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1. 불교 백제전래와 발전
범본 律部 백제인 손으로 번역…독창성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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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 석탑> |
사진설명: 부여 중심가에 위치한 정림사지에 있는 높이 8.8m의 5층 석탑. 국보 제9호로 백제불교 뿐아니라 한국 석탑을 대표하는 유물로 평가된다.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은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 |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순도(順道)스님이 고구려에 들어온 지 12년 뒤의 일이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에 따르면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 인도 출신의 마라난타스님이 동진(東晋)에서 들어오자, 왕은 환영해 궁중에 모시고 예경했다”고 한다.
〈해동고승전〉엔 “왕이 교외에까지 나가 맞은 후, 궁중에 모시고 공경히 받들어 모셨다. 다음해 2월 한산에 절을 짓고 10인을 득도시켜 출가자가 되게 했다”고 나온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초전(初傳)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전래와 차이가 있다.
중국 전진(前秦)의 국가적 사절(使節)로 순도스님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면, 마라난타스님은 개인적 차원에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온 한 스님을 맞이하기 위해 왕이 교외에 까지 나갔다는 기록에서 당시 백제도 불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동국대 김영태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불교사〉(경서원) 등에서 “당시에 있어서는 궁중에 일반인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했는데, 외국의 사문을 궁중에 모시고 예경한 것은 왕이 불교를 갈망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9월에 들어온 스님을 위해 다음해 2월에 사찰을 짓고, 게다가 10명의 출가자까지 배출했다는 점에서 백제가 불교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기록들을 종합하면, “불교가 국가발전에 매우 필요한 종교”임을 백제 상층부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발전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었다. 그러나 한산에 사찰을 짓고 10명의 출가자를 배출한 이후 불교가 전국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불교가 들어온 지 1년 뒤 침류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사왕(재위 385~392)이 즉위 했으나, 불교와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진사왕 이후 왕위에 오른 아신왕(재위 392~405)이 392년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영을 내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권3 ‘흥법편’에 전한다.
나름대로 착실히 기반을 다져가던 백제불교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제26대 성왕(재위 523~554) 4년(526)부터. 이 해 겸익(謙益)스님이 인도에서 귀국하며 산스크리트 율부(律部)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겸익스님과 함께 인도의 배달다(倍達多)스님도 들어왔는데, 성왕은 겸익스님이 가져온 범본(梵本)원전들을 번역하게 했으며, 나라 안의 학자 28명으로 하여금 역경(譯經)을 돕도록 했다. 역경 결과 율부 72권과 소승율인 비담(毘曇)의 번역이 완성됐고, 번역을 본 담욱.혜인스님이 36권의 소(疏)를 지었다. 당시 이뤄진 율부 72권과 율소 36권을 ‘신율(新律)’이라 했는데, 여기서 율을 강조한 백제불교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침류왕 원년(384) 인도 마라난타 스님이 전해
다시 말해 백제는 중국에서 번역된 율부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번역한 율을 백제의 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마란난타스님이 들어올 때, 아마도 한역(漢譯)경전과 함께 범본 경전도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경전’과 ‘율전(律典)’을 가지고 있었던 게 된다.
“단순한 중국불교의 재탕(再湯)이 아닌, 한역본을 통한 간접 전달이 아닌, 직접적인 원전을 수용한 창의적인 불교를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제26대 성왕 19년엔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열반경〉과 공장(工匠).화사(畵師)를 청해왔고, 23년(545)엔 “장육불상을 조성해 천하의 모든 중생이 다같이 해탈하기를 기원”(일본서기)했다. 그리고 성왕 30년(552) 불교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이것이 일본불교의 시초임은 물론이다. 단순히 불교만 전한 것은 아니고 백제의 스님들과 예술가들이 대거 도일(渡日), 일본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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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국 고대불교조각의 백미로 꼽히는 서산마애삼존불. |
성왕 시절 백제를 빛낸 스님이 있으니 현광(玄光)스님이 바로 그다. 중국 남조 진(陳)에서 남악혜사(514~577)스님으로부터 〈법화경〉 안락행 법문을 은밀히 전수받고, 수행 정진해 법화삼매를 증득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혜사스님은 현광스님을 인가하며 “본국으로 돌아가 선방편(善方便)을 베풀어 화도(化度)하라”고 했다. 스님은 고향인 웅주(공주) 옹산으로 돌아와 사찰을 짓고 크게 교화했다.
중국 남악혜사 영당(影堂) 내 28인도(人圖)와 천태산 국청사 조사당(祖師堂)에는 현광스님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었다고 〈송고승전〉 권18과 〈불조통기〉 권9.24엔 전한다.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고승이었던 것이다.
