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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작 1>
오음실 주인(梧陰室 主人)
윤 모 촌
내 집 마당가엔 수도전水道栓이 있다. 마당이라야 손바닥만 해서 현관에서 옆집 담까지의 거리가 3 미터밖에 안 된다. 그 담 밑에 수도전이 있고, 시골 우물가의 정자나무처럼 오동나무 한 그루가 그 옆에 서 있다.
이른 봄 해토解土가 되면서부터 가을까지, 이 수돗가에서 아내는 허드렛일을 한다. 한여름에는 온종일 뙤약볕이 내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왔다. 좁은 뜰에 차양을 할 수도 없어서 그럭저럭 지내 오던 터에, 몇 해 전 우연히 오동나무 씨가 날아와 떨어져 두 그루가 자생自生하였다. 처음에는 어저귀싹 같아서 흔하지도 않은 웬 어저귀인가 하고 뽑아 버리려다가, 풀도 귀해서 내버려 두었다. 50센티 가량 자라났을 때야 비로소 오동임을 알았다. 이듬해 봄에 줄기를 도려냈더니 2미터 가량으로 자라, 한 그루는 자식놈 학교에 기념 식수감으로 들려 보냈다.
오동은 두어 번쯤 도려내야 줄기가 곧게 솟는다. 이듬해 봄에 또 도려냈더니 3년째에는 훌쩍 솟아나서, 대인의 풍도風度답게 키(箕)만큼씩한 큰 잎으로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올해로 5년째, 그 수세樹勢는 대단해서 나무 밑에 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 위치가 현관에서 꼭 2미터 반 지점에 서 있다. 잎이 무성하면 수돗가는 물론이고, 현관안 마루에까지 그늘을 드리워 여름 한철의 더위를 한결 덜어 준다. 한 가지 번거로움이 있다면, 담을 넘어 이웃으로 벋는 가지를 쳐 주어야 하는 일이다. 더위가 한창인 8월에도 처서處暑만 지나면, 가지 밑의 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그래서 이웃으로 벋은 가지를 쳐주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짐짓 오동나무가 타고난 팔자를 생각하게 된다. 바람을 타고 가던 씨가 좋은 집 뜰을 다 제쳐 놓고, 하필이면 왜 내 집 좁은 뜰에 내려와 앉았단 말인가.
한여름 낮, 아내가 수돗가에서 일을 할 때면, 오동나무 그늘에 나앉아 넌지시 얘기를 건넨다. 빈주먹인 내게로 온 아내를 오동나무에 비유하는 것이다.
“오동나무 팔자가 당신 같소. 하필이면 왜 내 집에 와 뿌리를 내렸을까.”
“그러게 말이오, 오동나무도 기박한 팔자인가 보오. 허지만 오동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남을 즐겁게 해주지, 우리는 뭐요.”
“남에게 덕을 베풀지는 못해도 해는 끼치지 않고 분수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소.”
구차한 살림속에서 오동나무의 현덕玄德만큼이나 드리워진 아내의 그늘을 의식한다.
이전에 함께 학교에 있었던 S씨의 말이 나이들수록 가슴으로 젖어든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막걸리잔을 나누던 자리에서, 그는 찌든 가사家事 얘기 끝에 아내의 고마움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하였다. 여러 자녀를 데리고 곤히 잠들고 있는 주름진 아내를, 밤늦게 책상머리에서 내려다보면 미안한 마음뿐이더라고 했다. 나잇살이나 먹으니 내조가 어떤 것인가를 알겠더라며 그는 헤식게 웃었다. 진솔한 그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어, 점두點頭를 했던 일이 오래 전 일이건만 어제 일 같다.
언젠가 충무로를 걷다가, 길가에 앉아 신기료장수에게 구두를 고치고 있는 중년 여인을 본 일이 있다. 그 여인상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거리에서 구두를 고치던 중년이 돋보이는 내 나이- 생활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 듯하다. 내게로 온 이래 손톱 치장 한번 한 일 없이 푸른 세월을 다 보낸 아내를 보면, 살아가는 길이 우연처럼 생각된다. 세사世事는 무릇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라 하던가, 남남끼리 만나 분수대로 인생을 가는 길목에, 오동나무 씨가 날아와 반려가 된 것도 그런 것이라 할까.
