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여지도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당시 가져간 것으로 추측되는 지도로서,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를 조선 영토(강원도)와 같은색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좌측 상단에 박영호(朴泳孝)의 친필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조선왕조는 1481년(성종12년)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이를 증보하여 50년 후인 1531년(중종26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현재에는 동국여지승람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 |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제 248호로 지정된 조선전기의 전도. 이 지도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을 관할하던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지도로 대마도(對馬島) 종가(宗家)에 보관해 오던 것을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종가문서를 인수하면서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 전반 세종대의 과학적인 지도제작 사업은 세조 때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에서 결실을 맺었는데,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사본으로 추정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면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다. 산줄기는 풍수적 지리인식에 기초한 연맥으로 표현하였다. | |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이 지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색감을 중시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 많은 산봉우리에 봉화가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특히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주현읍치(州縣邑治) .도로, 산천과 대소 산맥.준령(峻嶺). 성곽.역참(驛站).봉수대 등을 그려 넣어 봉수의 직간선(直間線)을 한 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서해쪽의 네모 안에는 목멱산(木覓山: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강원도래양주아차산봉수(咸鏡江原道來楊州峨嵯山烽燧), 경상도래광주천림산봉수(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燧), 평안도육로래모악동봉봉수(平安道陸路來母岳東峯烽燧), 평안황해도수로래모악서봉봉수(平安黃海道水路來母岳西峯烽燧), 충청전라도래양천개화산봉수(忠淸全羅道來陽川開花山烽燧) 등 5대 봉수로와 동서 및 남북의 길이, 서울에서 동서남북 주요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 | |
조선전도(朝鮮全圖, 동국대전도)이 지도는 1757년(영조 33)에 영조의 명으로 정상기의 <동국대전도>를 모사하여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도록 한 모사지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강, 섬 등 자연 지명과 군현 이름, 창고, 진보(진보), 찰방, 산성 등 인문 지명 및 중국과 일본 등 모두 2,580여 개의 주기(주기)를 담고 있다. 산맥의 표현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크게 강조하고, 여기서 뻗어나간 주요 산맥들을 강조함으로써 국토를 인체(人體)로 인식하는 전통적 지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영, 수영, 읍성, 진보, 찰방, 봉수 등을 기호화하고, 산성, 고갯길, 관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한 층 더 발전했다. 한편 지도에 육로, 해로, 고갯길을 나타내어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필요를 모두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 |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 ~ 1752)의 <동국지도>이다.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는 대전도와 팔도분도가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팔도분도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한반도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이 정상기의 지도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는 대전도를 후대에 전사한 것으로 초기의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
아국총도(我國摠圖, 여지도)정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전국지도.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산줄기를 녹색으로 하천을 청색, 그리고 팔도의 군현을 색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의 섬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와 남북의 길이, 사방(四方)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의 군현 수가 기재되어 있다. | |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큰 획을 그었던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조(全圖)이다. 각 도의 군현을 원으로 나타내고 바탕색을 구별함으로써 팔도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은 사각형으로, 진보(鎭堡), 역(驛)은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우측 주기(註記:지리정보)에는 서울에서 각지에 이르는 거리를 수록하였다. 다른 전도와 달리 도로망을 그리지 않아 미완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 |
