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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을 빛낸 여류 시인들(Ⅰ)
김우연(시인·문학평론가)
낙강(洛江)은 1965년 4월 25일, 창립회원으로는 회명을 <경북시조문학동호회>로 정하고 고문에 이호우, 회장에 이우출을 뽑아, 초창기 회무를 주로 이끌어 갔으며, 모일 적마다 작품 품평회를 했다.
2년 후 1967년 6월 25일에 부산에서 임종찬도 참석하여 영남시조문학회로 개칭하였으며 7월 1일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영남시조문학회의 회장은 대가이신 이호우 선생이 맡으면 좋다는 회원들의 뜻에 따라 승낙하시어 그해 12월에 창간호 낙강(洛江)을 발간하게 되었다.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선생을 비롯한 많은 여류 시인들이 낙강이 시조단을 빛내었는데 모두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낙강의 후배 회원들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개인 시집들을 위주로 몇 명의 여류 회원들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낙강 2집(1968)에 이영도, 낙강 3집(1996)에 여류시인 특집으로 김정자, 정표년, 낙강 13집(1980)에 박옥금, 정표년, 낙강 15집(1982)에 김남환, 김일연, 박옥금, 정표년 시인이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낙강 17집(1984)에 34명의 발표 회원 중에 정표년, 김남환, 박옥금, 김혜배, 김송배, 정위진, 이일향, 김일연 등 8명의 여류 시인들이 참여하여 여류시인들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1.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보리 고개」 전문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달무리」 전문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네 머문다.
-「석류」 전문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비」 전문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탑3」 전문
이영도 시인은 1916년에 청도군 대성면 내호동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셨으며 이호우 시인의 여동생이다. 황진이 이후의 최고의 여류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 곳곳에 애절한 그리움의 시적 서정이 잘 형상화가 되어 있다.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는 조선 중기 황진이(1511∼1541)이래 오랜만에 이 땅이 낳은 최고의 여류 시조시인이다.(……)/ 그는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였다. 대시인 청마 유치환과 많은 편지를 교환하면서 가히 세기적인 정결한 사랑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영도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알뜰하고, 부지런하여 여성으로서 거의 완벽한 분이었다. 그 완벽했음이 결점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조금은 틈이 있어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는 그렇지 못하고 매사에 철저했으니 단명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영도 시인은 1935년 결혼하여 1945년 남편이 작고하였는데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였다고 박옥금 시인은 말하고 있다.
애달픈 인연이 아니면 내 인생에 있어 죽음이 애석하고 슬픈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고운 당신을 알뜰한 아내로서 삶을 이룩해 보지 못하고 허탕칠 목숨이, 이 지극한 상애(相愛)가 보람없이 시들어 죽고 말 것이 원통할 뿐인 것입니다.
1962년 7월 2일에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박옥금 시인은 말처럼 사랑이란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법인데 그것이 안 된다면 참으로 애달프고 슬픈 인연일 것이라고 하였다.
2. 정표년
정표년 시인은 1946년 대구 달성 출생으로 1969년 《여원》에 「너 앞에」로 시조 당선, 1973년 《현대시학》에 「설일」로 추천 완료하였다. 2019년 낙강 총회에 모시어 회원님들께 좋은 말씀 전해주시기로 했으나, 박영교 고문님이 꼭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에 가시게 되어서 두 분이 함께 모이는 해에 다시 모시기로 하고 양해 말씀을 올렸다. 폰 문자 답변에 “낙강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어요. 늘 애틋합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가야 합니다.”라고 낙강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셨다.
새벽마다 울던 새가/ 산빛 물빛 다 흔들었나// 술렁대던 자리마다/ 툭툭 생명들 여는 소리// 예수여/ 가시관 위에/ 눈이 부신 황금 햇살
-「부활」 전문
당신을 사랑한 것은/ 내 죄가 아닙니다// 비 온 뒤 나뭇잎 푸르듯 그렇게 온 당신의 정은// 이 가을 저문 뜰에도// 낙엽질 줄 모르고// 내 허물 앞에 놓고/ 절망으로 어둠 찍으며// 마주하지 못하고/ 마음 꼭꼭 접어 안고// 이 가을 저문 뜨락을/ 낙엽 밟고 가는 달
-「당신」 전문
마음에 비오는 날은/ 시집 한 권 뽑아 읽는다// 생각의 갈기갈기/ 빗줄기에 씻기우며// 시인의 잊었던 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온갖 느낌 온갖 푸념// 조용조용 읊조리다/ 거칠게 분노도 하며// 숨겨 둔 소중한 얘기도/ 슬쩍 꺼내 보인다// 마주앉아 얘기하듯/ 같이 웃고 공감하며// 끄덕끄덕 말려든다/ 구름 슬슬 걷어내며// 어느새 마음밭에는/ 파란 하늘 다가온다
-「시집 속의 시인과」
아무로 모르고 있는/ 신의 섬으로 찾아가서// 슬픈 일 고픈 일 다/ 모른 체 눈귀 닫고// 한 석 달 잠들고 싶다/ 깊은 잠에 들고 싶다// 행여나 생각날까/ 혹시나 보고플까// 그저런 생각들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멍하니 나도 모르게/ 세월 훌쩍 넘고 싶다
-「신의 섬으로 가서」
여빈아 네가 만드는/ 티 없는 언어들은// 세상을 열어가고/ 사랑을 일깨우는// 둘만의 은근한 암호/ 막 떠들고 싶은 비밀// 꽃잎이 벙그듯이/ 눈 맞추고 입 오무려// 온힘을 한데 모아/ 떨림으로 풀어내듯// 숨소리 멈추게 하는/ 천사의 시 낭송소리
-「옹알이」
정표년 시인이 2018년에 발간한 산문집에 시조 관련 내용이 몇 곳만 발췌해본다.
민족시로서의 시조를 대하는 국민의 자세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쓰지 않으나 시조를 이해하고 아껴는 줘야 할 것이다. 극언일지 모르나 시조를 모르는 것은 민족혼民族魂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이제 반해 쓰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문제는 있는 것 같다. 꼭 문학 분야 특히 시·시조분야에 있는 문제만도 아니지만 어떤 모임이나 개인에게 있는 아류亞流나 아집我執도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나 아니면 별로라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지 없다.(……) 나의 인간됨과, 나의 작품과, 나의 인생관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편에서, 독자가, 혹은 제삼자가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 결국 많은 독자를 갖기 위해서는 또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평자가 말했듯이 사심 없이 인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일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또 문제로 남는다.