좁은 뜰에 나무의 성장이 너무 겁이 나서 가지 끝을 잘라 주었다. 여남은 자 가량으로 키는 머물렀지만, 돋아나온 지엽枝葉이 또 무성해서 지붕을 덮는다. 이 오동의 천수는 예측할 수 없고, 내가 이 집에 머무는 한은 그늘 덕을 입게 될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 벨 생각이지만, 오동은 벨수록 움이 나와 다음 주인에게도 음덕陰德을 베풀 것이다.
요새 사람들은 이재理財에 밝아 오동을 심지만, 선인들은 풍류로 오동을 심었다. 잎이 푸를 때는 그늘이 좋고, 낙엽이 지면 빈 가지에 걸리는 달이 좋다. 여름엔 비 듣는 소리가 정감을 돋우고, 가을밤엔 잎 떨어지는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오엽梧葉에 지는 빗소리는 미상불 마음에 스민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떨어지자 자폭한 김상용金尙容 그분은, 다시는 잎 넓은 나무를 심지 않겠다 하고, 오엽에 지는 빗소리에 상심傷心과 장한長恨을 달랬다 한다.
달은 허공에 떠 있는 것보다 나뭇가지에 걸렸을 때가 더 감흥을 돋운다 하였지만, 현관문을 나서면 나뭇가지에 와서 걸린 달이 바로 이마에 와 닿는다. 빌딩가에 걸린 달은, 도심의 소음 너머로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보이지만, 내 집 오동나무에 와 걸리면 신화와 동화의 달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소녀의 감동만큼이나 서정의 초원을 펼쳐 주고, 어린 시절의 고향을 불러다 준다.
선조 때 문신에 오음梧陰이라고 호를 가진 분이 있다. 그의 아우 월정月汀과 더불어 당대의 명신으로 불리던 분이다. 호는 인생관이나 취향에 따라 짓는 것이라 하지만, 아우 되는 분의 월정에선 재기가 번득이고 감상적이며, 맑고 가벼운 감이 있으나, 오음에서는 중후하고 소박하고 현묵玄黙함을 느끼게 한다. 두 분의 성품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음 쪽이 깊은 맛이 난다. 내 집 오동나무의 그늘을 따서 나도 오음실주인梧陰室主人쯤으로 당호堂號를 삼고 싶지만, 명현名賢의 이름이나 호는 함부로 따 쓰는 법이 아니라고 한 할아버지의 지난날 말씀이 걸려 선뜻 결단을 못하고 있다.
처서까지 오동은 성장을 계속해서, 녹음은 한껏 여물고 짙어진다. 음 7월을 오추梧秋 또는 오월梧月이라고 부르는 뜻을 알 만하다. 옛부터 오동은 거문고와 가구재로 애용되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이다. 편지에 쓰이는 안하案下니 하는 글자 외에도, 책상 옆이라는 뜻으로 오우梧右 혹은 오하梧下라고 쓰는 것을 보면, 선인들은 으레 책상을 오동으로 짠 것 같다. 동재桐材가 마련될 때는 친구에게도 나누어서 필통도 깎고 간찰簡札꽂이도 만들어 볼까 한다.
무료하면 오동나무를 쳐다보게 되고, 그럴 때마다 찌든 내 집에 와 뿌리를 내린 오동나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79.1.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분 당선작)
<추천작 2>
홍어와 과메기
박 용 수
빨갛게 솟구치는 욕망,
설한에 피는 동백은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인생들에게 희망이자 위로이다. 탄력은커녕 윤기조차 없는 사막 같은 친구들이 온기를 찾아 강진 백련사와 여수 오동도를 오갔다. 저 동백처럼 우리도 강렬한 꽃을 피우고 툭 떨어지자고 발악을 하며, 1박 할 숙소 경주로 향할 때는 지는 해가 설핏 금오산 능선에 걸렸을 때였다.