해좌전도(海左全圖)19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유사하며 산계(山系)와 수계(水系), 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동의 여백에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10여 개의 명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섬 정계비,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구주(新羅九州), 고려팔도(高麗八道)의 고을 수를 좌측상부의 여백에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로서, 목판 인쇄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 지도는 조선시대 지도학의 결정체로서, 지도첩의 양식을 본떠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만들어 일반인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즉 전체를 22첩으로 꾸며, 접으면 책자가 되게 하였고 이것을 2~3개씩 합쳐서 볼 수도 있으며 또 전부를 합치면 전도(全圖)가 되도록 되어 있다. 축척 대신에 각 첩을 가로 8, 세로 12로 나눈 방안(方眼)으로 만들고 그 방안 하나를 사방 10리가 되도록 하였으므로, 각 첩은 가로가 80리(32km)로 결국 축척 1/16만 지도가 된다. 지도의 내용은 산천(山川), 해도(海島),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역참(驛站),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산성(古山城), 도로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그 정확함이 현행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축쇄판과 소재지명 색인을 간행한 이래 각종 영인본이 출간되었다. | |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소축척으로 줄여서 만든 전도로 약 1 : 92만 축척지도이다. 이 지도는 제작자와 발간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지도의 내용으로 보아 김정호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지도도 <대동여지도>와 같이 산줄기를 연이은 톱니모양으로 독특하게 표현하였는데, 굵기로 산줄기의 대소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산맥과 하천을 별개로 보지 않고 통일적으로 파악하려는 전통적인 산수분합(山水分合)의 원리가 지형인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각 군현의 정확한 위치와 더불어 도로망도 자세한데 서울로부터의 거리 수도 옆에 병기하였다. | |
동여도(東輿圖, 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아래)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 가운데 제 14층과 제 13층의 일부이다. <동여도>는 <대동여지도>와 산계와 수계, 도로망을 비롯한 대부분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나, 필사본으로 제작한 지도로 <대동여지도>보다 더 많은 지명을 담고 있다. 이들 지도는 조선시대 지도학의 모든 성과들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축척은 대략 1 : 16만 정도이다. 우리나라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리 간격으로 나누어 전체를 22층으로 만들고, 각 층은 80리 간격으로 끊어서 병풍처럼 첩으로 만들었다. 22개의 첩을 모두 연결시키면 660 * 410cm 정도의 대형 전도가 된다. 이들 지도는 산지를 이어진 산줄기의 형태로 표현하여 전통적인 산수분합의 원리를 반영했고, 각종 범례의 사용과 더불어 도로에 10리마다 표시를 하여 거리를 가늠케 함은 물론, 예술적 아름다움까지 갖춘 조선시대 지도의 최고 걸작품 중의 하나이다. |
본 자료는 사이버독도닷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료를 사용하시려면 해당사이트의 출처를 밝혀주시고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http://dokdo.dgb.co.kr/dokdo/document/01/name.jsp ]
[ 우리 땅 독도는 어떻게 불러왔을까요? ]
우산도(于山島) 512년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혹은 우산과 울릉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독도를 '우산'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답니다.
이 외에 천산(千山), 간산(干山), 자산(子山) 등의 표기도 보이지만 이는 우산을 잘못 표기한 것이지요
삼봉도(三峰島) 1471년
조선 성종때 사용한 명칭이에요. 성종실록(1476년)에는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나란히 있고, 그 다음은 작은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사방 바닷물이 통한다."라고 하여
지금의 독도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어요. 작은섬과 암석은 동도와 서도 사이의 무수히 흩어져 있는 바위들을, 복판 섬은 서도를, 복판 섬 서쪽의 작은 섬은 지금의 동도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지도(可支島) 1794년
1794년(정조 18년)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의 울릉도 보고서에
"갑인년 4월 26일에 가지도(可支島)에 가보니 가지어
(可支漁)가 놀라 뛰어 나왔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의 우리 말인 '가제'를 음역하여
부른 것으로 가지도란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란 뜻입니다. 실제로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며, 서도 북서쪽에는 가제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도 있어요
석도(石島) 1900년
석도는 대한제국이 1900년(고종 37년) 10월 25일에
칙령 제 41호에서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울릉도의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및 석도(石島)' 로
규정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답니다.
여기서 죽도는 현재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 '죽도'이고,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지요. 석도가 독도를 지칭하는 것은 석도의 한글 표현이 '돌섬'이고 돌의 사투리가 '독'인 점을 감안하면 석도가 독도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어요
독도(獨島) 1906년
공식적으로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한편 일본 군함 니이타카(新高)호의 1904년 9월 25일자
보고에 의하면 "리앙코르트 바위를 한국인들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일본 어부들은 '리앙꼬도(島)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어 독도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마쓰시마 (松島)
일본 문헌에서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67년의 온슈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며 이때의 독도 명칭은 마쓰시마(松島)였고, 울릉도는 다케시마(竹島)였다.
