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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연습 아가타 투진스카
소설가, 시인, 전기 작가, 대학교수, 저널리스트이자 연극인이기도 한 아가타 투진스카는 현제 젊은 폴란드 문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한 사람이다. <슐츠의 제자들>(2001년), <싱어, 기억의 풍경>(2002년)을 출간 했다. 2006년 그라세 출판사에서<두려움의 가족사>를 펴냈다. 사랑하는 남자가, 함께 늙고 싶었던 남자가 죽을병에 걸렸다. 가차 없는 선고였다. 전조는 없었다. 우리를 지키려면 사랑을 말해야 했다. 우리는 싸우기로 했다. 같이 있기로 했다.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이국적으로 들리는, 예쁜 병명이었다. 글라이오믈래스토머 멀티폼, 다형성 신경 교아종, 뇌종양 주에서도 제일 흉포한 놈, 악성도 4도의 강력한 상대였다. 운에 매달려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단 몇 달 만에 사람을 죽인다는 병이었다. 전조는 없었다. 경고도 없었다.
시신경을 압박하는 종양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의사는 정확히 선택된 어휘를 써서 돌이킬 수 없는 진단을 내렸다.
우리는 14년의 생활을 나누어 가진 끝에 결혼식을 두 번 올렸다. 한 번은 휠체어에 앉은 신랑과, 또 한 번은 ‘후파’ 밑에서.
며칠 전 통화할 때 오른쪽 눈이 아프다고, 운전 중에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흘려들었다.
2005년 4월 15일 흰 옷을 입은 수술 팀이 당신의 머리를 열고 파헤칠 여섯 시간 동안 나는 뭘 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이집트와 인과 메소포타미아 인, 히브리 인은 물론 호메르 자신도 지성과 감성의 중추는 뇌(에케팔로스 egkephalos)가 아니라 심장이라고 믿었다.
최초로 뇌를 연구한 사람은 오리엔트 헬레니즘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두 의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로부터 20년 이상이 흐른 뒤의 일이다. 기원전 300년경 이집트 왕 프톨레메우스 1세가 그들 두 그리스 의사 중 칼레도니아의 헤로필로스를 시의侍醫로 맞아 들였다. 최초의 해부학자인 헤로필로스와 그 조수는 야심차게 해부학 연구에 몰두했다. 헤로필로스는 뇌, 소뇌, 뇌막, 뇌세포에 대한 기술을 남겼고, 신경이 척수와 뇌에 동시에 연결됐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관찰했다. 그는 영혼의 소재지를 뇌세포로 옮긴 것이다.
불가사리 발톱이 뇌의 섬세한 섬유를 움켜쥐고 있어 놈들을 종이 오리듯이 정교하게 잘라내기는 불가능하다. 그 일대에 메스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인간의 감각, 인내심, 상냥함이 훼손된다.
4월, 5월, 6월 나는 완전히 맥이 빠지고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를 먹이고 씻겼다.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옷을 갈아입히고 마실 것을 주고 달랬다. 나는 틈틈이 울었다. 그리고 할 일을 했다.
나는 이제 우리도 좀 편히 살자고 그를 설득했다. 돈 벌려고 그만 뛰어다니라고, 아이들 때문에 애 끓이는 것도 졸업하라고. 의무나 책임은 저만치 두라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라고, 나는 거듭 말했다. ~~~~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잃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실은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미 숱한 죽음을, 수복 불가능한 무수한 헤어짐을, 완전한 결별을 맛보았기에, 전부 빼앗길 순간이 오리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익숙해져서도 안 되고, 너무 많이 바라거나 너무 깊게 사랑해서도 안 된다. 빠르건 늦건 결국 다 빼앗길 테니까. 요컨대 시간이 문제였다.
4월 1일 만우절, 눈비가 내리고 기온은 2도, 헨릭은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안 보고 면도하는 연습을 한다. 만우절, 이게 전부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쪽 눈이 아팠던 것인데……. 눈보라 속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용감하게 운전했다. 내 마음은 충만감으로 가득해 불길한 예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날 밤은 둘 다 잠을 설쳤고 그는 이튿날 비행기로 돌아갔다.
병마의 세상, 병마의 대륙, 병마의 제국. 우리는 늘 거기서 생환했다. 나나 그 사람이나 병마의 세상에는 잠깐씩만 다녀왔다. 거긴 잠시 들르는 장소였다. 우린 항상 건강을 되찾았다. 중병을 앓거나 죽는 건 언제나 남들이었다.
병이란 어디까지나 소나기 같은 것이었다. 며칠, 아무리 길어도 한두 주일( 그 이상의 경우도 가끔 있지만)이면 멈출 고통에 아까운 시간을 헌납하는 일이었다. 특별히 마음의 각오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위험 지대에 영주권을 얻었다. 불길한 땅에 유재되었다. 날짜를 미룰 길은 없다. 돌이킬 수도 없다.
병은 낫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여기선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선 듯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다.
당신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내가 모래밭에서 반죽을 만들어 놀 때 당신은 이미 여자들을 돌아보는 나이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둘 다 마르졸보스카 거리 모퉁이에서 파는 나무딸기 맛 탄산 쥬스를 마시고, 프라가 지구 동물원 입구에서 파는 카러멜을 먹으면서 자랐다. 우리 책장에는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2005년 4월 21일. 수술하고 엿새가 지났다. 그 사람의 왼손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떨리고 튀다가 가까스로 잠잠해지고, 잠잠한가 하면 자꾸 안으로 굽는다. 왜 그런지 모른다. 잠시 후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종양을 도려내면 머릿속도 전부 제자리를 되찾는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아 말하는데, 게다가 손이 늘 얼음장 같다. 잘 때는 이불을 두 장이나 덮고 장갑까지 낀다.
당신은 탐욕스럽게 살아왔던 거다. 한순간도 허무하게 흘러가는 걸 당신은 참지 못했다. 당신의 정신은 반짝거리며 부단히 움직였다. 당신이 제일 좋아한 것은 독서였다. 사업을 구상하고 마케팅 전략을 고심하거나 출장으로 인해 책 읽을 시간을 낼 수 없으면 소중히 팽겨뒀던 <뉴욕 이브 오브 북>을 연속으로 꼼꼼히 독파했다.
런던 태생의 해부학자 J. Z. 융은 인간의 뇌를 100억에서 150억 명의 비서가 동시에 일하는 초대형 사무실에 비유했다.
뇌는 가장 복합적인 인체 기관이다. 백만 킬로미터나 되는 전도체 다발들로 연결된 10억 개의 신경 세포 속에서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 일어난다.
신경계의 핵심 요소인 뉴런은 신경섬유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정보 이해 체계는 신경교세포로 이루어진 지지 조직과 보호 조직 속에 끼워져 있다. 신경교는 뇌와 척수 내부에 있어, 신경 조직을 결합하고 유지하며 영양을 공급하는 조직이다. 세포들끼리의 의사소통은 시냅스 즉 다른 세포 말단과의 연결부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경의 정보는 일종의 방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나는 내 머릿속이 초원이고 숲이고 물이고 바다고 호흡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뇌에 관한 입문서를 읽고 나자 머릿속은 발전소에 공장이 되었다.