이호우 선생님께 직접 사사 받도록 권해 주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호우 선생님을 뵙고 시조에 관한 얘기도 듣고 작품 지도도 받고 지낸다는 소식을 드렸더니 주신 편지 였다. 그러다가 내 건강 문제로 걱정을 했더니 선생님께서 불러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물 세 살의 나이로 서울 첫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마포구 하수동 95-10번지에서 1968년 7월 23일부터 여름날 오십 일간을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까서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큰 보탬을 주었다.
문학에 큰 기대감 없이 투병 중인 무료함을 메꾸며 투고자로 있던 나를 문단으로 이끌어 주셨고 매사에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보통 사람이 피곤해하리만치 철저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목말라 하는 이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았으며 한자리에서 혹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상대방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주기도 하셨다.
박옥금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68년 여름 마포구 하수동 이영도 선생님 댁에 머물록 있을 때였다.(……)/ 대구 경북의 시조 전문 문학단체인 영남시조문학회(낙강) 회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연말 모임이 되면 김남환, 이일향, 정위진 선생님을 비롯해 작고하신 김혜배, 김해석, 배위홍 선생님이 오셨고, 모임 끝에는 대구의 회원들과 지금은 활동을 쉬고 계시는 전영순 선생님, 김숙자 선생님이 필자랑 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정표년 시인의 인품에 대해서는 박옥금 시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영도는 그 때 혼자 살았는데 외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여 대구에 있던 정표년을 불러 올렸던 것이다. 다정하고 단순한 이영도는 정표년을 딸처럼 사랑하였다. 자기 딸은 고분고분 하지 않았기에 친딸보다 더 사랑하였는지 모른다. 애견가가 강아지를 귀여워하듯 그렇게 사랑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슬며시 심술이 잘 정도였다.
나는 남편이 구박도 구박이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큰 의지가 되었던 친언니 같은 이영도가 뒤늦게 알게 된 젊은 후배를 더 사랑하느라 나와 멀어진 것 같아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더해 갔다. 나와 남편 사이에는 기어이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그럼, 이영도가 딸 이상으로 귀여워한 정표년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도 여기에 기록해 주어야겠다. 과장 없이 말을 하라면 그는 내가 존경하는 시조시인이다. 나보다 10년 이상 연하인 그를 존경한다함은 그의 시조가 소박하고 아름다워 그 기법을 따르기 힘들 정도로 시조 솜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착하고 순한 인품 때문이었다.(……) 그 순하디 순한 눈빛이며 그 착한 마음씨는 가을에 숨어 피는 가련한 들국화 같은 사람이다.
3. 김남환
김남환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72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하였다. 김천에 백수 선생이 있어 걸출한 여류 김남환 시인이 배출된 것은 인연이라 볼 수밖에 없다.
내 고향 수꾹새를/ 닮은 白水 先生님// 열매 같이 익은 孤獨/ 望黃岳의 窓에// 深深山 저문 가을 해/ 먼 生涯를 바람이 풀데// 피를 나누 듯/ 목숨을 쪼개 듯// 주신 사랑 외줄기/ 열어 둔 이 長江에// 萬갈래 세월 사이로/ 떨리는 落花를 보네.
-「因緣」 전문
김남환 시인이 등단 25년 되던 해에 펴낸 제6시집 『이차돈의 江』(동방, 1997)에서 몇 작품을 뽑아 본다. 한 편 한 편 모두 가편들이라 현대시조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말」에서 “이 텅 빈 대금의 가락처럼 은은한 목소리로 이 세상의 온갖 어혈들을 풀어내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다. 시인은 오직 자신의 삶에 대하여 끝없이 추구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속에서만이 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낙강 총회에 서울에서 참석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표년 시인이 “서울 도심에다/ 시골 한 폭 옮겨 놓고// 형님네 4대 가족/ 끈적이는 정의 고리// 그 옛날 엄마 솜씨/ 통김치도 맛들었네”(「남환 형님」 두 수중 첫째 수)라고 노래 한 바 있다.
이 저승 넘나드는/ 장군봉은 보았을까// 죽어서 꽃을 피운/ 이차돈의 푸른 話頭// 서라벌 長天을 누빈// 새벽달은 보았을까.// 무시로 범람하는/ 강물을 이끄시며// 무지개 둘러놓고/ 어루만진 빈 하늘을// 빛부신 연꽃을 들고/ 날마다 환생한다.
-「이차돈의 江」 전문
새야, 무등산 새야/ 숨어 우는 무등 새야// 총칼 앞에 무참히 진/ 망월동 넋을 불러// 울어서 일으킨 봄 한 철/ 저승까지 물든 초록.
-「무등산 새야」 전문
밀려오는 물굽이를/ 대패질로 깎아 내며// 피울음 울지 말고/ 갈매기나 뛰울 것을// “우리 님 지키오리다”/ 마주 섰는 금강문.
-「독도」 전문
종 소리 받아 안으면/ 나도 한 자락 강으로 흘러// 산수유, 목련, 철쭉꽃/ 소신 공양 하는 이밤// 오십년 저편의 하늘이/ 쪽빛 입고 내리신다.
-「봄날, 直指寺에서」 전문
산이 가로막으면/ 높이 날아 산 오르고// 짖어대는 밤바다를/ 너울너울 건넌다// 때로는 곤두박질한/ 천 길 벼랑도 있었다.// 햇살 한 잎 따물고/ 묵화밭에 깃 내리면// 욕망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북새판이야// 찰나에 사라져 버릴/ 요지경 속 아니던가.// 노래여, 눕지를 말고/ 무쇠처럼 울 일이다// 피 뱉으며, 혼절하며/ 잠긴 목청 다 틔우며// 움츠린 산빛을 열고// 강물 흘릴 일이다.