다소 늦은 9시 무렵 경주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뜨겁게 달아오른 동백이었다. 서둘러 방 배정을 마치고 여장을 풀자마자 과속 페달을 밟듯 더 열정적으로 잣커니권커니 흥이 절정에 다다랐을 즈음,
“홍어! 홍어 준비 안 했는가아.”
누군가 갑자기 홍어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옆 친구가 차로 달려가더니 화물칸에서 홍어상자를 꺼내왔다. 그리고 여태 가짜만 먹은 사람들이 진짜를 만난 것처럼 칼칼하게 목을 쓰다듬으며 영산포 홍어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 동박새가 동백의 은밀한 곳에 깊숙이 부리를 박고서 꿀을 빨 듯 그렇게 홍어를 질겅질겅 먹기 시작했다.
“오메 맛나구만, 막힌 속이 뻥 뚫려버링마!”
“역시 홍어를 묵어야 진짠 것이여”
그렇게 열심히 홍어를 먹고 있는데, 호텔 사장이 코를 끙끙거리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우리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홍어를 보더니 기겁을 했다.
“뉘 망하는 꼴 보려고 그런기가. 지금 손님들이 이 고약한 냄새 땜에 방을 빼겠다고 난린기라. 퍼뜩 짐 싸서 꺼져삐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우리는 엉거주춤 홍어를 주워 담았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다시는 홍어를 먹지 않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짐을 싸라는 것이었다.
“비렁뱅이인 겨 야만인인 겨! 어찌 이리 고약한 것을 먹는 겨?”
이미 밤 12시를 향하고 있어서 갈 곳도 없었다. 봄이라지만 밖의 기온은 한참을 곤두박질했다. ‘야만인’ ‘이런 곳’이 몹시 거슬렸지만 몇 차례 더 애원을 했다. 하지만, 지난달에도 홍어 때문에 영업 손실을 보았다는 고집스럽게 생긴 늙은이를 이길 수 없었다. 술기운이 가라앉은 우리도 치욕을 감내해 가면서 호텔에 남을 필요도 없었다. 늦은 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나왔다.
밖은 예상보다 추웠다. 춘백으로 가기엔 여전히 붉은 동백이었다. 이곳저곳 호텔을 수소문하면서 인정머리 없는 호텔 주인을 원망하기도 하고 또한 괜스레 홍어를 원망했다.
“홍어, 그놈의 홍어가 뭐라고, 냄새 때문에…….”
운이 좋게 마침 다른 호텔이 있었다. 홍어를 단단히 감춘 채, 여장을 풀었다. 늦었으니 내일을 위해 푹 쉬어라는 인사를 마치고 주인도 내려갔다. 피곤이 밀려오자 나도 몇 친구들과 더불어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잠을 청하려는 때였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누군가 홍어를 꺼내 놓은 것이었다. 잠을 자려던 녀석들도 하나 둘, 홍어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뜩이나 움츠려진 음성, 어둠 속에서 질겅거리는 소리가 잔잔한 화음으로 들려왔다. 허나 목소리를 낮춘다고 냄새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홍어 냄새는 밤도둑처럼 창문과 벽을 타고 계산대 쪽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고 아니나 다를 까 저 멀리서 호텔 주인이 코를 흥흥 거리며 다가왔다.
이런 낭패도 없었다. 이젠 영락없이 노상에서 자야할 형편이다. 모두는 서둘러 먹던 홍어를 숨기기 바빴다. 홍어 상자야 숨길 수 있다지만 어디 홍어가 두부처럼 한입에 꿀걱 삼킬 음식이던가. 이미 입속에 들어있는 홍어는 어쩔 수 없었다. 모두는 홍어 삭인 냄새가 나가지 않도록 꿀 먹은 벙어리였다. 젊은 사장은 키가 크고 얼굴도 미남이었다. 그는 방구석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니 겁 먹은 아이처럼 사장님의 하명만을 기다렸다.
“홍어, 이거 홍어 냄새 아닌 겨?”
