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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장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웠던 장도영을 실각시켜 감옥에 보낸 후에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자 '의장 각하'가 되었다. 그는 대통령(윤보선)과 최고회의 의장 외에는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로 군사정권이 끝나고 그가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자 국가유일의 '각하'가 되었다. 기왕에 극존칭을 받으려면 전하(殿下)로 할 일이지 아무래도 각하는 무소불위의 한국 대통령의 격으로는 맞지 않는다. 이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국가의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일본 대신급으로 격하시켰던 각하라는 호칭은 훗날 민주주의자인 대통령 김대중의 지시로 사라지게 되었다.
박 정희 청년은 문경읍이라는 당시에는 오지의 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만주국 군관학교 생도로 그 출발은 미약 했으나 그의 60평생은 창대 하였다. 그의 연대기나 자료를 읽을 때마다 놀라는 것이지만, 진정 코 그가 하늘의 도우심이 없이 그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없었다고 본다. 그의 인생 고비 고비 마다 운명의 힘이 그를 돕고 구해 냈던 것이다. 가히 하늘이 내린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의 각종 자료를 읽고 내린 나의 결론 이었다. 내 나이 28살 되던 해 그는 딱 지금의 내 나이(만62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그가 타계한 나이에 이른 그의 친자가 현직 대통령으로 이 나라 국가 행정을 이끌어 가고 있고, 전국 도처에 그를 추앙하는 동상, 기념관, 생가등과 함께 그를 추앙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 동상과 장소에 참배하므로 해서 그 인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가 조선인 수재 형 청년으로서 사심 없는 애국자라면 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로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따져 볼 수 있지만 하늘이 내린 사람은 운명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마음먹으니 나이제한에 걸렸다. 서 너 살 이 더 많았던 것이다. 왜 좀 더 일찍 군관의 꿈을 실현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은 부질없는 것이다.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에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의 패망 후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박정희는 곧 국방경비대를 거쳐 육군 장교가 되었다. 건국 후 박정희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서울 육군본부 작전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신생 대한민국에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졌다. 북한 정권과 연계된 남로당이 광범위한 국군 프락치를 국군에 심어두고 군을 뿌리에서부터 교란 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여기에 남로당 국군 프락치 총책 이던 이태복과 연계된 박정희 소령도 적발되었다. 남로당 군 책 하부 조직관리라는 혐의였다.
【정보국 나의 사무실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 하였다. ㅇㅇㅇ의 간절한 주선으로 수감자 박정희의 면담 요청을 허락 하였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전력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천정에는 백열전구 하나가 켜져 있었다. 어두운 사무실 문을 등지고 선 침울한 그의 얼굴에도 짙은 음영이 깔렸다. 왜소한 몸집의 그의 얼굴은 경직돼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 자리를 권했다.
쿠데타의 지도자가 당시 나이 45살. 그 수하의 육사 8기생들이 고작 삼십대 중 후반 이었으니 젊은이들의 경륜을 탓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국시에 반공을 갖다 붙인 것은 그들의 역사관, 민족관 그리고 그 얕은 교양의 문제로 보인다.
40대 초반의 가장으로서 그 정도면 생활이 안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현상에 만족하는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라의 권력을 잡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순리대로 전역을 하고 정치에 뛰어드는 길(드골 대통령이 취했던 길)이 아니라 일거에 무력으로 나라의 정권을 잡는 방법론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수하에 그 꿈에 동참하고자 하는 부하들이 모였다. 부산 광복동 고만고만한 요릿집에서부터 서울 충무로 그렇고 그런 한정식 집을 오가며 막걸리, 정종 등의 술과 함께 단속(斷續)된 주석 모임이 있었다. 역적모의가 시작된 것이다. 군사 반란을 도모한 것이었다. 당시 참모총장이 장 도영 이었다. 그들 반란 세력들이 언제 어떻게 장 도영에게 언질을 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면 민주정부 수립 15일 이후부터 역적모의가 시작 되었다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백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의 무능과 정국혼란 그리고 부패를 쿠데타의 빌미로 내 세웠다. 스스로 자기모순을 밝힌 것이다. 동서고금의 아무리 유능한 정부도 수립 이후 안정을 찾기 까지는 일 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작 쿠데타 군사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집권 2년 간 우왕좌왕하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에 빠졌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 군사반란은 운명적으로 천운이 따른 경우였다. 쿠데타이든 혁명이든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모의를 하고 실행 하여 성공한 경우가 동서고금을 통하여 극히 드물었다. 모택동 일행과 홍군은 이 십 여 년 간 몸서리나는 시산(屍山)을 넘나들며 극한투쟁 끝에 혁명을 성공시켰다. 漢나라를 세운 유방의 경우는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고난의 전쟁을 통해서 정권을 잡았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포병장교답게 대포까지 동원한 쿠데타였다. 스페인의 프랑코 쿠데타 반란은 3년여의 처참한 내란 전쟁으로 이어졌다. 하다못해 전두환의 쿠데타도 소총의 탄알이 난무하고 군을 수호 하려던 장교들이 죽거나 다치면서 성공한 경우였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명실상부한 무혈 쿠데타였다.
60만 대군이 반란군에게 총 한 번 쏘지 않고 육군본부를 비워 준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하늘의 도우심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이면에는 육군 참모총장 장 도영의 야심과 좌고우면하는 기회주의가 있었다. 협량한 인물이었던 대통령 윤보선의 묵시적 사후 동의가 있었다. 장면 정부 약 9개월 간 윤보선은 행정권 없는 상징적 대통령자리를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 자신 2공화국 헌법을 모르고 대통령 자리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장도영과 윤보선은 그 때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박정희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장도영과 박정희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관계인 셈이었다.