-「노래여, 눕지를 말고…」 전문
휘영청 사철을 넘는 풍류장이 한량이라.// 꽃소식 들 때마다 구름 한 자락 잡아 타고 三春을 다 놀고는 오뉴월 불볕 속을 가랑이 껑충대며 흰웃음 뿌려대다가 저만치 소슬바람이 대금을 불어 흩는 날은 팔도강산 휘젓고 돌아칠거나. 그러다가 겨울 왕대밭에 들어 휘날리는 눈발되고 가슴 열두 골짜기에 불 당겨 활활활 타 버린들 또 어떠리// 어차피 한판 인생길/ 탈놀음이 아니던가.
-「취바리의 춤」 전문
시집 『이차돈의 江』에서는 강과 바다의 이미지가 많았다. 강을 직접 거론한 것은 「江을 위하여」,「임진강」, 「사이공 江」 등이 있다. 강을 통하여 깊은 역사와 인생을 통찰하는 의식들이 승화되어 있었다. 각 작품마다 선명한 이미지를 구현한 것은 수준 높은 시적 표현들이다. 「노래여, 눕지를 말고……」 에서는 물욕이나 권력의 압제 등 부정적 현실에 에 굴복하거나 물들지 않고 순수한 시인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섬세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어조들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시인의 성품이 잘 나타난 것이라 본다. 「취바리의 춤」은 사설시조이다. 달관한 인생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김남환의 시에 대한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4. 박옥금
남주(南州) 박옥금(朴玉金) 시인은 1927년 2월 26일에 청도 유천에서 태어나서 2005에 선종(善終)하였다. 조부님은 유천에 있는 박동철한의원이었다. 1944년 봄에 부산항 공립고등여학교(현 경남여고)를 졸업하여 밀양 산외초등학교 교사로 갔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현 영남대학에 입학하여 시작과 연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가 2학년 재학 중에 검정시험을 쳐서 안동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동생 박정수는 공학박사로 빙그레 사장 및 한국피혁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 『탑』 간행으로 등단하시어 그해 《낙강》 제6집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002년까지 빠짐없이 《낙강》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낙강에 보인 사랑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지금까지 추모 특집도 싣지 못한 것은 죄송한 일이다. 추모하면서 짧게나마 박옥금 시인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정표년 시인은 박옥금 시인에 대하여 이영도의 말을 전하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이영도 선생님은 생전에 박옥금 선생님을 “마음이 여리지만, 머리는 참 비상하다.”고 하셨다. 참 열심히 사셨고 자녀들도 잘 커 주어서 효자 효녀로 어머니께 각별했다는 흐뭇한 얘기도 들었다.
박 선생님은 아마 하시고자 했던 일은 다 하셨던 것으로 안다.(……)막상 박선생님의 운명 소식을 한참 뒤에 듣게 되어 작별 인사도 못 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소박하고 순박했던 모습대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빌면서 이 글을 두서없이 놓는다.
박옥금 시인은 시조도 빼어났지만 이영도 평전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 같은』(문학과 청년, 2001)은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평전의 명저이다. 최승범 시인은 “정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하나의 빛이며, 그 일생을 이처럼 가까이서 밀도 있게 다룬 책은 아직 없다.”라고 뒷표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발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후 25년이 되었지만 나에게는 하늘같은 스승이자, 고향을 함께 하고 어린 시절부터 자매처럼 지낸 분이기도 하다. 내가 늦었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로부터 받은 태산 같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 이외에도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되어 문학사에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제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다.
평전의 핵심은 세기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이영도에게 또 하나 슬픈 사연은 아무래도 내가 쓰는 이 평전의 하이라이트가 될, 한 남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헌헌장부인 대시인 청마 유치환(柳致環)과 정신적인 사랑을 하면서 그 동안 교환한 애정 편지가 무려 5,000통이 이른다니 가히 이것은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영도의 평가가 빛을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후. 이영도는 문단 생활 31년 유작집 합해서 시조집이 3권, 수필집이 7권 등 도합 11권이나 되니 양적으로는 이호우를 능가하고 질적으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짐에도 이영도는 이호우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여진다.
이영도의 평전을 쓰기 위하여 서울에서 이영도 생가를 방문한 후에 이영도와 그의 문학을 비유한 「구원의 달빛」이 있다.
바람도 비켜가리라 이 자리 새겨진 업적/ 이것은 구원에 흐를 당신의 달빛입니다
이득함 감당치 못해 비파강이 우옵내다.// 이수삼산(二水三山) 고향에는 이름만 남기시고/ 이 땅을 덮고도 남을 구원의 달빛 같은/ 생가 뜰 감나무에는 가을이 익고 있습니다.// 안채며 사랑채며 그 날의 꽃은 지고/ 천리 찾아온 발길 눈물에 젖으면서/ 휘영청 달빛을 보며 당신 음성을 듣습니다.
위 시에서 감나무는 어릴 때보던 그 감나무였다고 평전에서 밝히고 있다. 박옥금 시인은 이영도 선생과 고향이 같다. 어릴 적 그 댁에서 감꽃 줍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이영도를 만난 것은 일곱 살 때쯤이었다. 대궐 같은 그 댁에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꽃이 많이 떨어진 것을 보고 할머니를 졸랐다.(……) 누구보다도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달고, 수를 놓고 있던 이영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시절 나는 동무들과 예배당에 다니고 있으면서 예배당에서 들은 바 있는 천사가 그가 아닌가 하였다.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시절은 이영도의 말동무가 되지 못했다./ 그 후로는 나는 길이 나서 해마다 감꽃을 주우러 다녔는데 어느 날이었다. 혼자 그 솟을대문을 쥐새끼처럼 뚫고 들어가서 혼자 열심히 감꽃을 소쿠리에 주워 담고 있는데 미닫이를 반쯤 열어 놓고 수를 놓고 있던 이영도가 바늘에 색실을 달고 감나무 밑으로 내려 왔다. 감꽃을 바늘로 색실에 꿰어 꽃타래를 만들어서 내 목에 걸어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옥금이라고 했지, 참 예쁘구나. 이 많은 감꽃 주워서 다 뭐 하려고?”/ “먹기도 하고요, 말려서 먹기도 하고요, 동무들과 소꿉놀이도 해요.”/ “옥금, 예쁜 옥금이, 이제부터 나를 힝이(언니)라 해라.”/ 나는 다만 꿈을 꾸고 있는 듯 너무너무 감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영도는 막내라 동생도 없었지만 집안에 갇혀서 의외로 고독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된다.
