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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회 太陽金星體의 極貴 明堂 찾아 (안동 2010년 10월 10일)
옛 선비들의 생활과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는 유교문화의 본향 安東에서 조선 성리학의 틀 세운 `동방의 주자`
퇴계 李滉 선생의 아버지 李埴과 조부 증조부 고조부들의 묘소를 찾아보며 `인걸은 지령`의 풍수를 느껴보고자
초가을의 맑은 햇살을 받으며 8시에 회원을 실은 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군위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에 잠시 休息을 취한 후 西 安東 나들목을 벗어나니 10시쯤이다.
첫 번째 답사지 2세 松安君 李子隋 묘소가 있는 서후면 명리를 향해 안동과학대학 옆길 34번 국도로 10분 정도
달리니 왼편 도롯가에 송안군 묘소 푯말이 우리를 반긴다. 재실이 보이는 골짜기를 꼬불꼬불 돌고 돌아드니
靑龍 白虎의 合水口에 破口處가 뚜렷하니 좋은 穴地를 암시한다.
(도로 입구의 松安君 遺蹟碑)
경사진 언덕 위 바로 보이는 묘소를 오르니 모두 여섯 基의 묘가 있다. 穴場에 두 개, 순전에 세 개, 入首到頭
부분에 하나가 있다.
예로부터 墓碣이 없어 상하 2 基 중 어느 것이 父이고 母인지 판단하지 못하여 碑石을 상하 중앙에 세웠다고
한다.
<松安君 묘소 입구>
松安公은 眞城人 시조 이 석(碩)의 子이며 退溪先生의 5代 祖이다.
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文科 及第하여 벼슬은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를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冊錄)되어 松安君에 봉(封)해졌다.
처음엔 진보(眞寶)에서 풍산 마애리(磨厓里)에 옮겨 살다가 뒤에 주촌(周村)으로 옮겼다 한다.
작산사(鵲山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上. 松安君 묘 1)
水口 안쪽에 강하고 힘차게 聚氣되므로, 수구 안쪽이 이른바 明堂이다.
명당은 龍이 行龍을 끝내고 머물러 있는 龍盡處다.
그러므로 水口의 모습을 보는 것이 明堂을 판별하는 일차적 요소가 된다.
이곳의 水口는 地氣의 漏泄을 막으려고 큰 바위가 수구를 막고 있다. 이러한 바위를 `曜星’이라 한다.
요성은 명당의 남은 氣運이 뭉친 것으로 비교적 작은 바위일 때는 ‘曜石’이라고도 한다.
(下. 松安君 묘 2 )
李子隋 산소는 水口가 잘 짜인 명당이며 혈장의 힘도 좋다.
龍脈이 후덕하고 내외 백호가 이중으로 감싸주며 案山과 朝山이 혈장을 둘러친 신하들의 배알이라 조용하고
아름다우니 훌륭하다.
山勢로 보아 癸坐丁向, 正養向으로 보이나 碑石末尾에 좌향을 坎坐離向하였으니 좌선용에 우선수로 胎向胎流는
胎天干丙字上으로 거수하되 백보전란하여 물이 똑바로 나가는 것이 보이지 않아야 하며, 龍眞穴的하면 大富大貴
하고 人丁旺興한다고 하였으니 각자 생각해볼 뿐이 아닌가.
(案山과 朝山)
*두 번째 답사지 북후면 물한리 진성이씨 中興 祖 4세 선산공 이정묘로 향한다.
삼거리에서 서후면사무소 뒤쪽 영주방향 도로를 따라가며 중간에 권태사, 장태사, 김태사 묘역 간판등을
보노라니 물한리에 도착했다.
(鵲山精舍 및 可倉齋舍) ㅡ 송안군 이자수의 덕을 추모하기 위한 위패를 보관한 사당. 그사람 고령 양반***)
善山公은 천성이 청렴하고 자질이 용맹하여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영변 판관으로 재직할 때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찾아 단 한발의 화살로 호랑이를 넘어뜨려 세인을 탄복하게
하였다.
1431년(세종 13) 평안도 영변 판관으로 재직시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한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증축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공하고, 다시 최윤덕에 종군하여 여진을 치는데 공로를 세워 세종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공이 영변에서 귀향 시 옮겨와 본가에 심은 향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314호(1982)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善山公 이정(李禎) 묘. ㅡ푸른 초가을 묘역을 看山하시는 회원님들ㅡ)
墓所로 오르기 전에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祭祀 작산 정사(鵲山 精舍) 및 가창 재사(可倉 齋舍)를 둘러보았다.
물한리 가창산 下 묘역은 子坐午向으로 善山公 묘 아래 婦人永嘉金氏墓를 안장하였으며 전순 부분과 入首到頭
위쪽에 각 1基로 묘역에 4 基의 묘가 있다.
