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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와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로 불린다. 우치무라는 서양에서 수입된 교파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기독교만이 일본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을 구원한 기독교가 루터에게서 나오고, 영국을 구원한 기독교가 존 녹스와 밀턴에게서 나왔듯이, 일본을 구원할 기독교는 일본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중심점이 하나뿐인 ‘원’이 아니라, 예수와 일본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라고 주장했다. 우치무라의 주장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새 계명을 자신의 역사적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예수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제1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제2계명을 결합한 것이다.
우치무라의 정신은 김교신과 5명의 신앙 동지가 창간한 『성서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성서조선』 창간호(1927년 7월)에서 김교신은 말한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라고. 1935년 4월 김교신은 다시 강조한다. 그는 「성서조선의 뜻」이란 글에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이것이 우리의 『성서조선』”이라고 밝혔다. 스승 우치무라가 기독교의 진리로써 일본을 사랑했듯이, 김교신도 그리스도의 진리로써 조선을 사랑했다.
우치무라의 아버지
우치무라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일본 사회의 격변기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사회구조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수백 년간 분산되어 있던 권력이 중앙 정부에 집중되었다. 구체제의 특권층이었던 사무라이 계급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치무라는 이러한 격변기에 1861년 3월 23일 조슈(上州) 타카사키번(高崎藩)의 무사 우치무라 요시유키(內村宣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다카사키번의 번주 오오코우치 테루나가(大河內輝聲) 휘하의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무사였다.
유신 정부는 1871년 기존의 200여 개 번(藩)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부현제(府縣制)를 실시한다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조서를 공포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 250년간 일본을 유지해오던 막번체제(幕藩體制)가 해체되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전제적 중앙집권 체제로 개편되었다. 메이지유신에 반대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佐幕派)에 속했던 다카사키번은 완전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우치무라의 아버지 요시유키는 번주를 따라 실각하고 은퇴했다. 자신의 주군과 운명을 함께 한 것이다. 막부 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40살의 젊은 나이에 그의 경력은 끝을 보고 말았다. 당시 우치무라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후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우치무라가 아직 10대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의존하기 시작해 그가 16살 때 가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아버지에 대한 우치무라의 감정은 복잡했다. 그는 아버지의 능력과 무사의 자존심, 그리고 유학의 스승으로서의 자질, 윤리적 청렴함 등은 존경했으나, 청년기에 들어 부친에 대한 신뢰는 흔들려, 아버지의 인생을 실패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물려준 정신적 유산도 적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향리의 저명한 유학자였다. 어린 우치무라에게 아버지의 유교적 분위기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부친 요시유키는 혈연의 부친에 그치지 않고 유학의 스승이기도 했다. 우치무라의 인간과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그의 무사의 아들, 즉 ‘사족(士族)’으로서의 자긍심과 유교적 교양을 무시해선 안 된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실패 체험을 기반으로 우치무라에게 성공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반면교사의 역할도 했다. 서양의 영향 앞에서 무력했던 그의 경험은 서양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가족과 국가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열쇠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부친은 어린 우치무라에게 외국의 기술, 특히 외국어를 통해 입신출세의 길을 걷도록 종용했다.
우치무라가 처음 영어를 배운 것은 다카사키에 있을 때였다. 다카사키번이 설립한 영어학교에 들어가서 도쿄에서 초빙된 고이즈미(小泉) 선생에게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 당시 나이는 11살이었다. 옛 질서와 함께 부친이 몰락하는 것을 본 소년 우치무라가 유학 대신 다음 세대의 학문으로서 영어에 힘을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쿄영어학교 시절
1873년에 12살 소년 우치무라는 혼자 상경해서 도쿄 아리마사학교(有馬私學校)에 입학했다. 우치무라는 여기를 발판으로 해서 이듬해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했다. 13살 때였다. 그가 의식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오래된 성스러운 세계의 너무나도 비참한 말로를 목격한 우치무라는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세계를 영어의 세계에서 찾았다. 도쿄외국어학교는 1875년에는 영어과가 독립해서 도쿄영어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1877년 도쿄제국대학 예비학교인 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우치무라는 일본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어학 훈련을 받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도쿄영어학교 재학 중 병으로 1년 남짓 휴학을 했다. 병명은 늑막염 또는 결핵이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단신 상경한 소년이 1년 남짓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 일은 우치무라가 삶과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게 했음이 분명하다. 신병으로 1년을 늦춘 뒤 복학한 도쿄영어학교에서 그는 훗날 일본의 지도자가 될 두 소년을 동급생으로 만난다. 저명한 식민정책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와 식물학자로 유명한 미야베 긴고(宮部金吾, 1860-1951)였다. 이들은 우치무라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세 사람은 동급생이 된 데 그치지 않고 하루 걸러서 만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세 사람이 만나면 대화는 반드시 영어로 하고, 어쩌다 일본어가 튀어나오면 벌금을 내야만 했다.
도쿄영어학교는 1877년 4월에 도쿄제국대학 예비학교로 개칭되었고, 그곳을 수료하면 도쿄대학에 진학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우치무라를 비롯한 많은 학생이 삿포로(札幌) 농학교에 진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동으로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에 갈 길이 열리는데 우치무라 등은 왜 하필이면 북쪽 끝에 있는 삿포로에서 공부하기를 원했을까. 농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과 고액의 월급을 제안했다. 우치무라는 특히 월급에 강하게 끌렸다. 가장이 되었기에 경제적 책임감이 무거웠다. 우치무라의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 미야게 긴고도 함께 진학을 결심했다. 이들 모두가 가난한 사무라이 가계의 출신으로 장학금에 의해 생활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 우치무라는 “선생님은 왜 제국대학에 진학하지 않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돈이 없어서였지”라고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삿포로농학교라고 하면 그저 수많은 실업학교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도쿄대학과 어깨를 겨루는 소수 관립의 고등교육기관의 하나였다. 1877년 8월 우치무라와 함께 12명의 학생이 삿포로농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바닷길로 삿포로로 간 우치무라의 가슴속에는 입신출세해서 국가를 위해 쓸모있는 인재가 되려는 열정이 훨훨 타고 있었을 것이다.
