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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변하는 것을 믿는다
-임지은 시가 보여주는 새로운 주체
김나영
우리는 왜 59분을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무한히 정지한 시간 안에서도 아이는 나이를 먹었다 손발이 자라고 이상한 두려움이 아이의 귀를 멀게 했다
-「멈춤 열차」 부분
예기치 못하는 시간
임지은의 신작시에서는 시간에 관한 특별한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5분 후」라는 시에서 ‘나’는 “5분 전 나”와 “5분 후 나”로 구분된다. 5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 ‘나’라는 엄연함을 의심하고 분리하고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하게 만든다. 어째서 그런가. 우선 이 시에서 ‘5분’은 자기 자신과 불화하고 화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때로 보인다. 시는 ‘5분 후’라는 사건 발생 이후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 보면 ‘5분 전’에 “나는 도마 위에 생선을 썰다가/ 왼손이 잡은 칼을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일이 ‘5분’을 둘러싼 사건의 계기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생선을 썰다가 칼을 놓친 일은 ‘나’의 실수이지만, ‘나’는 그것을 ‘왼손’의 잘못인 것처럼 쓴다. 마치 ‘나’의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인격과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분열되어 있다. 혹은 이렇게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을 스스로 저질러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자신의 분열을 직감한다고 말이다. 별일 없는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왼쪽과 오른쪽을, 왼손의 방심을 오른손이 어쩌지 못하는 것을 날카로운 사건의 시간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거리에 대해 미리 염두했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5분’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되어서 “식탁에 마주 앉아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지은 시의 시간 감각이 특별한 점은 ‘나’를 나누고 ‘우리’로 재조합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아가 그렇게 나뉘고 만나는 존재가 마주하는 것이 어떤 공백으로 지시되는 것들이라는 데에 있다. “빈 접시” 같은 텅 빈 대화와 의미 없는 말만 쏟아내는 열린 입(“고장 난 서랍처럼”), 갈 곳을 잃은 시선(“거울에 남아 있는 눈동자”)과 금방 취소될 말들(“찢어버린 페이지”), 그 외에도 “빈 페이지”와 “잃어버린 우산”, “내리지 않는 비”, “뽑힌 플러그”가 의미하는 것은 공백으로서의 현재다. 가령 5분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5분 후가 되어야만 그것의 ‘있음’이 증명된다. 지속과 진행의 와중에 어떤 사건은 사건으로 이루말 할 수 없는, 사물과 낱말의 시간으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현재는 포스트잇과 흘러내리는 것과 엉엉 우는 울음과 무엇을 휴지로 닦아내고 의자를 옮기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하는 시간들로 무수히 분절되어 있을 뿐이다(“하루는 사라질 5분과 사라지고 있는 5분과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5분과 흘러내리는 5분과 엉엉 울고 있는 5분과 휴지로 닦아낸 5분과 의자를 옮기는 5분과 아무 것도 옮기지 못한 5분”, 「5분 후」). 때문에 임지은 시에서 ‘우리’는 아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현재성이자, 사라졌다가도 거듭 나타나는 영원성에 가까운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때로는 이러한 시간에 관한 감각이 심각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기도 한다. 과거라는 지나간 시간에 붙들리거나, 미래라는 도래할 시간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 없이 현재라는 불안한 시간에 사로잡혀야만 한다. 시간에의 사로잡힘은 어딘가에서 출발해서 어딘가로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지향적인 현실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문제는 그 어딘가로 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도 중에 원하는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라 정해진 곳에 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곳에 올라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추위와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무작정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 기다림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기약없는 기다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기다림의 와중에 누군가는 자신에게 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멈춤 열차」의 것이다. 열차는 앞으로만 나가고, 그 진행을 위해 우선 멈추어 있는 사람들. 3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열차는 오지 않고 시간은 “2시 59분 59초”를 지나 “61초 62초 63초”로 흘러간다. 이상한 초침의 진행을 목도하며 길게 도열해 있는 사람들의 형상을 상상하는 일은 그 자체로 ‘멈춤 열차’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시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와 그것으로 구성되는 서사를 생략하고 나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에 속수무책으로 발이 묶인 사람들, 도착하지 않는 열차처럼 무용한 현재를 살아가는 중인 존재들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한 이미지로 남는다.