◈ 다케시마 (竹島)
1840년 시볼트의 지도에는 유럽 지도의 영향으로 울릉도(다쥬레섬)를 마쓰시마(松島)로, 독도(알고노트섬)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면서 일본에서 명칭에 대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 리앙코도(Liancort島)
1849년 프랑스 배 Liancourt호에 의해 발견되어 이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코르섬이라 명명되었는데, 일본에서는 「리앙코」또는 「량코」섬으로 불렀다.
◈ 다케시마(竹島)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울릉도는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부르던 것을 19세기 중반부터 서양의 혼란스런 지도에 현혹되어 울릉도를 마쓰시마(松島)로 독도는 '다케시마(竹島)''리앙코섬' 등으로 부르다가, 1905년 시마네현 영토 편입시에 '다케시마(竹島)'로 명명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하면서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고, 서양인들의 흉내를 내어 '리앙코섬'으로도 불렀던 것이다.
------------------------------------------------------------------------------------------------------------------
[신라장군 이사부]
그런데 갑자기 저쪽 하늘에서 구름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파도가 일렁이기에 모두 놀라 서둘러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그러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 갔고 파도는 이제 뱃전을 치며 노조차 젖지 못하게 되었다.
세 사람은 노 젖기를 이제 단념하고 운을 하늘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둠이 차츰 덮이자 허옇게 뒤집히는 파도는 배와 사람을 일시에 삼키려는 듯 닥쳤다가는 지나가고 하는데 배는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것과 같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세 사람은 그저 죽었구나 하고는 배 바닥에 엎드려 정신이 없었다. 배가 어디로 떠내려가는지 방향은 물론 알 수가 없었다.
이러기를 사흘, 간신히 바람도 멎고 파도가 잠잠해지자 세 사람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시퍼런 바다와 하늘에 떠있는 구름뿐이었다.
사흘을 굶은 그들에게는 이제 노를 저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으니 그저 절망감만이 그들의 가슴을 엄습할 뿐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내맡겨 두는 도리밖에 없었으며, 서로 이야기할 기력조차도 이들에게는 없었다.
"어어-, 저것 보게!"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머지 두 사람도 일어나 소리친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 멀리 구름인지 안개인지는 분간을 못하겠으나 밑 쪽으로 거무스름하게 보이는 것이 육지 같았다.
눈을 닦고 자세히 보니 틀림없는 육지였다. 절망에 빠져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환성을 질렀다.
"살았다-"
"이제는 살았구나"
세 사람은 꼭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하였다. 그리고 용기가 솟아났다. 세 사람이 다같이 노를 저었다. 다행히 물결도 그쪽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간신히 그 곳에 다다라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위를 쳐다보니 여전히 안개는 자욱할 뿐이었다. 그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다른 곳을 찾아보려고 노를 저어 나갔다. 간신히 한 곳에 이르니 겨우 사람이 발붙일 만한 곳이 눈에 띄었다. 배를 붙이고 내려보니 길도 없고 그저 바위투성이 이었다.
세 사람은 이곳저곳을 헤매며 쏘다니다가 간신히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였다. 안개가 짙은 가운데에도 살펴보니 울창한 왕대밭 이었다.
세 사람은 그러한 것에 놀라고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 무엇이든 간에 허기를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무엇인가 앞에 보이었다. 보니 그 집안에는 수염이 하얀 노인 한 분이 문을 열어 놓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세 사람은 다짜고짜 그 앞에 가서는 절을 넙죽 하였다.
"웬 사람들인고?"
노인의 음성은 점잖은 가운데도 우렁찼다. 그리고 그 눈매는 빛났으며, 용모는 단아하였고, 범치 못할 위엄이 있었으며, 신선같이 보였다.