사장은 우리들 뒤꽁무니를 두리번거리더니 우리의 실체를 파악해버린 것이다. 이젠 정말 한데서 자야한다는 절망으로 사장의 뒷말을 기다렸다.
“경상도에서는 좀체 먹기 힘든 귀한 홍어, 내도 엄청 조아한 긴데, 한 점 먹을 수 있는겨?”
“예―?”
예상과 다른, 아니 전의 사장과 다른 호텔 사장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내 우린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그날 그 호텔은 밤새 웃음과 이야기와 홍어 향기가 넘쳐났다. 친구들의 모습도 밝아졌고, 경상도 토박이라는 젊은 주인도 우적우적 홍어를 포식했다.
홍어는 바다의 된장이고 김치이다. 뼈와 관절 기관지등에 특효가 있는 귀한 바닷고기라는것,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 음식이라는 점에 공감을 했다. 홍어가 비싸다는 것을 알았는지 사장님은 답례를 하겠다며 나의 주소를 물었다. 호텔을 나오면서 다음에도 이 호텔을 이용할 것이라는 우리들의 말에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 예보와 달리 경주의 드넓은 무영탑 영지위로 새하얀 뭉게구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광주에 도착한 며칠 후, 그 사장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호미곶의 싱싱한 바람과 햇살이 밴 과메기였다. 과메기에서 너그러운 사장님의 성품이 풍겼다. 나는 친구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과메기에서도 홍어처럼 독특한 향기가 났다.
홍어란 타지 사람들에게 무엇일까. 행간의 의미를 읽기 어렵듯이 홍어 자체의 맛 못지 않게 거기에 숨겨진 미묘한 정서, 홍어의 호불호가 맛을 좌우하는지 모른다. 과메기 역시 홍어처럼 숙성을 필요로 하는 저장음식이다. 홍어는 배추김치와 돼지고기를 함께 싸먹으면 좋고, 과메기는 미역이나 다시마 거기에 파를 섞어서 싸먹으면 맛이 좋다. 하지만 홍어와 과메기는 영호남이라는 지역민의 기질만큼이나 다른 점도 있다. 같은 바닷고기이면서도 수중과 바닥이라는 서식환경도 다르고, 육질도 다르다. 홍어는 이름이 그렇듯 넓적하다. 외모는 투박하고 육질은 질기지만 찰지고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인간관계를 차지게 맺고, 낮은 곳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의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끈질긴 호남사람을 닮았다. 과메기는 주로 꽁치나 청어가 사용된다. 등 푸른 생선이라서 고소하고 영양 만점이다. 청렴한 삶을 지향하고 임기응변이 빠르며, 잘 뭉치는 경상도 사람들을 닮았다. 또 홍어는 과메기에 비해 전통적으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형님뻘 되는 음식이어서 중장년층이 선호한다면, 과메기는 온고지신의 현대화 과정에 잘 맞도록 만들어진 신상품이어서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홍어든 과메기든 중요한 것은 지역적 특색을 담고 있는 소중한 음식 자산이고 문화라는 것이다. 애써 구별하기보다 공통점을 찾으려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깻잎과 콩잎, 표준어와 방언이 좌와 우의 양 날개이듯 과메기와 홍어 역시 편견 없이 공생의 성찬이길 바란다. 과메기나 홍어도 겨울에 특히 맛있다. 편견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하나는 소유하되 모두를 얻지 못한다.(계간수필: 2016. 봄호. 통권 83호)
<추천작 3>
거리의 심벌리스트
박 성 실
입동을 앞둔 어느 날, 겨울 채비를 하며 햅쌀을 넉넉하게 살 기회가 있었다. 묵은쌀이 조금 남은 걸 보니 튀밥 생각이 떠올랐다. 긴 겨울밤 주전부리로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도심 한가운데서 뻥튀기 아저씨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듯했다.
하루는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터지는 “뻥!”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8차선 대로변에 뻥튀기라니! 정류장 가까이 통행이 잦은 길목에서 한 아저씨가 옥수수를 튀기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언제 다시 오는지 물었다. 궂은 날이 아니면 매주 수요일에 온다고 했다. 앳된 청년이었다.
