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24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개었다가
비 뿌리다(卽事)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圓鑑 冲止) 선사
반청반우천음음
半晴半雨天陰陰
사난사한춘적적
似暖似寒春寂寂
펴문감와도황혼
閉門憨臥到黃昏
은은소종감창벽
隱隱疎鐘撼窓壁
날씨가 개었다가 비 뿌리다
하늘 기운 음습하고 음산한데
따뜻한 듯 쌀쌀한 듯
봄 날씨 또한 심란하구나
문 닫고 가만히 홀로 누워
황혼의 저물 녘에 이르나니
먼 절(寺刹)의 소북소리가
창벽에 와서 부딪히며 들리네.
"
제목(題目)으로
사용(事用)된 문장(文章)
《즉사卽事)》는
즉흥적으로 떠 오르는 감정
시상(詩想)을 통해서 시(詩)를
읊음(게송)을 말한다.
또한
《음음(陰陰)》이란
구름이 끼어 어두컴컴하다.
라는 뜻이며
《감와(憨臥)》란
오랫동안 누워 있다.
라는 의미이다.
"
한중우서(閑中偶書,
한가로운 중에 우연이 쓰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圓鑑 冲止) 선사
암재천봉리 庵在千峰裡
유심미역명 幽深未易名
개창변산색 開窓便山色
폐호역계성 閉戶亦溪聲
암자(庵子)가 있는 곳은
천 봉우리 속에 아득히 숨어
골짜기가 깊고 험하여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네
창문을 열어 바라보면
다가서는 것은 산빛이요
문을 닫고서 고요히 있으면
스며드는 것은 개울 물소리뿐.
"
위(上記)에서
사용(事用)된 문장(文章)
《미이명(未易名)》은
이름(名)을 잘 알 수가 없다.
라는 뜻이다.
출전(出典)
해동조계제육세원감국사가송
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선사(禪師)의
시(禪詩)이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1226∼1292)
선사(禪師)는
고려시대
선승(禪僧)으로서
고려의 수선사(修禪社)
제 6세(第 6世) 국사(國師)이다.
속성은 위(魏)씨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法名)은
법환(法桓)이며
뒤의
법명(法名)은
충지(沖止)
자호(字號)는 복암(宓庵)
또는 복암노인(宓庵老人)이다.
원(元) 나라
세조의 흠모를 받았으며
원오 국사(圓悟國師)의
부처님 법(佛法)을 이어 받아서
수선사(修禪社)
제 6세 국사(國師)가 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 佛家)에
나아가(정진)
득도(得道)하기를
원(축원 발원)하였지만
양친(父母)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官職 조정 관리)에
몸(一身)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門下, 佛門中)에 들어가
승려(僧侶)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巡歷, 돌아다닌다)
하였는데
이 것은
항상 도(一心成佛道)를
얻고자(수지 득지)
53선지식(53 善知識)을
찾아다닌《화엄경》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本) 받고자(效視) 함이었다.
1266년
(고려 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圓悟國師,
1215~1286)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
조정의 교지)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제수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甘露寺)를 떠나
전라도 승주군의
수선사(修禪社)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원감국사 충지 스님)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대선사(大禪師)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대선사(大禪師)
등(等)으로 부터 시작된
수선사(修禪社)의
법통(正統的 부처님 法統)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禪定 참선 명상 수행)보다는
교(敎學 부처님 가르침)에
치중하였다.
이후
수선사(修禪社)
제 6세 국사(國師)가
되었고
1271년 여름
합단적(哈丹賊)의 난(亂)을
피(避)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오로지 수선사에서
교화 생활에만 몰두하며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293년 1월 10일
문하 문인들에게 설법(說法)과
게송(偈頌 오도송)을 남긴 뒤
법랍(法臘) 39세로
입적(入寂 열반 해탈)하였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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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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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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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