박옥금 시인은 《낙강》 35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해는 이영도 평전을 낸 이듬해인 2002년이었다. 지금까지는 박옥금 시인에 대한 글이 이영도 선생의 평전과 인연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박옥금 시인과 이영도 선생은 그만큼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박옥금 시인은 시조집으로는 『탑』, 『한생 피는 뜻은』, 『생활의 서』, 『도농리 가는 길』, 『저 하늘 끝에서』, 『은하의 가을 소식』, 『가지산을 넘으며』, 에세이집 『여자의 강』, 편저 『한국여류시조문학전집』 외 1권이 있다. 1986년 한국시조문학상, 1887년 정운시조문학상, 1991년 노산문학상, 2000년 가람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박옥금 시인이 《낙강》에 발표한 마지막 해인 2002년을 준으로 5년을 거슬러 올라가 일 년에 한 편씩만 감상함으로써 마지막의 그의 작품 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금빛 옷 갈아입고 가을을 등에 지고/ 호접처럼 나래 펴고 작별을 고하는가/ 가슴에 지핀 불씨가 西天을 태우는데….
-「은행잎 떨어지니」 전문
꽃 한 송이 달지 못한/ 사철 푸른 병정처럼// 말 수 없는 고부간에/ 세모꼴 다리를 놓고// 솔솔히/ 구름을 밀고/ 처마에 거는 초승 달.
-「관음죽(觀音竹)」 전문
건져 올릴 수 없을까/ 제주도의 아들 같아서/ 산과 들 까만 돌멩이들/ 제주도 닮은 눈빛인데/ 해종일/ 밀고 밀리며/ 파도는 왜 우는가// 風浪에 동동 뜬/ 네 외로움 묻지 않겠다/ 물결과 싸우다가/ 물개가 된 섬 아이들이/ 갈매기/ 나래에 방울 다는/ 작은 학교 종소리
-「牛島」 전문
넘어야할 산이 있었고/ 건너야할 강이 있었다// 暴風雨 치는 날에는/ 슬피 눈물 뿌리던 나무// 그 山河 뒤돌아보니/ 하마 西山에 해 저무네.// 돌아갈 수 없는 땅에/ 눈처럼 내리는 悔恨// 어느 큰 손길이 있어/ 저 스크린 맑게 닦으랴// 내 세월 남은 세월의 짧아 고운 落照여.
-「歲月」 전문
비에 젖어 돌아가는/ 京釜高速道路/ 하늘은 나즉이 숙이고/ 山野는 꿈 속에 잠자고/ 내 車는/ 千里長江을/ 배가 되어 흐르네.// 이런 날 홀로 나그네/ 외로움도 오붓해라/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래며/ 생각의 우물을 판다/ 몇 길을 깊이 파야만 내 물줄기 솟을까// 살아온 날과 달리/ 車窓에 어룽진다/ 다시는 않으리라/ 人間에 집념 않으리라/ 기나긴 旅路를 딛고/ 다가서는 서울이여.
-「비오는 旅路」에서
마지막 발표에서는 위의 「은행잎 떨어지니」 외에도 「落葉」이 있어 제목만 봐도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예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에 대한 가슴은 여전히 뜨거운데 서천(西天)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마저 일어난다. 「관음죽」에서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고부간에 관음죽이 초승달을 처마에 걸어와 대화가 되도록 중간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소통이 필요함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우도」에서는 학교의 종소리가 갈매기 날개에 방울을 단다는 것은 변형묘사로서 참신한 이미지이다. “파도는 왜 싸우는가”에서 끝이 없이 밀여 왔다가 사라지는 파도를 통해 인생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은 한 편이 자서전이요 자화상이라 볼 수 있겠다. 「비오는 여로」에서는 “다시는 않으리라/ 人間에 집념 않으리라”의 인생을 달관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내가 잊을 수 없고 아직도 가끔 내 귀에 쟁쟁 울리는 이영도의 말씀”이라고 한다.
옥금아, 인간에게 집념하지 말라. 인간을 너무 사랑하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끝내는 배신을 당하기 마련이다. 고의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이 뜻대로 안 될 때는 일종의 배신이고, 사랑하는 남편도 일찍 죽으면 배신이라 할 수 있지. 친구는 말할 것도 없다. 그저 거리를 두고 덤덤히 사랑하여라. 배신이 없는 것은 시, 즉 예술과 신앙과 자연뿐이란다.
이상으로 <낙강>을 빛낸 여류시인들(Ⅰ)을 살펴보았다. 이영도, 정표년, 김남환, 박옥금 시인 네 명은 모두 인품이 훌륭하고 개성 있는 시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여류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면서 앞으로도 여류시인들을 발자취를 돌아볼 것이다. 특히 세상이 더욱 각박해지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대화가 단절되는 면이 있는 이 시대에 독자들은 감수성이 풍부한 여류시조를 통해서 내면의 치유와 기쁨을 얻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또한 <낙강> 동인들은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 “역사성은 현재를 통해 과거가 역사로서 살아 움직이게 하고, 역사를 통해 현재가 미래로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선배 회원님들의 작품을 통해서 후배들은 <낙강> 오랜 역사에 합류하게 된다. 특히 근년에 입회하신 회원님들께서 관심을 가진다면 가장 오래된 시조 동인인 <낙강>의 푸른 물을 함께 이루어서 끊임없이 흘러갈 것이다.
낙강을 빛낸 여류 시인들(Ⅱ)
김우연(시조시인·문학평론가)
5. 이일향
이일향(李一香) 시인은 193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1983년 <시조문학> 추천완료하였다. 선시집(選詩集)『목숨의 무늬』(1998)의「책머리에」에서 “돌아보면 세월의 높은 물마루가 내 삶을 송두리째 휩쓸어가던 날, 나는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때 내 손을 잡아준 시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구원이요 사랑이요 힘이요 새로운 삶의 지평선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이설주(李雪舟) 시인이며 그의 본명은 용수(龍壽)이다.
