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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회 잠언서 25장-31장
잠언 25장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잠엄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으로서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것이다”(1).
25장 1절에서 유다 임금 히즈키야(기원전 725-697년)의 왕궁에서 학자들이 솔로몬 시대의 잠언들을 수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5-29장까지는 솔로몬의 둘째 잠언서라로 말한다. 히즈키야는 그가 왕좌에 있는 동안 평화와 번영이 널리 퍼졌으므로 훌륭한 임금이었다. 열왕기 하권 19-20장을 보면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의 왕국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지헤문학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우둔한 자가 더 희망이 있다.”(잠언 26,12) “불행하여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 자신을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이사 5,21)
2절부터 12절 까지는 임금으로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고 일을 밝히는 것은 임금의 영광이다”(2).
임금으로서의 삶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생명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일을 숨기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조직의 관계를 하려고 하고 생명관계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조직이 사자라면 생명관계는 힘 없는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 일을 하려고 하면 조직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데 생명관계는 느슨하다. 줄이 안 세워져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덤비고 맞먹는 그런 관계이다. 조직이라면 잘라야 하는 관계이다. 하느님도 우리와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하느님도 늘 수없이 우리를 자르고 싶어 하실 것이다. 말도 안 듣고 줄도 삐뚤어지게 서있는데 자를 수가 없다. 조직의 관계는 사자와 같아서 힘이 있고 뭔가 할 수가 있는데 그 안에 생명이 없다. 그런데 어린 양은 연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생명의 관계를 숨기신 것이다. 조직의 관계가 더 세고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죽을까 봐 숨기시는 것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처럼 임금의 마음도 헤아릴 길 없다”(3). 2절의 “숨기다”와 3절의 “헤아릴 길 없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두 구절을 연결시킨다. 하느님의 생각이 임금으로부터 숨겨진 것처럼, 왕의 생각 또한 우리로부터 숨겨져 있다. 이 “헤아릴 길 없다” 기질은 전제군주의 뛰어난 지혜나 그의 설명할 수 없는 변덕, 즉 다른 이에게 그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다른 것 일 수도 있다. 그러한 군주는 영예롭게 모셔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 해야 한다.
하늘과 땅이 잴 수 없을 만큼 높고 깊다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이해력의 한계를 체험하였다. 자신의 이해를 벗어나는 것은 자신의 지배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창조주의 지배 영역이라고 믿었다(집회 1,1-10; 이사 40,12-14).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하느님이 아니라 임금에 대하여 말한다.
25장 2-10절은 임금을 모시는 신하에게 주어진 잠언이다. 정사를 돌보는 것은 임금과 관리들이 함께하는 일이다. 임금은 가난한 사람에게 바른 재판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29,14) 관리는 임금궁의 깨끗한 정사를 통하여 임금의 정의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임금 앞에서 악인을 없애야 왕좌가 정의로 굳건해진다.”(5절) 또한 부당한 세금 징수나 거짓 정보로 임금이 불의한 정치를 하게 해서는 안된다. “공정으로 다스리는 임금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만/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는 자는 나라를 망친다.”(29,4) “통치자가 거짓된 말에 귀 기울이면/ 신하들이 모두 사악해진다.”(29,12)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 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11). 적절한 말로 화해를 시키는 것이다. 합당한 말은 진리의 말인데 진리의 말은’Yes, No’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말이 ‘예’가 되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내가 그것을 따를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믿음의 말이 감사하는 것이고 감사와 회개가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이다. 상황과 사건과 사람, 이 세 가지는 다 요동치는 문제인데 요동치는 문제 속에서 상황에 따라서 이것은 맞고 이것은 틀리고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소수의 의견도 아니고 어떤 때는 다수의 의견이 진리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소수의 의견이 진리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가 상황과 사건과 사람을 이겨낼 수 있는 또는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가 터지면 사람은 방법을 찾는데 하느님은 사람을 찾는다는 말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꾸 방법을 구한다. 어떻게 벗어날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진리를 구하라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잠깐 벗어날 수는 있어도 사는 방법이 아니다.
“거짓 선물을 자랑하는 자는 구름과 바람은 있으나 비가 없는 것과 같다”(14). 구름과 바람은 식물을 자라게 하고 대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것인데 생명이 없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거짓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거짓은 관계와 관계를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인해서 올바른 관계를 할 수가 없다. 대화를 할 때 A와 B가 있다. A가 a’를 얘기하고 싶은데 솔직히 말하면 체면이 구겨질 것 같으니까 b’로 얘기한다. 그렇다면 B는 b’로 들어야 하는데 A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어서 c’로 듣는다. 그런데 또 A한테 c’로 얘기할 수 없으니까 d’로 얘기한다. 사실은 a’와 c’가 숨겨진 것이다.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겉돌기만 하고 대화가 될 수가 없다.
사탄의 속성, 우상의 속성은 거짓과 분열이다. 거꾸로 하느님의 속성은 정직과 하나 됨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정신 자체가 나누고,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나랑 안 맞는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21-22).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개인적인 적대감을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 “성급히 법정에 나서지 마라./ 네 이웃이 너를 부끄럽게 하면 결국 어찌 하려느냐?”(25,8)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예부터 깨달은 바이며(탈출 23,1-9)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지혜문학의 이 논증을 상세히 설명한다. 원수 관계에 있다 해서 이웃에게 창조의 선물을 누릴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신다(마태 5,43-45). 바오로 사도도 원수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곧 선으로 갚으라고 권고한다(로마 12,21). 어떤 경우든,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의무이며 이로써 개인적인 원수 관계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옥상 한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24). 다툼도 거짓과 같은 개념인데 여인과 함께 큰 집에 사는 것이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한다면 다투는 여인과 사는 것은 오히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누구의 문제도 아니고 공간의 문제도 아니고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정신에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파괴되어 성벽이 없는 성벽과 같다”(28).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 절제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의 최고의 단계가 절제인데 로마서로 표현하면 절제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은 게으르고 자고 싶지만, 내 마음은 악하지만 제어하는 것이다. 방어하지 않고 모역, 패배, 실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삶에 도움을 준다. 성급함과 조급함은 더 큰 문제만 가져올 뿐이며 그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처만 늘게 될 것이다.