전자와 전극 사이의 정보 교환, 나는 이런 말엔 늘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뒷말을 다 들어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더없이 정확한 슈퍼 컴퓨터였던 헨릭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지성, 기억력, 지식이었다.
헨릭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정신이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늘 뭔가를 읽고 있던 정신이었다. 한마디로 위대한 독학자였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을 까? 그 사람의 회색 세포가 과도한 사용을 견디지 못했을까? 그의 지성, 폭넓은 분야와 언어를 넘나드는 방대한 정보량과 종양의 성장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걸까? 말하자면 엔진 과열 같은 것이었을까? 하찮은 상상, 잔혹한 현실.
뇌가 동질의 덩어리가 아니란 사실은 20세기 초엽에야 맑혀졌다. 신경세포의 형태를 최초로 기술한 이는 스페인의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의학자 산티아고 라몬이 카할이다. 그는 이 연구로 1906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시적인 표현을 할 줄 아는 과학자들은 신경세포를 인체 구조의 특권 계급이라 불렀다. 갑오징어의 다리처럼 뻗치는 강력한 팔들을 지닌 그것은 외부 세계의 가장자리와 맨 처음으로 접촉하는 조직이다.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을 열심히 들여다보면, 얄팍한 물리학과 의학 상식을 주워 담으면 이 병을 물리칠 수 있을까? 운명이 널뛰듯 움직이는 그때 내게는 힘이 없었고, 그래서 다른 데로 정신을 돌리려 애썼다.
그해 봄, 몇 주일이나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를 돌봐야 할 때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임무들을 수행했다. 임무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그것들은 대개 머리가 아니라 손만 쓰면 되는 일이었다. 휠체어나 보행기를 빌리고, 샤워용 의자를 사고, 약국에 전화하고, 약을 찾으러 갔다. 할 일은 무궁무진했다. 때가 되자 랍비와 매장 절차를 의논했고, 자네크 삼촌과 마르탱 이모부에게 장례식이며 비용 따위를 의논했다. 그 사람은 화장을 원할까요? 유대인은 화장을 하지 않아. 그걸 알았냐고요? 아뇨, 몰랐어요. 대신 그 사람이 관 속에 사진을 몇 장 넣고 싶어 한다는 건 알아요. 관……., 관 예기가 나왔으니 화장은 아니란 소리다..... 어떤 사진을 넣을 것이며 인화는 누가 하지? 묘지는 에스테르의 부모님이 묻힌 곳이 좋겠지, 나는 그게 어딘지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그러자 다른 유태인들처럼 도시의 북쪽에 묻혀 있다고 했다.
그는 한탄하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다. 차분하고 당당하다. 나는 퇴학하는 중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이따금 기운이 있으면 그는 외교 리셉션 때 폴란드 정치인 고무우카가 굴 먹고 손 씻는 레몬수를 마셨다는 실수담이나 에투르 대통령의 하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헨릭은 멀어졌다. 라일락이 피었다 시드는 사이 그는 병원 침대에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웠다. 방사선 치료가 그를 거의 죽이다시피 했고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신경교종은 간단히 말해 중추신경계(이것은 신경조직의 피질을 구성하고 뉴런의 유지, 영양 공급 및 회복 기능을 하는 신경교로 이루어져 있다)의 종양군 즉 암의 그룹이다. 말하자면 낚싯밥으로 쓰는 살진 지렁이처럼 역겨운 기생충들이다(사실 지렁이한테도 뇌가 있고, 납작한 유충한테도 사람과 닮은 제법 복잡한 신경계가 있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다경신경아종은 신경교 세포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헨릭은 제일 심한 단계, 악성도 4도 종양이었다. 이 악성 종양은 일반적으로 대뇌 반구의 앞부분 즉 전두엽과 측두엽 속에서 자란다. 침윤에 의해 퍼지고 전이가 집중적이며 성장이 빠른 것이 특징이다. 이 종양에 대해서는 역사 병리학적으로 다양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조직학적으로 악성이 높으며, 뇌출혈을 유발하는 다수의 병적 혈관과 희저의 발생원을 동반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로 인해 신경교종을 정부 절제하기는 어렵고 완전히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종양의 재발과 중추신경계 부분으로의 전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신경교종은 방사선 민감도가 약한 암, 말하자면 코발트 동의원소를 이용한 방사선 치료가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암이다. 발병률은 대개 5, 60대 남자가 가장 높다.
나는 인터넷도 뒤져 다른 정보도 찾아본다.
5월 11일, 또 한 번 불면의 밤을 보내다. 헨릭이 잠든 상태로 욕실에 가다가 넘어졌다. 내 힘으로는 그 사람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쓰러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숙여 그 사람 등 밑에 양팔을 집어넣었다. 그렇지만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는 전화였다. 피곤하지만 활기찬 목소리로 그 사람은 말했다. 나 또 수술해야 한 대. 한 번 더 호되게 당하는 거야. 해 보라지 뭐.
오후 늦게 그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됐다.
5월 말이 되자 혹 6월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너무 늦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그는 위독했다.
5월 말. 이때부터 당신은 기억이 없다. 당신은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지냈다.
뭐든 상관없어요, 무슨 조치든 취해 주세요. 지금요, 지금 당장요. 부신 피질 호르몬을 두 배로 주사해 주세요. 아니, 세배로, 아직, 이 순간 저 사람을 살릴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세요.
6월 1일, 얼가가 결혼식 의상을 골라 주었다……. 나는 짙은 황갈색의 레이스 푸피스와 분홍색 구두, 헨릭은 검은색 아르마니 정장, 나는 뭘 고르거나 결정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이 행사의 주인공인지 구경꾼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식 한 시간 전, 병원에 도착해보니 헨릭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너무 야위고 창백한 신랑. 그가 누워 있는 시트처럼 새하얀 안색, 지친 얼굴, 이즈음 그의 눈동자는 유난히 빛났다.
다음 순간 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빠졌다. 그가 깨어나지 않을까봐, 이 결혼식이 이미 늦었을까봐, 여기서 삶이 멈춰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불안한 순간이 왔다. 서명의 순간이다. 서명이 없으면 이 결혼은 무효였다. 그에게 만년필을 쥘 힘이 있을까? 그가 만년필을 쥐려고 애쓴다. 그는 열심히 서명을 하려고 한다. 잉크가 번질 때마다 불안도 번진다.
헨릭의 두 아들도 와 있다. 헨릭을 닮은 갈색 머리의 그 아이들은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다.
18층의 널찍한 대기실에서 열린 저녁 리셉션에 그는 흰 셔츠에 파자마 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쾨블러 로스」가 해방된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것은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이들이 마지막 시기를 보냈던 가건물 벽에는 나비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이 신호의 실체를 알아내고 싶어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다. “인생에 우연은 없다는 걸 깨닫는 데 50년이 걸렸다……. 설령 비극적인 사건일지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기회로, 내적 성숙을 위한 자극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녀는 환자들로부터 교훈을 얻기로 하고 죽음의 정신적 과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녀는 출신지 취리히에서 공부한 다음 뉴욕에서 연구를 이어가면서 스무 권 이상의 저작물을 펴냈다.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관하여>와 <장례의 다섯 단계>는 특히 주목받은 저서로, 죽음에 관한 대표적 문헌이라 할 만하다.