표백되지 않는 얼룩
임지은의 신작 가운데 「존재 핥기」는 ‘나’라는 것에 대한 불온한 사유와 절감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나’는 아마도 과일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스크림이 금새 녹아내리는 계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입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스푼 위에서 녹고, 스푼을 든 손으로 흘러내리고, 간혹 옷으로도 흘러내려 “얼룩”을 만든다. 이런 상황은 잘 익은 토마토를 먹을 때와 비슷하다. 토마토를 손에 쥐고 베어물면 과즙은 여지없이 그것을 쥔 손으로 흘러내리고, 그러다보면 토마토는 씹어 먹는 것이라기보다는 “천천히 핥아 먹”는 종류의 것이라고 여기게도 된다.
무엇으로부터 흘러내려 나에게 옮겨 흐르는 것, 그것은 너무나도 미세한 얼룩이어서 나는 닦거나 씻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핥아버리게 된다. ‘핥다’는 행위 가운데에 미묘한 존재의 역전이 일어난다. 과일 아이스크림을 핥던 내가 내 몸에 묻은 그것의 얼룩을 핥는 순간에 “녹아내리는 중”인 아이스크림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잘 익은 토마토에 이를 박아 넣던 내가 내 몸에 옮겨 흐르는 붉은 액체를 핥을 때 나 역시 “잘 익은” 어떤 것이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몸을 구성할 것이라 여기는 발상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처럼 어떤 뜨거운 시간의 영향을 받아 녹아내리고 익어버린 것을 제 몸에 옮겨올 때 그 대상과 나 사이의 ‘기울어짐’과 그로 인한 ‘흐름’을 의식하고, 결과적으로는 나에게로 흘러든 그것의 일부분을 ‘핥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익숙하고도 낯선 장면이다. 누구나 손에 쥔 아이스크림이 손등과 손목으로 흘러내렸을 때, 그것을 핥아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 장면은 익숙하다. 그럼에도 존재의 전이를 그 본능적인 ‘핥음’에 의해 직감하는 상상력은 흔히 보지 못한 낯선 것이다.
이 익숙하고도 낯선 상상이 소중한 이유를 하나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이 ‘나’라는 한 존재를 생각하는 데 이르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기울어고, 흐르고, 핥는, 세 가지 동사의 역할이 해내는 것은 너와 내가 어떻게 만나고, 나는 너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같은, 관계에 의한 존재의 성찰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오로지 홀로 있어서는 자기 존재를 파악할 수 없고, 때문에 나와 관계 맺는 대상들로부터, 그 대상들과 어떻게 관계를 지속하고 단절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일로부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목구비가 혼자 거울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정의는 ‘나’로부터 쉼없이 발화된다. ‘나’의 혀는 내가 아닌 모든 말들을 ‘나’의 말로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오래전에 닳아버린 혓바닥이 아직 나에게 머무릅니다”, 「존재 핥기」). 달리 말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곧장 내가 되는 것은 아니나 ‘나’라는 존재를 궁금해 하는 이에게 ‘나’의 정체를 가장 분명하게 전달해주는 것은 ‘나’로부터 발화되는 말이다.
「존재 핥기」의 주체는 말을 뱉던 혀의 역할을 바꾸어, 무엇을 핥는 일로 돌려놓음으로써 특별해진다. 입 속의 혀는 말을 하고,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를 구축하고 자리를 확보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존재의 자기 존재감은 때로는 허약하고 씁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책상은 네 개의 다리와 직각을 이루는 상판으로 구성되어 반듯하게 놓여 있고, 의자는 그 앞에 단정하게 놓여 있지만, 그러한 속성들이 그들과 ‘나’를 반드시 안정감 있는 관계로 맺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무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그것의 얼룩이 내 손바닥에 생겨나는 일처럼, 때로는 “조금 기울어지”고 “삐걱거리는” 데에서부터 ‘나’라는 고유한 존재에 대한 인정과 안정이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존재들이
뜻밖으로 튀어 오르는 맛
자, 이제 핥아 먹을 시간입니다
-「존재 핥기」 부분
인용한 부분은 「존재 핥기」의 마지막 두 연이다. 이 시를 시작하는 처음 두 구절이 차례로 “달콤함이 입안에 남아있습니다”와 “가끔 다르게 불러주는 일이 필요합니다”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시는 의미상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존재는 입 속의 혀를 움직여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혓바닥에 남은 아이스크림의 맛처럼, “뜻밖”의 “수많은” 달콤함을 감각하는 ‘나’의 발생을 통해서 감지된다. 그때의 ‘나’는 아이스크림도, 그것의 달콤함도, 달콤함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아니며, 오히려 내 손으로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는 순간의 체험이 체화된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을 때 아이스크림이 묻은 내 몸은 아이스크림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수많은 존재들이/ 뜻밖으로 튀어 오르는 맛”을 보기 위해 “핥아 먹을 시간” 앞에 놓인 것 역시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지은 시의 ‘나’는 존재성을 증언하거나 증명하지 않고 스스로 맛보여주는 존재의 별명(“가끔 다르게 불러주는 일이 필요합니다”)이다.
