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을 넘긴 어느 고명하신 수필가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고 했다. 역시 팔십을 넘긴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까. 그것도 긴 세월 동안 쉬다가 갑자기 다시 쓰게 된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지 않을까.
그즈음 건망증이 심했다. 핸드폰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 헤매고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아리송했다. 특히 그날은 셋째 손주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 치매일 수도….’ 덜컥 겁이 났다. 본인이 망가지는 건 물론이고 가족들 삶까지도 엉망으로 만들기에 암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질병보다 무섭다지 않는가.
사업 성공으로 복된 노후를 누리던 지인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온 치매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증상이 심해져 자식들 얼굴도 몰라보는가 하면 고래고래 소란을 피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식들 효심으로도 더는 감내할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르자 부랴부랴 불귀(不歸)의 섬, 요양원으로 등 떠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지 않는가. 호호탕탕 좌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그분의 환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치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보건소로 달려갔다. 치매라고 할 수 없지만 고령일 경우 건망증이 바로 치매로 이어질 수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시라, 가 검사 결과였다. 당장 그날 오후 서재로 들어가 아주 오랜만에 컴퓨터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외국어 공부나 천자문 필사 같은 뇌를 집중시키는 정신노동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보건소 직원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기억력이 나보다 좋은 건 성경 필사를 꾸준히 해 온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치매 예방을 위해 팔 년여 만에 다시 글을 쓴다. 지금도 독수리 두 마리가 톡톡 자판을 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글쓰기 얘기를 펼치기에 앞서 그 긴 세월 동안 어째서 글을 쓰지 못했는지를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늦깎이로 등단해 겨우 수필집 한 권을 내고는 어느 문예지의 발행인을 맡으면서 글쓰기의 맥이 끊어졌다.
발행인이라는 직책이 어영부영 회전의자만 돌리고 있으면 되는 그런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다. 봄철 농사꾼처럼 눈, 코 뜰새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할 만큼 일이 많았다. 언감생심, 그 와중에 어떻게 글쓰기를 한단 말인가.
4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 셋째더러 서재 컴퓨터 모니터를 큰 걸로 바꾸고 소형 에어컨도 설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출사표였다. 드디어 발행인 졸업, 개선장군처럼 허리 꼿꼿이 세우고 가슴 내밀며 서재로 들어갔다.
그새 메모해 두었던 열 몇 가지 소재 중 제일 쉽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골라 임시 제목을 붙였다. 제목 아래 메일주소와 이름을 떡하니 입력하고 보니 벌써 어엿한 한 편의 수필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웬걸, 목에 힘주고 기세 좋게 자판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답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글이 풀리지 않았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기를 수십 번,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소재를 갖고 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또, 또 다른 소재를 줄줄이 갖다 대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기계를 오랫동안 사용치 않으면 녹이 슬어 못쓰게 되듯 글 쓰는 뇌도 오랫동안 방치하면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마는 걸까.
피를 말리는 듯한 안간힘의 나날들, 그러기를 석 달여가 지났지만 단 한 편의 글도 내어놓지 못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책에서 오는 쓰라린 패배감, 명치끝으로 묵직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불을 둘러쓰고 며칠을 보냈다. 한데, 몸은 스스로 병을 고치는 치유력을 갖고 있다던가. 어느새 뇌가 상처 입은 내 마음을 치유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네가 명상 중에 무릎을 쳤던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려고 애쓰는 자의 삶에는 많은 괴로움이 따른다.’라는 어느 선사의 경구를 상기해 보면 어떨까. 애면글면 글쓰기에 매달림은 지금 위치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려 함이 아닌가. 아서라! 그 나이에 수필집 한 권이면 장원 아닌가. 더 높아지려 입술 깨물지 말고 그냥 지금의 위치에서 복되게 살면 안 될까.’
백번 옳다 싶었다. 이튿날 새벽같이 집 뒤 정발산에 오르고 그새 발길이 뜸했던 체력단련센터에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친구들과의 주말 둘레길 산행은 여전히 즐거웠고 야구 중계에 환호작약하니 절로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카톡 친구들과의 문자 수다도 재미가 쏠쏠했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이런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면서 받는 환영 박수도 싫지 않았다. 글 없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삶, 그러구러 또 4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치매 예방 글쓰기에는 뜻하지 않은 원군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코로나19’였다. 그 바이러스 군단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만백성을 일시에 ‘집콕’ 신세로 만들었다. 줄줄이 모임이 취소되고 특별히 누굴 만날 일도 없게 되었으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한아름이 넘는 풍성한 시간, 그건 하느님이 마음껏 글을 써 보라며 내게 내려주신 선물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바로 자판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4년 전의 쓰라린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우선 딱딱하게 굳어 있는 감성을 나긋나긋하게 그리고 말라버린 사유(思惟)의 샘에 찰랑찰랑 물이 고이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책 저책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 수필집 《내 마음속의 해와 달》도 읽었고 등단 이전부터 저장해 왔던 〈멋진 비유〉, 〈아름다운 고유어〉 노트도 정독했다. 특히 내 수필집을 읽을 때는 작품 하나하나마다 그 글을 쓸 당시의 정서에 젖어보려 무진 애를 쓰곤 했다. 그러기를 한 달여, 머릿속이 맑아지고 촉촉해진다는 느낌이 왔다. 조심조심 자판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단, 발표용이 아니고 치매 예방 용이니 너무 용쓰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다짐을 두고서였다. 그 다짐 때문인지 글이 의외로 잘 풀려나갔다. 여러 편을 썼다. 그중 괜찮다 싶은 한 편을 골라서 내 멘토이기도 한 어느 선배님께 보내드렸더니 조목조목 짚으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용기백배하여 쓰고 또 썼다. 특급열차처럼 속도도 빨랐다. 한 달에 한 편을 후딱 써낼 때도 있었다. 그새 여러 잡지에 이미 열 몇 편을 발표했고 발표 대기 작품도 여럿이다. 이대로 쭉 나가면 내후년 구순 때쯤에는 두 번째 수필집을 묶을 수도 있겠다 싶어, 결혼 날짜 헤아리는 총각처럼 설레는 마음이다.
[출처] 다시 글을 쓴다 / 강철수|작성자 장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