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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Horace G. Underwood는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데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감동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즉시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선교사를 부르시는 순간, 저는 마지막까지 거부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많은 지원자들을 보면서도, 저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로 지원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세 번째 결단 시간 때는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지루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결단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습니다.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평소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중국과 북한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중국과 북한에 대한 빚진 마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솔직히 중국과 북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마음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가끔, 친하게 지내는 동료로부터 언제까지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빚진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합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은혜를 값없이 선물로 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주어졌으니까, 절대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력餘力이 되는 만큼만 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노후를 위한 대책을 세워놓기는 하였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고 대답합니다.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맞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비록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과 결과가 돌아올 때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아지지 않아서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부르신 분의 선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곳 곧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충성하는 일군들입니다. 그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두껍고 잘 접히지도 않는 이불을 서너 겹으로 덮어도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 혹독한 추위와 싸우면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약을 먹어도 도무지 떨어질 기색起色조차 보이지 않는 고질병을 달고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각되는 날이면 인생이 끝장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숨바꼭질 하듯 은밀하게 공안들을 피해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가까운 주변 지역에서 성경공부 반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즉시 하고 있던 일을 내려놓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다음으로 미룹니다.
은혜 받은 복음을 또 다시 듣기 위해서 결코 짧지 않는 거리를 어떤 성도들은 걸어서, 어떤 성도들은 자전거를 타고, 어떤 성도들은 트랙터를 몰고 한걸음에 달려옵니다. 끼니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저희들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을 듣습니다. 자신들은 굶고 있으면서도 일군들은 먹어야 한다며 식사를 대접합니다. 일군들이 함께 모여서 훈련을 받는 장소로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놓습니다. 받은 은혜와 감동이 너무나 커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흐느끼는 소리조차도 내지 않습니다. 집을 내놓은 성도들은 물론 자신들의 신분도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한주동안의 성경공부를 마치고 돌아서는 제 손을 놓지 않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자신들에게는 한 달 생활비에 가까운 물질을 적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쥐어줍니다. 20,000km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마음만큼은 정말로 가볍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먹고 입고 마실 것 등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 역시 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곳 곧 중국과 북한이 주는 은혜는 무엇보다 크고 놀라웠습니다.
그곳에는 이곳과는 다른,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감동과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는 약혼녀를 찾았습니다. 같이 조선으로 갈 수 없겠느냐고 설득했습니다. 약혼녀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약혼녀는 또 병원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낯설고 물 설은 외국에서 아픈 몸을 치료할 수 없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약혼녀는 또 그가 조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하나님을 모르는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조선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약혼녀는 조선으로 동행하자는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정식으로 파혼을 통보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출발하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했던 것입니다. 이후, 조선에 도착한 그는 서양식 병원, 고아원, 수없이 많은 학교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마음에 닿지 않는 그렇지만 그는 자세하게 보고 느끼면서 누렸던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인 김옥춘은 2010년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걸을 수 있고, 설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간절하게 부르짖어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이어집니다.
결코 쉽지 않은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한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어도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을 모르지만, 시인만큼은 누구보다 자세하게 보고 느끼면서 누릴 수 있었던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은 예측불허의 사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단 하루도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예측불허의 사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사건은 단 한 가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예측불허의 사건들은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다 가장 이상적인 때에 주어집니다.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사명의 자리로 인도해 줍니다. 곧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허무하게 잃게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할 그곳으로 인도해줍니다. 사도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부담이 주어졌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쉽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고난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거듭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행20:24)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고난과 죽음의 고비들을 넘기면서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했습니다. 쉬지 않고 충성했습니다. 그런 그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고난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른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예루살렘 곧 그곳에 존재해야만 하는 거룩한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존재해야만 하는 거룩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두셨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어드렸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현장은 사명의 자리입니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바로 그곳입니다. 반드시 견뎌내야 할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내놓아야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자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Gary Keller $ Jay Papasan은 함께 집필한 “원 씽The One Thing : The ONE Thing: The Surprisingly Simple Truth Behind Extraordinary Results”이라는 책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무엇이냐고 반복해서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에너지를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하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자리 곧 그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이 자신의 에너지 전부 곧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 요구한다면 기꺼이 거룩한 희생 제물로 쏟아 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창22:1b)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결의決意에 찬 대답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현주소가 “하나님 앞Coram Deo”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그곳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b)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비교할 대상이 아예 없을 정도로 귀하디귀한 아들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이 떠난 이후부터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아들입니다.
이십 오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린 끝에 겨우 얻은 아들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서 겨우 태어난 유일한 아들입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아들입니다. 사랑을 통째로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 이삭을 오래전에 이미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선택해 두셨던 그곳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죽이고,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절대로 간과하지 말고 반드시 살펴봐야할 너무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너는לְךָ֔ (레카)”입니다.