잠언 26장 우둔한자에 대한 경계
26장은 우둔한 자(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 그리고 말쟁이 등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미련한 자와 함께 어리석은 논쟁을 벌여봤자 아무런 유익도 없으며, 자신도 미련하게 될 뿐이다. 가장 미련한 일은 자신이 미련한데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밥상 앞에 앉아서 음식을 입에 넣기를 괴로워할 정도의 극단적인 예를 통해 게으름을 경계한다(15절). 자신과 상관없는 다툼에 참견하거나 자기 이웃을 속이는 일도 조심해야 할 경계 거리이다. 20절 이하는 말쟁이들에 대한 경계로서, 험담과 거짓말을 예로 들었다.
“여름에 눈처럼, 수확 철에 비처럼 우둔한 자에게는 명예가 맞지 않는다”(1). 2절을 빼고 12절까지 절마다 “우둔한 자”라는 말이 나온다. 우둔한 자는 곧 미련한 자라는 말이다. 1절은 미련한 자들에 관한 일련의 잠언들을 시작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여름철의 눈은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추수 때의 비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미련한 자에게는 명예가 똑같이 부자연스럽고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이해가 부족한 자를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 주는 것은 그에게 큰 해를 입힐 기회를 주고 그런 행동은 정말로 그런 승급에 합당한 자들을 낙심시킬 것이다. 1절에서의 교훈은 단순하다. 우둔한 자 즉 미련한 자를 칭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둔한 자의 입에 담긴 잠언은 술취한 자의 손에 놓인 엉겅퀴와 같다”(9).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엉겅퀴 즉 가시나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술 취한 자는 고통에 무감각해서 그의 손에 든 가지를 느끼지 못한다. 그와 같이 미련한 자도 지혜에 무감각해서 자신이 지혜로운 말을 해도 그것을 모른다. 둘째, 손에 가시나무를 든 술취한 자가 그것을 흔드는 것은 미련한 자가 격언을 말하는 것 만큼 위험하다. 얕은 지식은 위험한 것이다. 셋째, 너무 취해서 그의 손에 가시를 뽑을 수 없는 자는, 그의 입에서 말한 지혜를 어떻게 적용할지 모르는 미련한 자와 같다. 어떤 의미를 선택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미련한 자의 입에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게으름뱅이는 “거리에 사자가 있어! 길거리에 사자가 있어!” 하고 말한다. 문짝이 돌쩌귀에 달려 돌아가듯 게으름뱅이는 잠자리에서만 뒹군다.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입으로 가져가기조차 힘들어한다”(13-15).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하고 길에 나가지 않는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집 안에서만 맴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돌듯이 게으른 자는 집안의 침상을 따라서 돈다. 집에서도 침대에서만 붙어 있고자 한다. 게으른 자는 입에 손을 넣고도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힘들다고 불평한다.
잠언 27장 책망의 필요성과 유익에 관한 교훈
전반적으로 보면 27장은 책망의 필요성과 유익에 관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그 마음의 생각이나 행실이 완전무결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충고요, 책망이다. 그리고 충고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는 바로 그의 친구이다.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상대편의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할 수 있는 친구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다. 물론 충고나 책망은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한다(5절). 한편, 23절 이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1). 삶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확실히 자랑하지 말라며 불길한 어조로 경고한다. 1절은 장기적인 계획에 대해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태도에 대한 경고이다.
“배부른 자는 꿀도 짓밟아 버리지만 배고픈 자에게는 쓴 것도 모두 달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은 둥지를 잃고 떠도는 새와 같다”(7-8). 베고픈 자는 쓴 것이라도 달게 먹는다.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맛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배고픔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객이라는 영화를 보면 가장 맛있는 것은 춥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울 때 먹었던 밥이다. 임금도 배고플 때 맛있게 먹었던 것이 도루묵이다. 우리는 나그네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그네는 보금자리를 떠난 새와 같다. 나그네는 안식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떠난 나그네들이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하느님에 대한 배고픔을 가져야한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은 우리의 본향인 하느님 나라에 있다.
“영리한 이는 재앙을 보면 몸을 숨기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대로 가다가 화를 입는다”(12). 우리는 비방을 받을 뿐 아니라 재앙을 만날 때도 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피할 줄 아는 자이다. 재앙을 통하여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교통사고 당한 것을 보고 조심하여 자신은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증서다가 망한 것을 보고 보증서지 않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재앙을 당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죄를 회개하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20 저승과 멸망의 나라가 만족할 줄 모르듯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1 은에는 도가니, 금에는 용광로 사람은 그가 받는 칭찬으로 가려진다. 22 미련한 자는 절구에 넣고 곡식과 함께 찧어도 그 미련함이 벗겨지지 않는다”(20-22).
저승(스올)과 멸망의 나라(아바돈) 같은 죽음의 장소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인간들의 지나친 욕구 역시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만족하지 않는 눈과 저승과 멸망의 나라, 즉 묘지에는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전히 믿다가 죽은 자들로 가득하다.
사람은 대부분 시련이 단련을 시킨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아무리 때려도 그 미련이 없어지지 않는다. 매를 아무리 때려도 변화되지 않는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 미련이 벗겨지지 않는다. 매를 때려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칭찬으로 변화될 때가 있다. 칭찬이 사람을 단련할 때도 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러나 칭찬할 때 주의해야한다. 우선은 칭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아부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칭찬해주어야 한다. 추상적인 칭찬이 아니고 구체적인 칭찬을 해주어야한다. 칭찬하는 것은 도가니나 풀무로 금을 단련하듯이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의 숨은 은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오랜 관찰을 통하여 그 사람의 은사를 찾아야한다.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다보면 그 사람의 은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금광석에서 금을 찾듯이 그 사람의 은사를 찾아서 발굴해 주어야 한다. 칭찬하는 사람은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 가서 아시아 축구의 위상을 높이 올려놓았듯이 그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다. 나를 나답게 한 것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3 네 양 떼가 어떤지를 잘 살피고 가축 떼에게 관심을 기울여라. 24 재물은 길이 남지 않고 왕관도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25 풀이 스러지고 다시 새 풀이 돋아나 산에서 목초를 거두어들이고 나면 26 새끼 양들은 네 옷을 장만해 주고 숫염소들은 밭을 살 돈이 된다. 27 염소젖은 넉넉하여 네 양식이 되고 네 집안의 양식과 네 여종들의 생계가 되어 준다”(23-27). 23-27절의 아름다운 글은 전원 생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을 가르친다. 이 구절들은 다섯 마리의 동물들과(23.26.27절) 세 종류의 풀들(25절)을 포함하여 농장 용어들로 풍부하다. 가축에 대한 투자는 다른 재물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23,24절은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부에 대해 초월해야 된다는 중압감을 지니는 반면, 명백한 농업적 성향을 띄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가축은 잘 돌보아져야하고, 밭고 잘 가꾸어져, 언제라도 추수할 수 있도록 뿌려진 씨앗들이 풍작을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알맞은 때에 꼴을 수확해 양과 염소들에게 먹이를 준다면 그것들은 차례로 털과 젖을 제공하며 더 많은 땅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의 재산을 적절히 돌보아야 하고 가축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반드시 지혜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동물들, 비옥한 벌판, 시기적절한 수확, 거둔 것들의 지혜로운 사용 등 모든 것들에 지혜가 필요하다.