젊건 늙었건, 직함이 듬뿍 딸렸건 내세울 게 하나도 없건, 가난하건 부자건, 마지막 길은 똑같은 듯했다.
그녀의 연구에 의하면 병이라는 현실과 대면하는 데는 몇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충격과 거부와 거절이다. 환자는 진단을 부인하고, 마음속에서 무효화 시킨다. 진실을 점차 인식하면 할수록 저항도 커진다. 저항은 분노와 분개를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는 흥정이다. 누구와 흥정하는가? 운명? 신? 아니면 시간? 지금은 안 돼.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있어, 아직은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그 다음이 의기소침 단계이다. 낙담과 공허감, 그리고 그 뒤에야 체념과 동의와 항복과 받아들임이 온다. 더불어 안도도 찾아온다. 각 단계에는 죄책감과 걱정이 뜨른다. 강렬한 두려움이 동반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파블러 로스는 불치병 환자들이 자신들의 떠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죽음에 직면한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그들은 열리고, 굽히지 않는다. 불가피한 일과의 대면은 그들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나는 저녁 늦게 병원에서 돌아온다. 걸어 올 때도 있다. 봄의 밤들은 눈물로 안감을 댄 것처럼 부드럽다.
3월 말, 모든 검사를 마친 후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들려줄 것을 요구했다. 젠틸리 박사는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물었고 그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암 전문가들과 의견이 달랐다. 갈수록 희망이 줄어드는 그 사람의 병세를 구체적으로 그에게 알리기는 싫었다.
통계에 따르면 4도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은 환자는 대개 두 달에서 열 달 정도 생존이 가능했다. 칼처럼 단호한 말투였다.
화학요법 불가라는 대답은 헨릭에게 최종 수단마저 실패한 것으로 비치리라. 그때 저 값진 테모졸로마이드, 뇌종양 환자들이 당장 죽는 일은 면할 수 있다는 신약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캡슐 한 알에 좋은 TV 한 대 값은 족히 되는 약이었다.
우리는 고무됐다. 헨릭은 큰 기대를 품었다. 우리는 용기를 갖고 싸움을 준비했다.
내게는 믿음이라는 재주가 없다. 종교는 아무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구명튜브로 골랐다. 나는 희망을 붙들고 있다. 희망의 싹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
인간의 손에는 20밀리볼트에 이르는 섬세한 전자 전위차가 존재한다. 생물요법사들의 경우 이 전위차가 50밀리볼트 혹은 그 이상이다. 파웰이란 치료사는 150밀리볼트 이상이었다.
파웰은 이튿날 나타났다. 호리호리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손이 크고 손가락도 길었다. 그는 일명 ‘비스타 강변의 해리스’라 불렸다. 그는 아무 약속도 해 주지 않았다. 헨릭이 자신의 에너지에 반응할지, 한다 해도 어떤 식일지는 그도 몰랐다. 헨릭이 화를 낼까 봐 나는 그냥 머리 마사지라고 얼버무렸다. 그가 그 말을 믿었을 리는 없지만, 파웰의 방문은 10분 만에 조용히 끝났다.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파웰이 말했다. 헨릭은 살 겁니다, 손의 마비도 풀릴 거예요, 그는 일어날 겁니다. 숱한 죽음의 선고 후에 들은 그 말은 내 귓전에조차 비현실적으로 울렸다. 믿을 수만 있다면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인체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에 대한 연구의 길은 천천히 열렸다. 과학 분야에서도 그 존재를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마리 퀴리는 몸이 방출하는 이상한 광선에 흥미를 품었다. 그녀는 손바닥에서 빛을 내뿜는 나폴리의 이름난 영매 유자피아 팔라디노의 회합에 몇 차례나 참석했다고 알려진다.
치료사 파웰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처음엔 병원으로, 나중엔 집으로도, 그는 최대한 헨릭의 에너지 배터리를 충전했다. 그에게는 무진장한 힘이 있는 듯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나 화학 요법을 중단하란 말도, 의학적 해결에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자코 부단한 부활과 상실의 단계에 동반해 줬을 뿐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헨릭의 몸이 그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한, 그는 나와 더불어 빛 쪽에 있었다. 그에게 은총이 있기를…….
볼테르는 눈물을 슬픔의 조용한 언어라고 했다. 하이네는 눈물에 담긴 시정을 명상했다.
캐나다의 병원들에는 조그만 휴지 박스가 도처에 놓여 있다. 눈물 닦아 주는 일을 전담하는 직원들도 있다. 의사들은 눈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단단하다, 단단하도록 훈련 받았다.
헨릭은 병상에서 러시아 시를 암송하면서 자주 울었다. 특히 시모노프의 시가 그 사람을 울렸다. 회색 천으로 장정된 시선.
캐나다의 드니 아르캉 감독의 영화 “야만적인 침략”의 주인공은 암에 걸린 것을 알고 죽으려 한다. 마약 중독자인 한 여자가 그를 위로하다가 공감을 품게 된다. 그녀는 그를 위해 모르핀을 주사하면서 그가 과거의 삶에 대해 간직한 그리움은 결코 가라앉지 않으리라 말한다. 지나간 삶이란 건 없다고, 옛날의 그 남자는 없다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묵인하는 순간부터, 죽기는 간단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맞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병마의 고통은 헨릭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2005년 6월 18일 아래층 헨릭의 서재에 힘들여 환자용 침대를 들여놓았다. 2층 침실에서 지내려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이제 당신에게 불가능하다.
몇 주일을 꼼짝도 못한 채 누워 지낸 후 당신의 몸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 알아낸 것은 시트와 베개를 바꾼 다음 당신을 침대 위쪽으로 밀어냈을 때였다. 당신이 혼자 움직였다. 착각인가? 당신은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꿈쩍도 않던 짐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당신을 옆으로 돌려 눕힐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며칠 지나자 당신 팔과 손이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되돌아왔다. 그날, 내가 어떻게 당신을 침대 위에 앉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왜 그날이었고,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당신이 다리를 살짝 구부렸다. 그리고 흔들었다. 하얗고 야윈 다리는 곧장 바닥에 닿지는 못했다. 당신이 종일 누워 지내는 침대는 아름다운 곤들라와 같았다. 어릴 때 매트가 깔린 철봉대에 메달려 다리를 흔들어대던 것처럼 당신은 그렇게 다리를 흔들었다. 일어설 수 있어? 서 봐, 농담이겠지? 5주일 만에 일어나 앉은 사람의 눈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물론 편치는 않으리라. 머리가 빙빙 돈다. 중지. 잠시 쉬었다 벋디디고 선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선 당신의 모습은 얼마만인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엄마처럼 나는 당신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와. 일어나서 걸어봐. 한 발짝, 두 발짝, 그 사람이 방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삶이 시작됐다.
2005년 6월 26일 덜컥 겁이 난다. 매일 조금씩 그 사람의 상태가 호전되기 때문이다. 병이 잠깐 한눈이라도 파는 것처럼, 어쩌면 화학요법의 결과이거나, 사랑이나 기도 덕분이거나, 기적일지도 모른다. 난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헨릭이 살아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먹고 듣고 말하고 이해한다는 것. 예전처럼 지성적이고 예전처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리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7월 1일, 헨릭의 생일을 성대히 치를 준비를 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친구들이 있다. 그것이 커다란 힘이 된다. 초대장에는 이렇게 썼다. 언제 어떻게 악화될지 몰라 두렵지만 , 그래도 58세 생일을 축하하려고 합니다…….