우리 집/ 뒤뜨락에/ 인왕산이 내려와서// 바위 끝에 취암(醉岩)이라/ 깊은 글자 새겨 놓고// 사시절/ 솔바람소리/ 나를 올려 놓습니다// 사직골/ 터를 잡아/ 산 높이로 집을 짓고// 비스듬 세월 기대/ 나를 살라 하시더니// 당신은/ 천만 리 먼 길// 훌쩍 떠나갔습니다// 밤 들면/ 떠오르는/ 우리 집 큰 등불을// 모란 꽃밭 닮았다고// 남들은 말하지만// 나는 이/ 불빛조차도/ 감내하기 힘듭니다// 밀물과/ 썰물 사이/ 밟아가는 아픈 상념// 아니다 소리치며// 발자국을 지워 봐도// 생각은/ 파도로 나가고/ 홀로 누운 해안선.
-밀물과 썰문 사이
위 작품은 1990년 중앙일보의 중앙시조 대상수상작이다. 선시집(選詩集)「나의 생애, 나의 문학」에서 “이 시에 무엇을 더 덧붙이랴. 취암은 남편의 아호인데 바로 우리 집 터가 조선조 영조 때 도정궁 터여서 영조가 친각(親刻)을 했다는 ‘취암(醉岩)’ 두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어 남편은 거기서 호를 딴 것이고 나는 그이가 가고 없는 사직동에 혼자 앉아서 세월의 밀물과 썰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낸 마음을 담은 것이 심사위원들이 가슴에 닿게 했었던 것 같다. 그 후 ‘윤동주 문학상’ ‘노산문학상’ 등을 받았지만 첫 번 수상한 ‘중상시조대상’의 감격이 아직도 나를 흔들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열리는/ 한 바다인데/ 풀리지는 않는 바다// 빨아도/ 얼룩만 지는/ 비릿한 내 육신이여// 오늘도/ 흰 구름 한 자락/ 하늘 위에 내다 건다.
-「구름 해법(解法)」 전문
제6시집『구름 解法』작품 해설에서 이근배님은 “이일향 시인의 사랑은 먼저 자연의 섭리에 눈을 뜬다. 그의 모성은 시적 감수성으로 공간적으로 넓게, 시간적으로 멀게 확대시키면서 그 위에 자신의 내면적 풍경을 밀착시켜 새로운 시적 의미를 낳고 있다.”라고 하였다.「구름 해법」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약된 단수 속에 무한히 넓은 공간을 만들면서 시인의 내면적 아픔을 하늘 위의 구름으로 표백시키는 기법은 자유시로서는 해내가 어려운 기술이다. 또한 거기에 값하는 이일향 시인의 대담한 자연과의 교감, 그 사랑의 열기는 자못 뜨겁다.”라고 하였다.
내 숨결 불붙여 물면/ 이지러져 아픈 거울 속// 타다가 남은 밤이/ 생각 속엔 재가 된다// 옷걸이/ 걸어 둔 그리움/ 떨쳐 입고/ 어디로 갈거나// 삶의 생채길랑/ 연기로나 가려 두고// 한 사람 있고 없는 일/ 온누리의 흐느낌이여// 살아 온/ 덧없는 이야기/ 등불 너머/ 가물거린다
-「타다가 남은 밤」
시집 해설에서 이근배님은 “절실하다. 몸으로 느끼지 않고, 생각으로 태우지 않고는 이토록 아픈 말들이 입밖으로 나올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낱말이 들어 있지 않으나 사랑이 저절로 배어 나오고, ‘외로움’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도 외로움이 파문지며 밀려온다.(……) 특히 ‘한 사람 있고 없는 일’이라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죽음과 삶의 나뉨, 사랑의 있고 없음을 이렇듯 평이한 말로 풀어 쓰는 듯하며 긴장감을 주는 어법은 이일향 시인이 혼자 해낸 것이다. 저 조선조의 내방가사를 쓰던 규수시인들도 이별, 고독 따위를 노래하면서 ‘한 사람 있고 없는 일’이라는 운치 있는 말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라고 하였다.
시집,『그곳에서도』(2000) 서시에 “시가 아니었으면/ 나 어찌 살았을까/ 사랑하는 이 보내고/ 눈보라치는 강 언덕에 서던/ 그 날// 시가 아니었으면/ 나 무엇으로 슬픔을 달랬을까// 젖 물려 키운 아들/ 어이없이 땅에 묻고/ 쏟아지던 그 통곡을// 시가 있어/ 긴 밤도 쓸어 넘기고/ 피는 꽃 지는 달도 보는/ 오늘이 있어라// 나 살고 있어라.”라고 노래하였다.
「나의 생애, 나의 문학」에서 지금 돌이켜 보면 남편을 여의고 죽은 나무가 되었던 나를 다시 꽃피우게 해준 것이 바로 시였고 정완영 선생이셨다.”라고 한 말이 쟁쟁하다. 그런데 43세의 한창인 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 속에서도 시가 있어 “나 살고 있어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선시집(選詩集), 『목숨의 무늬 』(1998)에 구상 시인의 시조로 쓴 축시가 있다.
샛별의 동산에선/ 함박꽃 각시더니/ 어느덧 가을 하늘/ 외기러기 마님 되어/애틋한 회포와 정한(情恨)/ 시조에다 붙였네// 신명도 열기 가셔/ 난향(蘭香)처럼 그윽하고/ 시름도 백운(白雲)인 양/ 드맑게만 바래져서/ 마음 속 안 뜨락까지/구석 구석 정갈해// 시(詩) 속의 속절없는/ 그리움과 목마름도/ 영원의 나라에선/ 어김없이 채우리니/ 그 노래 목숨의 가락/ 다 기울여 부르리.
구상,「일향송(一香頌)」전문
제자의 시조집에 자유시인 구상 시인이 축시로 쓴 시조 작품도 눈길을 끌고 있다. 시인에게 시는 목숨줄이었고 부활의 축복이었다. 세속의 부귀공명을 다 갖추었더라도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먼저 보냈을 때의 절망과 고통과 고독은 그 누구보다 크고 깊었으리라. 그러나 시가 있어 영혼의 음악을 절절히 풀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일향 시인의 삶과 시인의 시들은 절망적 상황을 맞이한 독자들에게 부활과 희망을 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6. 정위진
정위진(鄭渭鎭) 시인은 1924년 경북 상주 우산(愚山) 출생이다. 우산(愚山)은 유성룡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후에 이 고장에 들어와 여생을 보낸 곳이며 그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정위진 시인은 선비의 후손으로 경북여자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시조를 통하여 그 인품이 드러나고 있다. 낙강(洛江) 총회 때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여류시인들과 함께 서울에서 빠짐없이 참석하셨다. 매사에 빈틈없이 완벽을 추구하시는 모습은 흰 모시같은 정결한 여인임을 느끼게 하였다.