잠언 28장 의인과 악인의 특성
28장에는 대조적 평행법 형식으로 의인과 악인의 특성과 결말을 대조하는 언급이 다시 나온다. 대조적 평행법 형식이 아닌 구절은 대부분 악인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언급된 악인에 관한 묘사를 살펴보면, 그 반대로 하느님의 공의를 좇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의 유익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악인은 항상 불안에 쫓기며, 율법을 듣지 않으며,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다. 또한, 그는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방탕한 삶을 추구하고 탐심에 사로잡혀 자기 부모의 물건까지 도적질한다. 이런 자는 마침내 재앙에 빠지고 만다.
“악인은 쫓는 자가 없어도 달아나지만 의인은 사자처럼 당당하다”(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도망을 간다. 그러나 의인은 하느님을 믿음으로 사자처럼 당당하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죄사함을 받고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은 사자같이 담대할 수 있다. 의인은 ‘사자처럼 당당해서’ 악인을 누를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 그들의 용기는 그들 곁에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작은 용기만 있어도 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면 우두머리가 많아지지만 슬기롭고 올바름을 아는 사람이 다스리면 나라가 오래간다”(2). 고대 이스라엘의 진리였던 것은 오늘날에도 진리이다.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은 나라에 정치적 조직과 통치를 흔드는 일종의 불안을 초래한다. 그러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도자 즉 솔로몬 같은 사람은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이 선하면 오래 통치하며 나라도 번성해진다. 그러나 악한 왕들은 빨리 폐위되고 나라는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혹은 내부의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받게 된다.
“11 부자가 제 눈에는 지혜롭게 보여도 가난하지만 슬기로운 이는 그를 꿰뚫어 본다. 12 의인들이 승리하면 그 영광이 크지만 악인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이 숨어 버린다. 13 자기 잘못을 감추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끊어 버리는 이는 자비를 얻는다”(11-13). 의인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자이다. 부자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고 자신의 죄를 살피지 않는다. 부유함이 의로움을 주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해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 가난해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는 스스로를 자신의 죄를 살피며 회개한다. 이들이 지혜로운 자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느님은 그의 길을 인도한다. 태어날 때부터 의로운 사람은 없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항상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공동체에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짓밟힌다.
많은 사람들은 규칙을 깨뜨린 죄인들이 항상 승리하는 반면, 규칙을 지킨 의인들은 항상 패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3절에서는 반대이다. 만약 당신이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다면 반드시 그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이 잠언은 대조적인 평행으로 “잘못을 감추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끊어버리는 이는 자비를 얻는다”라는 절묘한 비교를 보여준다.
“27 가난한 자에게 주는 이는 모자람이 없지만 못 본 체하는 자는 많은 저주를 받는다. 28 악인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이 숨어 버리고 그들이 멸망하면 의인들이 많아진다”(27-28). 고대사회 즉 생명보험, 건강보험, 복지, 사회안전망 등이 없던 시대에 재정난에 허덕였던 사람들이 그 어려웠던 시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재정보조 제도의 복잡성으로 인해 가진 자들은 좀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은 도움을 베푸는 것조차도 알지 못한다. 성경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릉 숨겨져 있지 않았고 그들의 필요는 누구에게나 보여졌다. “못 본 체하는 자”는 그러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자이다. 그렇게 자기 유도된 맹목과 냉혹함은 당연히 가난한 자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그리고 악인이 일어나면 의인이 숨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시절 섭정의 여인 최순실, 청와대 지배자 비서실장 김기춘, 법을 마음껏 주물렀던 대법원장 양승태 등 악인들이 지배하였다고 생각한다. 악인이 사라지고 의인이 통치하면 의인들이 기뻐하여 세상에 많이 자신을 드러낸다.
잠언 29장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한다
29장은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얻은 지혜의 일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한 나라가 번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통치가 먼저 요청된다(4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이 있듯이, 고위층이 부정부패에 열을 올리는 한 백성의 시름은 더욱 늘어만 갈 뿐이며(12절) 민심이 흉흉해지면 심지어 통치권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왕은 하느님의 계시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자식이든, 신하든, 혹은 종이든 간에 잘못을 범한 자가 있으면 정의로운 질책을 가해야 공동체의 기강이 확립된다(15~21절).
“훈계를 자주 듣고도 목을 뻣뻣이 세우는 사람은 졸지에 파멸하여 구제될 가망이 없다”(1). 우리는 충고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거나이다. 1절은 만약 우리가 충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둔감해 지거나 목이 뻣뻣해져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것은 ‘불화의 씨앗’이 될 뿐이며, 이러한 자만은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패먕을 예방할 수 있는 치료제를 거부하게 만든다.
“공정으로 다스리는 임금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만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는 자는 나라를 망친다”(4). 4절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 대한 솔로몬의 회고록과 거의 비슷하다. “원로들의 가르침을 버린” 르하브암은 백성들을 무거운 세금으로 억압하고(2역대 10,13-16),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여 나를 멸망시켰다. 반면 솔로몬은 지혜롭고 정의로운 자로 알려져 있다. 예를들면, 그가 살아 있는 한 아기를 두고 싸우는 두 여인의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면 그의 지혜를 알 수 있다. 그러한 ‘정의’는 나라에 안정을 주었고 그로인해 이스라엘은 그 어떤 화려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금시대를 향유했다.
