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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자를 구하는 욥
욥기 9: 25-35
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하나님과 마귀의 관계는 마귀의 타락 이후 영원한 원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영원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반면 마귀는 피조물로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 하나님과 전혀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마귀가 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마귀가 아무리 악을 도모하며 어둠을 확장시킨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막거나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귀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는 사실에 대해 알려주지만 그럼에도 그의 활동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마귀의 의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며 하나님을 이기고자 하는 지독히 어리석은 악한 발상입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무모한 악독함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마귀가 인간들의 마음에 악한 동기를 부여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런 성경적인 예들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23 그(예수)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성령)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23, 32-33)
베드로의 이 말씀을 보면, 악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장 무서운 악을 저질렀는데 그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미리 아신 대로 예수님을 내준 바 된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악한 일의 발생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에게 인구 조사하도록 격동 시키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인구 조사는 참으로 교만하고 악한 죄악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그런데 역대상을 보면, 다윗을 충동한 존재는 사탄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즉, 실제로 다윗이 죄를 짓도록 충동한 것은 사탄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충동시켜 다윗으로 죄를 짓도록 한 것이니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킨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를 향해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도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출 14:8)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 14:4).
이에 대해 신약에서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7-18)
이런 부분을 읽고 마귀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한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죄악을 저지르시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 전체를 오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와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마귀가 하는 일에 대해 마치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못하시고 방관자로 계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런 경우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마귀의 활동에 대해 매우 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물론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실 것이지만 현재 진행되는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 및 그리스도께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귀를 심판하시는 날이 이르기까지는 악과 선은 대등한 입장에서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극도로 긴장을 하고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마귀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패배하게 되어 고난과 질병과 가난 등,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신학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권능과 섭리를 오해하고 있는 비성경적인 사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악과 무관하시며 악을 조장하지 않으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속성과 모순이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는 악의 어떤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가 분명하게 외칩니다.
[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3, 16-17)
우리는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관계는 인간의 논리로 파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사용해서 선을 이루시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선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악한 사건 속에서 주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너무나 깊은 지혜와 섭리 가운데 진행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영향을 받지도 않으시고 죄악을 범하지도 않으시며 또한 시험에 들지도 않으시고 실패도 없으시고 항상 무한한 선과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며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바울은 참으로 깊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우리는 욥기 1장과 2장에서 천상에서의 어전 회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천상의 어전 회의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천상 회의는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으며 그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마귀는 하나님이 주권 아래 허락된 사건 속에서 그의 악하고 어리석은 뜻을 따라 온 힘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고 저주하게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귀가 온 힘을 다해 신자들을 유혹하고 또한 자기 권한 아래 있는 모든 졸개들과 악인들을 동원하여 온갖 악을 저지르더라도 결국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상황 속에서 신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면 아무리 마귀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도 신자에게 유익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할 때나 고난의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에 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항상 주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뜻을 믿음으로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욥처럼 영원한 칭찬을 듣게 되는 믿음의 영웅들이 될 것입니다.
자, 우리는 다시 한번 욥이 당한 비참과 고난은 그의 온전함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1, 8)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계시를 보면 하나님은 욥을 노아와 다니엘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14, 20)
물론 이들의 온전함은 예수님처럼 죄가 없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난 번에 다룬 것처럼 욥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욥 역시 구원을 받으려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이에 그는 이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늘 자기와 가족 전체를 위해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1-2).
욥은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심판하시면 그 누구도 주의 거룩하고 엄중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도 더러운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인간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 14:1-4)
그럼에도 그는 온전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뜻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노아처럼,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주의 계명을 지키며 또한 번제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 언약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작은 죄라도 범하게 되면 곧바로 죄를 회개하고 번제를 드리며 죄 사함을 받았고 그런 상태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 안에서 주와 교제를 나누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흠이 없고 정직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의로움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그렇게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 왜 그러한 극심한 고통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습니까?
만일 그가 고질적인 죄가 있는 평범한 신자였다면 우리는 그가 주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그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고통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경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이 땅의 그 누구보다 의롭다고 칭찬하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하고 정직한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욥의 친구들은 말합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욥이 당한 고난을 보아서는 그는 틀림 없이 분명히 어떤 비밀스러운 큰 죄를 숨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악하고 잔인하게 그를 대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내가 지은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나를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고 또한 뭔가 죄성을 교정하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내게 왜 이런 재앙을 당하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욥의 원수처럼 행하시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를 신뢰하며 그분의 구원을 소망합니다. 즉,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자, 욥은 세 친구 앞에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느니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빨리 죽을 수 있다면…” 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바스는 곧바로 욥을 다그치며 숨겨 놓은 무서운 죄를 토설하라고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이때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저의를 알게 되면서 크게 실망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친구이기는커녕 잔인하고 무식하고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말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욥 6:2-3).
“내가 너무나 괴로워서 생각 없이 말했구나 너무나 괴로워서 고통 가운데서 처절히 말한 나의 말을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런 고통 가운데 이런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이런 고난 가운데 푸념한 것인데 뭐가 그리 심각하냐?”
