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주인석
사람에게도 맛이 있다. 여러 번 만나도 밍밍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단 한 번의 만남에도 톡 쏘는 맛이 나는 사람도 있고 또, 만날수록 깊은 맛이 나는 묵은지 같은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맛 중에서 나는 특별히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경주에 있는 전통 가마에서 해가 빠지기 시작하면 불을 지핀다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달려갔다. 가마에서 시시로 변하는 불의 색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로 화가, 도공, 염색공예가, 조각가 외에 소리꾼도 있었다.
사람들이 가마 앞으로 차츰 모여드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의식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가마 뒤로 낮게 내려앉은 주황색 하늘이 산을 덮자 그 아래 작은 연못은 기다렸다는 듯 동그란 몸 안에 산을 품었다. 산이 금세 무채색으로 변하자 가마가 색의 릴레이 경주를 벌이듯 아궁이로 황색 불빛을 받았다. 지네 마디 같은 가마 굴 속으로 불꽃이 오르자 간단한 의례가 시작되었다.
돼지머리를 중심으로 잘 차려진 고사 상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기원을 담아 삼배를 올렸다. 전통가마에서 구워지는 도자기의 완성품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예를 다하는 것이다. 도예가와 손님들의 배례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기도가 올려졌다. 그때 진행자는 한 사람이 빠진 것 같다면서 태태선생이라는 분을 불렀다. 발음상 전해지는 이름의 느낌도 얄궂었지만 느린 등장과 예사롭지 않은 차림새로 보아 각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 머리카락이 머리의 대부분을 덮은 걸로 보아 그분은 연세가 꽤 드신 듯했다.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올라온 그는 쓰고 있던 초록색 빵모자를 조용히 벗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좀 특별나게 천 원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한 장을 돌돌 말아 돼지 콧구멍에 꽂으며 조용히 한 마디 했는데 대단한 재치가 엿보였다.
“천만 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귀가 쫑긋했는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절을 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기원을 담은 말을 했다. ‘아물따나 꼬물따나 만들어 주이소’ 라는 약간은 중얼거림 같은 그의 말이 들렸다. 혹시 잘못 들었는가 싶은 찰나에 또 다시 ‘색깔도 아물따나 꼬물따나 나오게 해 주이소’ 한다. 신을 상대로 한 성스러운 자리인데 우스갯소리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황당한 말을 듣고 신선한 충격과 웃음이 교차되었다. 자리가 워낙 엄숙해서 그런지 그 광경을 보고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절을 하고 일어선 그를 보고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마를 향해 양팔을 흔들며 ‘할렐루우야 할렐루우야’ 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아멘’이라고 장단을 맞추고 말았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멈추지 않는 웃음을 참느라고 가마 뒤쪽으로 돌아가서 애를 썼더니 뱃가죽이 다 아팠다.
예가 끝나고 음복시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그가 가방을 열더니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끄집어냈다. 명함 한 장과 앙증맞은 가루 봉지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여자를 만나면 작업용으로 쓰는 비타민이라고 했다. 내가 한마디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는 나에게 ‘첫사랑’이라고 했다. 갑자기 언어의 기습 공격을 받은 나는 상 위의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당황했다. 노란 가루봉지 비타민만 조몰락거리다 옆 눈으로 슬쩍 명함을 봤다.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름이 있는 화가였다.
나는 혼자 별 생각을 다했다. 그가 처음 보는 내게 그런 말을 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의 첫사랑과 닮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지난 후에 내가 왜 첫사랑인지 물어봤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가루비타민 만큼이나 새콤달콤했다.
“여기서 처음 봤으니 첫사랑이지요. 나는 첫사랑이 수도 없이 많아요.”
지금까지 고정관념으로 틀이 만들어져 있었던 내 머리를 확 치고 지나가는 한 마디였다. 첫사랑은 단 한 번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는 단단한 테를 만들어 나와 남을 가두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이 어디 첫사랑에만 적용되었을까. 재치 있는 한마디와 제스처가 우리의 삶을 훨씬 맛깔스럽고 살맛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상큼하고 흥분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똑같은 장작으로 불을 지피지만 가마 속의 불은 열과 시간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그 경이로운 색을 대할 때 감정이 북받치는 것처럼 멋진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감응이 있다. 비슷한 환경에 사는 우리들이지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색깔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보통이 아닌 그의 명함 건네는 방법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상큼하고도 친근감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첫사랑으로 기억될 그는 평생 늙지 않는 나이의 젊음을 유지하며 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