“20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우둔한 자가 더 희망이 있다. 21 종을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기른 자는 결국 곤욕을 치르게 된다. 22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고 성을 잘 내는 자는 죄를 많이 짓는다”(20-22). 말을 조급히 하는 사람은 미련한 자보다도 희망이 없다. 말을 생각하고 해야한다. 개콘에도 생각, 생각, 생각 좀 하고 말해라는 유행어가 있다. 한자어에도 삼사일언(三思一言)이 있다. 우리는 말을 생각하고 정문일침과 같은 핵심적인 말로 자녀와 종을 가르쳐야한다. 손자를 지나치게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뜯는다는 말이 있다. 종에게 엄할 때는 엄해야한다. 노하고 성내는 종은 다툼을 일으키고 범죄함이 많다. 혈기를 부리는 사람은 죄를 채찍으로 책망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많은 이가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사람의 권리는 주님에게서 온다”(26). 26절은 25절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것이 올가미가 되지만 주님을 신뢰하면 안전해진다”라는 말의 모사이다. 여기서 사람은 하느님 아니라 사람의 보상 혹은 사람의 승인을 추구한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보다 정부를 더 영예롭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보다 더 선명해진다. 많은 세금은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고 내지만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봉헌금에 대해 어떠한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법정과 하느님 중 누가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준다고 믿는가? 우리는 변호사, 판사, 하느님 중 누글 더 먼저 찾는가? 26절은 통치자로부터 정의를 구하는 자가 많지만 우리가 정의를 얻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역겨워하고 악인은 길이 올곧은 이를 역겨워한다”(27). 27절은 시적인 대칭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절은 잠언 10-29장의 결론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사탄과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삶 가운데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잠언 30장 아구르의 잠언
30장 내용은 아구르의 잠언들이다. 아구르는 이티엘과 우칼과 같은 현자로 추측된다. 먼저,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위시한 모든 사람이 미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백하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1~9절). 이어서 자신을 위시한 모든 사람이 특별히 유의해야 할 죄악 된 행실들을 몇 가지 나열한다(10~14절). 15~31절은 소위 '숫자 잠언'으로서 유사한 내용을 한 묶음으로 소개하는 형태이다. 그중 앞의 두 가지는 지혜자가 경계해야 할 사항들인 반면(15~23절), 뒤의 두 가지는 지혜자가 본받아야 할 사항들이다(24~31절).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 그 사람이 이티엘에게 하고, 또 이티엘과 우칼에게 한 담화”(1). 이 절의 해석은 많은 토론을 야기해 왔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아구르나 야케 혹은 우칼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이티엘의 이름은 베냐민 자손에 속한 것으로 느헤 11,7에 나타난다. 어떤 유대인 해석자들은 아구르가 솔로몬에 대한 비유적인 이름이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시작하는 절을 “경건한[혹은 순종하는] 아들 수집자의 말”로 해석하는데, “경건”은 다윗을 가리키고 있다. 「70인역」도 그 절을 “발언자의 아들, 곧 수집자의 말”로 번역하여 유사한 사상을 따른다.
솔로몬을 이 부분의 저자로 생각하지 않는 학자들은 이것이 본서의 선행(先行) 부분들보다 어느 정도 낮은 어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들은 또한 2절과 3절이 솔로몬의 어조와 같지 않다고 지적한다.
한 희랍어 역본과 많은 해석자가 “예언”(prophecy)에 해당하는 말에서 아마도 창세 25,14; 1역대 1:30에 언급된 마싸라는 지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이름으로도 아구르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빛을 던져주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를 통하여 이 영감의 말들이 주어졌는지를 우리가 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마싸 사람 아구르의 말로 되어 있는데, 아구르는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의 현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스라엘 전통에 매우 충실한 것으로 보아 저자를 비이스라엘인으로만 규정할 필요는 없겠다.
전반부(30,1-6)는 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에 비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제시하고, 후반부(30,7-14)에는 저자 자신의 기도를 수록하고 있다.
“2 정녕 나는 여느 사람보다 멍청하였고 나에게는 인간의 예지가 없었다.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치지 못하였다”(2-3). 2절은 자신의 이해력은 인간 이하라고 말하면서,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헐뜯는다. 물론 그 표현들은 과장이다. 지식이 결여된 사람은 결코 이러한 말들을 기록하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아구르는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지 않기에 몹시 불행하다는 것이다.
3절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아구르는 적어도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를 명쾌히 제공해 준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라는 표현은 바른 방향으로의 큰 진전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절망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거기에 희망이 있다.
잠언 30,7-9 아구르의 기도
아구르는 다른 본문에서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르무엘의 모음집(31,1-9)과 마찬가지로 이 모음집(30,1-14)의 히브리어 제목을 해석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아구르와 르무엘은 마싸 사람으로 나오는데, 마싸는 창세 25,14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아시리아의 몇몇 비문은 기원전 734년이래로 마싸를 언급한고, 다른 기록들도 기원전 5세기에 마싸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마싸는 테마(Tema)에서 멀지 않은 아라비아 북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아구르의 이름 아래 수집된 잠언들은 신중함과 약한 이들에 대한 존중을 특징으로 한다. 그 가르침은 깊은 인상을 준다. 특히 여기에서 매우 아름다운 기도를 보게 되는데, 잠언에서 전해지는 유일한 기도다. 솔로몬의 잠언집에도 기도에 대한 잠언이 세 개(15,8.29; 28,9) 전해지는데, 의인의 기도 곧 의로움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의 기도만을 주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한다. 올바르고 참으로 종교적인 도덕적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예식은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구르의 이름으로 된 기도는 다음과 같다(30,7-9).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30,7-9).
이것은 참으로 현인의 기도다. 이 기도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를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이 기도가 외국인의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도가 성경의 책들 가운데 하나에 삽입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이름이 언급되게 되었다.
이 기도는 수 잠언과 같은 식으로 짜여 있다. 기도하는 이는 두 가지를 청한다. 그러나 곧 난점이 나타난다. 그 두 가지는 무엇인가? 현재의 본문에 따르면 첫 번째로 청하는 것은 허위와 거짓말을 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청하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셈이다. 부정적으로, 가난함과 부유함을 피하게 해 주시고, 이어서 긍정적으로, 내 몫의 양식을 주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첫 번째 요청이 본래 저자에 의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여기에 허위와 거짓말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실상 욥기에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기도가 있다.
“저에게 이 두 가지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 앞에서 숨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당신의 손을 제게서 멀리 치우시고
당신에 대한 공포가 저를 덮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시고는 부르십시오.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아뢰겠으니 저에게 대답해 주십시오”(욥 13,20-22)
여기에는 분명 상보적인 요청이 두 가지 있다. 부정적으로는 고통을 끝내 주시라는 것이고, 긍정적으로는 토론을 시작해 달라는 것이다. 30,8에서 기도를 무겁게 만들고 이 절을 비정상적으로 세 행이 되게 하는 – 이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라는 어구는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보면 아구르의 기도도 상보적인 두 가지를 요청하는 결과가 된다. 양극을 피하고 살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을 허락해 주시라는 것이다.