세 람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허어 그 사람들 고생께나 하였겠구먼"
하고는 그저 멀거니 세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답답해진 세 사람은 다시
"저희들은 오늘까지 나흘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허기와 갈증에 지쳐 있으니 물과 먹을 것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물은 없고, 사람이 먹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하나"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먹을 것이 없다니 도대체 될 말인가? 그렇다면 자기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사람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고 제각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노인이 선뜻 일어서더니 무엇인가를 방에서 가져 나오더니
"자 그럼 이것이라도 먹게나"
하고 노인이 내미는 것을 보니 꼭 사과같이 생겼는데 사과는 아닌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우선 이판에 이것저것 가려볼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과실을 먹어치웠다.
맛이 어떤 맛이었는지 조차 몰랐다. 허기진 판이라 허겁지겁 먹느라 맛인들 알았으랴? 우선 심한 갈증을 좀 면한 것 같았지만 워낙 배가 고팠던 터이라 염치 불구하고 한 개씩만 더 줄 것을 간청하니,
"아니, 이 사람들아 그것 한 개면 1년을 살 수 있는 건데"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허기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하룻밤을 그 집에 자고 나니, 세 사람은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아니 생기를 되찾았다 기 보다 힘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노인이 안에서 나오더니,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가야지 식솔들이 몹시 기다릴텐데"
"그렇지만 저희들은 어디 방향을 알아야 갈 수 있지요"
"그런가 그러면 내가 길을 인도하지"
하여 네 사람은 배에 올랐다.
그리고는 순풍에 돛을 올려,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배를 몰았다. 뒤돌아보니 섬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었다. 여러 시각을 달려 이윽고 저 멀리 수평선상에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살았습니다"
"그럼 이젠 찾아가겠지"
"고맙습니다. 어르신네"
"뭐, 고마울 것 있나 자네들이 하도 딱해서 도와준 것뿐일세"
그리고는 옷소매 자락에서 어제 먹던 과실을 세 개 끄집어내어 세 사람에게 주며, "이 과실을 햇빛이 없는 곳에 두어야 하네. 그리고 또 오늘부터 쳐서 꼭 석 달 열흘만에 이것을 먹도록 하게. 그럼 잘 들 가게나"
하고는 인사할 틈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그저 서로 얼굴만 멍하니 쳐다 볼 뿐이었다.
드디어 울릉도에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서, 그것도 기운이 펄펄해져서 돌아왔으니 집안식구는 물론, 온 마을이 야단법석이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꽃이 피었다.
그 신비와 안개에 쌓인 섬에 관해서 기이한 노인이며 신비로운 과실이며, 대나무의 숲이며 모두 듣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에 싸이게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였다.
그 뒤 호기심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몇이 모여 세 사람의 어부를 부추겼다. 그리고는 큰 배에다 식량과 물을 싣고 또다시 신비의 섬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철 아닌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것을 보았을 뿐 풍랑이 심하여 끝내 이 섬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
19세기 중엽, 55.8×98.3, 목판본
1530년(중종 25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람도에 수록된 팔도총도에 독도(=우산도)는 강원도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우산도로 표현되어 있어요. 우산도(=독도)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울릉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네요.
두 섬의 위치가 바뀌는 과도기에 그려졌지만 관찬지리지에 두 섬을 넣어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인쇄본 단독 지도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랍니다.
제작연도는 18세기 이구요
우리나라전도와 팔도분도등으로 구성되어있어요.
여지도 강원도 지역에
울릉도 옆에 독도가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
김대건(1822~1846)이 근대적 작도법에 의해 만든 지도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현하고 있어요.
독도가 울릉도의 바깥쪽에 정확히 그려져 있으며, 지명은 우리의 발음을 그대로
옮겨 울릉도는 'Oulangto(울릉도)'로 독도는 'Ousan(우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요.
