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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3장 16-2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②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저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 저주를 선포하셨는가? 저들은 외식하는 자들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척 하지만 경건하지 않다는 것이고, 거룩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어떤 자들인가 하는 것을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시는데, 그 첫 번째가 저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로 이해하자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천국 문을 열어 보여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른 가르침과 먼 자들이었고, 아예 천국 문을 여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였지만, 정작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어떤 자세를 가졌는가? 수고와 노력, 열심은 가졌지만 그런 열심으로 전도한 대상에 대하여 자기들보다 더욱 지옥 자식이 되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올바른 가르침과 상관없이 거저 열심만이 중요한 것처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우리는 바울을 통해 하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는데,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의만 세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동일선상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선 16절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여기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눈 먼 인도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 그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가르치는 자들로서 그들도 진리를 볼 뿐만 아니라 진리를 올바르게 제시하여 바른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앞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저들의 직무는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눈 먼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로 있지만 진리를 볼 수 없는 자들로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가르치겠습니까? 천국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천국 문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코 올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같은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18절을 보시면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일단 맹세와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맹세 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10:2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2)는 말씀도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되 거짓된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3-37) 그러나 해당 본문을 살필 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저들의 맹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고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 당시 율법의 가르침과는 달리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이나 자기 자신의 머리를 걸고 맹세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즉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이 없다는 것에 비춰보면 하늘과 땅으로 맹세할 때, 그리고 예루살렘이나 자기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때 그것이 거짓으로 나타나더라도 죄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 대수롭지 않게, 습관적으로 맹세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어디를 두고 맹세하더라도 그 모든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 달리 말하면 모든 신자는 맹세한다고 할 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해야 한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셨던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맹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서도 성전으로 맹세한다든가, 아니면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쳤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런 가르침을 가르쳤는가? 그것은 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 관계자들이 이 예물 중에서 상당 부분을 자기들의 몫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금이나 예물을 두고 맹세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위선이란 실리 추구와 거의 언제나 관련되어 있으며 통속적인 미신은 대개 목사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양육된다. 이 세상은 곁길로 가려는 성향이 있으며 고의적으로 온갖 기만과 협잡을 스스로 끌어들이지만 타락한 형태의 예배에 대한 최종적인 보루는 지도자들 스스로의 확증에 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정적 혜택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교묘하게 잘못을 꾸며낼 뿐 아니라 이것을 부채질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는 성전의 금이나 성스런 제물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여러분, 지난주에 바리새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한 마디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눅16:14), 오늘 본문은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내용이 아닙니다. 저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 땅에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배를 불릴까?
그런데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적어도 주의 길을 따라 간다고 하는 목회자라면 아무리 교회의 규모가 크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선에 어느 정도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터무니없이 많은 생활비와 더불어 그 외 여러 명목으로 자기 배만을 불린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지식에 대한 무지에 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지식을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보다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는 덕의 원리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목회자의 생활과 관련해서 볼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17절입니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오늘 본문 16절에서도 저들에 대하여 눈 먼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저들에 대하여 맹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이익이 있는 거기에 마음을 쏟고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어느 것이 크냐?” 너희는 성전의 금을, 제단의 예물을 크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질문의 형식을 통해 넌지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금이 거룩한가? 아니면 성전이 거룩한가? 당연히 성전이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이미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물과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진 것이 성전이요, 제단입니다. 반면 금과 예물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까지는 결코 구별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앞서는가? 금보다 성전이 앞서고 예물보다 제단이 앞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전과 제단이 더 거룩합니다.
물론 오늘날 성전이라는 말, 제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이후로는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성전, 더 이상의 제단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제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엇이 더 거룩한가에 있어서는 금과 예물이 아니라 성전과 제단입니다. 즉 성전과 제단은 사람들이 거기로 금이나 예물을 가져오기 전에도 이미 거룩한 반면, 금이나 예물은 성전이나 제단에 가져와서 드릴 때까지는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매튜 풀 주석 참고). 당연히 성전이 거룩하고 제단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비교는 실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본다는 측면에서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오늘날 성전이라든가, 아니면 제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예표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무엇보다 크신 분이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하나님께 드릴만한 예물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크신 분은 없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는 과연 그분만을 가장 크게 여기고 있습니까? 바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조차 배설물로 여길 수 있을 만큼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많은 것들을 누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욥의 고백을 생각하자면 맨 몸으로 온 사람들에게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빗대어 말하자면 성전의 금, 제단의 예물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드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주시는 하나님이 크겠습니까? 아니면 주어진 것들이 크겠습니까? 당연히 주신 분이 크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신 분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주어진 것보다 주신 분이 크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많든, 적든 그분으로만 만족하고 자족하면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어지면 감사로 반응하지만 주어진 것을 가져가실 때는 원망, 불평하는 모습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예물을 더 크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가장 크시다는 것을 알지만 실상 크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것들에 의해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저들의 자세가 우리의 자세일 수 있습니다. 저들의 생각이 우리의 깊은 내면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것이 크냐고 물으실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장 크게 여기는지를,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가장 크게 여기는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데, 20절부터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쉽게 말하면 너희가 제단으로 맹세한다 할지라도 제단으로만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너희가 바친 예물과 함께 맹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에만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임재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래서 성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그렇다면 기록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제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단과 제단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늘로 맹세하는 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사실 하늘에 대해서 맹세하는 것 자체는 미신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맹세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5: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너희가 하늘로 맹세한다고 할 때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라고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에 바로 그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으로 맹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주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너희들이 행하고 있는 모든 맹세는 실상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제단에 맹세하고, 성전에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해도 좋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두고 맹세하든지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맹세는 아무 일 없고, 어떤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이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아가 모든 것이 하나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할 때 결국 맹세는 누구에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고, 제단의 예물로 맹세하지만, 나아가 어떤 이들은 성전으로 맹세하고, 제단으로 맹세하고, 하늘로 맹세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마련해 두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맹세의 대상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은 무지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맹세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분명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0:31).