“절망한 사람에게 친구의 친절이 있어야 그가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을 것이 아니냐”(욥 6:1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욥 6:4, 10).
“내가 죄를 지었다고 추측하지 말라. 너희는 함부로 판단하는 그런 죄를 짓는 행악자가 되지 말라.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러한 숨겨 놓은 큰 죄악을 지은 일이 없다. 내가 옳고 그른 것도 판단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죄를 짓고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겠느냐?”
이 말을 하고 욥은 다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탄식합니다.
[
3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욥 7:3-6)
욥은 이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합니다.
“주여, 내 생명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듯한 순간에 와 있습니다. 나의 눈은 이제 내가 잘 되고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고통의 기간, 비참의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이제 저는 곧 죽을 것입니다. 나를 볼 자들이 나를 못 볼 것이며,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참조, 욥 7:7-10).
욥은 자신이 곧바로 고통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다루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힘들어 합니다.
[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탄식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 7:11-16)
그러면서 욥은 만일 하나님께서 욥을 지적해서 그가 날 때부터 지은 모든 죄악을 따지시며 심판하신다면 자신은 아무런 할 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 7:17-19)
그러면서 내 허물을 사하여 주시며 죄악을 제거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욥은 자신은 이 세상의 인과응보 원리로 이런 천벌을 받을 만한 죄악을 지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만일 하나님께서 작은 죄악이라도 따지시면 주의 심판에 대해 피할 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탄식은 호소로 마칩니다(욥 7:20-21).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여, 저를 사하여 주소서. 내 허물을 제하여 주소서. 이제 곧 죽게 될 텐데, 그 전에 그리하여 주소서. 그래서 저를 용서하신 후 제가 죽기 전에 주를 만나 뵐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이렇게 하여 욥은 주께 드리는 기도로 엘리바스와의 대화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공격합니다. 그의 신학은 흑백 논리의 율법주의였습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욥 8:1-2).
그리고 욥에게 임한 재앙을 두고 강력하게 다그칩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 8:3-4).
빌닷은 그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악독함을 순식간에 뱉어냅니다.
“네 자녀 열 명이 하루 아침에 죽은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죗값을 치르게 한 것일세”
이런 말보다 욥의 가슴에 더 못을 박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빌닷의 이런 말은 이미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한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가장 예리한 칼로 다시 쑤시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일 것입니다. 이때 빌닷은 ‘주께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주께서 네 자녀들의 죗값을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하루 아침에 그들을 당장 죽이시는 재앙을 내리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이 말을 사실로 듣는다면 이런 말은 얼마나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자극하는 최대의 유혹이겠습니까?
그러면서 빌닷은 엘리바스와 동일한 권면을 하고 회유를 시작합니다.
“자, 지금이라도 전능하신 이에게 죄악을 토설하고 잘못했다고 빌라. 그렇게 회개하고 빌면, 그래서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돌보시고 네 병도 낫게 하시고 네 의로워진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다”(참조, 욥 8:5-6).
그리고 빌닷은 이 땅의 여러 교회와 가정에서 잘 보이는 곳에 푯말로 붙여 놓은 매우 유명한 말을 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그리고 빌닷은 자신이 한 말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말합니다. 그의 말의 권위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선조들이 깨달았다고 하는 어떤 기준들입니다. 얼마 전 엘리바스의 절대 기준은 그가 체험한 어떤 영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한 영이 한 말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욥을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빌닷의 권위는 전통에서 오고 있습니다. 곧 오랫동안 믿어져 왔던 진리를 말합니다.
빌닷은 전통에 의지하여 노골적으로 욥을 빗대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의하면, 왕골과 갈대는 물만 좀 있으며 크게 자라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말라 비틀어진다. 욥, 바로 네가 이 꼴이다. 너는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저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망한 것이고 너희의 희망도 무너진 것이다”(참조, 욥 8:11-13).
빌닷은 욥이 재산 좀 모아놓고 뻐기면서 교만해지더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쫄딱 망했다고 말합니다. 자녀 열을 낳고 자녀와 건강을 자랑하며 거만해지더니 하루에 자녀 열명을 잃고 더욱이 악성 종기로 무서운 질병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욥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과 자녀와 건강이었기에 그가 믿는 것이 졸지에 다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다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미줄 같은 것을 의지하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이러한 근거 없는 추측을 하며 계속 악담하며 욥을 저주합니다.
“욥의 인생은 잘 나가는 화려한 식물 같았으나 그 뿌리가 뽑히니 그 뿌리가 다시 땅 바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집을 의지하였지만 집이 서지 못하였고 이제는 누가 굳게 붙잡아 주어도 그의 집은 보존되지 못할 것이다”(참조, 욥 8:15-19).
빌닷은 참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평생 친구처럼 지냈는데 이제는 욥이 고통 당하고 망하였더니 그 친구 앞에서 이처럼 독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단처럼 그릇된 신학은 참으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무정하고 잔인하고 악하기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멸망 받을 사람들의 특징을 나열합니다.