(善山公 이정 묘에서 잠시, 어때요 좋은 터라고요)
主山에서 뻗은 청룡 백호가 넓게 環包하여 局內엔 마을이 형성되어 조금 높은 지대지만 아름답고 순한 산들이
둥글게 둘러쳐 있으니 杜門洞이라 할 것이다.
가창산 중심 용맥이 結咽束氣하며 힘차게 뻗어와 둥글게 聚氣한 入首到頭는 숨을 고르고, 우측으로 약간 내려
平坦 圓滿한 穴場을 만들었고, 白虎 선익(蟬翼)이 감싸주고, 순전(脣氈)이 꼬리를 오므리니 혈장의 泄氣를 차단
함이다.
(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中直大夫善山都護府使眞成李公之墓. 贈貞夫人永嘉金氏之墓)
穴場에서 느껴지는 山勢는 猛將이 휘두르는 칼자루 모양으로 형성되었으나,
外形은 인자한 모란 반개형으로 보고 싶다.
따스한 햇살에 적당히 에워싼 소나무, 穴土와 잔디 살랑거리는 바람에 떠나기엔 너무 아쉬운 곳이니 어디를
두고 명당이라 하리오. 이곳이 명당이 아닌가.
(바라보이는 案山과 朝山 ㅡ 넉넉하고 푸근하지요 )
다음 답사지로 떠나야 한다.
와룡면을 돌아 도산면을 향하니 벌써 食事時間이라 무언가 허전하나 중간에 적당한 식당이 없어 도산면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된장 정식으로 배를 채우니 힘이 솟는다. 역시 금강산 구경도 식후라 ****
(멀리서 바라본 퇴계 父. 그위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祖父 묘역, 오른편에 재실))
*세 번째 답산은 도산면 온혜리 龍頭山 下 은혜초등학교 서북편 능선, 같은 龍脈에 있는 老松亭 이계양(李繼陽)
과 이식(李埴) 묘역으로 향했다.
(위로부터 上. 祖母 묘 * 中. 祖父 老松亭 묘 * 下. 퇴계 母 春川朴氏 묘)
도산면 온혜리 일대에 진성 이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은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老松亭 李繼陽.1454)
때부터로. 노송정은 이식(李埴)과 이우(李堣)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바로 退溪 선생이다.
노송정은 퇴계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돌아가셨다.
노송정은 성균진사로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예안(禮安) 온계리(溫溪里)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부인은
정부인 金氏이다.
(上 . 老松亭 婦人 墓)
온혜리는 도산온천이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溫泉이 있어 주변에 많은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溫惠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 앞의 시냇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하여 溫溪라 불리며 이 물은 토계에서 퇴계와 合水를 하여 上溪,
下溪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中 . 老松亭 이계양 墓)
老松亭 墓所는 온혜초등교 서북쪽 능선에 3 基의 묘가 있다.
능선 앞쪽으로 바라보이는 여러 묘 중에 맨 위쪽 묘는 李埴 묘다.
그 위쪽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곳에 老松亭 묘로 위쪽엔 부인 英陽金氏 묘. 중간이 老松亭 묘. 아래쪽이 퇴계
어머니 春川 朴氏 묘로 형성되었다.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進士眞城李公之墓)
靑龍 白虎 너머로 용두산, 국망봉, 투구봉이 엄하면서도 순하게 주위를 감싸주고 있으며,
玄武峯이 垂頭하니 그 자태가 賢子의 극치요. 乾方의 大氣는 太垣局이다.
老松亭 묘는 子坐午向으로 主山의 본선에서 출발한 靑龍 白虎가 서로 호기를 주고받으며 예를 갖추고
右旋水하여 案山 아래 냇물에서 合水하여 흘러나가니 음양택지로 대 길지라 하겠다.
(下 . 李埴 婦人 贈貞敬夫人春川朴氏之墓)
案山은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고, 朝山은 병풍을 두른 듯 공손히 拜謁하는 구나. 더욱 坎. 離. 震. 兌方에
단정하고 기세 있는 太陽金星體의 산이 혈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大吉地의 極貴 明堂이다.
퇴계 어머니 春川 朴氏가 퇴계를 가졌을 때 공자가 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聖臨門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老松亭께서 건축한 집에서 돌아가신지 3년 만에 퇴계가 탄생하였으니 陰陽宅의 發福이 아니고 무엇이랴.
(깨끗하고 수려한 병풍 서너 폭이 가리개로 외풍을 막아주는 듯한 案山과 朝山)
ㅡ 퇴계의 父 진사(進士) 이식(李埴) 묘
찬성공 이식(埴)은 성균진사로서 여러번 추증되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이며 부인은 義城 金氏와 春川 朴氏다.
生後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윈 퇴계 이황 선생은 그에게 아버지와 스승의 역할을 감당해준 사람이 숙부 松齋公
이우였다.
송재공 이우(李堣) 묘는 이식(李埴) 묘 왼쪽 기슭에 있다. 최숙생(崔淑生)이 墓碣을 지었다. 온혜초등 앞에
神道碑가 있다.
