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세기, 문자 발명 전, 고대 그리스 음유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시를 짓기 전에, 음악과 시를 관장하는 무사 여신(Μουσα, 영어로는 뮤즈Muse)에게 시적 영감(靈感)을 구하는 기도를 올리고, 부여받은 영감으로 지은 시를 영혼에 새긴 뒤 청중들에게 낭송해 주었다.
청중들은 소경인 이 음유 시인이 들려주었던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 이야기와, 이후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귀향 이야기를 눈을 감은 채 청각만으로 즐겼다. 시인의 이야기에 매료된 채 청중들의 몸은 이 서사시의 리듬과 운율에 따라 춤추듯 반응했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호메로스의 후예들에 의해 구전(口傳)되던 이 서사시는 기원전 6세기, 문자를 도구로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로 집대성된다.
시의 청각적 울림을 즐기던 전통은 호메로스 이후 천 사백 년의 세월을 지나 시인 셰익스피어의 시대,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엽까지 이어졌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의 배우들이 음성으로 밟는 운율에 넋을 빼앗겼던 당대 런던 관객들은, 극장에 연극을 ‘보러’(to see) 간다고 말하지 않고, ‘들으러’(to hear) 간다고 말하는 고유한 전통을 후대에까지 전했다.
지금도 시도되는 시낭송회가 이 전통의 연장이다. 시인의 발성이 조성하는 리듬감과 운율, 의성어, 의태어를 생생하게 느끼자는 것이다.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독자들은 시의 운율에 민감해지는 순간 미묘한 정서의 떨림을 경험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낭송은, 시어(詩語)와 그 소리의 울림 간의, 오랜 기간 존중되어 온 관계를 회복하려는 행위이다.
안타깝게도, 디카시를 접하는 현대 독자는 ‘글과 영상’이 어떻게 융합되는지를 살피느라 이 혼합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것 같다. 리듬과 운율의 울림을 그리워하지 않은 채.
첫댓글 제가 준비하고 있는 디카시집의 발문을 적어준 친구의 글 중 일부입니다.
디카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성격도 담고 있씁니다.
강현국님의 글을 읽고 연상되어 올립니다
호메로스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