손꼽아 기다렸다. 하늘은 맑았지만 반신반의하며 쌀 봉지를 들고 큰길로 나갔다. 멀리서 보이는 그 모습이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반가웠다. 옹색하게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서도록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봉지를 불쑥 들이밀자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예열이 안 된 상태라며 한 시간쯤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그러나 추억의 한 장면을 지켜보고 싶었다. “뻥!” 소리에 놀라 달아나다가도 강냉이 한 알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몰려가던 아이들. 쌀이 들어간 둥근 통이 현기증 나게 돌아가며 불 위에서 제 몸을 달구고 있는 동안 그의 얘기도 익어갔다.
남녘에서 소작농을 하던 한 사내는 자식 공부라도 제대로 시키려고 상경했지만, 번듯한 일을 찾을 수 없어 뻥튀기 일을 시작했다. 본디 착실하여 변두리 동네로 돌면서 단골도 생기고 입에 풀칠도 하기에 이르렀다. 추루한 동네였지만 판잣집이라도 갖게 되면서 고단한 줄 몰랐다. 그러나 재개발 바람은 그의 집도 비껴가지 않았다. 입주권이 있어도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에겐 평생 만지지 못할 큰돈이었다. 별수없이 “딱지”를 팔고 말았다. 언덕 진 옆 동네로 이사했다. 낡은 가재도구와 밥솥, 뻥튀기 기계가 실린 리어카가 전부였다. 마음을 다잡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뻥”소리를 내질렀다. 힘들여 끌던 리어카가 오토바이 꽁무니에 매달리던 날, 그는 꿈속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했다.
요일별로 가는 동네가 정해지다보니 그런대로 현상유지가 되었다. 첫째는 학교 수업만으로도 제법 좋은 성적을 유지해서 원하는 대학에 순조롭게 합격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재수해서 자신이 바라던 대학에 꼭 가고 싶다고 했다. 늦은 밤까지 공부하는 녀석의 모습이 그에겐 한 병의 피로회복제였다. 다시 쓴잔을 마신 아이는 군대에 다녀온 후 재도전하겠다고 했다. 결심이 하도 단호해서 말릴 수도 없었다. 아비 생각엔 그동안 입학금이라도 마련하리란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큰애의 제대를 코앞에 둔 어느 날, 눈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저축은커녕 고등학생인 작은 애 등록금도 내지 못하게 되자 아내는 파출부 일 시간까지 늘렸다. 군에서 돌아온 아들이 말없이 녹슬어 가는 뻥튀기 기계를 닦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부부가 들어간 방에는 밤이 이슥하도록 불이 켜지지 않았다.
방학이면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힌 솜씨로 서툴긴 했지만 약속날짜를 기다리던 단골손님들을 찾았단다.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년 목표로 뻥튀기 일을 하며 궂은 날과 밤에 입시공부를 한다고 했다.
방학이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힌 솜씨로 서툴긴 했지만 약속날짜를 기다리던 단골손님들이 찾았단다.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할수 없어서 이 년 목표로 뻥튀기 일을 하며 궂은 날과 밤에 틈틈이 입시공부를 한다고 했다.
“휘리릭 ~~”, 긴장감이 감도는 몇 초가 흘렀다. 뚜껑이 열리는가 싶더니 “뻥!” 튀밥 알갱이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마냥 부푼 알갱이는 그물망에 갇히고 뜨거운 입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행인들의 눈빛은 잠시 추억에 잠기고, 청년의 모습이 열기 속에서 더욱 굳세고 의젓해 보였다.