우리 발음으로 서양 세계에 소개된 최초의 지도로 1849년 프랑스 리옹 『지리
학회』에 축초 수록되었고, 6개국어로 번역되어 우링 영토 독도를 서양에 널리
소개하게 되었어요. 현재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답니다.
1757년 정상기(1678~1752)의 동국대전도를 모사한 지도에요. 안용복 사건을 통해 촉발된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반영되어, 독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우산도로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16 ~17세기의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가 바뀌어 표현되었으나,
이 지도처럼 18세기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제 위치에 표현되게 되죠.
대일본 분견신도(大日本 分見新圖)
<1878년 일본 야마무라(山村淸助) 제작>
일본지도 좌측 상단에 조선지도를 그려 넣었는데, 일본은 각 현별로 색깔을 달리 했고, 조선은 단일 색(노란색)으로 그려 졌어요. 죽도(竹島=울릉도), 송도(松島=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 조선영토로 표시하여 독도가 우리땅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삼국통람도설 부 삼국접양지도 (三國接壤之圖)
<1785년 일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제작>
일본을 둘러싼 3국을 색깍로 구분하여 그린 지도에요.
조선해(동해) 한가운데 두 개의 섬을 그려 놓고 왼쪽의 큰섬을 죽도(울릉도)라 하고 "조선의 것"이라고 표기 되어있다.
그 오른쪽에 그려진 작은 섬은 독도를 그린 것인데, 이 두 섬 모두 조선의 색깔(노란색)로 칠해져 있어서 이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그렸으며,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로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
독도박물관 소장
러시아 군함 올리부차호가 1854년 조선동해안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러시아 해군이 1857년에 처음 발행한 지도에요.
이후 러시아 해군성은 1862년, 1868년, 1882년에 지도를 재차 발행하게 되는데,그동안 조사된 지리적 정보를 추가하여 재차증보 발행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한반도 동부해안의 포구와 해안선 및 울릉도와 독도등 부속도서를 상세히 그리고 있어요.
이처럼 독도가 조선동해안도에 누차 그려진 것은 제3국인 러시아의 시각에서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어서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겠죠?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제2판
1899년 일본 수로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조선 연안과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편찬한 수로지에요.
제4편 조선동안에서 독도를 '리앙코르트 토열암'으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함께 상세히 설명하여 일본 해군에서도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어요.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과 충사령부지령으로
독도는 한국영토로 확정
1943년의 카이로선언은 일본이 강압과 폭력으로 탈취한 새 영토를 반환시킬 것을 정하고 있죠.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자로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67호를 발효하여 일본의 영토를 한정짓게 되는데, 여기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할 대표적인 섬으로 명기하고 있어요.
본 지도는 SCAPIN 제677호 발효 약 1개월 후 작성된 것으로 독도는 비록 다케(TAKE)로 표기 되었지만 한국의 행정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답니다.
----------------------------------------------------
아래는 일본의 주장입니다.
일본에서 만든 한국어 독도사이트
http://www.pref.shimane.jp
다케시마에서의 강치 조업(사진제공:산인중앙신보사)
다케시마가 발견된 정확한 연도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에도시대 초기에는 일본인에게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런 상황이 1952년의 이승만라인선언으로 크게 변화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이와 같이 다케시마는 역사적으로 보아 일본의 영토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
1904년 오키섬의 주민 나카이요자부로(中井養三郎)라는 사람이 다케시마에서 강치 조업이 가능하도록 일본 정부에 다케시마 영토편입 및 대여를 신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28일, 각료회의를 통해 이 섬을 정식으로 다케시마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 오키관할 소관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기초하여 시마네현 지사는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그 내용을 공시했습니다. |
국제법에 비추어도 일본의 고유 영토임이 확실합니다. |
다케시마 연표
|
日 정부, `독도 시마네현 편입' 허구성 사실상 자인 | ||||
[연합뉴스 2006-11-20 06:28] | ||||
`독도 조선 영토' 인정 태정관 지령문 질의에 답변 회피 "日 정부.학계, 태정관 문서 의도적 은폐..국민까지 기만"
외무성 "지금은 답변 못하겠다"...문서존재 사실은 인정
"태정관 지령문은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의 아킬레스건"
(서울=연합뉴스) 김용수 편집위원 = 일본 정부가 1905년 단행된 독도 시마네(島根) 현 편입 조치의 불법성과 `독도 고유 영토설'의 허구성을 사실상 자인했다.