7월 1일 당신은 일어섰다. 두 발로 서서 버텼다.
일주일 후 병원 사람들은 혼자 일어서고 혼자 앉고 그리고 걸었다. 거의 마비되었던 왼손도 움직였다. 화학요법은 제2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여름 내내 우리는 잃었던 희망을 발굴했다. 숱한 포도주가 고통을 어루만졌다. 일어나 앉게 되고 읽을 수도 있게 되자 그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2005년 7월 24일 ~~~신랑이 먼저 가고 신부가 뒤를 따라간다. 흰 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팽팽한 침묵 속에서, 기적을 목격하는 놀라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 발로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눈물은 없었다. 그것은 삶으로 귀환하는 의식이었다.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랍비는 위엄과 용기에 대해 말했다. 장애를 물리치고 삶을 구축하라고, 사랑과 우정이 없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도 말했다.
아침 식사용으로는 레몬과 까치밥나무 열매가 그려진 새하얀 식기를 ㄱ로라야지. 알레시 사의 쟁반과 유리잔도 고르자. 집은 배일 저녁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헨릭이 그러자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은 기다시피 계단을 오르내리며 식당과 2층을 드나들고, 아직은 물 잔을 들어 건배할 수 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얼마 지나자 그는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게 됐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미국 작가 조앤 디디온의 (주술적 사고의 한 해)라는 책을 샀다.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편을 애도하는 책이었다. 헨릭이 암 선고를 받고 난 몇 달 사이 내가 손에 잡은 구 번째 책이었다. 첫 번째로 읽은 책은 미치 앨봄의(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었다.
미국의 문필가 부부 조앤 디디온과 존 그레고리 던느는 거의 40년을 해로했다. 존은 일흔 살 고개를 넘긴 후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빨리 변한다. 정말이지 한순간에 변한다. 디디온의 책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당신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익숙했던 삶이 돌연 멈춘다고. 그날도 그녀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남편이 위스키 한 잔을 부탁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이 건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쓰러졌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떠오른다. 자기 연민을 품어도 좋을 것인가? 이것이 일이 벌어진 후 그녀가 처음으로 기록한 말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이 터진 순간이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었음을 역설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많은 사람들도 그 점에 주목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단단하고 길은 어수선 하거나 한적하고 날씨는 무심하게 맑거나 비가 왔다는 것, 한 낮이거나 석양이었다는 것, 특별한 조짐, 불길한 결과를 예언할 만한 것은 없다. 첫 번째 비행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충돌한 것은 쌀쌀하고 맑은 아침이었고, 길을 건너던 아이가 트럭에 치었을 때 들판은 활짝 핀 개양귀비 꽃으로 뒤덮혀 있었다. 뇌종양이니 병원이니 하는 말이 적힌 헨릭의 이메일이 왔을 때 나는 막 주차장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하루 중의 어떤 한순간, 혹은 매순간, 언제라도 좋은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고른 순간. 이미 기록되어 버린 순간, 새겨진 순간, 그 순간이 이제 영원히 나를 따라다니리라.
디디온은 12월 30일, 남편이 저녁 식탁에 앉은 순간부터 아홉 달 닷새를 기록한다. 그 순간부터의 모든 장면들이 나선을 그리며 되돌아온다.
내가 글을 쓰는 망식은 곧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라고 디디온은 말한다. 마침내 작가는 과부가 할 일을 하기로 한다. 그녀는 고통의 의미를 하나하나 기록하기로 한다.
남편의 유품은 비닐봉지에 담겨 돌아왔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집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봉지에는 남편의 옷가지와 영수증, 신용카드,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애도, 슬픔, 후회, 불경한 말인지 모르지만 부모의 죽음은 얼마간 자연스럽고, 조금쯤 순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가 떠난 뒤에도 당신은 사람들과 만나고, 밥을 먹고, 여권을 갱신 하고, 치맛단을 줄인다. 그렇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 곁에 좀 더 머물렀어야 할 사람, 당신과 함께 자라 마침내는 당신 자신이 된 사람을 잃은 슬픔은 물결처럼 밀려와 당신을 삼킨다. 당신을 후려치고 힘을 거두어 간다. 잠들고, 깨고, 잠들고, 다시 아침이 와도 그 사람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낙담, 눈물, 애도는 병이다. 애도하는 것은 병을 앓는 일이다.
영국의 자연 인류학자 제프리 고러는(죽음, 절망, 그리고 애도)에서 애도는 병적인 자기 연민이라고 했다.
죽음이 나를 따라다닌다. 내 인생과 내 예감을 따라다닌다. 몇 해 전부터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차례차례 이별하고 있다. 누구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고 누구는 뇌종양, 갑상선암, 자다 말고 경색을 일으켜 제각각 죽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불연 듯, 울란바토르 출신의 몽고인 치료사의 말이 떠올랐다. 오래 전 바르샤바에서, 그는 내 몸을 굽어보며 이런 말을 했다. 사방이 막혔어요, 길목들이 막혀 에너지 순환이 안 돼요. 머릿속에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을 놔두고 그늘을 벗어나 햇볕 드는 데로 나오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래서(두려움의 가족사)를 완성했다. 치료사는 게토와 전쟁과 희생된 세대만을 의미했던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말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죽음을 길들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숱한 이별을 겪어 왔으니까. 아니 그건 이별이 아니라 눈앞에서 어느 날 불쑥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계단에서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마지막이었다는, 빅토르 보로질스키의 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차원의 이야기도 그런 의미도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읽으면 말들은 비로소 메시지가 된다.
오랫동안 책 한 권 잡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읽기 시작한 것들은 전부 종양과 죽음, 그리고 희망을 향해 길을 환기하는 책이었다. 헛된 줄 알면서도 나는 의미를 찾는다. 부조리에 땅에서 낙관을 품으려 한다. 우물 바닥에서 빛을 찾는다. 부적절한 은유,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는데 나는 어쩌자고 더 목청껏 소리를 지를까.
디디온의 남편은 단 한 번의 발작으로 죽었다. 모리 교수는 심각한 병마를 안은 채 오래고 느린 죽음을 맞았다. 늙은 모리 교수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옛 제자를 만난다. 만일 헨릭이 5월 말에 떠났더라면……. 내가 알던 헨릭, 내가 반하고 사랑했던 바위 같은 사람, 내 동반자, 내 멘토로서 떠났으리라. 하지만 그는 살아 남았다. 목숨을 구했다.