1984년《시조문학》에 천료하였으며 일곱 권의 시조집을 발간하였다. 그 중에서 다섯 번째 시조집인『아자창과 半香』(1998)과 여섯 번째 시조집인『어제바람』, 일곱 번째 시조집인『입상立像을 위하여』(2006) 에 실린 작품을 통하여 일찍부터 시조를 사랑한 시인의 시조사랑을 기리고자 한다. 물질숭배의 이 시대에 한류가 경제적인 효과를 낳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한류는 정신 치유와 진정한 행복의 길에 가장 효과적인 시조를 통한 인간성 회복에 있기 때문이다.
뙤약볕을 견디다 못해/ 검푸르게 멍들고도/ 나무는 大乘을 배워/ 짙은 그늘 드리우고/ 그 가지/ 입풀무 불어/ 남의 땀을 씻어준다.// 매미는 짧은 생애를/ 한탄으로 지새우며/ 째지는 울음소리가/ 더위 한결 보태주고/ 無爲를 마감하는 날/ 小乘 小乘 흐느낀다.
-5시조집에서,「참선 그리고 나무」전문
퇴약볕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늘로써 남에게 베푸는 나무와 짧은 생애 동안 욕망을 다 채우지 못해 한탄으로 보낸다는 매미와의 대조를 시켰다. 매미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만 하는 평범한 우리 인간들을 비유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분열을 일삼는 것도 물질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물리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나무 그늘처럼 나와 남이 함께 공존할 때, 즉 대승의 정신을 발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작품이다.
모과 한 개 받아 들면/ 밝은 기운 모여든다./ 금빛 붕어 뻥긋뻥긋/ 몸으로 뱉는 자작시/ 가을은/ 제 철이라서/ 제 향으로 익는 하늘.// 생모시 깨끼옷 차림/ 서늘한 매무새로/ 어느 댁 별당에 앉은/ 향그러운 규수였을라/ 전생의/ 수련 핀 연못 가/ 누런 달빛 그리우리.
-제6시조집에서,「모과」전문
제6시조집 해설에서도 평론가 김삼주는 “정위진의 시조 방법론에서 이 불교적 사유가 시적 상상력의 한 근저를 이루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불교적 상상력이 정위진 시인이 꾸준히 추구하는 시 세계의 한 축임을 알 수 있다.
모과는 →‘금빛 붕어’→‘향그러운 규수’ →‘누런 달빛’으로 확장은유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과의 밝은 기운은 금빛 붕어의 자작시가 되고, 제 향으로 가득한 하늘이 되며, 서늘한 매무새로 별당에 앉은 향그러운 규수가 된다. 그것은 전생에서 수련화 핀 연못가에서 ‘누런 달빛’처럼 빛나던 모과에서 윤회한 것이며 열반의 세계에 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과 겹쳐지는 가을에, 티없이 맑은 하늘 아래 향기를 뿜어내는 모과야말로 해탈을 한 모습이며 인간이 걸어가야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질 추구에만 매달리다가 늙는다면 얼마나 추한 모습일까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여름 태풍의 눈/ 모진 성화 다 떨치고/ 두 손을 불끈 쥐고/ 조국을 지켜선 너/ 그 한번 울려면 와 바라/ 눈망울을 굴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솟는/ 뭍을 향한 그리움이/ 밤잠을 앗아가도/ 아침해를 떠올리고/ 임진란/ 거북선인 양/ 의연하게 지켜선 너.
-제6시조집에서,「독도」전문
일본이 독도 망언은 갈수록 심해가고 있다. 정위진 시인은 ‘독도’를 ‘임진란 거북선’으로 비유하면서 어떤 도발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토 앞에 우리가 분열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상화 시인은 카프 활동을 그만둔 것은 공산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의 근본적인 원인인 일제에 대항하기보다 조선시대 양반층과 권력자들의 횡포로 수탈당하여 자신들이 가난해졌다고 적을 양반과 권력자들로 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경리 소설『토지』에도 이와 같은 모습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남갈등으로 분열시키는 자들은 대기업과 부자들을 적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배를 더 채우고자 한다. 자신의 패거리가 아니면 ‘친일파’로 몰아세운다. 남한의 암덩어리들은 그러한 이념을 민주화로 위장하여 왔을 뿐이다. 성자 ‘카를 힐티’도 공산주의자들은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때 독도도 지킬 것이다.
정위진 시인은 국내여행은 물론 세계여행을 많이 한 시인이다. 많은 여행시조들을 남겼다.
배낭 하나 어깨에 메고/ 이골 저골 여행하듯/ 이생으로 건너와서/ 후생으로 가는 일도/ 그렇게/ 훌쩍 뛰어넘어/ 손흔들 듯 가고 싶다.// 마음의 배낭에다/ 강은 접어 아래에 싣고/ 새소리 송뢰소리/ 설악 지리산도 얹어/ 높낮은 파고의 이랑/ 노을 깔며 가고 싶다.// 고운 詩는 갈피갈피/ 책속에 담아 넣고/ 精일랑은 항아리에/ 뚜껑 닫아 간진한 채/ 내 생애/ 못다한 詩句/ 九泉에 가 읊고 싶다.
-제5시조집에서, 「九泉 갈 때에」전문
“내 생애/ 못다한 시구/ 구천에 가 읊고 싶다.”는 것은 정위진 시인이 얼마나 시조를 사랑한 것인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짙은 잎새들 사이로/ 반짝이며 쏟아지는// 보석 같은 햇살을 받으면/ 천년千年 한恨도 녹을 듯하고// 바람도/ 한 세상 맺은/ 매듭 풀고 가라 한다.