일본 외무성은 1877년 메이지(明治) 정부가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고 확실히 인정한 `태정관 지령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연합뉴스의 서면 질의에 대해 "현재로서는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태정관 지령문이란 메이지 시대의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太政官.다조칸)이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인지를 조사한 뒤 1877년 3월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와 관계가 없으니 명심하라"고 내무성과 시마네 현에 지시한 공문서다. 한국 학계는 이 문서를 일본 정부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공식 인정한 `결정적 사료'로 보고 있다.
외무성의 이 같은 궁색한 답변은 "태정관 지령문이 사실이라면 `늦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일본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해 영유권을 확립했고 1905년 각의 결정을 통해 영유권을 재확인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완전히 허구가 아니냐"는 국내 학계의 지적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합뉴스는 지난 9월 중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외상과 자민, 민주, 공산, 사민, 공명당 대표 앞으로 `1905년 일본 각의의 독도 시마네 현 편입 결정에 관한 질의서'를 보냈다.
주된 질의 내용은 ▲`태정관 지령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서인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 지금까지 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는지 ▲태정관 지령문에 따르면 `17세기 중반까지는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허구가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1905년 일본각의의 독도 시마네현 편입 결정 문서는 태정관 지령문을 변경시키는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태정관 지령문을 검토한 흔적이 전혀 없는데 이것이 의도적인 행위였는지 등이었다. 질의서에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태정관 지령문 복사본(B4용지 14쪽)을 첨부했으며 각 정당에는 태정관 지령문 내용에 대해 국회에서 정부에 질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같은 질의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수차례나 "검토 중이니 조금 기다려 달라"고 계속 답변을 회피하거나 시간을 끌다가 질의서를 보낸 지 60여일 만인 11월13일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는 알고 있다" ▲"그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해서는 지금 조사, 분석 중이어서 현 시점에서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 코멘트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내왔다.
일본정부가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일 양국은 1950년대 초 독도 영유권을 놓고 정부 차원에서 문서를 주고 받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태정관 지령문은 거론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자민당은 10월 18일 "자민당 차원에서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 통일된 정식 견해가 없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답변을 보류한다. 자민당 입장은 기본적으로 정부 견해에 준한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와 관련해 자민당의 한 관계자는 태정관 지령문이 "일본 국내적으로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고) 말했지 한국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태정관 지령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짐작게 했다.
공산당은 9월 30일 보내온 답변에서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독도가 일본 영토와는 무관하다고 인정한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를 알고 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해야 할 자료가 많이 있으며 태정관 지령문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산당의 이 같은 답변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민주, 사민, 공명당은 답변을 끝내 회피했다.
국내 학계는 일본 정부가 현재 국립공문서관에 엄연히 보관돼 있는 태정관 지령문에 대해 "조사, 분석 중이어서 현 시점에서는 답변할 수 없다"고밖에 답변하지 못한 것은 결국 태정관 문서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큰 타격이 된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독도문제 전문가는 "이미 1980년대 초 일본에서 존재가 알려진 태정관 지령문을 일본 정부가 `알고 있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면서 "그런데도 외무성이 `조사 중'이라고 한 것은 태정관 문서가 한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애매모호한 일본식 언어 사용으로 답변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외무성의 이 같은 답변은 그동안 일본 정부가 "일본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해 영유권을 확립한 이전에 한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했음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를 한국측이 제출한 적이 없다"고 버젓이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호언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 정부와 어용학자들은 그동안 태정관 문서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은폐, 왜곡함으로써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 국민까지 기만해 왔다"면서 "이 문서를 은폐해온 이유는 일본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독도 고유영토설'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정부는 문서 내용을 인정할 경우 1905년의 독도 편입이 태정관 문서를 무시한 채 자행된 제국주의적 약탈 행위로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령문 자체를 인정하거나 그렇다고 반론을 펴거나 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일본이 태정관 문서를 상쇄시킬 수 있는 기록을 억지로 들고 나오거나 관련 사실을 `날조'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석우 인하대 교수(국제법)는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을 국제법상으로 봤을 때 한국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을 당시 독도가 한국 영토였음을 반드시 입증할 필요가 있다"면서 "태정관 지령문은 한국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결정적 문서이자 반대로 일본에게는 `아킬레스건' 같은 문서"라고 지적했다.