개역 개정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은 철저히 배제排除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자신이 직접 죽이고 불에 태워서 희생 제물로 드려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혼자 서야만 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혹독한 시험을 혼자 외롭게 감당해 내야만 했습니다. 힘겨운 싸움을 혼자 싸워내야만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열 달 동안이나 뱃속에 품고 있었던 아내에게조차도 입도 뻥긋할 수 없었습니다.
심장이 터져서 물과 피가 분리되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싸워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서도 피 채로는 먹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셨습니다. 피를 흘리게 만드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거기다 이삭은 죽임을 당해야할 어떤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녁때마다 묵상하고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명령하셨습니다. 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경고하실 정도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희한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약속해주셨고, 오래 기다리게 한 다음 주셨다가, 이제는 다시 가져가겠다는 이상한 상황을 연출하셨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삭을 제물로 받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당신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곧 순종 여부를 확인해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당신을 얼마나 경외하는지 확인해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나귀 등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 이삭과 종들에게 길 떠날 준비를 시켰습니다. 번제에 쓸 장작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시하신 그곳을 향해서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80km 정도였습니다.
성인 남자 걸음으로 대략 삼 일 정도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관련해서 성명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지성소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속죄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희생과 헌신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었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멀쩡한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쳐야 하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어려운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죄는 그림자조차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인생들은 흉내조차도 내기 어려운 그야말로 완벽한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은 날로부터 시작해서 나흘째 되던 날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찬을 나눈 날로부터 시작해서 나흘째 되던 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그곳에 도착한 날은 절망의 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 시작되는 복된 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날들은 희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희망도 희망, 절망도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그곳에는 햇빛에 영롱하게 반사되고 있던 구름이 덮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그곳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있어야할 그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한편, 성경은 아브라함이 집을 떠나서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 앞에 선 아브라함이 겪었을 인간적인 갈등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반복해서 설명해준다고 해서 헤아려질 수 있는 갈등과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녀朴婉緖는 남편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참척慘慽의 고통이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구원의 가망이 전혀 없는 극형이었습니다.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 속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아니 헤아리려는 시도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영원 전부터 완벽한 하나였던, 그것도 죄는 그림자조차도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헤아려 드릴 수 없습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해 드릴 수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난도, 어려움도, 박해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도, 사망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끊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그곳의 이름은 “모리아מוֹרִיָּה(마르에야)”였습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친히 구별해 주셨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곳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희생과 헌신과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드렸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드렸는지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곳에서 드려야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법으로 드려야합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신 그곳은 약 5km전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브라함의 심장 박동 횟수는 급격히 치솟았습니다. 정점頂點을 찍은 후 아예 내려올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요동쳤습니다.
그때, “여기가 내가 지시한 바로 그곳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번 더 그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바로 잡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비록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기꺼이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들을 따로 분리했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과정에서 방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시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브라함 개인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혼자 감당해야 할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눅9:23b-24)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졌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내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바쳤다...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히11:17)라는 증거대로,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곳으로 올라간 아브라함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단을 쌓았습니다.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 이삭을 결박했습니다. 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았습니다. 아들을 짐승처럼 잡기 위해서 칼을 든 손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놀랍게도, 독자 이삭은 자신을 결박하고 단 위에 올려놓은 다음 죽이려는 아브라함에게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순순히 따라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에 철저히 굴복하셨습니다. 살리는 것도 사랑이고, 죽이는 것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다급한 목소리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소대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창22:11b)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지 기꺼이 순종할 마음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가리킵니다. 평안할 때도 그랬었습니다.
지금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상황에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독자 이삭은 이미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의 시험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절대 믿음을 고백하고 순종하는 그를 위해서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두셨던 숫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삭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독자 이삭을 돌려주셨습니다. 그곳에 꼭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는 그곳에 꼭 필요한 은혜를 미리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연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려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두셨습니다. 꼭 필요한 은혜를 미리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시기적절時期適切한 때에 맞춰 부어주고 계십니다. 객원보컬 팀 Hiswill은 “광야를 지나며”라는 CCM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가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수 없는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께서 당신 영광 하나만 오롯이 드러낼 수 있도록 광야를 마련해 두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꼭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고 계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막은 언뜻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꼭 필요한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경은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1:31)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성민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을 가슴에 안으셨습니다. 당신 예비한 그곳으로 친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할 자리에 두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은혜 안에서 값없이 덤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있어야할 곳에 두십니다. 그곳에 꼭 필요한 은혜를 예비해 놓으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가 이르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값없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든 하십시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두신 그곳에서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마음, 뜻, 정성, 힘, 생명까지도 바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사전에 미리 예비해 놓으신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물론 여호와 이레 하나님만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오롯이 올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