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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주제 : 죄/구원/감사
제목 :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
성경 : 막 1:29-31
찬송 : 216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0030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막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막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막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 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믿으며 고백합니다. 이것만큼 중요한 요리문답이 있는데 1563년 2월 독일 팔츠 지역의 수도였던 하이델베르크에서 발간된 요리문답입니다. 요리 문답이 뭡니까? 요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말하는 중요한 교리를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빌려 정리해 놓은, 믿음의 골격을 반듯하게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재를 말합니다.
양승헌목사님이 집필하신 ‘크리스천 믿음(상,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강해한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온 중요한 내용들을 함께 몇 시간에 걸쳐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스네일 피시 이야기
스네일 피시(Snail fish)라는 희안한 물고기가 있습니다. 스네일 피시는 지금까지 밝혀진 어종 가운데 가장 깊은 해저 7,600미터에 살고 있습니다. 일반 잠수함의 잠항 깊이는 150m, 최첨단 핵잠수함도 500-700m가 그 한계라고 합니다. 이 물고기가 사는 해저 7,600m에는 잠수함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떠한 강철 잠수함도 견디기 어려운 엄청난 수압 때문입니다. 이 깊이에서는 1평방미터에 가해지는 압력이 8,000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1평방미터에 8,000톤의 압력? 환산하면, 소형차 위에 1,600마리의 다 자란 코끼리를 올려 놓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강철 잠수함도 뒤틀어지고 쭈그러질 엄청난 압력 속에서도 면도칼로 한 번 긋기만 해도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얇은 피부를 가진 스네일 피시가 유유히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물고기 속에 외부의 압력에 대응할 내부적 대응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할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압력 속에 살아갑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압력을 피할 수 없다면 압력을 이길 내적 대응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어디서 삶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내적 대응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즘 같은 때에는 ‘면역력’을 높이면 ‘코로나19’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면역력이 높은 사람은 ‘코로나19’가 찾아와도 가벼운 감기 정도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기저 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인 것을 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스네일 피시는 참 놀라운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보다 더 놀라운 존재들입니다. 무자비하고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지만 그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내부적인 대응력으로서 참된 위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 몸과 영혼이 오직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위로인줄 믿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위안이 우리의 것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지금 삼성병원에서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고 치료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그 많은 재산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벌려고 죽을 고생을 하지만 정작 누리지는 못합니다. 재물에 치여서 삶이 불행해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부요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하이델베르크 2문이 다루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사건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사건 현장 한 곳을 둘러봅시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급히 와서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요즘은 몸에 열이 나면 비행기도 못 탑니다. 미국에 가려면 열 체크를 세 번이나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국민들은 전 세계적으로 90여 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입국을 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며칠 전에 전주 예수병원에 갔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열을 체크하고 주소 이름 다 적고 대구나 경상도 갔다 왔느냐 묻고 신천지 교인 만난 적이 있느냐 묻고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요즘은 호흡기 환자, 예를 들어 기침이 나고 열이 나는 사람은 들어가는 입구가 다릅니다. 선별 진료소를 들리든지 아니면 그런 환자만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안심병원이 지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유행성 독감이나 코로나19와 같은 병이었을 것입니다.
막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막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막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가버나움에 가면 회당에서 가까운 곳에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셨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가셔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랬더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감기몸살만 앓아도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하려면 후유증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며 이들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를 영화나 드라마로 구성한다면 3막으로 엮어야 할 것입니다. 1막은 이 장모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2막은 예수님이 오셔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병이 단번에 그리고 완벽하게 100% 회복되는 내용입니다. 3막은 방금 전까지 아파서 온몸을 땀으로 적시던, 방금 전까지 신음 소리로 방을 채우던 그녀가 언제 아팠냐는 듯 일어나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예수님 일행을 섬기는 장면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와 비참, 우리의 구원 그리고 우리의 감사의 섬김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믿음의 세 가지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이 위로를 누리며 살고 이 위로 속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발이 의자 비유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삼발이 의자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삼발이 의자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가구이기도 하지만, 가장 불안정한 가구이기도 합니다. 세 다리 중 하나가 짧거나 부러지면 더 이상 의자로서의 기능은커녕 서 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왜 요리문답은, ‘주님의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는,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며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450여 년 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기록될 당시 종교 개혁가들이 가장 많이 읽고 묵상했던 성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를 연구 했기에 사람을 종교의 노예로 전락시킨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제, 죄와 비참과 구원 그리고 감사의 섬김은 바로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로마서는 영어 알파벳 s로 시작하는 세 단어 ‘죄(sin), 구원(salvation), 섬김(service)’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➀1~3:20-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➁3:21~11장-우리가 그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합니다.
