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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대도호부 관아 - 푸른 동해 물결에 실린 붉은 순교자의 넋 |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58-1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강릉 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강릉 지역은 원래는 동예(東濊) 지역이여 고구려 때는 하서랑(河西良)[혹은 아슬라(阿瑟羅)라고 불렀으며 통일 신라 시대에는 명주(溟洲)였다. 고려 공민왕 때 강원 영동 지방의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강원 영동의 거진(巨鎭)의 의미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읍격을 정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여말 선초의 전환기에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김광을(金光乙), 함전림(咸傳霖) 등의 출사와 고려 초에 왕씨 성을 사성 받았던 세력이 김씨 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강릉 지방과 조선을 개창한 중앙 세력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도 강릉이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江陵 大都護府 官衙는 강릉 대도호부의 행정 관청이며 이 안에 객사인 임영관이 있어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렀다.
강릉 대도후부의 순교자
큰고을의 관아가 있었기에 전주교 박해시에는 필연적으로 많는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 교구 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이는 “치명일기”(致命日記)에 기록되어 있는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 정도이다.
“치명일기”에 있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옥에 갇히었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강릉에서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 5월에 이유일 안토니오와 심능석 스테파노 등이 체포되어 서울의 좌포도청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심문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이 서울로 이송되기 전에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심 스테파노와 이 안토니오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와 함께 하느님의 종에 포함되어 현재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강릉 대도호부의 현재 모습
조선 시대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종 19년(936년)에 세워져 모두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객사(客舍) 임영관(臨瀛館) 삼문(三門)’인 객사문(客舍門)과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도호부가의 정청이던 칠사당(七事堂)뿐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1998년 정식 발굴조사를 시행해 2006년 1차로 복원을 마친 건물들이다. 현재도 여러 건물에 대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칠사당(七事堂)
1971년 12월 15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社)를 시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현판의 뜻은 관아의 7가지 업무를 보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중건했다고 한다.
교회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해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가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ㄱ’자 형태의 건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임영관 객사문
칠사당 뒤편에 있는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柱心包)계 양식과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으로, 배흘림기둥은 현존하는 목조 문화재 중 가장 크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영지》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재위 19년(936년)에 창건했다는 강릉객사 임영관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노후와 변형으로 인해 완전해체한 후 보수하였으며,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은 2006년 10월 복원되었다. 그리고 서쪽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가 있다.
임당동 성당에서 강릉대도호부관아까지는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바라보면 보일 정도이다. 관아의 가장 앞에 있는 문은 아문(衙門). 요즈음 무슨 행사가 있는지 만국기처럼 등이 달려 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아문을 들어가면 세 영역으로 나뉜다. 문을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 칠사당 영역이 보이고 바로 들어가면 동헌 영역이다. 그리고 동헌 영역 뒤에는 객사 영역이다. 칠사당 영역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바로 동헌 영역으로 향한다.
동헌 영역은 맨 앞에 중문이 있고 그 뒤에 동헌이 있다. 동헌 왼쪽에는 별당이 있다. 동헌과 별당 사이엔 작은 문간집이 있는데 문화광광해설사의 집이다. 왼쪽 약간 뒤쪽 높은 곳에 의운루(倚雲樓)가 있다.
동헌은 관아의 정청(政廳)으로 수령이 행정 업무와 재판 등 정무를 보는 중심공간이다. 규모는 정면 6컨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동헌과 별당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집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다.
다음은 객사 영역이다. 객사(客舍)는 조선 시대 지방 관청의 여러 건물 중 하나이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한 지방관의 의례 공간이며, 동시에 지역을 방문하는 사신의 숙박 시설로 기능하였다. 때문에 지방 행정관청 건물보다 격이 높은 시설로 운영되었으며, 고을 또는 읍성의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큰 규모로 건설된다.
강릉 객사의 이름은 임영관(臨瀛館)으로 가장 앞에는 임영관 삼문이 있고 그 뒤에 중대청이 있다. 중대청 뒤에 객사 임영관 큰 건물이 나오는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전대청, 동쪽을 동대청 또는 동익헌, 서쪽을 서헌, 또는 서익헌이라고 부른다.
