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 서장 (書狀)
번제형에 대한 답서
‘경계=허망’알면 四苦서 해방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불사(佛事)는 행할 수 있으나 선어(禪語)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셨더군요.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행할 수 있는 자를 아는 것이 바로 선어이니, 선어를 알면서도 불사를 행하지 못한다면 마치 사람이 물 속에 앉아 있으면서 목마름을 호소하고 밥상 앞에 앉아서 배고픔을 호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선어가 곧 불사이며 불사가 곧 선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행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법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다시 이 속에서 같은 것을 찾고 다른 것을 찾는다면, 이것은 빈 주먹 위에서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가운데에서 헛되이 조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마치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서 급히 할수록 더욱 늦어지며 빨리 할수록 더욱 멀어집니다.
곧바로 마음이 확 트이고자 한다면, 다만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이해함과 이해하지 못함·같음과 같지 않음·다름과 다르지 않음 등 이와 같이 사량하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을 저 다른 세계로 쓸어버리십시오. 그리하여, 도리어 쓸어버릴 수 없는 곳에서 있는지 없는지 같은지 다른지를 살펴보시면, 문득 마음의 생각과 의식의 상념이 끊어질 것이니, 바로 이런 때에는 저절로 남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선어 알며 불사 행않으면
물속에 있으면서 목마름을
밥상 앞에 두고 배고픔을
호소하는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나의 실험을 해보자. 지금 똑딱 똑딱하고 소리나는 시계가 있는 방 안에서 짙은 향기가 나는 커피 한 잔을 앞의 탁자 위에 놓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먼저 5·10분 정도 눈 앞에 보이는 커피잔에 온 의식을 집중하여 유심히 살펴본다. 다음에 5~10분 정도 귀에 들리는 시계 소리에 온 의식을 집중하여 들어 본다. 다음에 5~10분 정도 커피 향기에 온 의식을 집중하여 맡아 본다. 다음에 내면으로 관심을 돌려서 5-10분 정도 온 의식을 집중하여 생각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자세히 살펴본다. 이번에는 어느 것에도 의식을 두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눈·귀·코·생각에 번갈아 가며 의식을 두어 보기도 하고 어느 곳에도 의식을 두지 않고 멍하게 있어 보기도 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의식을 집중하든 하지 않든 한 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생각나고 하는 살아 있는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움직임은 언제나 지금 여기 눈 앞에 있는데, 이처럼 끊어짐 없이 살아 있는 움직임이 바로 존재 혹은 도(道) 혹은 마음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 혹은 자성(自性) 등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 ‘그것’의 드러남이다. 바로 이 살아 있는 움직임이 모든 의식의 근원이며, 모든 경계의 바탕이며, 모든 망상의 뿌리이며, 모든 깨달음의 근거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과 부처와 인간이 나오는 출구이다.
이것을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고 말하는 것도 억지로 붙인 말일 뿐이니,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는 말이 벌써 이 움직임에 의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움직임을 사실은 움직임이라고 말하는 것도 맞지가 않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적멸(寂滅)의 자리이니, 공(空)이니, 실상무상(實相無相)이니 하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생멸하는 것들이 이것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일이 바로 이 살아 있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이 살아 있는 움직임은 어떤 경우에도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가 없다.
살아 있는 움직임인 이것을 모를 때에는 이것에 의하여 나타나고 사라지는 생멸법(生滅法)인 온갖 경계가 믿을 수 있고 확실한 현실로 여겨지고 이것은 비현실적이고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여겨지지만, 이것을 확인하고 충분한 시간을 거치며 이것과 깊숙이 친해지게 되면 변함 없이 실재하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고 생멸하는 모든 경계는 허망한 물거품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생노병사(生老病死)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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