불가능한 투명
“하루에 한 개씩 얼굴을 사용했다”고 고백하는 자와 “한번이라도 내면의 커튼을 젖혀본 사람”(「마데카솔 언니」)은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전자가 사람에 관계한 “믿음”을 의심하는 자라면, 후자는 의심과 확신 사이에 놓여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믿음」의 화자인데, 이 화자는 일종의 믿음이 깨진 상황에 처해있다. 믿음은 “하루 종일/ 살펴봐야 보일정도로 투명해”서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것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오염시키거나(“파란 잉크를 칠해두고”) 파손해야만(“투명한 컵이 깨져버렸다”) 한다. 오염되거나 파손되지 않은 믿음은 아예 ‘나’의 의식이나 감각 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다는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믿음에 대한 믿음을 추궁하기에 이른다. 투명한 것은 어째서 투명한가, 투명이 투명을 증명하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투명하지 않은 것이 개입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섞인 믿음이 아닌가. 이 투명함에 대한 물음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믿을 수 없음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제의 얼굴은 생각하지 않”고 “하얀 종이에 원을 그리고 눈 코 입을 채우”듯이, 매일 새로운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믿음」의 주체는 결국 자신을 의심함으로써 특별하다. 가령 애초에는 상대방에 대한 의혹과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던 자가 그 괴로움에 관해 골몰하던 시간을 보내며 믿음의 속성에 관해 생각하고, 그 혼자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는 누구나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믿음의 불가능을 불현 듯 직감한다. 믿음은 감은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물기처럼,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어제와 오늘로 이어지며 변하지 않는 것, 어떤 공고함을 통해 믿음을 말하는 기존의 방식은 임지은의 시에서 수정된다. 임지은 시의 주체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 생성되는 시간으로서 현재를 수긍함으로써 어떤 믿음에 도달한다. 그것은 “불가능이 물에 녹는 방식으로/ 우리는 계속 5분 후로 이동했다”(「5분 후」)는 표현에서 도달하려는 ‘우리’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도로 위에 언니/ 약상자속 붕대처럼 풀어도 풀어도/ 계속인 언니”(「마데카솔 언니」)라는 표현에서 만나고자 하는 ‘언니’에 대한 신뢰감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믿음은 분명하고 고정불변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강렬하게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그들을 ‘계속’ 변화하게 함으로써 사소하게 존재한다. 이 역할의 계속은 궁극에는 어떤 불분명을 증명하는 데 쓰이도록 세상의 모든 분명함을 이끈다.
나의 말들로는 모두 주워 담지 못하고, 나타났다 도로 사라지고, 계속 풀어도 다 풀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사유가 임지은 시의 배경에 흐르고 있다. 이것을 누군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존재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마지막에는 모두가 시에 관한 열망의 흔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을 견디며,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자의 모습이 모두 시를 쓰는 자의 “내면의 커튼”을 젖히고 언뜻 들여다 본 장면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무엇을 기다리는 일, 거듭 현재 속에 홀로 놓여 있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고통을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미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임지은 시의 주체는 보여준다. 그 고통은 과일맛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같다. 빠르게 녹아내리는 것을 모두 핥아 먹기 위해서, 나는 혀로 손바닥을 핥고 때로는 눈으로 거울에 묻은 자신의 눈동자를 핥는다. 기울어지고 흐르는 것을 핥는 일, 이것이 임지은 시 특유의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주체의 계속되는 현재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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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등단.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