임영(臨瀛)은 강릉의 옛 이름이다.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이 동해 바다 속에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영주산(瀛州山)이다. 따라서 동해 바다 영주산에 임해 있는 고을이 임영(臨瀛), 곧 강릉인 것이다.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일명 객사문, 국보)은 고려 태조 19년(938)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강릉 객사 임영관의 외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말-조선 초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목조 건물로 국보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과 시대를 같이 한다. 규모는 전면 삼칸 측면 2칸이다. 맞배지붕이며 주심포의 기둥을 하고 있다. 중앙 각 기둥 3칸에는 널문을 달았다. 삼문으로 진입하는 전면은 비교적 높은 돌계단을 쌓았고, 측면과 후면에는 둥근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였는데 각기 다른 모양이다. 전 후면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를 사용하였고, 중간 줄에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문을 달았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 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낮은 구릉에 위치하여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임영관 삼문 바로 뒤에는 중대청이 있다. 중대청(中大廳)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순찰하려고 방문하였을 때 머물던 공간이다. 중대청이 없는 객사도 많으며 강릉 객사는 중대청이 있는 대표적 객사이다.
중대청 뒤에 임영관(전대청 동대청 서헌)이 있다.
전대청(殿大廳)은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공간이다.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했던 곳이다. 이곳은 좌우의 동대청과 서헌보다 지붕을 한 단계 높게 지었다.
서헌(西軒)은 오른쪽의 동대청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동대청보다 규모가 작다. 1698년 왕의 명령을 모아 엮은 법전인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사신 일행 중 정 삼품관료들이 서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대청(東大廳)은 왼쪽의 서헌과 더불어 중앙관료들이 숙식, 연회, 재판과 국가의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 망곡(望哭)을 하던 곳이다. 수교집록에 문무관 구별없이 2품이상이 동대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헌보다 격이 높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칠사당 영역이다. 관아 외부와 통하는 칠사당문과 칠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칠사당은 강릉대도호부 관아 구역 안에 있는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처이다. 칠사당(七事堂)이라는 명칭은 수령이 행해야 할 주요업무인 七事(농사, 호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에서 유래하였다 최초 건립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10년(1632)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확장 중수하였으며, 이후 고종 4년(1867)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건물의 평면형태는 ㄱ자 모양이고 규모는 전면 7칸 측면 3칸이다. 전면 왼쪽에 누마루를 설치하고 뒷면에는 1칸을 내달아 ㅡ형태의 특이한 평면을 보인다.
중앙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온돌방과 마루방, 누마루를 배치하였고, 툇마루 앞에 대청 천장은 우물과 연등 모양이며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마루, 누마루 등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여 공간의 변화와 위계를 주었으며, 해안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물고기 모양의 화반, 삼익공의 공포 형식 등 품격 높은 조형미를 지녀 역사 ·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한쪽에 집경전(集慶殿) 터가 있다. 집경전은 원래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 어진을 모시는 전각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가 위험하자 태조 어진을 점차 북으로, 북으로 옮겨 강릉 객사에 모셨던 것이다. 건물 이름도 집경전 그대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왜란 후 인조 9년(1631)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인조는 3일 동안 흰옷을 입고 호곡을 했으며 강릉 부사 민응형은 곤장 100대에 유배에 처해졌다.
그후 경주와 강릉에서 여러 번 태조 어진을 그려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실행되지 않은 대신 정조는 경주에 集慶殿舊基(집경전 구기)라는 어필을 내려 읍성 안에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관했다. 이후 1939년 비각이 불타 없어지고 비석만 구 경주여중 교정(현 경주평생가족교육원)에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오후 5시. 차를 임당동 성당에 주차했기에 다시 성당으로 와서 차를 타고 행정 공소로 출발