옛날엔 대체로 옳은 말을 했지만 지금은 틀린 일도 우긴다.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쓰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디디온은 싸움도 떠남도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죽을병을 목격할 필요가 없었다. 병마로 인해 딴사람이 되어 버린 남편 곁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내게 제일 힘든 건 헨릭의 공격적인 언동이다. 거친 태도와 분노, 끝내는 그 분노마저 사라진 무관심이다. 나는 그의 정신을, 상냥한 말을, 너그러운 기질과 여유를, 자신감을, 대담함을, 교만함을, 그가 곁에 있을 때 태어나는 안도감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에게 뭐가 남았지? 그는 이미 병원에서처럼 자기만 봐 달라고 조르는 어린애도 아니다.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에라 W . 짙은 머리칼에 호리호리하고 아담하며 영어 발음이 서툰 그녀는 12년 전부터 토론토의 유태인 호스피스를 이끌고 있다. 여기선 죽어가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이다. 헨릭이 일시적 치료 효과밖에 기대할 수 없는 환자로 분류되고부터 그녀가 방문하기 시작했다. 2006년 봄의 일이다. 시에라는 백 건 이상의 뇌종양 케이스를 경험했는데 헨릭처럼 특출한 회복을 보인 환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를 붙잡고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헨릭의 흉을 볼 때도 있었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헨릭이 쓰러진 이후로 나는 일체 몸을 꾸미지 않는다. 그런데 7월 1일의 결혼식 때,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메니큐어를 발랐다. 그것도 요란한 빨간색으로. 지금은 늘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2005년 11월 21일. 조엔 디디온이 토론토에 왔다. 하버프론트 홀은 초만원이었다.
가을이 끝날 무렵, 헨릭은 자주 소리를 지른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초조하다. 도무지 기다릴 줄을 모른다. 걸핏하면 폭발한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낸다. 나를 집밖으로 내몰거나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그의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고, 병 때문이라고, 그 사람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내부의 어떤 것 때문이라고 나는 되뇐다. 더욱이 그는 그걸 인식하지도 못한다.
헨릭이 어느 정도 자제력과 통제력을 잃은 상태인지 나는 모른다. 그 사람은 불쑥 나를 쓸모없는 여자, 자기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욕했다가, 다음 순간 나야말로 자신에게 일어난 최고의 기적이라고, 내가 없었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치켜세운다.
그 사람은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나는 이따금 그 사실을 잊는다.
가을은 몹시 힘들었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화를 터뜨리고, 으르렁 거리고, 끔찍한 말들을 내뱉고, 분노하고, 주먹질을 했다. 그 사람도 나도 무력했다.
너의 문제점은 바로 이거야. 라며 에바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넌 그가 건강하던 시절처럼 그를 대하려고 애써, 그래선 안 돼. 지금의 헨릭은 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 삶은 이제 없다구.
대뇌의 전두엽이 상처를 입으면 인격의 변화가 따라온다. 환자는 스스로의 충동과 견해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요구가 충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기다리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헨릭의 종양은 전두엽이 아니라 훨씬 뒤쪽, 한결 깊은 곳에서 자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12월 초 헨릭은 나 혼자 며칠 뉴욕에 다녀와도 좋다고 동의했다.
수술 후 메나드 박사는 헨릭이 잘하면 2년은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수술 후의 상태는 한결 심각했다. 메나드 박사는 길어야 몇 주일 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5월의 일이었다.
12월에도 그의 상태는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12월 9일, 고약한 밤. 헨릭이 소리를 지르고 괴롭힌다. 그 사람도 나도 잠을 잘 수 없다. 조용한 데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대학으로 피신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집중할 수가 없다.
12월 중순, 그가 더욱 쇠약해지고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를 대한다. 그 사람은 이제 소리도 덜 지르고 싸움도 덜 건다. 그를 잃을까봐 겁이 난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 사람이 훌쩍 떠날까 두렵다. 그 사람을 향한 새롭고 깊고 큰 사랑이 일어난다.
12월 17일 이후, 그가 기절하거나 넘어지거나 잠깐씩 의식을 잃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그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이브 전야. 우리는 스키를 타러 떠난다. 이 대담한 계획을 세운 장본인은 헨릭이었다. 그는 두 아들과 내게 떠나자고 고집을 부렸다. 의사와 치료사와 친구들까지 , 온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기어코 내게 운전대를 잡게 했다. 토론토 주변에서 스키를 타자면 북쪽의 생 루이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날씨는 나빴다. 날을 미루자고 달래 봤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집중 호우속의 운전은 괴로웠다.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주차장에서 로커까지 그는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우선 퉁퉁 부은 그 발로 무거운 스키 신발을 신고 버클을 고정시켜야 했다. 내가 손을 빌려주려 하자 그가 밀어냈다. 아냐, 그냥 둬, 내가 할 거야. 그가 혼자 신발 버클을 채운다. 현기증이 나지만 그는 일어나 앉는다. 스키복을 단단히 입고 일어서서 벽을 짚고 버틴다.
그가 마침내 정상에 선다. 그리고 주저 없이 내려간다. 다리는 몹시 뻣뻣하지만 어쨌든 내려간다. 그가 넘어진다. 그는 눈 발 위에 뻗어 있다. 내가 내려가 그를 일으킨다. 힘들다. 다른 사람도 합세한다. 그가 다시 일어선다. 또 내려간다. 직선 활강코스 쪽으로 쭉쭉 내려간다. 다음에 넘어질 때까지. 그는 계속 내려간다. 넘어지고 뻗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뻗고 일어난다. 나는 맘속에서 필사적으로 응원한다. 그를 지켜본다. 그러자 눈물이 흐른다. 나는 무서워서 울고 행복해서 운다. 마침내 그가 코스를 전부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아가타 덕분에 너희들한텐 아직 아버지가 있는 거야. 이 사람이 날 살렸어.
제1 종결부 : 말, 일이 터지자 말은 이내 지리멸멸하게 흩어졌다. 깊은 탄식, 결국 말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옛 믿음(혹은 확신)은 한참 후에야 되돌아왔다. 우리는 말을 통해 한 발짝씩 착실하게 자신에게 돌아간다. 말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 위안과 절망의 말, 빛줄기 같은 말, 가슴속에 간직된 말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된다. 다시 일어나 걷게 되었을 때 그는 어디로 직행했던가? 컴퓨터 옆에 가 앉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는 일을 했다. 말들에게 돌아갔다. 매일, 부지런히 그는 자기 책을 썼다. 자기 인생을 회고했다. 그는 숨이 찼고 그래서 그 책은 애초 기대했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거기 있다. 그 다음에는 번역으로 돌아왔다.
제2 종결부 : 약속, 물러서지 않겠다고, 싸워 이기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그의 힘과 신념은 약간의 물리적 제약을 받았을 뿐, 우리는 더한 장애물도 뛰어넘지 않았던가. 그는 이런 병마쯤은 의지로 격퇴하리라 선언했다. 겨울이 오면 스키를 타러 가자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12월 23일, 그 약속을 지켰다.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도, 화장실에 못 갈 때도, 두 다리로 벋디디기 힘들 때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병원의 치료사들이 스키 탈 때의 자세를 떠올려 보라고 조언했다. 헨릭씨 스키 탔었잖아요. 기억나죠? 그러자 그는 왜 과거형으로 말하느냐며 화를 냈다. 또 타러 갈 거예요. 우리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산도 정복했다. 수술 전의 약속대로. 그는 말했다. 기록을 깨고 싶은 게 아니야. 보통 생활, 병 걸리기 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야. 작은 조각들을 되찾으려고 열심히, 난 시도해, 늘 시도해, 뭐가 됐던 불가능하다는 말은 해 본 적이 없어.