청년과 비슷한 또래인 둘째아들의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던 날, 새 학기의 캠퍼스는 꽃샘추위 속에서도 들썩였다. 동아리 활동답게 다양한 곡으로 꾸며진 연주회의 마지막 순서인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이 울렸다.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어갔다. 화려하고 경쾌한 바이올린과 환상적인 플루트, 묵직한 콘트라베이스에 맘껏 취하여 있을 때, 무대 위 조명이 닿지 않는 맨 뒷줄 구석진 자리에서 누군가가 슬며시 일어섰다. 두 손에 커다란 심벌즈가 은은한 빛을 내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선율에도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멜로디에 실려 마음도 한껏 날아가고 있을 때, 그가 두 팔을 벌리더니 커다란 원을 그렸다. “챙!” 그의 두 손에서 빛나는 심벌즈가 마주치는 순간. 마지막 악장의 속살 같은 금빛 알갱이들이 어둠속으로 퍼졌다. “챙!챙!…챙!챙!챙!” 연속으로 박진감 있게 쏘아올린 심벌즈의 축포소리. 앙코르 박수가 강당 가득 울리고 있었다. 고독과 맞선 채 홀로 박자를 세며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 심벌즈 연주자. 그 절정의 한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침묵한 기다림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늘도 큰길가엔 세찬바람이 불고 자동차 경적소리가 거리를 흔들어댄다. 틈틈이 책을 들여다보던 청년이 기계를 가열시키며 한동안 돌리더니 명쾌하게 한방 ‘빵!’ 쏘아 올린다. 거리의 행인들 틈에 더불어 있으면서도 절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자의 절규처럼 들려온다. 모진 추위를 치열하게 견뎌 내는 겨울 한 복판의 졸가리 같다. 아픔과 상처에 머물지 않고 간절한 바람을 푯대 삼아 암울한 현실을 건너는 모습이 더없이 의연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햇빛 화사한 어느 봄날, 오랜 시간 기다리며 침묵하던 희망의 씨앗이 마음껏 부풀어 꽃으로 피어나는 날이 분명 그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이며 삶의 승자가 될 그의 모습을 그려보며 아직 튀밥이 많이 남았는데도 봉지에 쌀을 담는다.(<좋은 수필>2014.09. 통권 38호)
<추천작 4>
낙 타
강 표 성
갑자기 비가 내렸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우산 속 데이트를 해야 했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떨어져도 안 되는 공간에 갇혀 우리는 해운대 바닷가를 걸었다. 한참 지나서야 그의 뒷 보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의 어깨와 등이 젖어있었다. 우산을 내 쪽으로 양보하다 보니 자신은 젖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젖은 등판을 보니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나를 지켜줄 것 같았고, 그의 널찍한 등이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보였다. 동화 속에서 처럼 어디든 데려다 주고 무엇이든 해줄 것 같았다.
만남이 엊그제 같은데 삼십년 전 이야기다.
바다와 바람을 좋아하던 남자는 가장이 되고 어른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뒷모습이 절벽 같은가 하면, 돌부처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의 등에도 굳은 살이 박인 것이리라.
사람의 등은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지난날들이 저장되어 있다. 산맥처럼 곧추선 등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따라 굳어지거나 휘어지며 일상의 무게를 견뎌낸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를 앙다문 마음들이 박혀있고, 눈물어린 순간들도 숨어있다. 그래서 뒷모습에서 삶의 이력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아버님은 연세가 드실수록 등이 둥그스름해졌다. 앞으로 굽어 가는 모습에서 지난 시간들을 엿볼 수 있었다. 등 하나로 세상을 건너온 이에게 그것은 농토였고 연장이었고 씨앗이었다. 당신의 칠순 잔칫날엔가, 남편은 아버님을 업고 마당을 휘휘 돌았다. 안반짝만한 등에 업혀서 얼마나 환히 웃으시는지 새로 박은 금니가 쨍하니 빛났다. 다 큰 아들에게 업힌 어른은 천진한 아이 같았다. 이는 등과 등이 만나는 순간이며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널찍한 등판이 가벼운 등판을 업을 때, 뜨거운 흐름이 서로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켜보는 이의 가슴조차 뭉클했다.
이제 남편이 짐을 이어받았다. 아버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가족의 등이 된 것이다. 남편의 뒷모습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이 보인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가슴은 앞으로 숙고,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평생을 넥타이부대로 살았는데도 그의 등줄기가 후줄근해 보인다. 예전에는 반듯한 양탄자 같았는데, 그것을 펼치면 어디든지 데려다 주지 싶었는데….