행정 공소 - 새들이 다 떠나고 둥지만 남은 교우촌의 황혼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행정2길 14
행정 공소는 강릉 지방의 오래된 교우촌이다. 본디 외교인 촌이었으나, 1924년경에 김세중 라파엘이 일가를 이끌고 양평에서 강릉 연곡 행정 1리로 이주해 와 옹기점 교우마을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후에 조병태 일가가 금광리에서 이주해 이들의 전교로 행정리 마을에 천주교 신자가 급증하게 되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어 행정 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행정 공소는 전체 주민 모두 교우들이고 옹기업에 종사하며 힘써 이웃 농민들에게 전교했으며, 김세중 라파엘 회장의 아들 김문교 요한 회장과 손자 김창식 아오스딩 회장까지 3대에 걸친 노력으로 영동지역에서 손꼽히는 큰 공소로 발전하였다. 행정 공소 건물은 처음에는 목조였으나, 1958년 김창석 아오스딩, 김종호 바오로를 주축으로 전신자가 협심하여 옹기 굽는 가마에서 직접 벽돌을 찍어서 38평의 공소 건물을 건립했다. 현 공소 건물은 최창규 발로도메오 신부 재임 시절인 1958년 10월 8일 춘천교구장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가졌다
당시는 매우 의욕적이고 왕성한 전교 활동으로 신자 세대수가 50세대 250여 명에 달했다. 또 신자들의 열심한 전교 활동으로 삼산공소(1958)와 인구공소(1959)가 설립되기도 했다. 공소에서는 매일 저녁 1시간 정도 만과가 바쳐졌고 주일에는 첨례(공소 예절)를 바쳤다. 이 때에 두 명의 사제 곧 김종석 도마(1987년 선종)와 이정행 사도 요한이 탄생했으며, 이귀녀 칸디다 등 여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옹기산업은 기계화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고, 도시 집중 현상을 대부분 신자들은 인근 도시나 서울로 이주하게 되어, 행정 공소는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공소 건물은 관리 부족과 한때 프란치스코회의 지원을 받던 지체장애인들이 공소에 입주하여 내부를 개조해 사용하면서 건물 본래의 모습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2003년 11월 건물의 보수를 시작하여 2004년 9월에 보수공사를 마쳤고, 같은 해 10월 28일에 장익 주교가 중창식을 하였다. 공사를 맡은 민봉영 레오는 1958년 행정공소 건립시 목수였던 민레문도의 아들이다.
춘천교구에서는 2009년 옹기마을 교우촌이면서 오지벽돌로 지어진 행정 공소 건물을 교구 사적지로 지정하고 표지석을 세웠다. 지금은 신자가 줄어들어 옛날의 융성했던 교우촌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곳이다.
현재 이곳 행정공소에는 은퇴하신 원로사제 이정행 사도요한 신부님이 상주하시며 공소를 관리하고 계신다. 이정행 신부는 이 교우촌 출신으로 이 옹기 교우촌을 이룬 김세중 라파엘의 외증손이시다. 1972년 12월 8일 사제 서품을 받고 강릉 임당동성당에서 보좌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여 2013년 9월 2일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은퇴하시고 9월 5일 행정공소로 돌아와 상주하시며 사제관을 짓고 공소를 관리, 사목하신다.
강릉 임당동 성당을 출발하여 30-40분을 소요하여 행정 공소 입구에 도착하니 먼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고 멀리 공소 건물이 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면 갈림길인데 왼쪽으로 가면 공소 경당과 순례자를 위한 아오스딩 쉼터로 가고 오른쪽으로는 사제관으로 간다. 아오스팅 쉼터는 10여명 적은 인원이 피정과 미사를 드릴 수 있는 휴식과 기도의 공간이다.
널찍한 경당 영역에는 아오스딩 쉼터뿐 아니라 성모동산도 있고 쉴 수 있는 정자도 있다.
공소 경당은 1958에 지은 붉은 벽돌조 건물로 2004년에 보수한 것이다.
성전 내부는 나지막한 제단 위에 제대와 십자고상, 그리고 제대 후면 오른편엔 감실과 성모자상이 있다. 벽에는 순교자 홍인 레오 부자 순교화가 걸렸고 벽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 목조 천장 아래 교우석은 간이 의자가 놓였다..
나오는 길에 사제관에 들렀더니 원로 사제 이정행 사도 요한 신부님께서 사제관 앞에 앉아 계시기에 인사를 드리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곳 출신 이정행 신부님은 이곳 출신으로 은퇴 후 이곳에 사제관을 짓고 현역 사제가 없는 공소에 사목을 하고 계시지만 공소 신자들은 거의 다 떠나고 이웃마을 평소 알던 자매 교우 10여명 찾아와 겨우 주일미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나마 지금 병환 중이라 활동하시기가 많이 어렵다고 하신다. 그래서 요즘은 사가의 친척 여성 한 분의 도움으로 지내고 계신다고 한다.
시골 공소라 옛날 교우촌 교우들의 생활상을 떠올리며 축복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고령과 환후에 시달리시는 신부님을 만나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새들이 다 떠나고 둥지만 덩그렇게 남은 모습을 볼 때의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신부님의 건강 회복을 기도한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오늘 순례 일정을 마감하고 양양으로 떠났다. 원래 고성에 있는 리조트에 예약을 했으나 양양에서 그곳까지 30분 이상 소요되니 왕복 1시간이 넘는다. 가뜩이나 장거리 운전이 부담이 되는 터라 숙박을 위해서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양양에서 숙박하기로 했다.