yskim@yna.co.kr |
▲ 1866, <大日本海陸全圖 附 朝鮮 琉球 全圖> 중 朝鮮國全圖 부분. -竹島(Take-shima=울릉도, 다줄레), 松島(Matsu-shima=독도, 리앙쿠르)가 조선(한국)에 포함돼 있어 한국 소속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태정관 지령문 내용.
1877년 일본 최고위 행정기관인 태정관(지금의 총리실)과 내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해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아 작성했던 공식 문건에 당시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 및 거리가 표기된 지도가 첨부돼 있다.
이 무렵에는 태정관 지령문이 갖는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했다. 일본의 관변 학자들이 지령문에 나오는 `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 중 '외일도'가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거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는 식의 궤변 등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정관 지령문'을 잘 읽어보면 '외일도'는 '마쓰시마(松島.당시 독도의 일본이름)'라고 기록되어 있고 위치, 크기, 특징 등이 정확하게 현재의 독도를 가리키고 있다
▲1877년 일본 명치정부의 태정관과 내무성이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결정할 당시 사용된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의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와 크기를 그대로 나타낸 모사도(가로58, 세로 38 센티미터 종이에 그림). 빨간색 동그라미가 현재의 독도
기죽도약도’는 1877년 일본 최고위 행정기관인 태정관(지금의 총리실)과 내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해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담긴 공식 문건에 첨부된 것으로, 가로 58㎝, 세로 38㎝ 크기다. 이 지도는 기죽도(현 울릉도)와 송도(현 독도)를 중심으로 당시 일본 서해안 지방과 조선 간의 위치와 거리를 표기한 것이다. 지도에는 ‘일본 서해 오키(隱岐)의 후쿠우라(福浦)로부터 송도까지 서북 방향 80리 정도’ ‘송도로부터 기죽도까지 서북방향 40리 정도’라고 표기돼 있다. 또 기죽도로부터 조선국을 원망(遠望·멀리 바라봄)하면 해상으로 95리에 해당한다고 적혀 있다.
▲1882년 일본에서 발행된〈동판조선국전도〉(독도박물관 소장). 일본 영토를 붉은 색으로 칠한 이 지도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점선 안)를 다른 색으로 칠해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나중에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라 불렀다.
우리 땅 독도 : 日학자 “한국 주장 일리 있다”
17일 일본 도쿄신문은 2개 면에 걸친 독도 관련 특집기사에서 ‘한국 주장에도 일리 있다’는 일본 학자의 인터뷰 기사를 일본 측 논리와 나란히 게재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측 논거를 외면해 온 일본 언론계 보도관행을 비추어 볼 때 찾아보기 힘든 중립적 보도였다.
▲1894년 독도를 한반도와 같은 색으로 표시한 일본 고지도 ‘신찬 조선국전도(新撰 朝鮮國全圖)’와 ‘일청한 삼국대조 조선변란상세지도(日淸韓 三國對照 朝鮮變亂詳細地圖)’를 22일 공개했다.
신찬 조선국전도에서 일본과 중국은 무색이지만 ‘마쓰시마(松島)’로 표시된 독도와 ‘다케시마(竹島)’라고 적힌 울릉도는 한반도와 같이 누렇게 칠해져 있다.