-제7시조집에서, 「무제無題· 1」전문
정위진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집을 보낼 때도 ‘나선(那善)’이라는 법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리스계의 미란다왕에게 깨우침을 준 ‘나선 비구’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한마디 작은 말에도 상처가 오래 남는 법이다. “보석 같은 햇살을 받으면/ 천년 한도 녹을 듯하고”란 말속에는 이유를 따질 것 없이 내가 잘못했다면서 원한을 풀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법구경에 “실로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서는 원한을 풀 수 없는 것, 오직 용서로서만 그것을 풀 수 있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
7. 배위홍 시인
배위홍 시인은 1919년 12월 24일 경북 안동 예안에서 3남 5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88년 고희 기념으로 첫 시조집『江 가에서』, 희수 기념으로 두 번째 시조집 『조각보와 가을꽃』을 펴내셨다. 두 시조집은 시인의 자녀 육남매가 정성을 모아 발간한 책들이라 그 효성이 느껴진다. 부친 배영덕은 대구에서 도의원을 지냈으며 매우 개방적인 분이었으나, 시댁에는 완고한 편이었다고 한다. 1936년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남 5녀의 종가에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낙강 총회에 서울에서 먼 길 오실 때면 연꽃 같은 미소로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셨다.『조각보와 가을달』에 실린 작품과 해설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맏아들 양희재는 “우리 6남매 모두 짝지어 사람 구실 하도록 잘 키워 놓으셨고 슬하에 손자·손녀 열일곱에 증손까지 보셨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평론가 정신재는 해설에서 “시인은 실제로 동생, 아들,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이 넘는 권위 있는 교수, 박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무슨 교육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 저어면서 그저 ‘그저 교육만 시켰을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시인에게서 어머니다운 모성애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옥죄인 한 생애를/ 강물로나 풀어 놓고// 미움도 곱게 감쳐/ 조각보를 깁노라면// 우련히 배어나는 그리움/ 바늘 끝에 아려라// 삼가던 한숨일사/ 원도 여원 앙가슴에// 곱게 피운 인고의 꽃/ 代를 이은 지어미 像// 어느 날 환상의 무지개/ 깃을 치던 丹頂鶴// 군물 지핀 아랫목에/ 서리친 고독 잠재우고// 빗금간 기다림은/ 세월 속에 한을 물어/ 情인가 홀연히 열리는/ 아! 청정한 하늘이여.
-「조각보」전문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는 유교적 전통적인 여인상이 잘 나타나 있다. ‘옥죄인 한 생애’, ‘대를 이은 지어미 상’에는 종부로서 긴장하고 인내한 세월을 함축하고 있다.가고 싶던 대학에는 못 가고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들이 성장하여 다 떠나가니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어릴 때 품었던 문학의 꿈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환상의 무지개/ 깃을 치는 단정학”이라고 밝히고 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전통적인 여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했으나 밀려오는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이었다. 자녀들의 효성이 지극하여 남편마저 먼저 떠나보내신 어머니에게 5대양 6대주를 다 돌아다니도록 하시어 많은 기행시조를 남기셨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기다림과 그리움의 한은 시조를 통하여 승화시키고 있다. “情인가 홀연히 열리는/ 아! 청정한 하늘이여.”라는 말 속에는 시조야 말로 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이며 행복임을 노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생이/ 강물이라면/ 나는 홀로 떠가는 배// 한 구비 돌 적마다/ 세월 그도 잠기는데// 한 생애/ 해진 돛폭은/ 눈 감고도 물길 가네.
-「홀로 떠나가는 배」전문
인생이란 한 마디로 “홀로 떠나가는 배”라고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수 천 년 앞 세대 사람들도 느끼고, 또 젊은 사람들도 미래 언제가는 늙음이 찾아오면 느끼게 될 평범한 내용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도 없는 길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은 누구에겐가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참신해야만 감동이 주는 법은 아니다. 공기처럼 매우 크게 소중한 것은 평소에는 소중함을 깨닫지 못함과 같이 평범한 것일수록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법이다.
門 없는 약속의 門/ 완벽한 둥근테를// 한 몸으로 살자고/ 죽자살자 씌운 굴레// 닳아진/ 삶의 흠집 속/ 다시 뵈는 얼굴 하나.
-「가락지」전문
결혼 반지를 ‘문 없는 약속의 문’이라며 참신한 발상을 하고 있다. ‘완벽한 둥근테’란 말속에는 부부간의 무한한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말이다. 결혼이란 삶의 ‘굴레’가 됨은 분명하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인내하며 살아온 삶이 자녀들과 손자손녀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온 삶에서도 행복을 함께 함께 했던 임을 그리워하며 “다시 뵈는 얼굴 하나”라고 하였다.
신이 빚은 환상의 영역/ 드러난 신비를 보라// 감히 저 우람한 침묵을/ 뉘라 흔들어 깨우리// 말 잊는 어기찬 목숨/ 赤馬는 갈기 세운다// 억만년 거스른 原初/ 가물었네 콜로라도강// 묵직한 기도문처럼/ 강노을은 물이 들고// 불현 듯 소리개 한 마리/ 孤를 치는 저 적멸.
-「그랜드캐년」전문
그랜드캐년의 대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신이 빚은 환상의 영역”이라서 “저 우람한 침묵” 은 “孤를 치는 저 적멸”이라며 말을 잃고 침묵에 들게 된다. 인간은 대자연 앞에 진정 침묵을 느끼는 순간이 무아의 상태요 대자연과 합일되는 순간이리라.