도쿄대학 예비학교 재학 중에 우치무라가 삿포로농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생애의 대전환점임이 틀림없다. 그 전에 병으로 휴학해야 했고, 나이 어린 소년기에 경제적 이유로 진로 변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우치무라는 인생에서의 질병과 가난의 문제를 일찍이 몸소 경험했다.
삿포로농학교
삿포로농학교는 1876년 농학 전문 교육기관으로 신설되어,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 학장 클라크(William Smith Clark)를 교무주임으로 초빙하여 삿포로농학교로 개교했다. 오늘날 클라크의 이름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패전 직후 일본 관료들이 클라크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갔을 때 그의 묘지를 찾느라 고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모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크게 이바지했고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클라크는 당시 미국과 독일에서 생물학, 광물학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적 교육을 받은 뛰어난 학자였다. 큰 키에 위엄이 있었으며,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학교 교육에 훌륭한 식견을 가진 교육가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애머스트대학(Amherst College) 학생 시절 신앙부흥 운동의 한가운데서 깊은 종교적 회심을 하여, 뉴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과 윤리를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도 아래 행해진 삿포로농학교의 교육은 서양적 에토스의 철저한 주입이었다. 후일 졸업생들이 ‘세뇌’라고 부를 정도로 종래의 일본 사회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교육 내용이었다.
우치무라는 이 학교가 창설된 이듬해인 1877년 8월 친구 니토베와 미야베 그리고 다른 일행과 함께 삿포로에 들어왔다. 당시 삿포로는 인구 약 2,000여 명의 한촌에 불과했다. 학교 인근에는 끝없는 삼림이 펼쳐져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학교는 더욱더 작은 사회를 구성했다. 학생들은 학교 밖의 세계와는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관계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치무라 일행은 양복을 지급받고 식사도 서양식으로 하는 등 의식주 전부가 서양풍이었다. 우치무라 주변은 이를테면 서양 사회의 한 부분을 뽑아다가 일본의 삿포로에 옮겨놓은 격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외국인 교사의 수업과 독서를 통해 모든 것을 영어로 배웠다. 영어 독서와 외국인 교사와의 회화는 모두 고급 영어 습득에 유용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작은 사회 이외의 현실에 접촉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국어에 의지해야 하는 긴장감을 동반한 일종의 정신적 온실에서 생활했다. 만년의 미야베는 “우리는 마음 깊이에 있는 감정과 사고는 영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1877년 4월 16일, 일본 정부와의 계약기간이 끝나서 클라크는 마침내 삿포로를 떠나게 되었다. 말을 타고 시마마쓰(島松)까지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 다음, 다시 말에 올라 “청년이여, 웅지를 품어라!(Boys, be ambitious!)”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클라크가 하얀 눈길을 달려간 이야기는 이제 삿포로농학교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우치무라는 클라크가 떠난 지 넉 달 뒤에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했다.
기독교 수용
삿포로농학교가 우치무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적 신념이었다. 클라크는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적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천해 보였다. 그로 인해 학교 내의 작은 서양 세계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극기심을 발휘하여 그것을 고창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클라크가 떠난 뒤에도 다른 외국인 교사들은 같은 영향력을 미쳤다. 우치무라는 이런 학교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근대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기존 일본 사회의 혈연적·지연적 공동체에 의한 규제였다. 따라서 자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집’과 ‘마을’을 떠나 도시에 나와 살던 젊은이들이었다. 삿포로농학교 학생들도 공동체의 규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풍 일색으로 채색된 공간에서 격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1기 입학생 전원은 이미 기독교 신자였고, 우치무라의 친구인 니토베와 미나베도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우치무라는 두 사람과의 우정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고립된 특수한 공간에서 우치무라의 기독교 입신은 ‘고독’을 보완하는 길이었다. 그 결과 우치무라는 또래들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우치무라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아직 각별한 회심(回心)을 수반한 입신(入信)은 아니었다.
1879년 6월 2일 우치무라는 7명의 동기생과 함께 감리교회 선교사 해리스(C. M. Harris)에게 세례를 받았다. 우치무라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 날을 ‘루비콘강을 건너간 그 날’이라고 불렀다. 세례를 받은 후 세 사람은 세례명을 골랐다. 니토베는 바울, 미야베는 프란시스, 우치무라는 요나단을 선택했다. 우치무라는 『구약성서』「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에 감동하여 이 이름을 골랐다고 했다. 기독교 입신에 즈음한 우치무라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혈연관계보다 더 친밀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정과 교제를 갈망했다.
우치무라를 비롯한 제2기생은 그들이 세례받은 해리스가 속한 감리교회에 입회했다. 우치무라는 해리스의 교파와 다른 교파의 차이점을 잘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그 교회에 입회했다. 그가 선량한 인물이니 그 교회도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7인 형제의 작은 교회’를 만들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유롭게 그리고 자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했다. 이 작은 교회는 제도상 완전히 민주적으로, 7인의 회원은 모두 권위와 의무에서 평등했다. 그들은 주 3회 모임을 가졌다. 7인 중 당번 한 사람이 그날은 목사이고 사제이고 교사였다. 그들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안식일을 준수했고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