결국 올해가 간다. 너무 지쳐서 구원을 믿을 기력조차 없다. 내가 늙고 추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란 느낌이 든다.
새해는 병과의 유대감, 그리고 죽음의 전조 속에서 밝았다.
1월 1일. 우리한테도 새해가 열렸다.
고대 세계에서는 병마를 신들의 분노라 여겼다. 신들은 왜 우리한테 화가 났을까? 우리는 교만했던가?
헨릭은 느닷없이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5월에 그 사람이 떠나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 머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헨릭은 죽음이란 말을 일체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다짐하고, 약속한다. “난 살 거야, 아무도 날 쉽게 못 데려가. 우린 살 거야.”
얼마 있으면 다시 프린세스 마가렛 병원에 가야한다. 7월 이후 처음이다. MRI 검사가 두렵다.
새해 첫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헨릭이 불쑥 말한다. “내 인생에서 아직도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내 가족,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감정적 욕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이야.” 아내는 나, 아이들은 지금은 재혼한 옛 아내의 아이들이다.
2006년 1월 새해엔 모든 게 나아질 거라 믿는가? 아니다. 헨릭의 용기가 보상받으리라 믿는가? 그러기를 바란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는가? 없다.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단념하지 않겠다. 말은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제일 성급한 남자. 그리고 말에 관한 일에는 제일 인내심 깊은 남자였다. 당신 어머니처럼, 당신은 타고난 편집자였다. 당신은 표현과 문장과 줄 바꿈에 대대한 주의와 성찰을 기울였고, 그것들과의 관계, 그것들의 약함, 그것들의 계보를 속속들이 알았다.
도널드 홀. 하버드 대학 출신의 빛나는 시인이자 유명한 편집자인 그는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신 젊은 여류 시인 제인 케년이 거기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보다 스무 살쯤 연상이었다. 그들은 두말없이 결혼해, 도널드 홀의 조부가 농장을 갖고 있는 뉴햄프셔의 월모트에 정착했다. “셔츠여, 너는 행복하구나. 그 사람 목덜미와 등에 스치니까, 그보다 더 멀리도, 허리 밑으로도 가니까.” 라고그녀는 그에게 썼다.
2006년 1월 4일. 병원에 가다. X 선 촬영 결과는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직감했다, 뭔가가 변했다는 걸. 종양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종양을 공격하던 약이 작업을 중단했다. 암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다. 글로 옮겨도 역시 냉혹하다. 포도 알(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과일을 들고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첫 종양은 귤 만하다고 했었다.)만한 크기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컴퓨터 화면에서 하얗게 보이는 그 덩어리를 응시했다. 그것을 잠자코 노려보았다, 흐느낌이 터졌다. 내가 용감하다고? 나는 무너졌다. 이런 건 나한테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외려 헨릭이 나를 위로했다. 그것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신약이, 새로 개발된 약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메달려 보기로 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간단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메이슨 박사 말로는 테모졸로마이드를 로무스틴으로 바꾼 환자들에게서 긍정적인 결과가 보였다고 했다. 신약은 이전의 약보다 훨씬 강력했다. 6주에 한 번씩 처방되는 약으로, 반응 기한은 좀 더 길다고 했다. 쉽게 말해 효과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약이란 소리였다.
집에 돌아와 나는 코냑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것이 끝내는 그 사람을 죽일 거란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 그 공포는 수시로 나를 덮쳤다. 그 삶이 의식을 잃거나 살짝 휘청거릴 때도, 그 사람이 불안에 빠져 내 앞에서 주저앉을 때도, 그는 이제 내 도움을 마다할 기력도 없었다. 그런 일은 갈수록 자주 일어났고, 하루에 몇 번씩 되풀이 될 때도 있었다. 뇌 속의 그 포도 알 만한 변화가 압박의 원인이었다.
어제, 토요일 오후, 그는 여섯 배나 더 강력하다는 새로운 화학요법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나는 그 사람과 아래층 방에 함께 있었다. 나란히 누워 이야기하고, 책을 읽었다. 약을 먹은 다음 그는 높은 목소리로 헤밍웨이의 단편(다리근처의 노인)을 낭독했다. 그는 울었다. 노인에게는 늙은 고양이 한 마리, 양 두 마리, 그리고 비둘기 한 마리뿐이었다. 그게 노인이 지닌 전부였다. 드넓은 세상 속에 노인은 혼자였다.
우리는 함께였다, 언제나 함께였다. 같은 방, 같은 침대(병원에 있을 때도 나는 수시로 그의 침대로 기어 올라가 찰싹 달라붙고는 했다)에서, 같은 공기를 마셨다. 그는 나를 위로했다. 내게서 힘을 얻는다고, 나는 그의 기적이라고.
헨릭을 자신을 종종 병든 짐승 이라 불렀다. 착하지만 아주 아픈 짐승이라고. 그는 쓸모 있으려고, 이전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몹시, 몹시 많이 아픈 짐승이다. 이따금 그는 저 주차장의 3분별 쓰레기통 속이 자기 자리라며 웃었다. 자신은 하잘것없는 병든 짐승이라고, 북아메리카 너구리와 스컹크의 잡종이라고. 그 말들이 나를 울렸다.
2006년 1월 초 나는 죽음을 유심히 관찰했다.
겁에 질린 할머니들이 눈앞에서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다. 병마로 팔다리가 굳어진 그네들은 반쯤은 정신이 있고 반쯤은 정신이 없는 듯 했다. s비;ㅊ은 흐릿하고 입은 시커먼 구멍처럼 뚫려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마지막과 자신들의 두려움을 몇 마디씩 고백할 기력은 있었다. 산 자들이 어루만져 주도록 얼굴과 손을 내밀 기력은 있었다. 그녀들은 차례차례 떠났다. 환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공기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그녀들의 고통스런 마지막 여행에 헨릭을 동반시키기는 싫었다.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프터 라이프’라는 영화를 나는 두 번이나 봤다. 두 번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저세상에 가져갈 추억을 단 하나만 고르라니, 그런 건 도저히 불가능할 듯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헨릭에게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리라. 우리는 정말 딱 하나라면 뭘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마리 선생은 내게 몇 가지 구체적인 준비를 해 두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묘지와 매장, 장례식과 랍비, 의상과 그 가격에서부터 카티슈와 미니언에 이르기까지, 나는 2월 첫 주에 그 모든 걸 준비했다.
언젠가 우리는 한 덩어리의 돌이 될까? 카뮈, 사르트르와 동시대의 시인으로, <질문의 책>을 쓴 유대 신비주의자 에드몽 자베스의 시를 읽고 나는 물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돌로 때렸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무덤에 돌을 놔두리라. 말, 작은 배 아니면 돌. 이라고 어느 날 나는 내 시에 적었다. 돌은 제 몸속에 우리를 간직하고, 굳히고, 불멸로 만들 수 있다. 호박처럼.
리즐 굿맨이 죽음에 관해 나눈 7백회 이상의 대화는 가장 유명한 저서 <죽음과 창조적인 삶>의 기초가 되었다. 그녀는 교양 있는 사람, 무식한 사람, 예술가, 과학자, 학생, 주부, 정보기술자 등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했다. 직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죽음을 겁내는 게 아니에요. 라는 말을 그녀는 책머리에 인용했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삼십대 남자의 말이었다. 그들은 떠나는 게 두려운 거예요, 아직 사는 일을 끝마치지 않았으니까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체 어떤 단계가 되면 인생이 완수된 걸로 보인단 말인가?