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결코 자기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왜곡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된 것은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갈등이라도 해야 되는데 갈등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이익된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있습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가르치는 자로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 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칼빈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인간을 높입니까? 얼마나 많은 부분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둡니까? 그래서 열심과 노력이 저들의 공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셔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 속에서 구원의 완성까지 인내하면서 걸어가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결국 구원의 완성으로서 영화의 자리까지 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이 단 1%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1%도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노력이나 열심을 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교훈과 책망을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좀 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살도록 노력하고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방금 말한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 탓으로 돌려도 되는가? 죄 문제가 등장하면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려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많은 부분 그렇게 역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가 얼마나 그 부패성이 강한지를 확인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부패성이지 하나님의 부패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분리시키지 말라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신6:4-5).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예배가 중요한 것이고, 그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셨는가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내 생각, 내 방식은 결코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고안물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예배의 내용으로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시는 바가 있을 때 항상 따라오는 말씀이 모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했다는 것인데, 그 자리만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하나님 사랑의 열매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은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지 나보다 못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나 자신 다음에 이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풍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내용과 맞물러 우리는 자기 부인을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 우리의 본성은 자리를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명하고 계신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총체적인 내용이 전혀 비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만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몰랐습니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눈 먼 인도자요, 맹인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오늘 본문은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시는데, 23절이 그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 보면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에 의하면 십일조와 관련해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십일조에 대해 도둑질을 하면 저주를 선언하실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에 대해 철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되어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혹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덜 중요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믿음이란 어떤 분들의 경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할 때 간단히 말하면 이웃 사랑의 실천이 전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드리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 같지만, 정작 이웃 사랑의 실천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보다 이웃 사랑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 이런 질문이 가능하냐 하면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으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진실 된 것이냐?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이것은 이미 누가복음 18장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 내용인데, 어떤 한 바리새인이 기도한다고 할 때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이 자기 의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말로는 감사를 하고 있지만, 말로는 십일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그것이 자기 의요, 자기 공로로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 사랑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하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들에게서 정의와 긍휼과 상호 간의 믿음이 나타나고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둘째 돌판의 계명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하나님에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저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저 형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종교적 형식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이런 성격을 더욱 강조하는 말씀으로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었던 겁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의식법에 속한 내용으로 이해하여 오늘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듣기로는 회중주의 입장이 그렇다고 합니다(JS 참조). 그러나 대다수의 개혁자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십일조가 의식법이 아니라 도덕법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하나님 사랑과 관련해서 십일조는 드렸습니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 마치 고르반 제도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구약법 안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엄격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전통은 무엇인가?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에 대한 의무는 마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막7:11-12 참조).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선 본문에서는 더 중요한 것을 하지 않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더 중요한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런 취사선택이 다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을 향하여 주께서 말씀하셨던 것은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는 것입니다(막7:13). 저들은 말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무엇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것, 그것은 정확하게 말씀을 폐하는 논리인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정당한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열매로써 이웃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없으면서 이웃 사랑만 있는 것도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물질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처럼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나 물질만 드린다, 십일조만 드린다는 것으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28장으로 가시면 십일조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0절부터 22절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우리가 잘 아는 야곱에 대한 내용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고 난 뒤 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하여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서 서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주셔서 다시금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인 줄 알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말하는데, 야곱이 어떻게 고백하느냐?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에는 어떤 정신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는 정신이 있습니다. 얼마나 주셨느냐? 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기 때문에 실상 모든 것을 주셨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겁니다. 때문에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뭐냐?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자면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은 십분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드린다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만 해서는 안 되고 십일조를 통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만약 종교적 의무만으로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한다면, 그리고 정작 나타나야 할 열매로써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다면,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고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도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신앙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우선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하자면 하나님 사랑이 우선합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것 때문에 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해도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고 해서 그것만큼은 잘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을 향한 저주의 내용이 실상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저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조명해 보면 우리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때문에 저들을 향한 저주가 우리를 향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다시금 살펴보셔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을 드렸다고 해서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일주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헌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까지 드려야 합니다. 개혁주의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라고 말할 때 우리의 열심과 노력이 없도록 하는 은혜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서 더 많은 수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데, 그 안에 수고가 있는 겁니다. 수고가 있기 때문에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고조차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은혜라는 말 때문에 수고와 노력 애씀이 전혀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시면 저들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하루살이의 경우 먹어도 죽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낙타를 삼킨다는 것은 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삼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전혀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심판, 자비, 그리고 신의는 무시하면서, 아니 전체 율법은 훼손하면서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빡빡하고 엄격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발에는 입을 맞추면서 거만하게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분명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되는 것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분별은 어디 있는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데 있습니다. 덜 중요하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명하셨으면 명하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