나이 들면 짐이 가벼우리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전에 친구 아들네 결혼식에 갔는데, 아들의 신혼집 전세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팔았다고 했다. 속이 상했다. 그 집을 사고 친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기에 더욱 그랬다. 허리띠를 졸라가며 지식들 뒷바라지를 했건만 취업난에 시달리고, 겨우 취직이 되어 결혼을 시키려니 주택난이 기다리고, 제 앞가림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독립하지 못하고 캥거루족이되어 부모에게 기대는 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란다.
거기다 연세든 노모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사는 친구는 요즘 말하는 ‘낀 세대’의전형인 셈이다. 평생 유행과는 무관하게 살더니 이런 데는 잘도 낀다. 낀 세대든 샌드위치 세대든,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또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그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동남아’란 말을 들었다. 동남아시아의 줄임말인줄 알았는데 삼식이 형님뻘이라는 것이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는 남자를 ‘삼식이’라고 하는데, 동남아는 말 그대로 ‘동네에 남아도는 아저씨’란다. 그럴 듯해서 웃었지만 속으로는 씁쓸했다. 머잖아 보게 될 남편의 뒷모습 같아서다. 한참 일할 나이에, 삶의 변방으로 내몰려 동네 산이나 오르내려야 하는 당사자 심정은 어떨까.
가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면 짠하다. 넓은 등짝 외에는 어떤 무기도 없는 남자, 누군가는 그의 등을 계단 삼아 올라갔을 테고, 누군가는 그의 등을 놀이터 삼았을 테지만, 저녁이면 식탁 앞으로 돌아오던 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이를 목말 태우며 웃었던 사람이다.
평생 가족이라는 등짐을 지고 온 사나이, 사막 한 가운데에 길을 내는 낙타처럼 그 또한 콘크리트 정글에 자신만의 길을 내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자꾸만 흔들리는 꿈을 향해 걸어가는 이, 그야말로 도시의 낙타가 아니겠는가 싶다.
오늘도 콘크리트 숲에서 돌아온 낙타의 등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토닥인다. 우리만의 초원에 다다르는 그날까지 함께 가자며, 등과 등이 나란히 걸어가면 그 길 또한 오아시스가 아니겠느냐며 그의 등을 토닥인다.(현대수필: 2014. 가을호 통권 91호)
<추천작 5>
까 치 집
최 명 숙
어젯밤까지 노란 단풍을 자랑하던 은행잎이, 아침에 일어나니 한 잎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떨어졌다. 가으내 그 노란 단풍잎을 보느라 창의 덧문을 닫지 않고 지냈는데, 하루밤새 저렇게 벌거숭이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게 허무했다. 놀라움에 참문을 열고 바닥을 살펴보니,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정신없이 구르고 있다. 이제 가을의 끝인가 보다. 가을을 이대로 보내기 서운하여 집 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전에는 못보고 지나쳤던 까치집이 보인다.
고향 마을 뒤 나지막한 산 위에 오르면 까치집이 있었다. 아침마다 경쾌한 소리로 짖어대던 까치들의 보금자리가, 저렇게나 높은 나무 위에 있었다는 게 어린 마음에 신비로웠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보이던 까치집, 그 까치집처럼 우리집도 참 소박하고 분수에 맞았다. 그리고 그 까치집에 살고 있는 까치네 식구처럼, 우리도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집에서 오순도순 살았다.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안채에는 안방과 윗방으로 방이 두 개, 사랑채에는 하나의 사랑방. 방은 저 까치집처럼 세 개였다. 안방에는 할머니와 남동생이 잤고, 윗방에는 여동생과 내가 어머니와 함께 잤다. 사랑방은 나무를 아끼느라 겨울에는 쓰지 못했고, 따뜻한 철에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썼다.
