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무화과(1-2)
사람의 생각에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이사야 55:8).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고 자녀들을 형통케 하십니다.
1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2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1-2)
주전 598년 키스레브월(11/12월)에 시리아·가나안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음 해 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원정을 전후해 유다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함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은 최악의 상황은 모면합니다.
주전 597년 제1차 바벨론 유배 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1:11-12,13-14).
바벨론의 침략과 그에 따른 유배로 주전 597년과 주전 587년 사이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정치적·사회적 긴장과 분열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유배당한 자들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과 반목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에스겔서는 시드기야의 연대를 거절하고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해를 기준으로 연대를 정합니다. 22:24에 고니야로 나오는 여고냐는 여호야긴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바벨론의 첫 번째 침략과 유배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항복한 여호야긴을 폐위하고 그의 삼촌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하여 왕위에 앉히고, 폐위된 여호야긴과 그의 가족과 유다의 지배 계층과 용사들 그리고 장인과 대장장이를 포함한 기능공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권력 지형도에 지각 변동이 발생했습니다. 정치·경제·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대거 사라지고, 주변부에 속했던 인물들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백성은 누구나 가나안에 살았는데, 만 명 이상의 유배민들에 의해 바벨론에 유다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두 공동체는 서로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특히 새로이 예루살렘의 주류계급에 편입된 자들은 유배민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긴장과 혼돈이 지배하는 시기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상을 통해 백성의 미래에 관한 당신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봅니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극히 좋은 무화과’가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담겨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와 더불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상로 자주 사용됩니다(8:13; 호세아 9:10; 미가 7:1b). 무화과는 보통 8월 말부터 먹기 좋게 익는데, ‘처음 익은’ 무화과(이사야 28:4; 호세아 9:10: 미가 7:1)는 5월 말에 열린 열매를 가리킵니다.
질문과 답변(3)
하나님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사전 약속이 없어도 됩니다. 어려울 때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부탁하고 애원하며 기도하고, 좋을 때는 감사하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탁하는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감이 있는 충분한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3)
여호와의 질문과 예언자의 답변은 이상의 일반적 구조에 속합니다(1:11,13; 아모스 7:8;8: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는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의 답변은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좋은 무화과는 ‘처음 익은 듯한’을 빼고 ‘극히 좋은’로만 언급하고, 나쁜 무화과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을 모두 사용합니다. 예레미야가 나쁜 무화과에 더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호와의 이상 해석(4-10)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 하에 너무나 가볍게 그 뜻을 말하고 치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또한 순간의 감정과 체험에 자신이 치우치지 않도록 영적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4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6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4-10)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어간 이들을 좋은 무화과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이들보다 더 선하거나 믿음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4절의 말씀 사건의 공식과 5절과 8절의 사자의 전언 양식은 해석이 여호와의 의지에 속함을 거듭 강조합니다.
⑴ 말씀 사건의 도입부(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남다른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7b절과 내용상 같습니다.
⑵ 좋은 무화과 : 바벨론 유대인(5-7)
여호와께서 먼저 좋은 무화과를 해석해주십니다(5-7). 여호와의 징계로 여호야긴과 함께 주전 597년 바벨론으로 유배당한 자들이 좋은 무화과로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미래가 약속됩니다.
이들은 징계를 받아 갈대아 땅으로 쫓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에 의해 옮겨져 그분의 돌봄을 받는 남은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연유에서 제1차 바벨론 유배민을 좋은 무화과처럼 좋게 보아주시는지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배지에서 돌보시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데려오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당신을 알고 온전히 따를 수 있는 마음도 주시고, 파기되었던 언약 관계도 회복시켜주십니다(31:33-34; 에스겔 36:26-28).
⑶ 나쁜 무화과 : 가나안에 남은 사람들(8-10)
만면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땅에 남아 있거나 애굽으로 도망친 자들을 악한 무화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 환난과 치욕을 당하게 하고 전염병으로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회복과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지켜 주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갚으십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약속해 주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지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즉각적인 순종만이 참다운 회복과 안식을 가져다줍니다.
희망은 절망을 먹고 자랍니다. 이 역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귀환 때가 돼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시내산 언약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아픔을 끌어안고 뒹군 만큼 든든한 희망이 피어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