현인이 스스로 겪지 않기를 바라는 양극은 가난과 부유함, 즉 궁핍과 사치이다. 두 가지 모두에 위험이 있음을 아구르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유해진다면 주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것은 영원한 유혹이 아닌가? 재산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재산으로 모든 것이 충분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것이 신이 된다고, ‘맘몬(mamon)’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6,24). 재산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재산은 권력을 가져다 주고, 교만과 자만이 여기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은 쓸모없고 내가 모르는 분이 된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주님이 누구이기에?”(탈출 5,2) 그리고 욥은 신앙도 율법도 없는 부자들이 하는 말을 이렇게 전한다.
“전능하신 분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며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에게 매달리리오?”(욥 21,15)
그들은 이미 손으로 그들의 행복을 만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쪽 극단에도 위험이 있다. 궁핍은 도둑질을 하게 만든다. 우리의 도덕이 생존을 위하여 도둑질을 한 사람에 대해 그의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처지라면 죄책이 그에게 있지 않고 사회에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서 절망에 빠지거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사야서의 한 구절에서는 약탈당한 땅에 사는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한다.
“허기가 지면 그들은 화를 내며
자기네 임금과 자기네 하느님을 저주한다”(이사 8,21).
욥의 아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몸까지 고통받고 있는 남편에게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말하지 않는가?(욥 2,9)
너무 부유하거나 가진 것이 없게 될 때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 아마도 여기에 앞의 구절이 덧붙여진 것은, 부유하게 될 때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빈궁함 속에서 그분을 저주하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허위나 거짓말이라는 생각에서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구르는 그의 하느님께 살아 있는 동안 이 두 극단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구르는 이렇게 분명한 부정적인 요청에 긍정적인 두 번째 요청을 대비시킨다.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라는 기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인의 기도, 지혜롭고 통찰력 있고 간결한 기도, 누가 감히 온전히 진실하게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이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점점 더 깊어지는 심연을 줄일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인류 전체가 처한 현 상황을 본다면, 믿는 이에게 이로한 기도가 절실함은 너무나 명백할 것이다.
“눈은 대단히 높고 눈썹은 치켜 올린 세대”(13). 눈이 대단히 높고 눈썹은 치켜 올린 세대란 교만한 세대를 가리킨다. 다윗은 시편 101,5에서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런 것들은 저는 참지 않으오리다”함으로써 눈이 높은 자들과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같은 부류에 두며 그들을 용납지 않겠다고 말했다. 눈이 높고 교만한 세대가 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1,29). 또 “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0,26-27).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교훈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이는 단도요 이빨은 칼인 세대 이런 세대가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이 땅의 불쌍한 이들을 집어삼킨다”(14).
14절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무리”에 대한 선명한 묘사이다. 그들의 입은 단도와 칼로 비유된다. 이러한 무기들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땅에서 삼킨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힘없는 자들을 잔혹하게 먹는 이미지는 또한 시편 14,4에서도 등장한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 하는 모든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시편14,4).
잠언 30,15-33 수(數) 잠언
소위 ‘숫자 잠언’이라는 형식은 지혜 문학 작품에서 발견되는 매우 독특한 문학 기법으로, 처음에 제시된 숫자에 ‘1’을 더한 숫자를 그 다음에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부분의 첫 번째 잠언에서는 “둘”(30,15ㄱ)로 시작하고 이어 “셋” “넷”이라는 숫자들이 연이어 등장한다(30,15ㄴ).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계속 반복된다. 이 잠언집은 서두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이들을 “거머리”에 비유하는데, 이들은 ‘배부를 줄 모르고 충분하다고 할 줄 모르는 이들’이다(30,15-16). 후반부에서는 자연계와 사회생활을 연결한 내용들을 다루는데, 30장 24-28절에서 지혜로운 짐승 넷(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존재 넷(사자, 수탉, 숫염소, 임)이 소개된다.
“15 거머리에게는 딸이 둘 있는데 “더 주세요! 더 주세요!” 하고 보챈다. 배부를 줄 모르는 것이 셋, “충분하다!” 할 줄 모르는 것이 넷 있으니 16 저승과 임신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충분하다!” 할 줄 모르는 불이다. ”(15-16).
거머리는 사람의 피부에 딱 붙어서 끈질기게 피를 빨아먹으려 한다. 그것은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다음 몇 가지도 이와 비슷하게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첫째, 저승 즉 무덤 혹은 지옥이 그러하다. 무덤은 끝없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고, 지옥은 바닥이 끝없이 깊은 무저갱(無底坑)이다.
둘째, 아이 배지 못하는 태가 그러하다. 그는 자녀의 잉태와 출산을 사모하고(창세 30,1) 아이를 낳기까지 만족이 없을 것이다.
셋째,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 그러하다. 땅은 많은 물을 자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것은 끝없이 물을 받아들인다.
넷째, 충분하다고 하지 않는 불이 그러하다. 불은 무엇이든지 다 태운다. 대형산불은 온 산림과 산에 있는 사찰이나 집들을 다 태운다.
인간의 욕심과 탐심은 이와 비슷하다. 즉 탐욕은 불만족스러운 갈망들을 초해하면서 단지 자신을 먹이로 삼는다. 우리가 삶에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를 결코 채울 수 없는 장소들, 사람, 물건들 속에서 만족을 갈망하는 저승, 임심 못하는 태, 마른 땅, 태운 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교만한 마음은 하느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하느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고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한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도리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도와야 한다. 우리는 끝없는 욕심과 탐심, 즉 물질욕, 정욕, 명예욕을 버릴 수는 없어도 경계를 늘 해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절제하고 자신을 부정하며 만족하는 법을 배우면서 살아야 한다.
“24 세상에서 가장 작으면서도 더없이 지혜로운 것이 넷 있다. 25 힘없는 족속이지만 여름 동안 먹이를 장만하는 개미 26 힘이 세지 않은 종자이지만 바위에 집을 마련하는 오소리 27 임금이 없지만 모두 질서 정연하게 나아가는 메뚜기 28 사람 손으로 잡을 수 있지만 임금의 궁궐에 사는 도마뱀이다”(24-28).
24-28절까지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지혜로운 네 가지 것들을 소개해 준다. 그것은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등이다.
개미는 “힘이 없는” 곤충이지만, 여름에도 놀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한다.