7시가 좀 넘어 비교적 손쉽게 모텔을 구해놓고 바로 인근에 있는 순두부 전문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 후 투숙.
성지순례(27) - 2024 .09. 07(토)-08(일) |
2024 .09. 08(일)
아침 05시가 조금 넘어 기상. 양양 성당 새벽 미사 시간은 06시 30분. 차로 양양 성당까지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이지만 차로 가지고 갔다. 굳이 다시 숙소에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 양양 성당은 수복지역이다. 6 25 전쟁 이전은 북한 지역이라는 말이다. 6 25로 인해 자유를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참 운이 좋은 지역이다. 만약 계속 북한 지배하에 있었다면? 참 끔찍하다.
양양 성지 - 납북 순교자 이광재 신부가 사목한 영동지방 신앙의 모체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1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청길 17
양양 지역의 교우촌의 형성과 공소의 탄생
강원도 동북쪽 북한 접경의 양양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것은 병인박해 전후라고 추정된다. 곧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교우촌에 거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禾日里)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잇달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 등 이 베드로 가족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 바오로가 속초 도문동 싸리재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설을 종합하면 양양의 범뱅이골과 속초의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을 즈음인 1882년 가을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처음으로 영동지역으로 파견되어 이듬해 봄까지 순방하면서 양양지역 최초의 공소인 쉬일 공소(양양읍 파일리)를 비롯하여 여러 공소를 설립하였다. 쉬일 공소에 이어 1887년 싸리재 공소, 그리고 잇달아 장승골 공소, 한재 공소, 정바위 공소, 장두골 공소, 명지골 공소, 이목동 공소, 신흥 공소 등이 설립되어 양양 · 속초 지역에만 9개 공소가 되었다.
1883년 4월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에 의해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섭골)에 섭가지 본당이 설립되자 이들 공소는 그 본당의 소속이 되었다. 1888년 함경남도 안변에 있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내려와서 강원도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면서 덕원교구 안변본당으로 이관되었다. 1896년 2월에는 안변본당의 4대 주임 불라두(T. Bouladoux, 羅亨黙) 신부가 안변에 내평본당을 설립하면서 이때부터 1921년까지 내평 본당 관할이 되었다.
본당의 설립과 발전 과정
영동 지역에 공소가 여러 개소 설립되어 신자수는 점차 늘어났지만, 소속 본당인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에 뮈텔 주교는 1921년 4월 17일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북간도 조양하(朝陽河) 본당에 있던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최문식 신부는 속초 상도문리의 싸리재에 거주하였으나, 성담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이 허술하였고, 전교 면에서도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성당 이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22년 2월 17일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로 성당을 옮긴 뒤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22일 완공하였다.
2대 주임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 때인 1936년 여름 수해로 성당이 완전 침수되자 성당 재신축 계획을 포기하고 양양 시내 중심지로 다시 이전하기로 한 뒤 현 성당 소재지의 부지 1,140평을 매입하였다. 이어 1939년 7월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는 성당 신축계획을 바로 이행하여 1940년 2월 28일 성당과 교육회관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1909-1950)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두고 미사를 드리다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의 부속 건물로 쫓겨났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대규모로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라며 월남하지 않았다. 또한 북쪽 강원도 평강과 이천 본당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이 체포되자 이 지역까지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50년 6월 24일, 6 25 전날 이광재 신부는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서 인민군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총탄을 맞고 쓰러져서도 피 흘리는 주변의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자 물을 떠나 주는 등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었다.
