리내린” 강직함과 동시에 “나이를 먹지 않은” 시간을 초월한 수행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긴 시간을 곱살스럽고 여리지만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수행인으로 바라본다. 또한 자신의 몸뚱이를 자그마하게 당기고 모진 고통을 참으면서도 굳어갈 뿐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머물지 않고 수행하던 어느 산길에서처럼, 또는 후세에 그의 작품 속을 헤매는 누군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 시인은 그곳에 있는 ‘결가부좌의 큰 바위’에서 절개와 순수한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늘을 향해 자신의 뜻을 맡기고, 시린 바람을 맞으며 앉은 자리에서 “예닐곱 살 엉덩이”로 사는 “그”를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
-----------------------------------------------------------------------------------------------------
아버지의 구두
이 옥
노자(路資) 옆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
당신이 말한 좋은 날인가요
폼 나게 신어 본 날보다
눈요기에 그친
연탄광 위 아버지의 길
반납된 휴일
무좀 꽃으로 피어나는 발자국
구두 속에 쌓인 구멍 난 사연
꽃상여 대신
타고 간
길들지 못한 당신의 쪽배
뒤뚱뒤뚱 저물지 않는
구두소리
―『시에』 2009년 가을호
신어 본 날보다 눈요기에 그친 새 구두처럼 아버지의 “폼 나는 삶”은 끝내 “길들지 못한” 채 남았다. 노자(路資)와 새 구두가 놓인 죽음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 아버지의 살아생전 없었던 가장 호사스러운 날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말한 좋은 날인가요”묻고 있는 시인의 말처럼 이 상황의 역설적 의미는 마치 특별한 여행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슬픔과 삶의 애환마저 느껴지는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연탄광”, “반납된 휴일”, “무좀”, “구멍”, “꽃상여” 처럼 남루하거나 결핍된 이미지들이다. 살아생전 제대로 신어보지 못한 새 구두와 함께 아버지는 꽃상여를 타고 떠났지만 시인에겐 이 꽃상여가 “길들지 못한” 새 구두처럼 낯설다.
‘죽음’만이 아버지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물지 않는” 아버지의 구두 소리뿐이다. 오래도록 “길들지 못한”채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라는 거다.
-----------------------------------------------------------------------------------------------------
삽
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슬며시 만져보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남을 찌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밤 땅을 파기 위해 삽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땅을 파야했던 삽 한 자루의 수행이 떠오른다
땅은 삽날을 갈아내기 위한 숫돌이었을까 강할수록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해야 한다며 꼬리뼈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린 그곳을 내놓고 다니는 짐승 한 마리, 모든 것을 달관한 자세 하나 얻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도 사나운 포효도 다 버렸다
―『제10회 시흥문학상 작품집』2009년 12월
어쩌면 삶은 수행의 과정이다. 욕심 앞에서 자신을 다 내어주다가도 절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 자신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모든 만물로부터 깨달음의 이치를 한 겹씩 입는 것이 아닐까. 뜻하는 마음과 행하는 마음이 반대이니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수행을 시인은 ‘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뾰족한 것이 둥그렇게 변해가고, 찌르기 위한 마음이 유순해지는 것, 이것을 시인은 ‘삽’의 “곡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름더미”처럼 푸짐하고 유용한 의미의 “곡선”인 것이다.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용도와 쓰임을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롭다. ‘팔수록/ 산봉우리’와 ‘모래/ 물의 흐름’은 상반된 의미들이다. 이것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인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이러한 마음을 ‘삽’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려야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수행”인 것이다.
-----------------------------------------------------------------------------------------------------
찢어진 혀
이주언
헤아린다. 한 발, 두 발, 기어오른다. 미니스커트에서 치솟는 모반. 그곳을 거점으로 수천의 발걸음 지나간다.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밟힌다. 우린 뱃속부터 대가리 치켜든 족속인 걸요. 태연을 가장한 발설은 네온사인을 가장한 어둠이었다. 콜택시에서 씨펄 시집에서도 씨펄 공중을 날아다니는 씨펄. 가랑이 벌려 놓은 말. 씨를 퍼 나르는 말. 허공 핥으며 두 갈래로 찢어지는 말. 대체 넌 뭐가 될래? 출항의 깃발 펄럭이는데 기단 아래 삭신을 들여놓는다. 나뭇가지를 가장한 길이었어요. 승합차 속에 구겨져 허공으로 뻗어가는 길.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는 길. 피도 안 마른 뱀은 슬픔을 몰라 홍등 아래서 운명을 점쳐보는 밤. 번뜩이는 가윗날이 두려운 밤. 가늘한 탯줄 잡아당길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 찌그러든다. 미끈함을 가장한 웃음 허공에서 굴절된다. 미끈함을 가장한 두 개의 다리. 버둥거리며 거꾸로 찢어지는 혀. 당신의 늑골을 뽑아 온전한 문장이고 싶어요. 피도 안 마른 유혹이 밟히는 순간 이브의 방 안 가득 퍼지는 황홀한 향기. 사내의 눈 속에서 혀 한 가닥 파르르 떨고 있다.