오소리는 그것은 “작고 약한” 짐승이지만,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어려운 일을 해내고 거기서 산다.
메뚜기는 작은 곤충이나, “임금이 없어도” 떼를 지어 나아가며 단결심이 있고 질서를 지키며 분쟁과 다툼과 분열이 없다.
도마뱀은 사람의 “손에 잡힐 만한” 약한 짐승이지만, 아주 재빠르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크고 좋은 임금의 궁궐에 거처한다.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등은 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본능적 지혜가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자녀들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세상적으로 천할지라도,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고 하느님의 선한 일을 받들 수 있다.
“32 네가 만일 잘난 체하며 바보짓을 하고 나서 잘 생각해 보았다면 손으로 입을 가려라. 33 우유를 누르면 버터가 나오고 코를 누르면 피가 나오고 화를 누르면 싸움이 나온다”(32-33).
32,33절은 분노를 반대하는 가르침과 함께 30장을 결론짓는다. 싸움은 종종 미련한 사람들이 탐욕 혹은 입장을 고수할 때 일어난다. 그들이 단지 그들의 “손으로 입을” 막으면 문제는 쉽게 마무리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집할수록 싸움은 더 고조된다.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들을 집착할 때 다툼이 시작되며 정의가 승리할리 없는 피흘리는 전쟁으로 끝나게 된다.
33절에서 “누르다”라고 나오는 동사 셋은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동사는 “젓다, 비틀다, 격동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또 악한 일을 도모하는 것은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계획하는 것, 즉 의도적인 악이며 아주 나쁜 것이다. 이런 일을 한 자는 그 손으로 입을 막아야 한다. 즉 그는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만하거나 악한 마음은 교만한 말이나 남을 비방하는 악한 말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이가 이미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교만하고 악한 마음과 말에서 다툼이 생긴다. 주님의 자녀들은 악한 마음과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고 서로 화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또 그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서는 다툼만 생긴다. 우리는 오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다른 이들과 화목하며 지내야 한다.
잠언 31장 루무엘의 잠언
“마싸 임금 르무엘의 말로서 그의 어머니가 가르친 것”(1).
31장은 르무엘 임금의 어머니가 아들인 임금에게 교훈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잠언이다. 우리는 잠언 30,1에 나오는 아구르만큼이나 31장에 나오는 르무엘에 대해 모른다. 단지 '르무엘'에 대해서는 솔로몬 혹은 히스기야의 이명(본명 외에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본문 내용은 어머니의 교훈답게 여자에 관한 조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저자는 술의 해악성에 대해 강하게 주지시킨 후에, 현숙한 여인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매우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현숙한 여인에 관한 내용(10~31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곧 주님을 경외하며 근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아, 내 아들아! 아, 내 몸에서 난 아들아! 아, 내가 서원하여 얻은 아들아! 3 여자들에게 네 정력을 쏟지 마라. 임금을 파멸시키는 자들에게 네 길을 맡기지 마라”(2).
2절은 르무엘의 어머니의 연설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계단식 평행 구조로, 각 문장들에 조금씩 새로운 문구가 더해져 쌓이는 흥미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그의 어머니는 서원 기도를 한 경건한 어머니이었고 하느님의 감동을 받은 자이었다. 그는 자기가 서원하여 낳은 아들을 하느님의 지혜와 교훈으로 교훈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11)와 티모테오의 어머니 에우니케(2티모 1,5)처럼, 경건한 아들에게는 경건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두 가지 악덕, 즉 욕정과 음주에 대한 경고를 한다. 3절은 특히 여자에게 힘을 쓰거나 정력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지나친 방종은 확실히 솔로몬의 큰 약점이었으며 그의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을 생각하면 확실하다. 솔로몬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하고 마침내 그를 타락으로 이끈 것은 지나친 여색에 있었다.
“8 너는 벙어리들을 위하여, 버림받은 모든 이들의 권리를 위하여 입을 열어라. 9 입을 열어 의로운 재판을 하고 가난한 이와 불쌍한 이의 권리를 지켜 주어라”(8-9). 어머니는 르무엘에게 적극적인 명령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입을 열라고 권고한다. 통치자들에게 악덕들을 삼가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다스리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면을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이들을 변호해야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
잠언 31,10-31 훌륭한 아내와 지혜
일반적으로 ‘훌륭한 아내’로 알려진 잠언 31,10-31은 22개 절로 구성되어 있고 어크로스틱 구조(Acrostic structure: 각 절이 히브리어 자음 순서대로 시작됨)로 짜여 있다.
본문의 주제는 남편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훌륭한 아내’이다. 이 아내는 근면하고 관대한 주부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31,15)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31,18) 손(31,19.20.31)과 팔(31,17)을 열심히 움직여 물레질을 하며(31,19) 짠 옷감을 팔고(31,24)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사들이고(31,14.16) 포도밭을 가꾸는 일(31,16)에 전념한다. 따라서 남편은 가정과 집안일을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사회적 · 종교적으로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기에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성공과 가정의 번영을 이룩할 뿐 아니라 자신도 성공적인 삶을 살면서 모든 이의 칭송을 받는다(31,28-31).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31,10-18)과 셋째 부분(31,21-29)은 각각 병행되는 아홉 구절로 짜여 있다. 예를 들어 아내의 뛰어난 면모(31,10.29), 남편(31,11.23), 도덕적 특징(31,12.26), 수공예 솜씨(31,13.22.24), 집안 관리(31,15.21.27) 등이 병행된다. 둘째 부분(31,19-20)은 동의적 대구법으로 이루어졌고, 마지막 부분(31.30-31)은 ‘칭송’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본문 전체를 종합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훌륭한 아내에 대한 칭송의 글이 잠언을 마무리하는 부분에 실려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에 담긴 메시지를 우리 삶에 적용하여 신앙적으로 성공한 삶, 하느님에게 칭송을 듣는 삶을 살아야 한다.
훌륭한 아내를 칭송하는 글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된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31,10). 어떤 남자도 자기 노력만으로는 훌륭한 아내를 얻을 수 없으며, 이 아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는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훌륭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하일’은 ‘힘’ · ‘세력’ · ‘실력’ · ‘권능’ 등을 뜻하는 명사이다. ‘아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에쉣’은 ‘여자’ · ‘여성’ · ‘아내’를 의미하는 명사 ‘잇샤’의 연계형이다. 따라서 “훌륭한 아내”를 직역하면 “힘(실력)의 여자(아내)”이다. 곧 저자가 칭송하는 아내는 남편과 가정을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현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실력을 지닌 ‘유능한 아내’이다.