8. 안을현 시인
안을현(安乙賢) 시인은 1925년 경남 의령 설뫼에서 태어났으며 마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산여고는 이화여고, 경기여고 다음으로 오래되었는데, 2남 4녀의 자녀교육과 봉사활동으로 2005년 제37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였다.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신 안호상 박사이며 장녀로 태어났으며 남동생이 있다. 모친 이화경 여사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쓴 수기『운명에 살았노라』(1984년)의 집필을 마쳤다. 장녀인 안을현 시인의 2008년 유고를 정리하여 이 책을 펴내고자 다음과 같은 서문을 쓰고 있다. “이 수기는 이 땅에 개화의 물길이 밀어닥친 20세기 초에 태어나 80여 년의 생애를 남모르는 비애와 외로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반영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 시대를 살아온 여인들이 흔히 겪어야만 했던 여성수난사(女性受難史)의 한 단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꼭 밝혀 두고 싶은 것은 고인이 손수 적으신 삶의 흔적을 그냥 묻어두기에는 그 정성이 너무 아깝고 그 삶이 하도 애달파 활자화하여 남기고자 할 뿐, 결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누를 끼칠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수기는 안을현 시인이 그토록 발간하고 싶어하였으나 남동생이 혹시 아버지께 누가 될까 봐 반대하여 펴내지 못하고 원본과 복사본 1부만 세상에 남게 되었다. 이 사실은 양계향 시조시인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 책을 보고 싶어하는 필자에게 양계향 시인이 구해줘서『운명에 살았노라』를 정독해보았다. 나 역시 세상에 알리고 싶은 책이라 여겨진다. 이화경 여사께서 창작하신 내방가사 2편을 싣고 있다. 한 작품은 「회한가(悔恨歌)」라는 제목이 있으며, 한 작품은 “을현아!/ 박덕한 네 어미 회혼 육십 일생동안 너의 남매를 두고”로 시작하였는데, ‘누가 알아주고 살펴주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 내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질 듯해서였다.’라며 가사를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안을현 시인은 양계향 시인의 외팔촌 언니이다. 양계향 시인의 모친 안경한(安慶漢)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의 생가 마을인 의령 설뫼이다.
안을현 시인은 낙강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91년 시조집『눈꽃으로 피려나』, 1996년 시조집 『달빛 배인 쪽물치마』를 펴내시었다. 서울에서 멀리 대구까지 총회에 참석하실 때에 언제나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두 번째 시조집 『달빛 매인 쪽물 치마』에 실린 작품 몇 편을 돌아보면서 낙강에도 열성적이던 여류 시조시인들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 한다.
“너 모르지 나는 다 안다/ 어젯밤 오뱅이 할배// 제사에 맥산 할배가/ 축지법 써서 다녀 가신 일”// 귓속말/ 지각 별도 뒷전/ 순사 올까 두렵던 길
-「설뫼 앞길」전문
‘오뱅이’이는 택호이며, “오뱅이 할배”는 맥산 할배의 아버님이며, 맥산 할배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백산 안희제 족조(族祖)라고 밝히고 있다. 안을현 시인이라면 ‘설뫼마을’이 고향이며, 외가는 밀양군 부복면 퇴로리이며 그곳에서 태어났다. 여러 작품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성장 과정에서 수시로 순사와 고등계 형사들이 들락거리며 감시당하던 때의 불안감이 나타나 있다.
애매한 들볶임에도/ 당돌한 따짐에도/ 얼굴 붉히지 않고/ 음성 높이지 않고/ 고요히 흘러만 가는/ 물처럼만 살고 싶다.// 둥근 말(斗) 모난 되(升)/ 감쪽같이 어우러져/ 낮은 곳 먼저 찾아/ 높은 자리 물려 줘도/ 뽐냄도 비굴함도 없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 바위도 뚫어내는/ 빗줄기 곧은 마음/ 맛, 빛, 내음에다/ 얼굴마저 있든 없든/ 꼬투리 잡힐 일 없는/ 빗물처럼 살고 싶다.
-「물처럼 살고 싶다」전문
‘고요히 흘러가는 물’처럼, ‘뽐냄도 비굴함도 없는 물’처럼, ‘고투리 잡힐 일 없는 빗물’처럼 살고 싶다는 것은 시인의 자연 순리의 인품을 느끼게 한다.
솜을 타나 하얀 피륙/ 삶는 김 하늘 치솟네/ 이 지상 개와 소까지/ 천년 입고도 또 남겠다/ 블루진 장만 하느라/ 물들이는 염색 공장// 절반만 뚝 잘라 준다고/ 놉이라도 산다면/ 단번에 뛰어들거야/ 고두리 뼈 부러져도 좋다/ 돌아선 님도 돌아오리라/ 그만한 힘 지녔다면// 캐나다 언덕 브라운 우비/ 미국 언덕 예로운 레인코트/ 임진강 양쪽 기슭/ 그리움의 붓꽃 피워/ 안개의 숙녀호를 타고/ 섞바뀌고 싶어라
-「나이아가라 폭포」전문
‘나이가가라 폭포’를 기행하고 남긴 시조들이 많다. 그런데 이 작품의 첫 수와 둘째 수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폭포의 웅장함을 조화롭게 이미지화하였다. 기행시조로서 절창이라 본다. “안개의 숙녀호”는 레인코트를 입고 용소까지 들어가는 배 이름이라고 한다.
신생아실 온실 모종/ 소록 소록 자라는 환희/ 봄비는 온 종일/ 자비를 베풀고 있고/ 산철쭉 합창을 멈추고/ 꽃샘 앞에 떨고 있다.// 애틋이 숨 쉬는 생명/ 눈에 넣어 아플까/ 핏덩이 갓난 아기/ 손끝 닿아 지워질라/ 가슴에 메이는 사랑/ 눈물보다 더 맑다.// 꿈인 너는 희망이리/ 기쁨인 너는 웃음이리/ 눈 귀 입 가뭇 닫은/ 빠알간 손가락 발가락/ 꽃삽은 기름진 자리/ 다독이며 뉘인다.
-「꽃삽」 전문
출생한 아기를 꽃삽으로 옮긴 어린 화초 모종에 비유한 것이 참신하다. 인간의 생명이 꽃처럼 아름다우며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어머니의 심정을 이처럼 잘 공감하게 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독창성과 보편성을 획득한 작품으로 출산율이 갈수록 저조한 이 시대에 더욱 감동을 주고 있는 명작이다.
이상으로《낙강》53호(2020) 낙강을 빛낸 여류 시인들(Ⅰ)에서는 이영도, 정표년, 김남환, 박옥금 시인을 살펴보았으며, 이 번호에서는 이일향, 정위진, 배위홍, 안을현 시인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여류시인들이《낙강》을 빛낸 여러 여류시조시인들이 있다. 그러나 몇 명이라도 살펴봄으로써《낙강》을 사랑하던 시인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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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낙강(洛江)은 정말 귀한 책이군요
주옥같은 분들이 그곳에 다 계셨었네요
이 작은 글로 표현은 안 되겠지만…….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이유진 선생님께는 낙강 발송이 안 되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