―『시인시각』2009년 겨울호
이 시에서 “혀”는 “가랑이를 벌려 놓은 말”, “씨를 퍼 나르는 말”, “두 갈래로 찢어지는 말”이다. “혀”는 가능성이자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때로는 “승합차 속에 구겨져 허공으로 뻗어나가는 길”이며, “다른 행성으로 옮겨 가는 길”이다. 이것은 또한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시의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는 ‘혀- 두 갈래 길- 욕망’은 “모반”, “발설”을 숨긴 채, “온전한 문장”이고 싶어 한다. 욕망 역시 결핍을 간직하기에 이 시에서 상징적 의미의 “혀” 는 “찢어지”거나 “버둥거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온전한 문장”이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미끈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굴절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혀”는 ‘나’를 대변하며 존재화하지만 두 갈래 선택의 기로에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또한 몸의 안 밖을 넘나드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이기에 언제나 갈등한다.
-----------------------------------------------------------------------------------------------------
어느 갯가에 머물기 위해
이초우
1
꿈틀꿈틀 내가 탄 열차는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시월의 주말 어느 결혼식에 가고 있었지요 강가의 나무들은 복슬복슬 제 차림을 물거울에 비춰보곤 했습니다 가만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수도 없는 내가 마라톤 선수들처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늘하늘 수양버들이 긴 팔 흔들며 끝까지 완주 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달리는 내 몸은 꼬리처럼 두 발을 얄랑이며 헤엄쳐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숨이 가빠 견디기 힘들었지요 도열해 있던 강가의 나무들이 간혹 왜가리 모양의 하얀 물병을 군데군데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반환점을 가기만 하면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반환점까지라도 뛰어라고, 그들의 외치는 소리 참으로 간곡했습니다.
2
내가 달리는 오늘의 강은 동강(東江)이었지요 아마 다음 달에는 서강에서 달리게 될 지도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의식은 혼미해 자욱한 안개 속을 비틀비틀 뛰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른 나를 앞질러 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반환점이었나 봅니다 목에서 단내가 타 올라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투명 물주머니 하나가 보였어요 나는 그 동그랗게 생긴 물주머니를 보자마자 머리로 힘껏 들이받아 막을 찢고 뛰쳐들어갔습니다 물주머니 안의 물을 울컥울컥 들이켠 나는 갑자기 둥둥 떠 있는 무의식의 황홀함을 느꼈습니다 이젠 이전의 내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많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질 않았고, 돌아 내려오는 내 발길은 참 부드럽고 여유로웠습니다 불그스레한 연어 알 같은 내 몸을 쉴 새 없이 굴리며, 나는 어느 갯가에 머물기 위해 강 하구쪽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언젠가는 모래톱을 부수며 기어나가 아장아장 안뜰을 걷기 위해서 말입니다
―『애지』 2009년 봄호
열차 안, 차창 밖 풍경을 쫓는 시선에서 속도감이 느껴진다. 풍경에 이입된 자신을 달리기 선수에 비유한 표현 때문만은 아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수양버들”이 빠르게 스치는 현상을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 모습으로 치환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로부터 시작되는 풍경과의 일체감은 이 시가 묘사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풍경들이 자신을 격려해주는 대상들로 바뀌는 부분에서 주체의 안과 밖 경계를 허물며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라보던 ‘나무’는 ‘나’와 일체감을 형성하고, ‘나무들’은 또다시 ‘나들’로 의미전환 된다. 여기서부터 시는 흥미로워진다. 바라보던 풍경들은 오히려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 곳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며, 반환점까지 만이라도 달리라고 독려하기 시작한다. 의식이 혼미해지고 사력을 다해 뛰어가는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앞지르기 위해 “찢고 뛰쳐들어”가기를 애쓴다. 자신을 앞지르기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은 ‘나’는 “아장아장 안뜰”을 걸어 나오는 새로운 ‘나’로서 재탄생 된다. 나와 풍경의 교감으로 탄생한 ‘나들’은 진정한 ‘나’에게로 가는 풍경일 것이다. 내가 ‘나’와 만나는 일은 고통을 이겨내고 새롭게 태어나는 자연의 모습과 닮아 있다.