건국 전 휴전선 전방에서 경비근무 중이던 박정희 중위와 연대 본부의 장도영 소령이 조우하게된 것이 그들 운명의 서곡이었다.
늦은 봄 해가 떨어진 무렵의 오후였다. 사위에 어스름이 깔리면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위는 고요 하였다. 중부 전선 전방 초소에 키가 자그마하고 마른 몸집의 중위 계급장을 단 박정희가 근무하고 있었다.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 야심차고 영민한 인물들이 그렇듯 눈빛이 살아 있었다. 전방 순찰 중이던 대대장 장도영은 박정희 중위라는 인물에 관심이 갔다. 알고 보니 1917년 생으로 1922년생인 자신보다 5살 연상이었다. 그의 전력이 궁금하였다. 만군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 했다는 답변이 있었다. 장도영 자신이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기왕에 일본군 졸병으로 만주에 주둔한 전력이 있었다. 전직 만군 중위와 전직 일본군 졸병이 상관과 부하의 신세로 뒤바뀌어 조우한 것이다. 이것을 신파적 표현을 빌면 ‘운명의 장난’쯤 되는 것일까? 하지만 박정희 중위는 일본군 전직 장교의 자존심을 표출하는 법도 없었고 일본군 졸병출신 현직 상관에 대한 불경도 없었다. 묻는 말에만 조용하고 겸손하게 답변 할 뿐 매우 과묵한 인물로 보였다. 장도영은 나이 많은 전직 만군 장교 박정희에게 일말의 동정과 함께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심상이 장도영을 운명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혈기 방자한 20대 청년 장교 장 도영으로서는 깨닫지 못한 일이었다.
건국 후에 여순반란 사건이 터졌다. 국군이 발칵 뒤집혔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것을 안 육군본부의 작전국장 장도영은 좌고우면 없이 백선엽 수사국장의 박정희 구명운동에 동참하였다. 위에 필설 한 대로 동참의 보람은 컸다.
5.16 군사반란이 무혈 쿠데타로 성공한 데에는 육군참모 총장 장도영의 위상이 크게, 아니 오히려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쿠데타 세력은 장도영을 전면에 내 세우면서 모든 지도적 직책을 그에게 부여 하였다. 장도영이 40살. 박정희가 45살 때였다. 그 때 장도영이 무슨 생각과 장래의 포부를 가졌는지는 자식세대인 내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그는 쿠데타 2개월 여 만에‘반혁명(반 쿠데타)모의를 주도한’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이 내려 졌다. 속절없이 수갑을 차고 독방에 수감 되었다. 장도영은 쿠데타 발발 불과 2 개월 만에, 그리고 박정희 중위와 만난 지 13년 만에 수갑을 찬 채로 한 평 남짓한 감방에 갇혀 도대체 무슨 상념에 사로잡힌 것인가?
아, 소리도 못해보고 속절없이 사형수의 처지가 된 장도영은 수갑을 차고 어둠침침한 백열전구 아래 쪽방과 같은 독방 마룻바닥에 퍼질러 앉아 끊임없는 자조적 상념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 나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가? 쿠데타 전날 밤에 이상한 낌새에 시달리던 장면 총리가 나를 총리사무실로 긴급히 호출 했을 때 그에게 달려가지 않고 헛바퀴를 돌린 것이 도끼로 발등을 찍고 싶도록 후회가 되는구나. 내가 그들을 더 믿었단 말인가? 장면 총리는 나를 참모총장에까지 앉히지 않았나? 이런 배은망덕한 놈! 애비를 참모총장이라고 자랑하던 나의 아이들은 지금 애비를 어떻게 생각 하고 있을까?”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자를 신뢰 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그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다 하였다. 그런데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를 참모총장의 지위에 올려준 국가와 정부를 배반하고 그런 자를 믿었던 나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과 아내는 뭐가 된다는 말인가? 나는 그 자를 위하여 13년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를 다 하였다. 인간관계에는 도리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닌가. 반혁명 모의? 혐의? 그렇게라도 하고서 이 꼴이 되었다면 후회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 내가 설사 살아난다 해도 이제 더 이상 한국 땅에서는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게 됐구나!“
장도영은 결국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은전(?)으로 형 집행 후에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여 지방대학의 교수로 봉직 하다가 타계 하였는데 생전에 다시 한국 땅을 밟지는 못하였다. 그에게는 어찌 됐건 간에 군사반란의 얼굴 마담 지도자였다는 낙인이 있는 것이다.
어제 이 나라 언론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 성유보 선생이 타계 하였다. 그는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언론투쟁을 한 언론 지식인 이었다. 그가 전 생애를 바친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보람이 있었나? 오늘날의 한겨레언론의 형편이 대답을 대신할 것으로 본다.
인간들의 아우성이 어떻든 시간과 세월은 흐르게 마련이다. 5.16쿠데타 세력의 자식세대인 나도 어느덧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처지가 되었다. 인생의 낙일(落日)을 보는 처지이다. 내 나름대로 이 나라의 현대사를 보고 듣고 읽은 바를 필설 하는 것이지만 의미 없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날 이 세상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본이고 정치권력이다. 그 밑에서 쇠잔한 서민의 몰골을 하고 있는 나는 자괴감을 느낀다. 지금이라도 아Q의 사고방식을 배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