겨울이면 안방 아랫목에 주발이 담긴 밥을 이불 속에 묻어두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그걸 꺼내 밥상을 차려주셨다. 화로에서 뭉근히 끓고 있는 된장찌개와 함께 곱은 손으로 밥을 먹으려면 할머니는 따뜻한 손으로 녹여주셨다.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씹으며 숟가락을 놓으면 어느새 할머니는 양손 속에 고사리 같은 내 손을 넣고, 조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며 녹여주시곤 했다. 그때의 안온하고 포만감이 느껴지던 마음은, 밥으로 부른 배보다 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문풍지가 웅웅거리며 큰소리로 우는 늦가을 밤이면, 뒷산에서 들리던 산바람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 불기가 들어오지 않는 윗방에는 찬기만 가득하고, 어머니의 양쪽에 누워 잠을 청하던 나와 여동생은, 어머니의 겨드랑이 속으로 움작움작 파고들었다. 그때 안방에서 들리는 잔잔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에미야, 내려와 자거라. 추울라.”
“괜찮아요.”
목울대를 타고 나오는 어머니의 음성은 추위에 오그라들어 작게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다.
두어 번 더 내려와 자라는 할머니의 권유가 있을 때, 어머니는 우리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내려가 자리를 폈다. 그럴 때마다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할머니는 머리를 윗목에 두고 발을 아랫목에 두는 형태를 고집했고, 어머니는 맨 아랫목에 할머니가 눕고 남동생 나 여동생 어머니 순으로, 맨 윗목에 어머니가 자리를 펴려고 했다. 그러나 항상 할머니의 말씀대로 모든 식구가 아랫목에 다리를 뻗고 윗목에 머리를 둔 상태로 이부자리를 펴곤 했다.
“엄니, 추우신데 아랫목에 주무시잖구요”.
민망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여. 춥긴 다 한가지여 에그 얼른 추위가 가야하는데.”
안타까움이 서린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나왔다.
서너 달 가까이 우리는 그렇게 한 방에서 잠을 잤다. 윗방에는 겨울의 점심 양식인 고구마 통가리가 놓이고, 작은 안방에서 옴닥옴닥 다섯 식구가 잠을 잤다. 안방 문 앞에는 할머니가 눕고 옆에는 남동생, 또 나, 여동생, 그리고 뒷문 앞에는 어머니의 이부자리가 펴졌다.
안방 맨 윗목에는 하얀 사기요강이 놓이고, 한쪽 구석에는 질화로가 놓였다. 요의를 느낄 때마다 이불을 부스럭 대면, 할머니는 칠흑처럼 어둔 방안에서 손가락으로 사기요강을 톡톡쳤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가면 요강 언저리가 어슴푸레 보였다. 나는 찬기가 엉덩이에 닿을까봐 엉덩이를 들고 오줌을 누곤 했다. 아침에 보면 가끔 오줌이 방바닥에 조금 흘러있을 때도 있었다.
초저녁에 담아다 놓은 놋화로의 불이 다 사위어가면,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그믐이 다가오면 뒷문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던 그 은근한 달빛, 방안 가득한 달빛으로 환히 보이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잠든 모습, 허수아비처럼 보이던 약간은 무섬증을 동반한 벽에 걸린 몇 개의 옷까지, 너무도 깊이 잠들어있는 동생들의 평온한 얼굴, 이 모든것은 까치집처럼 소박한 집에 살던 내 유년의 편린들이다.
오늘밤에는 거실에 잠자리를 펴고 온 식구가 함께 자야겠다. 식구들이 한방에서 옴닥옴닥 붙어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또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지내보고 싶다. 까치집처럼 소박했던 그 옛날의 우리집을 생각하며, 그리운 할머니와 어머니 또 동생들을 그리워하고 싶다. 가난했지만 마음이 부자였던 유년시절도.(<그린에세이> 2016. 3․4. 통권14호)
첫댓글 오음실 주인은 창작적인 산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홍어와 과메기, 거리의 심벌리스트는 있었던 일의 기록 일 뿐입니다.
낙타는 내가 전에 비평한 일이 있습니다.
까치집은 <까치집처럼 소박했던 그 옛날의 우리집>이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옛시절을 까치집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유법 이상의 창작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문작품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낙타' 제가 평 했었어요~^.^
다시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