-----------------------------------------------------------------------------------------------------
망각의 음료
이현채
무신론자들이 신들을 더 들먹거리듯
미로에 갇히는 형벌을 받은 나는
모든 신들을 불러 기도를 한다
미로는 가장 큰 궁전
황금사과가 가득한 숲
밤에도 대낮처럼 빛난다
그러나,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뭔가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진지한 것을 원할 때 물을 원한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물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시선과 같다
어둠의 그림자
거짓말쟁이, 술주정뱅이들로 난무한 세상이지만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은 나를 해방시킨다
소나무 우거진 숲 가지에 걸린 태양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그런데 나는 왜 평화롭지 못한가
혼자 있는 것, 버림받은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숨 쉴 수 있고 생기가 돌며
나 자신이 되기 시작한다
거울에 비친 내 마음의 상처
수족관의 물고기도 울고 있다
눈을 감는다 온갖 색깔의 공들이 보인다
아침 바다에서
머리 없는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그러면
물고기의 머리가 다시 자란다고 한다
나를 스치는 운명의 숨결, 슬픈 비행 중에
나 자신을 잃는다
하늘은 갖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소리, 가래 낀 목소리들
영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운명은 가끔 이상한 장난을 친다
그동안 출입하지 않는 그늘진 음지로 잠입한다
해가 중천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
그늘이 없는 시간에
빗물이 가득 찬 웅덩이에, 피라미 두 마리가 놀고 있다
―『시로여는세상』 2009년 가을호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 시선” 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나’는 “미로”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밤에도 대낮처럼 빛나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곳이기에 “미로”는 “진실”과도 같은 곳이지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진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즉 ‘나’에게 미로의 형벌은 “진실”앞에 드러난 존재이며, 이곳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 없고, 나갈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밤에도 대낮처럼 밝아 모든 것이 드러나 있어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 시는 5연에서 투명하게 드러난 존재들의 비애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거울에 비친 나(내)”와 “수족관의 물고기”를 통해 진실은 눈을 감아도 “온갖 색깔의 공들이 보이”는 상황처럼 거역할 수 없음을 표현한다. 이것은 1연에서 말하고 있는 미로에 갇힌 “형벌”과 같은 의미이다. 마치 머리 없이 던져진 물고기의 머리가 다시 자라나는 ‘비애’처럼 말이다. 자라나는 머리의 기억은 고통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 진실-‘고통- 운명’의 의미를 거역할 수 없는 슬픔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기억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
흔적
―백암산성에서
임 윤
요동의 지평에 저녁이 떨어질 때 먹장구름 한 뼘 비켜 있었던가요 얼음 조각에 빛이 붙어 환일(幻日)의 하늘엔 태양이 두 개나 빛난다지요 가물거리는 양떼가 놀을 먹어치우는 동안 빛바랜 시간은 점차 저녁연기 속으로 사라졌답니다
어린양들이 여물지 않은 각축을 벌일 즈음 초승달도 뿔을 세워 지워져가는 성곽을 바라보았어요 지평선과 평행을 이룬 실눈은 푸릇푸릇 별 하나씩 뱉어내고 말았답니다 어둠이 문자를 삼킨 성벽에서 제국의 연대기를 떠올렸지요 벌판에 서서 말굽소리, 징소리를 들었다 하겠더군요
허물어진 석축으로 사내들은 담장을 쌓았어요 잃어버린 갈빗대 하나가 발치 아래 어둠을 이끌고 내 몸으로 밀려들어 왔었죠 저녁내 삼켰던 빛을 칵칵 토해내는 양떼들도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곤 차디찬 어둠이 지평선의 지퍼를 닫더군요
무너져 내린 성벽엔 숨소리가 층층이 끄르륵거렸어요 마른 풀 더미 사이로 쉬쉬하며 바람이 지나갔지요 침묵만이 산성을 내려왔습니다 집집마다 석탄가스가 냄새를 뿌려댔지요 시간을 베어 문 어둠 속에서 늙은 부부는 마른 옥수숫대를 산더미처럼 쌓고 있었어요
지평선이 삼킨 빛으로 누군가 모닥불을 지폈던가요 옥수숫대 타는 냄새가 간간이 날아다녔습니다
―『실천문학』2009년 여름호
흔적이란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취이다. 백암산성의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그 ‘흔적’의 이미지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해질녘의 풍경은 “지워져가는 성곽”, “잃어버린 갈빗대”, “무너져 내린 성벽”, “양떼들도 몰아 넣”는 소멸의 이미지이다. 낮 동안의 풍경을 품은 어둠은 “누군가의 모닥불”로 또 다시 빛을 만들어 지난 시간의 자취를 재현한다. 즉 “시간을 베어 문 어둠”인 것이다.
이 시에서 ‘어둠’은 소멸의 이미지처럼 보이나 빛을 삼킨, 생성 가능한 어둠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백암산성의 풍경은 어둠이 빚어 놓은 ‘흔적’과도 같은 것이다. 어둠을 소멸이 아닌 빛을 품은 가능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이기도 한 ‘흔적’의 의미는 빛과 어둠의 조화가 이룬 ‘실체’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렇듯 낮 동안의 모든 풍경을 삼킨 ‘어둠’ 역시 중의적 표현을 획득하게 된다.
박선경
서울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