무는 두렵지 않다. 지상의 임무에서 해방되는 것이 나는 두렵지 않다. 향기로운 황야나 호숫가의 따뜻한 바람 속으로 나는 기꺼이 사라지겠다. 하지만 남들에게 내준 것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우리 삶이 아무 이익도 없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에, 그러기가 힘들다.
선명한 흔적을 남길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이, 넉넉히 사랑하고 창조하지 못했던 것이, 충분히 놀지 못했던 것이, 아직 다 시도하지 못했다는 것이, 깊숙이 가 보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죽는데 적절한 순간이란 게 과연 있을까? 인생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가는 사람들도 있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마침내 질리고 진력이 나고 지쳐서, 드디어 가는구나, 하고 안도하면서 지상의 일상을 포기하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
헨릭은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게 그 사람이 제일 원한 것이었다. 아직 우리한테 남은 건 뭐지? 어떻게 해야 시간을 속이고 충만의 환상을 품을 수 있지? 물가로 소풍을 가고, 친구 집에 놀러가고,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할까? 아니면 대화? 그래, 대화가 제일 중요하겠지, 헨릭은 고통 받지 않는다. 고통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 덕에 만사가 조금 더 쉽다.
두려움의 메커니즘에 대한 몇 가지 지식, 두려움과 연관된 정보를 만들고 보관하는 과정과 뉴런 구조는 과학적으로도 이미 알려졌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른바 ‘아미그달린’물질이다. 감정의 평가는 상황의 인식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인다. 어떤 사건이 명확히 의식 속에 등록되기 전에 먼저 겁을 낸다는 소리다. 심지어 지각할 수 있는 공포가 미처 개시되기도 전부터.
이따금 내 자신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진다. 우물보다 더 깊이, 탑보다 더 높이. 사실 내려가느냐 올라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나는 혼자이고, 내려감과 올라감은 고립과 이탈이라는 똑같은 감정의 변종이니까. 세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지 말자. 철책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말들이 나를 자꾸만 아래로, 더 아래로 데려간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으로.
2006년 2월 22일 나는 일주일을 산에서 보냈다. 헨릭은 아 없이도 버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했다. 나는 모처럼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눈과 잠 속에서 뒹굴었다.
오늘, 결국 헨릭은 바르샤바 여행을 결심했다. 그는 의사들의 경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 사람의 꿈을 단념시킬 수 없으리라. 꿈? 혹시 마지막 소원은 아니고?
정원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을 거야, 라고 그는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3월 8일, 비행, 시시각각 변하는 빛깔, 두려움의 메아리.
2006년 3월 18일 웨스턴 뇌신경외과 병원에 가다. 일 년 만이다. 이번에도 열달전 헨릭을 수술한 외과의와 상담해야 한다. 그때와 똑같은 계절이다. 바람에서 똑같은 냄새가 나고 신록도 몰이 오르려 한다.
현재로선 한 달에 약 1밀리미터씩 커지는 중이다. 놈을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주시해야 하리라. 젠틸리 박사는 수술을 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도한다.
슬픔은 뭔가, 후회는 뭔가. 포기는, 상실은, 애도는 뭔가. 그것들을 정의하는 연습을 한다. 눈물은 뭔가. 감동과 절망의 표현이고 고통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대답이리라. 눈물의 역사를 알아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헨릭이 많이 진정됐다. 그가 걷잡을 수 없이 화를 터뜨릴 때 얼마나 힘겨웠는지 나는 재빨리 잊었다. 나는 이 변화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옛날과 똑같은 그 사람이 돌아왔다. 4월에 그 사람이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주었다. 독일산의 다리가 짧은 사냥개. 이름은 로냐라고 지었다. 우리는 삶 쪽으로 건너와 있었다.
며칠 후 그가 물었다. 개들은 수명이 얼마나 되지? 내가 대답했다. 한 십 년쯤? 그가 말했다. 그럼 로냐가 나보다 오래 산다는 소리네.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말했다. 모르지, 어쩜 그렇겠지. 그가 말했다. 뇌종양 환자가 십 년이나 살았단 말은 못 들어 봤어.
두려움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나날들. 선고는 잠시 미뤄졌을 뿐,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모른다.
2006년 4월 25일 한 달 후면 내 생일이다. 삶이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헨릭은 갈수록 잠을 많이 잔다.
죽음과 어떻게 맞서야 할까? 정직하게, 위엄 있게, 애정을 갖고, 성실하게. 떠나는 사람들의 진실과 남는 사람들의 진실을 어떻게 배울까?
지금 벌어지는 일들에서 의미를 찾을 것,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4월이 끝날 무렵, 의료 보조 기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침대를 반납하라는 이야기였다. 그건 애초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에게 제공된 서비스였다. 그가 아직 살아 있어 대여 기간을 넘겼던 것이다. 의료용 침대와 욕창 방지용 메트리스를 반납하던지 비용을 지불하란다. 어지간한 자동차 한 대 값은 되는 비용을. 나는 전화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
2006년 6월 26일, 베어치 호수로 소풍을 가다, 두 번째 소풍. 어쩌면 마지막 소풍.
당신이 오랫동안 거부했던 휠체어는 이제 필수품이 되었다.
이튿날 호수를 향해 떠난다. 바다를 한 숟가락 덜어낸 것 같은 호수를 보러 간다.
나는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었다. 바싹 긴장한 채 불운에 대비했다.
2006년 7월 24일, 결혼 1주년 기념 파티를 하다. 마지막 파티, 마지막 기념일, 누가 생각해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수많은 꽃과 넘치는 다정함. 당신은 발코니의 밤나무 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몰라보게 퉁퉁 부은 슬픈 그 얼굴에서 당신의 속을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당신 곁에는 끊임없이 누군가 와서 앉았다. 우리는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불렀다.
2006년 7월 25일 무사히 폴란드 여행을 마친 뒤 그 사람은 어떤 모습이고 나는 어떤 모습인가? 그는 득의양양했고 나는 지쳤다. 싸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란 걸 알았으므로.