전란 중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면서 신자 공동체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주문진(注文津) 본당에 이어 동명동(東明洞)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지금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설리반(T. Sullivan, 서)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54년 11월 30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또 1960년 4월 1일 수녀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2층으로 된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당시 맥고완 신부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한 해 앞서 속초성당을 지었던 기술자들을 동원해 양양성당을 지었다. 양양 신자들은 자원해 성당 공사를 도왔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신자들은 끼니 한 끼 제대로 때울 형편이 못돼 밥 대신 물로 배를 채우면서 하느님의 집을 짓는 데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10대 주임 스미스(M. Smyth) 신부는 이광재 신부의 깊은 신앙심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일 순교 기념각을 세웠다. 그 후 1988년 4월 6일 현재의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성당이 협소하여 많은 불편이 따르자 1995년 10월 1일 성당을 증축(75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4일 농어촌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현북 가정 간호의 집을 개원하여 서울의 수녀회인 성가소비녀회(聖家小婢女會)에 운영을 위탁하였다.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동주(李東周, 시몬) 신부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 부임 직후 디모테오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이광재 신부 현양사업
본당에서는 2000년 10월 8일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순교각(殉敎閣)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기념관에는 양양 성당에서 마지막까지 사목했던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분이었다.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회에서는 본당 100년사 편찬과 더불어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기념관을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또 설악산과 낙산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는 본당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타지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념관을 널리 홍보하였다. 양양 본당은 이광재 신부 현양 사업의 하나로 2009년 6월 9일 이광재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광재 신부 석상 제막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춘천교구 또한 한국전쟁을 전후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하했던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고 이광재 신부의 삶을 묵상할 수 있도록 순교일인 10월 9일을 교구 ‘성직자 추념의 날’로 정해 기념해왔고, 2000년부터는 해마다 순교일에 ‘38선 도보순례’를 실시하고 있다. ‘38선 티모테오 순례길’은 신앙과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북녘 동포들의 피난길이었으며, 이광재 신부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북녘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을 도와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한 생명의 길이었다.
2007년 6월 춘천교구는 1940-50년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하다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개인이나 단체 혹은 본당 등에서 6.25 전쟁 전후 북한군의 박해와 전쟁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에 대한 조사나 현양 사업이 있었으나 시복 시성을 전제로 교구 차원에서 조사에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7년 9월 17일 춘천 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 묘역과 양양 성당을 성지로 선포했다. 현재 이광재 신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06시 10분 경 성당 주차장에 도착. 언덕 위의 성당을 가려면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한다. 주차장을 나오면 바로 오른쪽에 티모테오 회관과 어린이집 있고 왼쪽에는 순교각과 이광재 신부 기념관이 나란이 있다. 바로 오르면 성당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막길을 가면 십자가의 길을 통해 성당으로 이어진다.
순교각 안에는 제대 형식의 구조물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이광재 순교기념비가 들어 있고 위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옆에는 이광재 신부 약력을 간단히 소해하는 비가 서 있다.
성당 축대 아래로 십자가의 길이 지나간다. 돌로 조각한 14처가 길을 안내한다.
계속 오르면 성당 표지석과 그 위의 쉼터에 이른다. 시내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천연비누 등 친환경 생활용품을 파는 미니가게가 있다. 그리고 성전 바로 앞에 성모자상이 있다.
성전
양양성당은 1954년에 건립된 건축물로 1950년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춘천교구를 재건할 때 지었던 성당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장방형 시멘트 벽돌조 건물로 종탑의 첨탑은 성당 입구 지붕 위 4각 종탑 위에 브로치 형으로 장식돼 있다. 1995년 제대 부분을 완전히 헐어내고 증축하는 개보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보아온 성내동 성당, 묵호 성당, 임당동 성당과 닮은 모습으로 소박하고 단아하다. 그리 화려하지 눈에 띄는 것은 없으나 은은한 기품을 나타내는 선비 같은 느낌이 든다.
성전 왼쪽 측면 출입문 옆에는 이광재 신부상과 그 옆의 김교명(베네딕토) 신부와 유재옥(프란치스코) 신부의 순교 기념비가 있다.
김교명(베네딕토) 신부(1912.07.15.∼1950. 6) 는 1939년 강원도 양양 성당 출신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1942년 5월 평양교구에 지원하여 의주본당을 사목하면서 해방이 되어도 월남하지 않고 사목을 계속하였다. 1950년 6월 26일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의주 보안서에 일주일 간 억류된 이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유재옥(프란치스코) 신부는 경기도 화성 갓등이 출신으로 1925년 사제 서품을 받아 1927년 양양 성당에서 12년 간 재임했다. 1939년 황해도 겸이포 성당 초대 주임으로가서 해방이 되어도 양떼를 버릴 수 없다면서 월남하지 않았다가 1950년 6월 24일 정치보위부의 납치되어 그해 10월 해주 앞바다 백사장에서 전깃줄에 묶인 채 생매장 당해 순교했다.
성전의 바깥 오른쪽 측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배치되어 있다.
성당 내부도 외양과 같이 단정하게 꾸며졌다. 가운데가 높고 좌우가 낮은 천장, 모자이크 형태의 제대후벽의 십자고상, 2단 나무 벽면의 유리화와 그 사이에 배치된 14처 그리고 제대 왼쪽의 성모상 이외에 별다른 장식도 없지만 품위가 느껴진다. 더욱이 제대 오른쪽 뒷벽 아래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성당의 격을 높여주고 있다.