성왕 때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열반경〉을 가져오게 하고, 공장.화사를 청해왔다는 점에서 “국왕들의 불교에 대한 적극성과 국가불교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불교가 백제에서 이처럼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았기에, 제29대 법왕(法王)은 즉위하던 그 해(599) 1월 “살생을 금하는 령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고 어렵도구(漁獵道具)를 불태우게”(삼국사기 백제본기) 했다. 법왕의 살생금령(殺生禁令)은 형식적인 계율의 권장이 아니라 불교의 생활화를 국가적으로 실천하게 하려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아가 법왕 2년(600) 1월에 왕실 원찰 왕흥사를 부여에 세우고, 30명의 사문을 득도시켰다. 다음 무왕(재위 600~641) 때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했다. 무왕은 부인(신라 진평왕 딸 선화공주)과 함께 용화산 밑을 지나다, 산 밑 못 속에서 미륵삼존상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부인의 발원에 의해 미륵사를 창건했다.
미륵사 창건연기를 통해 “백제불교는 국토를 불국토화(佛國土化)하려는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부처님과 인연 깊은 나라일 뿐 아니라, 백제를 현실적인 부처님 나라로 이룩하려는 신앙적 희원(希願)과 사상적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영태교수)는 분석이다.
무왕 때 고승 혜현(惠現)스님은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특강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백제불교에서 특기할 것 하나는 “스님과 사탑이 매우 많으며, 도교인이 없다(僧尼寺塔甚多 而無道士)”는 사실. 중국 〈주서(周書)〉 권19 열전41 ‘이역(異域) 상(上) 백제조(百濟條)’에 나오는 이 기록을 통해 “백제가 불교를 국가적으로 발전시켰고, 불교는 백제에서 매우 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602년(무왕3) 일본에 건너간 관륵(觀勒)스님이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돼, 일본 불교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는 점. 스님은 이름난 의승(醫僧)이기도 했는데, 관륵스님 앞뒤로 수많은 스님들이 일본에 들어가 교화하고 일본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백제불교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 불교를 한반도에 심으려 했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부처님 가르침으로 섬나라를 개화시키려는 선도적 역할까지 했다.
흥불(興佛)이 곧 국가발전의 토대임을 알았던 백제인들 이기에, 그들은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백제불교 유산’을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유물이 부여 시내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부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절터의 백제시대 이름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발굴 작업 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 조각에 ‘정림사’라는 명문이 있어 그렇게 불릴 뿐이다. 그러나 탑은 백제인이 조성한 것임이 분명하다.
정림사지는 부소산과 왕실 연못이었던 궁남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위치상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탑만 덩 그라니 서있을 뿐이다. 뒤쪽에 최근 지은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이 안치돼 있다. 머리 부분은 훗날 연자 방아돌을 깍아 다시 올려놓은 것인데, 좌대부분의 연꽃 문양이 석불의 아름다움을 증명해 준다.
정림사지석탑 등 훌륭한 유물 많아…일본에 불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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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제금동대향로. 백제불교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
정림사지에 있는 5층 석탑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탑의 양식으로 추측컨데, 익산 미륵사지석탑보다는 후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미륵사지가 목탑 양식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면 정림사지는 목탑의 모방에서 한 단계 발전해 석탑의 조형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탑을 제작할 때 초기에는 나무로 목탑을 만들고, 이후 석탑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익산 미륵사가 백제 무왕 시대(600~641)에 만들어진 것이니 정림사지 석탑은 그 이후일 것이다. 때문에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시기적으로 7세기 중엽에 조성됐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의 1/3정도다. 미륵사탑이 목조 건축 양식을 그대로 돌로 표현해 놓았다면 정림사지 석탑은 그 형상미를 한 단계 승화시켜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석탑의 모범을 보여준다.
한국 석탑은 이후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켰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잘 다듬어 마름질한 화강석 149매를 짜 맞춰 올린 높이 8.8m의 탑이자, 목조탑이 석탑으로 어떻게 변화되는 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탑이다.
이 들 석탑과 함께 백제불교를 대표하는 유물이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다. 청동을 재료로 위로부터 봉황으로 추정되는 새와 뚜껑, 노신(爐身), 용 등 4부위로 나눠 주물제작하고 이를 결합시킨 금동대향로는 높이 64㎝의 대작. 출토 이래 탁월한 조형미와 각종 도상(圖像)이 나타내는 의미 때문에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석탑과 향로 등의 귀중한 유물에도 불구하고 백제불교 전반을 알려주는 자료가 부족한 것은 주지의 사실.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자체적으로도 찬란한 꽃을 피웠던 백제불교의 전모를 알기 위해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산.부여.익산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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