훌륭한 아내의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산호”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페니님’은 값진 보석을 가리키는데 ‘진주’ · ‘홍보석’ · ‘루비’ 등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이 용어는 지혜의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 3,15과 8,11과 20,15에서도 사용되었다. 저자가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지혜와 훌륭한 아내가 서로 견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남편의 존재는 아내를 부각시키는 이차적인 요소처럼 보인다(31,11-12). “소득”(11)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샬랄’은 본래 노획물이나 약탈품을 가리킨다. 아내를 통해 남편이 얻는 경제적 이익을 ‘샬랄’이라고 한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전쟁에서 얻는 노획물에 비유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에서 전승(戰勝)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때 얻는 전리품은 승리의 주역인 하느님의 소유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가운데 일부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하신다. 이러한 전리품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승리와 그 기쁨의 상징이다. 따라서 “남편은 …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11)라는 표현은 아내가 생산하는 경제적 이익이 남편에게 그러한 전리품과 같은 의미(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성공한 인생과 그 기쁨)을 지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양모와 아마”(13)는 아내가 남편과 집안 식구들을 위해 마련한 옷(31,21-22)의 재료이다. 아내는 옷을 짓기 위해 양모나 아마를 “제 손으로” 구하기 위해 나선다. 이처럼 아내는 어느 것 하나도 남에게 미루거나 의존하지 않고 남편과 가족을 위해 직접 나선다. 그렇게 헌신적인 아내이기 때문에 아낌없는 칭송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저자는 여인의 경제 활동을 “마치 상인의 배처럼 멀리서 양식을 마련해 온다.”(14)라는 말로 칭송한다. “상인의 배”는 지중해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선을 가리킨다. 여인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먼 지방에서 생산되는 갖가지 물품을 모아들이고 거래한다. 또한 여인은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성실한 주부이며, 여종들에게 각자의 할 일을 맡기는 여주인이다(31,15).
“자기가 번 돈으로 포도밭을 사서 가꾼다.”(16)를 직역하면 “자기 손바닥의 열매로부터 포도밭을 심는다.”이다. 집안의 부(富)는 여인의 손으로 마련된 것이다. 여인은 자신이 벌어들인 재물을 활용하여 포도밭을 사서 가꾼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내에게 땅을 사고팔 권한이 없었다. 이처럼 저자가 유대 관습을 벗어나면서까지 여인의 경제활동을 칭송하는 이유는, 아마도 집안의 모든 일이 여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곧 아내는 남편과 집안의 참된 성공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지녔다는 말이다.
저자는 “허리를 단단히 동이고 힘센 팔로 일을 하며”(17)라는 말로 여인의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그녀가 완전한 채비를 갖추고 온 힘을 다해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일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인은 “벌이가 좋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18). 이는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3,14)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곧 여인의 소득은 지혜가 가져오는 소득처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또한 ‘꺼지지 않는 등불’은 재앙과 죽음을 상징하는 밤의 어둠을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인은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19). 어느 한 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은 여인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강조한다.
여인의 두 손은 가난한 이들을 향해서도 뻗쳐 있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20). 여인은 자기 집안만을 위해 일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도 같은 비중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보이는 관대한 사람이다.
여인의 노력으로 “온 집안이 진홍색 양모로 옷을 해 입으니 그 집안은 겨울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21). 진홍색 양모는 값비싼 옷감 가운데 하나이며, 그녀가 벌어들인 소득으로 집안이 부유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포와 자홍색 천(22)도 값지고 화려한 옷감이며, 그녀의 손으로 얻은 결실의 풍요로움과 높은 가치를 상징한다.
훌륭한 아내를 얻은 “남편은 성문에서 지방 원로들과 함께 앉을 때 존경을 받는다”(31,23). 성문은 그 지방의 원로들이 모여 정치와 재판을 논하며 여러 가지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남편은 성문에서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원로들과 함께 공무에 전념하며 존경을 받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지만 수치스러운 여자는 남편 뼈의 염증과 같다.”(12,4)라는 가르침을 확인해 준다.
“아마 속옷”(31,24)은 “아마로 짠 옷”이라고 옮길 수도 있으며, 당시 예루살렘 귀부인이 걸치던 옷의 일종이다(이사 3,23 참조). 이 옷은 직사각형의 넓은 천으로 만들며, 외투처럼 옷 위에 걸치거나 잠잘 때 덮는 용도로 사용한다. “띠”(31,24)는 아마실로 만들며, 넓고 늘어진 옷이 활동하기에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허리에 동이는 용도로 사용한다(참조 : 예레 13,1; 에제 16,10).
“힘과 위엄이 그 아내의 옷”(25)이라는 표현은 훌륭한 아내의 능력과 힘과 영예가 마치 겉옷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 여인이기 때문에 “앞날을 흐뭇하게 바라본다”(25). 미래에 대한 여인의 낙관적인 생각과 태도는 그녀가 벌어들인 풍족한 소득이나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력(31,13-19.21-22.24.27),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향한 관대함(31,20)과 그녀의 내면을 지배하는 지혜(31,2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지혜와 자상한 가르침은 자녀와 하녀들을 향한 것이다. “입을 열면 지혜이고 자상한 가르침이 그 입술에 배어 있다”(26). 그녀가 어떤 지혜를 설교했는지 알 수 없고 그 지혜가 행위에 비해 작게 언급되었다 해도, 외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근면과 성실과 관대함은 내면에 자리 잡은 지혜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집안 일을 두루 보살피고 놀고 먹는 일이 없다”(27)에서 “놀고”를 직역하면 “게으름의 양식”이다. 우리말 성경은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드는 이 표현을 “놀고”라고 번역했다. 게으름은 양식을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문맥상 이 표현은 종을 부려 생산한 양식을 가리킨다. 주인이면서도 집안일을 직접 두루 살피고 솔선수범하여 일하는 여인이기에 종의 노고만으로 생산된 양식을 먹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아내에 대한 가족의 반응(31,28-29)중에서 “아들들이 일어나 그를 기리고 남편도 그를 칭송한다”(28)를 직역하면 “아들들이 일어나 그녀를 복되다 부르고”이다. ‘복되다’ 또는 ‘행복하다’라는 말은 시편 1편이 가르쳐주듯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토라에 충실한 삶을 말한다. 또한 지혜와 율법을 동일시하는 지혜문학 작품의 가르침(바룩 4,1; 집회 19,20)을 참고한다면 복(행복)은 토라, 곧 지혜를 실천하여 얻는 결과이다. 따라서 훌륭한 아내의 삶은 하느님의 지혜 곧 율법에 충실한 삶이며, 지혜에 바탕을 둔 근면과 성실과 관대함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남편과 온 집안을 성공으로 이끄는 삶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내의 여러 가지 근면한 행동을 칭송하는 분위기였다면, 종결부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훌륭한 아내가 거둔 삶의 결실을 칭송한다.