미사가 끝나도 7시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광재 신부 기념관 관람인데 이른 시간이라 문이 열리기 전이다. 성당 사무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친절한 사무장은 문을 열어 주고 대표적 유물을 설명까지 해 주었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손때 묻은 유품들뿐 아니라 82년 본당 역사가 잘 정돈돼있다. 1930년대 공소회장단 피정 기념사진과 교리문답집 등 빛바랜 흔적을 쭉 더듬어가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이광재 신부님 초상화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의 신품성사 성구는 요한복음 제10장 11절의 말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 이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글자수 40,460자 요한복음 전문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중 10장 11절의 말씀은 큰 글씨로 써서 돋보이게 했다. 이 작품은 재료가 변질되거나 변형되지 않도록 바탕 화면은 집성목판(集成木版)을 썼으며 그림은 커피 희석 물감을, 그리고 글은 먹물 붓으로 그렸다.
▲6 25 당시 본당 성물과 이광재 신부 유품 - 교우들이 땅에 묻는 등 보관하여 군종 신부에게 인계한 성물들
▲본당 초기 신부님들
▲양양 성당 출신 사제들 - 김교명, 최동,김택신, 김길상, 고봉연, 김효식 신부님
▲이광재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월남한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계시는 이해인 수녀님이 이광재 신부에게 드리는 헌시
사랑의 길이 되어 떠나신 분 - 이광재 신부님께
한번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지만
동해의 바닷바람, 가을바람이 가슴을 적십니다.
당신의 그 온전한 봉헌은
우리를 울게 합니다.
1909년 6월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27세로 사제로 서품되시고
1950년 10월, 41세로 생을 마치실 때까지
당신의 매일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오른 불꽃이었으며
그분의 수난에 동참한 거룩한 미사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가지 않고
죽음이 더 가까운 위험 지대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신부님
어리석게도 그것은
사랑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단 한명의 신자를 위해서도
사제는 희생할 의무가 있다며
스스로 피 흘려 제물이 되신 신부님
'교회의 앞날을 위해
나보다 더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를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한다.' 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월남(越南)길을 돕는 길잡이로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신 분
감옥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고
어둠과 악취뿐인 방공호 속에서
총을 맞고 숨져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보다 이웃을 더 많이 생각했던
당신은 진정 또 하나의 예수였습니다.
죽어 가는 동료들의 신음소리 들릴 때마다
"응, 내가 가지요, 내가 도와 드리지요.“
"물을 떠다 드릴 텐데 일어날 수가 없군요." 하고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이웃을 향해
사랑의 헛소리를 되풀이하셨던 신부님
앉지 않고 꿇어서 고백성사를 들으시고
잠시 머물던 나그네와 헤어질 때도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강복을 주시며 눈물을 흘리신
겸손하고 인정 많으셨던 신부님
당신은 진정 성자(聖者)임을 이제 우리는 다시 압니다.
이웃을 살리는 사랑의 길이 되어
당신은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죽음보다 강한 그 믿음, 그 사랑은
이제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교회 안에, 우리 가슴 안에
더 깊이 뿌리내려 열매 맺고 있음을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주십시오.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
11년 동안 밤낮으로 애쓰시던 이곳,
양양 성당에 와서
우리는 당신의 손때 묻은 기도서와
남루한 제의를 만져 보며
사랑의 숨결을 느껴 봅니다.
당신의 시신이 묻힌 원산,
가깝고도 먼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찬미했던 주님을
우리도 새롭게 찬미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갈라져서 상처가 많은
우리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처럼 두려움 없는 사랑일 수 있도록
더 깊고 큰 믿음을 뿌리내리게 해 주십시오.
1996. 6. 양양성당에서. 베네딕도 수녀회 이해인 수녀
전쟁의 비극과 6ㆍ25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배어 있는 양양성당을 비롯한 동해안 성당들은 우리 민족의 수난과 교회의 고통을 함께 견뎌낸 하느님의 집이다. 남북의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 화해하고 이 땅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순교자 현양 성당을 찾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08시에 이번 일정이 끝이 났다.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다. 온김에 관동팔경(의상대,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을 거쳐 갈 예정이다. 어쨌거나 이번 귀가 일정은 원거리 일정 가운데 가장 일찍 완료될 것 같다. (김연호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