松齎公 이우는 호조, 형조참판에 관찰사등 두루 요직을 하시고 무엇보다 퇴계 조카분을 지도하여 眞城李氏
家門을 우뚝 세우신 분이다.
(제일 위쪽 퇴계의 父 이식(李埴) 묘)
(진사(進士) 이식(李埴) 묘)
(청룡 백호에 客山 案山이 막아서니 水勢論에서 말하는 陰陽의 交配라 賢者의 孕胎함이 아닐까? )
*네 번째 답사지는 예안면 신남리 두리봉 아래 정자골에 있는 효절공 농암 이현보 묘소이다.
돌아서 달리니 벌써 와룡면 사무소 부근 와룡 3거리 좌측 예안 이정표가 반긴다. 꼬부랑 길을 달리다 주신교
다리를 건너 차창으로 정산리 우탁 선생님 묘역도 보면서 예안면사무소 정산삼거리에서 933번 도로를 이용
하여 봉화방향으로 달리니 왼편에 정자골 이정표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 전주대가 가리키는 위쪽 산봉우리에 묘소가 있다.)
이현보(李賢輔).호는 농암(聾巖). 세조 13년~명종 10년(1467~1555) 연산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戶曹參判) 중추부사(中樞府事) 의 벼슬을 지냈으나 말년에는 고향인 경북 예안(禮安)으로 돌아가 낙동강
상류의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를 지으며 여생을 마쳤다.
비(妣)는 안동권씨 호군(護軍) 겸(謙)의 따님이다.
저서로는 농암집(聾巖集)으로 예로부터 전하던 어부사(漁父詞)를 개작했고 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 되었다
(산봉우리에 묘소)
“농암 묘소는 원래 도산면 운곡동에 있었는데 1791년 10월 안동시 예안 신남리 남청량산 정자골로 移葬했다.
묘소의 이장은 경상감사가 7개 군(안동, 예안, 의성, 영양, 예천, 청송, 영주)에서 300명을 징발하도록 지시
하고, 안동부와 예안현에서 관리들이 파견되어 이를 관리하는 거도적 토목공사의 성격을 띠게 되어 지금의
묘소가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광중을 헤치고 관곽을 열어보니 당시의 장례 복식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 대표적인 관료들의 만사(輓詞) 35점이 고스란히 발견된 점이다. 처리과정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있어
당시의 장례절차 및 예법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4년 전 답사때 찍은 농암 묘소)
묘터는 전라도의 한광지(韓光祉)라는 지관이 잡았는데, 그 形局에 대해서는 ‘장비길(혈藏秘吉穴)’, ‘대현길지
(大賢吉地’)라는 표현이 보인다.
移葬 날 참석자는 무려 800여 명에 이르러 방명록의 종이가 부족할 정도였다 한다.
청량산 줄기 두리봉(853m)에서 섬발재를 넘으면 청량산이다. 두리봉에서 기봉하여 정자골에 내려온 龍脈이
人勢에 點穴하였으니 보기엔 경사가 심한듯하나 결인속기 힘찬 기세가 到頭하여 氣를 모아 平坦한 혈장을
만들었으니 누가 감히 이 明堂을 생각했으랴.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謚孝節公聾巖李先生之墓 配貞敬夫人安東權氏부右)
청룡 백호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정자골에서 合水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모양 좌우로 흘려나가고,
주변 산들이 높지만 穴場과 적당한 높이로 형형색색의 봉우리로 형성되었으니 선생의 인품과 淸白吏에
머리를 숙이며 `어부사`을 불러본다
.
"설빈어옹(雪鬢漁翁)이 주포간(住浦間)허야 /자언거수승거산(自言居水勝居山)을 배띄어라
배띄어라 조조재락만조재(早潮裳落晩潮來)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至菊叢 至菊叢 於斯臥)허니
의선어부일견고(依船漁父一 高)라."
(멀리 두리봉이 보이는 남청량산 정자골)
聾巖 선생은 참으로 福人이시다. 퇴임 때는 나라님을 비롯한 백관의 전송을 받았으며, 故鄕에 돌아와 山水와
벗하며 어부사 등을 노래하며 벗들과 강호지락을 즐겼으니까.
햇살이 두리봉에 걸리니 갈 길도 바쁘다.
오늘도 조선 선비들의 사상. 철학. 그리고 삶이 베여있는 유택을 돌아보면서 인간적 체취를 맡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시각을 더욱 풍요하게 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돌아오는 길에 정자 아래서 주고 받은 한 잔술은 하루의 疲勞를 싹*****
태극 풍수회원님들 수고했습니다.
건강히 지내십시오.
2010. 10.14 사진 유철준 : 글 淸虛堂
첫댓글 안동은 정말 선비의 고장이여 문화재 많은 곳이라 좋은곳 선정하시어 구경 잘 하였습니다 감사 합니다
강선생님! 잘계시온지요? 그 우렁찬 목소리 들어본지도 오랜데..대구내려가면 한번 뵙겠습니다..건강하십시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