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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동등한 조건에서 관계를 맺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대변해 줄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려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춘 존재가 필요하다. 그 두 가지 본성은 "서로 변환되거나 조함되거나 혼합되지 않으면서 한 인격 안에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신성이 충만해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는 존재여야만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골 2:9, 빌 2:6). 또한 죄는 없으면서 모든 일에 시험을 받는 참 인간만이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인간을 대표하는 중보자가 될 수 있다(히 4:!5). 이것이 중보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이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 그 모든 자격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인간에게는 위로가 넘쳤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다. 그분은 신성의 모든 속성과 영광과 영예를 공유하신다(요 1:1, 14, 빌 2:6). 또한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딤전 2:5).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우리와 같은 모양이 되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요 1:1, 14, 히 2:14-18, 4:15, 고후 5:21).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무지하고 미혹된 자들"을 깨우치시고,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히 2:17, 4:15, 5:1-4).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와 공로에 근거해 하늘에 들어가셨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옹호하신다(히 4:14, 15, 9:11).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신다(히 2:11). 예수님은 영화로워진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앞서 하늘나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분은 선택받은 백성의 대변자로서 영원히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신다(히 7:25).
족장 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자격이 있는 중보자를 갈망했다(욥 9:28-35). 욥이 갈망하던 중보자는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 그분은 "세상 끝"에 나타나시어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애셨고, 하늘에 오르시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다(히 9:24-26). 우리는 그분을 통해 "영혼의 닻", 곧 휘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하고 견고한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히 6:19). 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셨고, 우리의 칭의를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셨다(요 19:30, 롬 4:25).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역은 중보기도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교리 가운데 하나지만 잘못 이해될 때가 많다. 뛰어난 성경학자 찰스 하지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본질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성경의 표현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고, 그런 표현을 일일이 다 설명하려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존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주님의 중보 사역이 지닌 성격을 심하게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을 "카타콤의 모자이크에 나오는 형상처럼 양팔을 활짝 편 상태로 성부 앞에 서서 마지못해하시는 그분을 설득하려고 눈물로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상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보좌에 앉으신 왕이요 대제사장으로서 항상 그분의 요구를 듣고 응답하시는 성부께 원하는 것을 구하신다. 우리 주님이 하늘에서 하시는 일은 기도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주님의 요구는 항상 응답되며, 항상 효력을 나타낸다. 주님은 성부를 직접 대면하시며, 주님과 성부의 관계는 절대 깨지지 않는다.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주님의 제사장 사역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님이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확보하신 구원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저명한 학자들이 주의를 당부한 말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고 물어야 한다(히 7:25). 성경에 계시된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대답은 크게 네 가지다.
예수님은 선택받은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다
첫째,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속죄를 중재하신다는 생각, 곧 그분의 속죄 사역에 결함이 있다거나 그분이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성경은 때가 되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켜 단번에 속죄를 완성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한다(히 9:12, 26-28, 7:27, 10:10, 벧전 3:18).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1-14).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단번에 해결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부 앞에 서거나 엎으려서 선택받은 백성들을 위해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속죄가 완성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영원한 공로다.
예수님은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대리 속죄뿐 아니라 지속적인 중보기도를 포함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리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항상 간구하심이라"(히 7:25).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 모두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언급하면서 헬라어 "엔투그카노"(entugchano)를 사용했다. 이 말은 "기도, 간구, 중재"를 의미한다. 메시아의 미래 중보 사역과 관련하여 이사야는 히브리어 동사인 "파가"(pag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말은 "간청하다, 중재하다"라는 뜻이다(사 53:12). 따라서 원래의 의미와 문맥을 충실히 반영한다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는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 포함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사역은 그분의 이중 본성의 능력과 권위를 밝히 드러낸다. 그분은 전지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시련과 유혹, 필요를 동시에 모두 알고 계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의 어려움을 도와주실 수 있다(히 4:15, 2:16-18).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 그들을 위해 간구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대신해 하늘에서 중보기도를 드리시는 사역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세히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더라도 이 문제를 다룰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존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그분이 탁월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예수님이 하늘에서 어떻게 중보기도를 드리시냐고 묻거든,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 곧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에 드린 기도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그 기도를 주의 깊게 연구하면, 주님이 자기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에게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셋째,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는 마귀와 그 추종자들의 비난에서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는 사역이 포함된다. 성경은 마귀를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일컫는다(계12:10). "마귀"는 "고발자, 비난과 중상을 일삼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를 번역한 것이다.
마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고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들을 변호하신다. 그리스도의 변호는 그리스도인들의 결백이나 공로, 또는 마귀가 비난하는 말의 신빙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의 변호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죄를 지으므로 마귀의 고발이 옳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변호는 그분의 완전하고 확실한 사역에 의존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온전히 속죄하셨기 때문에 비록 마귀가 우릴 비난하는 말이 옳다고 해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바울의 질문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그는 우리를 정죄할 권한을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모든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귀의 고소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이길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장 약한 자조차도 어린양의 피 덕분에 가장 강한 귀신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계 12:11).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고소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실 뿐 아니라 그들이 마귀에게 공격 당할 때도 기꺼이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 그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지만,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32). 그분은 교회가 이어져온 2,00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그와 똑같은 일을 해오셨다. 그분의 중보기도는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
넷째,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죄를 물리치는 능력을 얻는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종종 실패를 경험한다.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하시는" 은혜로우신 대제사장이 하늘에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은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절망할 수밖에 없다(히 5:1, 2).
히브리서 4, 5장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두 가지 강력한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 가장 깊이 감추어져 있는 생각과 행위도 능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둘째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모두 알고 계신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우리 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는 두 가지 진리는 그리스도인을 무력하게 만들어 온갖 의심과 불확실성의 늪에 빠뜨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은혜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일에서 함께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으셨다(히 2:16, 18, 4:14, 15).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심과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히 4:16). 채리티 벤크로프트가 지은 찬송가는 이 영광스런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나를 위해 온전하고 강력하게 호소하시는 분이 계시네.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위대하신 대제사장께서
항상 살아 계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시네.
그분의 손에 내 이름이 새겨 있고,
그분의 마음에 내 이름이 쓰여 있네.
그분이 하늘에 계시니
그 누가 나를 쫒아낼 수 있으리.
사탄이 나를 절망에 빠뜨리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때,
고개를 들어 내 모든 죄를 속하신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네.
죄 없으신 구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죄 지은 내 영혼이 자유로워졌네.
의로우신 하나님은 만족하신 얼굴로
주님을 보시고 나를 용서하시네.
부활하신 어린양,
흠 없고 완전한 의를 지니신,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지존자요
영광과 은혜의 왕을 보라!
그분 안에 있는 나는 결코 죽지 않으리.
그분의 피로 내 영혼을 값 주고 사셨네.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의 구주요 하나님이신 그분 안에
내 생명이 감춰져 있네.
폴 데이비드 워셔 /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