[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자요하나님께서미워하시는자요능욕하는자요교만한자요자랑하는자요악을도모하는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29-31)
참으로 빌닷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불의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무정하고 잔인한 빌닷이 이제는 욥을 회유합니다(욥 8:20-22).
“지은 죄악을 토설하게나. 하나님을 찾게나. 그분 앞에서 회개하고 간구하게나. 자, 정직하게 말하게. 자, 지은 죄악을 말해 보라고. 하나님은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으셔!”
“그러나 정직하게 토설하면,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기에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실 것일세. 자네가 자네의 장막 안에 있던 죄악을 토설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이제는 오히려 자네를 미워하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야. 자, 회개합세. 악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일세.”
이처럼 빌닷은 욥과 그 가정이 악인의 장막이라고 빗대며 욥의 가정의 모든 죄악들을 하나님과 그들 앞에서 토설하라고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전통이라는 명분을 세워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수가 바로 빌닷의 저질렀던 실수였습니다.
빌닷은 복음과 거리가 먼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복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고 저주하도록 하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사랑 가운데 이 세상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난들에 대하여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독한 빌닷의 말을 들은 욥이 대답합니다. 그는 친구인지 알았던 빌닷이 매우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닷의 주장은 전통에서 나온 것인데 이 세상의 인과응보적인 사고로서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은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요 이 세상에서 불행하면 그는 죄인이라는 증거로 삼는 괴팍한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전하며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빌닷의 말에서 욥은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었습니다. 전혀 위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먼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꿰 뚫는 공의로운 눈 앞에서 모두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합니다. 욥이 말합니다.
“빌닷아, 단편적으로 너의 말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순전을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없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참조, 욥 9:3, 15, 22, 32).
즉, 하나님이 따지시면 모든 인생은 영원한 지옥 불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죄악대로 심판 받지 않음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욥은 점점 복음적으로 깊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
욥은 하나님은 모든 자연과 우주를 다스리시며 심지어 악의 세력도 완벽하게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수없는큰일을, 셀수없는기이한일을행하시느니라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욥 9:6-10, 13)
여기서 라합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가장 큰 용, 또는 큰 물고기를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 및 라합을 돕는 모든 악한 영들도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들의 사회와 마음까지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그러면서 결론은 이러한 창조주시며 모든 만유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누가 감히 대답하며 떳떳하게 설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나의 용서를 구하는 간구를 들으실지는 나는 알 수 없도다”(참조, 욥 9:14-16)
그러므로 욥은 자비를 구합니다. 욥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께 간구하여 자비를 얻는다면 그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인생의 안녕과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합니다. 자비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합니까? 이것이 욥의 궁극적인 질문이며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이며 그분의 중보자 역할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성령을 통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보니 하나님은 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구했어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까다롭게 하나님께서 욥의 잘못을 찾아서 죗값을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욥 9:17-18).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욥은 자신은 진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였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의 기준으로 욥을 측정한다면 율법의 정죄함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욥 9:20).
이는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과 그분의 완전한 율법의 심판 앞에서는 자신은 죄인이요 부패한 사람인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리는 결론은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전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순전하든 안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천박한 인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니 다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순전한 자건 악한 자건 언제든지 멸망시키신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죄 많은 자나 죄가 적은 자나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요,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재앙을 당한다고 욥은 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자비가 끊어졌고 결국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특별한 죄악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그리고 그러한 죄를 주께서 심판하시는 것 같으니 아무런 따질 힘도 없고 변명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하나님께 따질 수 없고 단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욥이 갑자기 밝아집니다. 바로 번제가 가리키는 메시야, 곧 중보자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 그러한 판결자가 나타나서 */)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욥 9:29-35)
여기서 ‘판결자’는 원어로 (모키아)라고 되어 있는데 분사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70인경에 따르면 양측을 화해시키고 이해시켜서 서로 친교하고 대화하도록 언약을 맺게 하는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33절 이하를 쉽게 써 놓으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변호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과 내가 마음껏 대화할 수 있도록 내 죄를 가려주고 하나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내게 은혜를 베푸시도록 나를 변호해 주실 분이 없을까? 그러한 중보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에 대하여 점검하지 않으시고 나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실 텐데,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맘껏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 그러한 중보자만 계시다면 나는 하나님께 아무 두려움 없이 말씀 드릴 텐데, 그러나 그러한 중보자가 없이는 지금 내 스스로 나를 변호할 수 없고, 따라서 나의 죄를 살피시는 하나님께 전혀 나아갈 수 없구나!”
우리는 그 중보자가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이 말합니다.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4-7)
또한 히브리서 사도는 그 중보자는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이라고 알려줍니다.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이처럼 욥은 원수들의 조롱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아무리 자신이 고결하고 온전하더라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두 측을 화목하게 하실 중보자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욥과는 달리 많은 죄악을 지은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더욱 우리의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고 얼마든지 주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량과 부활로 인해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복된 주의 자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