▲1894년 제작된 ‘신찬 조선국전도(新撰 朝鮮國全圖)’와 ‘일청한 삼국대조 조선변란상세지도(日淸韓 三國對照 朝鮮變亂詳細地圖)’ 사본을 22일 공개했다. 한반도와 같은 색으로 칠해 일본 및 중국(청나라) 영토와 구분했다.
'
▲1895년 일본군 지도에도 독도를 한국땅으로 표기
실측일청한군용정도(實測日淸韓軍用精圖)’는 일본 군부가 10여 년 동안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민간인 요시쿠라 세이지로(吉倉淸次郞)가 1895년 편집한 지도.
▲일본 총독부 지도 '독도는 한국땅'
일본 총독부 지도 '독도는 한국땅' 1945년 7월 일본 총독부가 발행한 한국 지도첩인 '해동지도'.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경상북도에 속한 섬으로 표기돼 있다.
▲ '시마네현 고시' 이전인 1903년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출판부에서 펴낸 어업지침서 '한해통어지침' 의 목차. 독도(당시 명칭은 양코도)가 목차의 강원도 소속으로 명시돼 있다. 다툼의 소지가 없는 무주지라서 그들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허황됐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이 "본부 소속 독도"라고 강원도 관찰사에 보고한 사실과 부합되는 자료로 두 나라 모두 독도를 강원도 소속으로 인식했음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제작한‘초등지리서부도’중부조선편 울릉도 옆에 독도가 죽도(竹島)로 표시돼 있다. 같은 책에 수록된 일본 지역 지도에는 독도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당시 일본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 1939년 일본 동경학습사에서 발행한 심상 소학국사회도(尋常小學國史繪圖) 하권 40쪽에 그려진 지도에는 일본 땅은 붉은색으로, 조선 땅은 청회색으로 표시해 놓았다.
======== 해방후 ===========
▲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 전후 일본과 한국(남한)의 행정관할구역을 구분한 지도로서 울릉도와 TAKE(독도)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한국(남한)에 포함되어 있어 독도를 우리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1946년과 1951년 공문서에서는 이미 독도가 한국땅임을 인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은 과거 한국에서 10년 간 영어교사로 근무할 당시 독도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한 미국인 교사가 최근 미 국립기록조사국(NARA)에서 찾아낸 관련 문서들을 분석해 밝혀냈다고 23일 미주한국일보가 보도했다.
▲ 연합국의 舊일본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 제3항과 이 합의서의 부속지도.
이하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국제법상 지도들
▲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1951년 9월 8일) 뒤인 1952년 조약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발행한 책자인 ‘대일평화조약(對日平和條約)’에 독도가 일본 국경선 밖에 표시된 지도가 실려있다. 일본영역도(日本領域圖)’라는 이름의 이 지도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남해와 동해 해역에 제주도, 대마도, 울릉도, 죽도(독도) 등 4개 섬을 표시한 뒤 국경선을 그어 제주도와 울릉도 죽도는 한국 영토로,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명확히 구분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한 49개 연합국 가운데 미국과 함께 주축이던 영국이 조약 체결 몇 달 전 미국에 제시한 조약 초안에 들어있는 지도에도 독도가 분명히 한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는 사실도 확인됐다.
▲ 독도는 한국땅” 입증 미 군정 지도
방공식별구역은 비행물체가 적대적 의도가 있는 항공기인지 군용.민간 항공기인지 등을 식별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설정된 공역(空域)으로 KADIZ는 1951년 3월 미 태평양 공군사령부가 극동방위를 목적으로 최초 설정한 이후 55년 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독도 상공은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이 아닌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의 동해권역 안에 들어가 있다.
[ http://ezhistory.org/zbxe/dokdo/4788 ] [원글 http://www.antijapan.net/bbs/board.php?bo_table=pds&wr_id=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