훌륭한 아내의 생산적 능력과 활동은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30)라는 말로 평가된다. 지혜문학 작품에서 ‘주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근원이자 지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 여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를 지녔기에 근면과 성실과 관대함을 실천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칭송의 이유라는 것이다. “그 손이 거둔 결실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한 일을 성문에서 칭송하여라”(31). 지혜가 성문 앞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듯(1,21; 8,3) 훌륭한 아내를 칭송하는 소리가 성문 앞에서 울려 퍼진다.
잠언서의 신학사상
1. 창조
잠언은 ‘창조’라는 주제를 세상 창조와 인간 창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주제는 1,1-9,18에만 나오고 (3,19-20; 8,22-31 참조), 두 번째 주제는 다른 잠언 모음집(10-31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4,31; 17,5; 22,2; 29,13 참조). 이렇게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고, 각기 다른 부분에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상 인간 창조에 대해 언급한 본문들은 하느님의 창조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창조된 인간이 취해야 하는 사회적·윤리적 실천 사항(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에 세상 창조에 대해 언급한 본문들은 시문학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찬미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세상 창조는 본문의 핵심 주제가 아니며 다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첫 작품(9,22)이자 창조의 도구(3,19)로 사용된 지혜의 탁월함과 권위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세상 창조에 대한 언급은 지혜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인간 창조에 대한 언급은 사회 윤리의 신학적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심판관이신 야훼
하느님께서는 의인의 기도를 들어주시며(15,29) 사람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실 뿐 아니라 그 마음속가지도 들여다보신다(5,21; 15,2.11; 22,12; 24,17-18). 하느님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참된 심판관이시다’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하느님만이 정의의 유일한 원천이며, 올바른 판단과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고 실천하시는 ‘정의의 심판관’이다. 따라서 세상의 임금들이 무엇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데 한계를 지닌 반면, 하느님께는 그런 한계가 없다(29,26).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에 들린 저울은 불의한 생각을 실천하는 도구이지만, 하느님에게는 정의로운 심판 도구이다(16,11). 또한 세상 법정에서는 권력자나 재산가에게 유리한 판결이 선언될 수도 있지만 어떤 힘도, 어떤 재물도 하느님의 심판을 흐리게 하거나 뒤바꿔 놓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현인들은 주님께서 정의로운 판결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송사를 직접 맡아주신다고 가르쳤다(22,22-23).
3. 보상
이 책에서 말하는 보상은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직접 의인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응당한 보상을 받게 하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는 보상 개념이며(10,3; 12,2; 15,25 등), 다른 하나는 인간 스스로 행하고 얻는 ‘자연적인 보상’ 개념이다(10,4.9.24등). 하지만 보상 개념에 대한 구분은 편집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지, 실제로 고대인들이 초자연적 보상과 인위적 보상을 구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현인들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 행실에 따라 벌하실 때 인간이 당하는 불행이나 재앙은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행실이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가지 보상 개념을 구분하였다고 본다.
특별히 1,1-9,18은 하느님께서 인간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장하시는 분이며, 하느님 자신 또는 그분의 지혜가 의인을 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두 가지 보상 개념이 양극단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주제에 대한 두 가지 관점(5,21-23) 또는 두 가지 다른 표현(10,3과 13,25 비교)일 뿐이라고 말한다. 곧 보상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 각자의 행실에 따라 정의롭게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어떤 것인가? 보상 내용은 생명과 죽음으로 함축할 수 있다. 현인들의 가르침 또는 지혜의 가르침에서 제시되는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보상으로 주어지지만, 그 길에서 벗어난 이들에게는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의 보상은 단순히 ‘장수(長壽)’만을 뜻하지 않는다. 보상으로 받은 생명은 건강, 부, 성공, 안정, 평화, 이웃과의 긍정적이도 행복한 관계등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실패나 좌절 등을 상징한다.
4. 주님을 경외함
“주님을 경외함”이라는 표현도 드물지 않게 사용되었는데(15회) 이는 악(악인)을 피하거나 멀리하라는 뜻도 담고 있다(3,7; 8,13; 16,6; 24,21).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선택을 반성할 줄 알고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일으키는 악의길을 제대로 가릴 줄 아는 양심을 지닌 사람이다(14,16). 또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지혜로운 가르침을 마음에 대시는 사람,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고 주님께 교훈을 청하는 사람, 주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는 현인이다(3,1-12).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지성과 지혜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의 어떠한 지혜도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21,30-31).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모든 상황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은 주님을 경외함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며 정점임을 깨닫게 한다(1,7; 9,10; 15,33).
참된 앎은 지혜의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며, 그로써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앎과 현명함을 얻게 될 것이다.
5. 의인화된 지혜
이 책 어디에서도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지혜문학 작품들 제외)과 대조되는 이러한 특징은 이 책이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 작품들과 공유하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하느님의 침묵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또는 하느님과 인간 공동체 사이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시편 22,3; 69,14.17.18), 이 경우 인간은 하느님께 단죄하고 버림받아 혼자 남겨지게 된다. 하지만 지혜문학 작품에서 하느님의 침묵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직접적인 말씀 대신 동일한 권위로 선포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혜’이다(1,8.9). 지혜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로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여임금이며 애인이고 삶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혜를 선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종종 하느님처럼 말하는 선포자(1,20-33)로, 하느님과 피조물의 중개자(8,1-36 참조)로 소개된다. 이처럼 지혜를 의인화한 목적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지혜를 주체로 내세워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방면의 지혜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목적인 듯하다. 곧 개별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각기 다른 지혜를 문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주체 아래 귀속시킴으로써 개별성을 탈피하여 보편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삶의 경험과 세상에 대한 종교적 비전을 융합하기 위해 지혜를 의인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배 이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지혜의 목소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좁혀주는 말씀으로 다가왔으며, 인간이 하느님께서 창조 세계에 부여하신 질서 안에 조화롭게 융화되도록 이끄는 말씀으로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