들것에 실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바로 잠들었다. 잠들었을까, 의식을 잃었을까? 몇 시간이 지나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헛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앰블런스를 불렀을 때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병원 행을 완강히 거부했다. 의사들은 달래기도 하고 위협도 했다. 결국 그는 서류에 서명했다. 나도 서명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치료 거부가 죽음과 직결 될 수 있음을 각오한다는 각서였다. 죽음이 우리 곁에 충실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놈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2006년 9월 16일 16시 32분, 우리는 죽었다. ■
[에필로그] 全文
당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어떻게 해야 당신한테 갈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내 이야기, 내 편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그곳……. 그 들판, 그 초원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신을 만지고 싶다. 당신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다. 이렇게 흘러가 버린 운명을 뒤집고 싶다. 우리는 코헨의 음악 속에서 죽음을 향해 가며 춤추었다. 사랑의 끝까지, 둘이서 춤추었다. 음악이 들린다. 당신의 번역 속에 우리 노래가 있다. 「나는 당신의 것, 나는 당신의 남자, 사랑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나와 춤춰 주오.」 우리는 삶과 작별했다. 사랑이 아니라 삶과 작별했을 뿐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아름답고 세심한 간호사들, 마지막 의무를 완수하는 겸손한 손들, 그녀들은 우리와 함께 노래했다. 그녀들이 당신을 씻기고, 붕대를 감고, 면도를 시켰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그곳으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마실 것을 주고, 옴 몸 구석구석을 단정하게 정돈했다. 음식물은 가느다란 관들을 타고 자비롭게 흘러 들어갔다. 음료, 약, 마취, 나는 당신을 내 품에 안았다. 끊임없이, 홀린 사람처럼, 내 손은 갈수록 자주, 갈수록 자신 있게 모르핀을 주사했다. 나는 당신 얼굴에 입을 맞추고 당신 귀에 속삭였다. 비록 몇 주 전부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당신은 싸움을 단념하고 물러나 있었다. 나는 그걸 이해했지만 누구나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에게 굶주린 사람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 존재를 갈망하는 그들은 당신에게 휴식을 주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일어나 맞서라고 그들은 집요하게 당신을 흔들어댔다.
나는 그때까지 활짝 열려 있던 우리 집 문을 다다 걸었다. 타인들의 절망과 혼란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쓸어갔다. 내 눈물은 마침내 고독을 요구하고 있었다. 최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아직 말할 수 있는데도 당신은 말을 멈추었다. 잠 속에 가라앉기 전에 말부터 멈추었다. 당신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당신이 깨달은 걸 고백하기는 너무 힘들었으리라. 우리가 졌다 는걸, 이겨내지 못했다는 걸, 뭔가가 더 강했다는 걸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고백하기는 너무 힘들었으리라. 당신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몇 달이나 싸웠다. 마지막으로 기권할 때까지. 나는 당신의 결정을 존경과 감탄 속에서 받아들였다. 당신이 얼마나 쇠약해졌으며 얼마나 달라졌는지 나는 느꼈다. 나는 당신 편을 들어야 했다. 이번만은 체념하고 그렇게 해야 했다. 당신이 단념하도록 해 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그로 인해 당신을 둘러쌌던 우리 동아리의 단결성이 깨졌다. 그것은 내 칙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그걸 원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제일 중요했다.
당신의 죽음은 우리 사랑의 증서였다.
당신이 죽기 전날, 한밤에 우리 집 창문으로 돌이 날아왔다.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크리스털의 밤의 망령이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당신은 그로부터 채 열 시간을 살지 못했다.
토요일이었다. 당신은 열이 있었다. 조금씩 다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얼굴이 온화해졌다. 작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석양 무렵 사람들이 당신을 거두러 왔다.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당신의 병마와 우리 삶의 마지막 몇 달이 있는 이곳에 남고 싶다. 그 모든 것의 증인들과 함께 있고 싶다. 우리는 매달 이 집에서 모인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있다. 나는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우리 개도 갑자기 회색 털이 많아졌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도 우리를 기다리길 바란다.
[한국어판에 붙여]
~~~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어느 폴란드 시인이 썼듯이, 사람들은 너무 빨리 떠나 버리니까 서둘러 사랑하라는 한마디……. [Review]
“2006년 1월 4일. 병원에 가다. X 선 촬영 결과는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직감했다, 뭔가가 변했다는 걸. 종양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종양을 공격하던 약이 작업을 중단했다. 암이 퍼지고 있었다.”<본문>
책의 종반부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왔다. 두 번의 수술 후에 그들은 약간의 차도를 보이는 병세에 다시 희망을 걸었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절망이었다.
2005년 4월 악성 뇌종양 말기판정을 받은 남편의 머리에서 오렌지만 한 종양을 제거했다. 남은 생존 기간이 두 달에서 열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막연한 기다림 하나로 버텨나갔다. 그 기다림은 그들이 아직 죽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수술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손을 덜덜 떨고 팔이 안으로 굽는 증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인 5월에 남편은 욕실에 가다가 넘어졌다. 그 일로 남편은 다시 한 번 수술대에 누웠다. 그 후 남편의 몸은 놀랍게도 호전의 기미가 보였다. 예전처럼 먹고 듣고 말하고 이해하며 지성적이고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나 가끔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난폭하게 소리를 지르고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런 중에 새로운 신약 “테모졸로마이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캡슐 한 알에 좋은 TV 한 대 값은 족히 되는 약이었지만 그들이 얻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다. 약물과 방사선 치료를 계속하며 그들은 생일을 성대하게 치르고 결혼식을 두 번씩이나 올리고 고향 친지들을 만나고 여행을 떠나고 무리하게 스키도 탔다. 그런 중에도 남편은 걸핏하면 폭발했다.
“가을이 끝날 무렵, 헨릭은 자주 소리를 지른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초조하다. 도무지 기다릴 줄을 모른다. 걸핏하면 폭발한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낸다. 나를 집밖으로 내몰거나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그의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고, 병 때문이라고, 그 사람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내부의 어떤 것 때문이라고 나는 되뇐다. 더욱이 그는 그걸 인식하지도 못한다.”<본문>
긴 기다림 후 2006년 1월 다시 병원을 찾아 그동안의 경과를 검사했을 때 그들은 절망했다. 첫 번째 종양은 귤 만하다고 했다. 그런데 제거된 그 자리에 다시 포도 알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컴퓨터 화면에서 하얗게 보이는 그 덩어리를 응시했다. 그것을 잠자코 노려보았다, 흐느낌이 터졌다. 내가 용감하다고? 나는 무너졌다. “<본문>
2006년 9월, 최초의 수술 후 1년 반을 채우지 못하고 그는 죽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전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책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가 얼마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떠나보내는 자의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평생을 해로하고도 무덤덤하게 보내고 떠나간다면 슬픈 일이다. 안타깝게, 아쉽게 헤어져야만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 모두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성서에는 “애통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음”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그 애통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인 것은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애통해한다면 그것에는 위로의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주는 메시지는 한 개인의 죽음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극한 슬픔과 자신이 겪은 애통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위로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사랑편지. Love Letter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닐까?
성서에서 말하는 위로의 보상은 천국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무신론자라고 밝혔기에 그가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책의 말미에 그녀가 남긴 말을 통해서 짐작할 뿐이다.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당신의 병마와 우리 삶의 마지막 몇 달이 있는 이곳에 남고 싶다. 그 모든 것의 증인들과 함께 있고 싶다. 우리는 매달 이 집에서 모인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있다.”<본문>
이 책은 죽음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작 죽음을 맞은 당사자, 남편이 보여준 것은 그 죽음에 맛선 피상적인 모습뿐이다. 남편은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의사의 치료를 거부한 체, 아직 말할 기력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데도 입을 열지 않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어쩌면 한줄기 빛마저도 없는 깜깜한 어둠속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
예일 대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 때문이고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많고 또, 절대적으로 꼭 일어난다고 확신 할 수 없을 때라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그 모든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 우리 앞에 닥치면 그것은 이미 두려움이 아니라 인내의 문제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그 순간이 올 때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서, 오직 인내뿐 아무런 위로가 없다면 슬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