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4막 22장(5부)
만 20세가 되며는 투표권이 부여됨과 동시 국민의
4대의무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였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국방의 소임을 대체하며 일반인들은 만20세가 됨과 동시 병무청에 방문하여 병역판정검사를 받아야 하였다.
1979년 병무청에서 시행된 병역판정검사는 4등급으로 구분하였으며 1,2등급은 현역, 3등급은 보충역 , 4등급은 군면제로 구분되였다.
그당시는 베이비붐으로 인력이 넘쳐나 조금만 신체에 이상이 있어도 3등급을 받게 되였다.
심지어 2등급에도 1등급에서 인력이 수급되면 보충역으로 판명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나는 병역판정검사 결과 시력이 나빠 3등급으로 판명되여 보충역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였다.
보충역은 동사무소에서 예비군통지서나 배포하고 예비군업무를 수행하는 "동사무소 방위병"과 기타 군시설및 군부대에 보조기간병으로 근무하는 " 일반 방위병"으로 나누어 근무하게 된다.
일반 방위병은 군부대의 현역이나 직업군인과 어울리니 긴장속에서 군복무를 하여야 하나, 동사무소 방위병은 예비군 중대장밑에서 군무하니 한량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8월10일경 소집통지서가 발송되였다.
"기초군사훈련"을 2주차 받으라고 통보가 온것이다.
훈련장소는 수색을 지나 화전역 근처의 60사단 훈련소였다.
재수없게시리 한여름 훈련을 받게 되다니 .
보충역들은 매일 훈련소에 오전7시까지 집결하여야 하였다.
오전7시까지 도착하려면 집에서 오전5시에 나와야 하였다.
지각은 꿈도 못꾸었다.
만약 지각을 하게되면 무지한 얼차레를 받아야 하였고 재입소하는 일도 생길수 있기 때문에 도시락을 들고 첫버스를 타고 기차로 갈아타 화전역에 도착하여 훈련소로 향하여야 하였다.
한여름 뙤약빛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을 받다보면 물이 얼마나 먹고싶은지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것 같았다.
다행히 훈련소에서는 소대별로 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물땅"이라는 물보급 책임자를 선정하여 수시로 주전자로 물을 길어 날랐다.
휴식시간이며는 주전자앞에 줄을서 물쟁탈전이 한바탕 벌어지기도 하였다.
매일 5시까지 훈련을 마치고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면 8시 내외가 된다.
그리고 샤워하고 저녁을 먹으면 9시에 취침하고
다음날 새벽4시 기상.
2주간의 훈련은 지루한것을 떠나 어떨때는 하루가
한달 같았다.
내 인생중 가장 밑바닥으로 내팽개쳐 개차반이 된 나는 군대와는 적성에 안맞았다.
삼군사관학교에 입소한 고등학교 친구 "최○○" 가 우상처럼 느껴졌다.
그럭저럭 2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는 날.
우리들은 개인별로 근무지를 배속 받게 된다.
몇일전 특기사항과 적성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개인면담이 이루어졌고 나는 운적면허증이 있다고 하였다.
그당시 운전면허증 소유자가 별로 없어서 면허증은 자대배치에 유리하다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운전면허증은 나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나의 엄청난 실수였다.
나는 동사무소 근무를 원하였다.
집근처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면 집에가서 점심도 먹을수 있으니 ..
얼마후
내이름을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
"네"
"육군본부 수송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