➂12~16장-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감사함으로 섬겨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개의 주제가 하이델베르크 문답 전체를 구성하는 세 부분입니다. (참고-제 1부:3~11문-죄와 비참에 대해서, 제 2부 12~85문-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제 3부 86~129문-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섬기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우리가 참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 알아야 할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알아야 할 것 : 죄와 비참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부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죄를 깨닫고 죄를 인식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여러분의 잘못을 지적할 때 큰 위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누가 그렇겠습니까? 죄와 비참을 아는 것이 어떻게 위로를 받는 길이 되겠습니까?
✔죄와 비참을 아는 것 자체는 위로가 될 수 없지만, 위로로 인도하는 도약판이나 현관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위 내시경 받아보셨습니까? 저는 일 년에 한 번씩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수면 내시경이 아닌 비수면 내경을 받습니다. 굵은 호스를 처음 삼킬 때 눈물이 나오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내시경을 우리 위장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시경을 통해서 우리 위장이나 대장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진기로 진찰하고 맥박으로 진찰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은 직접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종이나 선종이 있는지 아면 염증이나 헬리코박터 균이 있는지 알아봅니다.
내가 죄인이고,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자기를 미화하고 포장합니다.
‘나는 죄인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비참하다고 인정하기에는 내 삶은 그런대로 행복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비참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수술대 위에 자기 몸을 눕히겠습니까? 내가 비참한 줄 모르는데 무엇 때문에 구원을 열망하겠습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분의 부활이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큰 비참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려면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힘든 내시경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먼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것 : 구원의 길
살아서나 죽어서 그 위로를 즐기고 누리며 살기 위해서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받는가?’입니다.
✔이것은 주로 예수님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치켜 올려 물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고, 남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외부에서 와야만 합니다.
✔사람이 아닌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인 존재만이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그 구원자가 예수님이십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은 종교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이나 한학자도, 신천지의 이만희도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비참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믿습니까?
세 번째로 알아야 할 것 :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
✔이 부분은 주로 성령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새로운 삶의 목표, 새로운 삶의 원리, 새로운 삶의 동기, 새로운 삶의 동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에게도 종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남에게 빚을 지거나 남의 재산을 도둑질했는데, 그것을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는 그 집에 들어가서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6년까지는 종살이를 하지만 7년이 되면 그 돈을 다 갚든지 못 갚든지 관계없이 무조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문화에도 없는 독특한 노예제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종 가운데는 도둑이었던 자기를, 빚 때문에 파산했던 자기를 아들처럼 사랑해주고 자기 자녀를 친손자처럼 돌봐준 주인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죽는 날까지 주인의 종으로 있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재판장에게로 데려다가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평생 주인의 종으로 살기로 한 것이 그 사람의 자발적인 결정이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확인되면 재판장은 그 사람을 주인집으로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귀를 뚫었습니까? 예쁘게 보이려고 귀를 뚫었지요? 그러나 히브리 종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비참에서 구해준 주인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주인을 위해 어떻게 감사함으로 섬겨야 하는지를 알았기에 평생 그 은혜를 갚으려고 귀를 뚫은 것입니다.
죄와 비참함, 구원, 이어서 섬김, 이것은 한 정거장을 떠나 다른 정거장으로 가는 기차역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20년쯤 지나면 구원을 받고, 30년쯤 지나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개념은 정거장이 아니라, 삼발이 의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성숙한 성도로 자랐을 때나 똑 같이 이 세 가지는 같이 그리고 서로 엮여 있습니다.
죄와 비참함을 모르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손을 내밀겠습니까? 그래서 부자들이 예수님을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죄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다 못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도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바로 본다면 예수님께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과장된 표현처럼 들리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라는 말을 기독교적 상투어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내 삶을 송두리째 드린다는 것은 너무 깊이 빠진 거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개종자이고 교인입니다. 기독교에 귀화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회심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심한 사람과 개종한 사람의 차이는 이 세 가지를 내 것으로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냐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이 개종한 사람인지 회심한 사람인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 압니다. 아직도 개종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고백으로 이 세 가지를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를 인정한 회심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년 전 혹은 수십 년 전 소위 ‘은혜 받은’ 그때, 그 고백에 지금도 머물러 있다면 당신은 자라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지고 더 민감해지며,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 깊이를 더해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손과 우리의 삶이 더 커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인식이 날마다 더 확장되고 날마다 더 깊어지고 날마다 더 높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