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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주권의 단두대>의 줄거리: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합니다. 이 사건이 뜻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 주권이 칼날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항상 내 삶에 단두대의 칼날이 되어 임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만은 피하여여 합니다. 불안 두려움 원망 근심 분노 질투 등이 생기고 있다면 지금 벌써 마음이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베인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의 단두대
(마태복음 14:1~12)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주권의 단두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주권의 단두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사건의 시점과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이 들으신 소식이란 세례 요한이 참수 당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순교는 시기적으로는 보다 앞선 일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고 말한 것을 예수님이 듣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11장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시기적으로는 이 사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례 요한의 순교를 뒤로 미루어 14장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해 우리는 이러한 마태의 의도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단두대와 같이 작용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두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받아들이십니다. 26장 39절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이 괴롭고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든 돌로 내려치는 과정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았을 것이니 십자가 사건에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났고 그 마음에서는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건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주권의 작용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셨습니다. 버림받고 저주아래 있는 우리의 처지로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죽음 모두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했으나 일어난 일은 반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와 일체를 이루고 계시던 분이 버림받고 저주받아 우리의 상황에 던져지게 되셨고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단두대라 할 수 있고 또한 오늘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두대(guillotine)는 영어로는 길로틴이라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기요텐이라고 합니다. 단두대를 설계한 의사 조셉 이그나스 기요틴(Joseph Ignace Guillotine, 1738~1814)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양 기둥 사이에 비스듬하게 달아둔 무거운 칼날을 떨어뜨려서 죄수의 목을 치는 끔찍한 형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 하늘에서 땅에 임할 때에 이토록 단호한 단두대와 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마태의 의도를 따라가 보면 세례 요한의 목 베임의 사건과 단두대의 목 자름의 사건을 연상해서 이런 제목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이 세상이 세례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민중은 회개의 정의를 부르짖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례 요한이 요구했던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베푸는 진정한 세례를 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가 필요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공생애를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즉 세례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은 육체를 통해서 세상을 관심합니다. 지난 시간에 “세상이슈에 덮인 천국이슈”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음은 육체를 통해서 세상을 이슈로 삼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모든 것을 그대로 안에 지니고 계시는 성령님을 따라서 천국을 이슈로 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를 통해 세상을 이슈로 삼는 동안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했던 세례 즉 침례의 의미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례란 세상에 대해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세례는 육체의 관심을 따라 이 세상을 이슈 삼아 살아가던 나를 익사시키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을 죽였다는 것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세례를 원치 않음을 상징합니다.
또 우리는 지난 말씀에서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은 천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천국을 이슈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천국을 이슈로 삼기 위해서는 세상이슈에 대한 관심은 꺼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했고 세상이슈로 천국이슈를 덮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에서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태어났고 충실하게 그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세례 요한이 죽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참수를 주도했던 헤로디아라는 여자는 본래 헤롯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헤로디아를 탐내어 아내로 삼고 본처와는 이혼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한편 헤로디아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의 주석에 따르면 살로메는 10대 중반의 소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딸이 헤롯 대왕의 생일에 요염하고 관능적인 춤을 추었고 헤롯 대왕은 이에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마가복음 6장 23절을 보면 이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받게 되자 헤로디아는 눈엣가시 같았던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가져오도록 딸에게 사주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약속을 했던 헤롯은 이 요청을 수락하여 그 목을 소반에 담아 가져오게 합니다. 간악하고 사특한 모녀의 욕정이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연결되었으니 참으로 모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헤롯 대왕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의 평판을 의식하여 차마 죽이지는 못한 채 감옥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작 잔치석상에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요한을 참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 요한은 목이 베이기 전에 자신이 죽는 이유를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살로메의 춤에 만족한 헤롯 대왕이 선물로 네 목을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요한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 어리석은 왕과 간악한 모녀의 감정놀음에 희생되어야만 한다니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대단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개인적으로 요한의 제자들이나 가족들 중에 몇 사람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라면 어떻게 요한이 저렇게 죽도록 방치하실 수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결코 실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에게도 믿음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11장 3절에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요한이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답을 받은 요한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죽음에 임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할 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쪽으로는 예수님을 따라 천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한쪽으로는 육체를 따라 세상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하물며 세례 요한의 죽음이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났겠습니까? 심지어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게 된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육체를 따라 이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면 단호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베이는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등졌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살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마음이 놓인 상황을 중심으로 두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마음으로 향해야 할 천국의 영역이 있고 육체를 따라 세상으로 가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영역과 천국의 영역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은 기쁨과 만족과 평강과 행복의 영역입니다. 한편 육체를 따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명령권이 임하시는 영역일 뿐입니다. 이 주권과 명령권의 영역에서는 결코 기쁨이나 만족이나 행복이 찾아지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귀신이 쫓겨 나감을 보고 기뻐하자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기쁨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주권과 명령권이 임하는 영역입니다. 결코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으려 하다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마음을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불안하고 두렵고 짜증나고 원망스럽고 괴롭고 우울하다면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베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이 무채를 썰 때에 한 손으로는 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잡습니다. 그 때에 무를 잡았던 손끝이 무보다 앞서나가게 되면 여지없이 칼에 베이게 됩니다.
마음은 육체를 따라 세상을 향할 수 있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따라 천국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천국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땅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명령권만 임하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고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며 소원을 가지게 될 때에 마음은 하늘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삐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세상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의해 베이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베일 때에 나타나는 고통이 불안 염려 짜증 원망 등으로 나타납니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부부관계는 이 세상에 속한 일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부관계를 통해서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천국으로 가서 기쁨을 얻은 상태에서 서로를 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배우자를 통해 기쁨을 얻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마음이 베이게 됩니다. 배우자로 인해서 상처받고 원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배우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베였다는 증거입니다.
자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녀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하고 화나는 일들만이 생겨날 것입니다. 자녀는 내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 기쁨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기쁨을 얻은 상태에서 자녀와 관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비참하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조금도 몸을 따라 이 세상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아담의 원죄의 습성을 따라서 육체를 따라 세상을 향하게 된 마음에 대해서 단두대의 칼날로 작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을 수 없음을 안다면 마음을 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며 마음을 보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마음을 베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도 반복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면서 삶이 괴롭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 마음이 아픈 것이 당연하고, 배우자에게 원망스러운 것이 당연하며, 직장에 나가면 승진과 월급으로 괴로운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실은 마음이 하나님의 주권의 칼에 베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일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시기 위해 가슴을 열고 하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기차이신 예수님께 올라타지 않는다면 삶의 현장은 괴로움만이 존재하는 단두대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마음을 베는 칼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이 육체를 따라 이 세상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할 때에도 마음은 베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평안한 순교는 곧 육체가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세상에서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릴 수는 없다는 반증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보겠습니다.
제가 프린스턴에 있을 때에 자주 상담을 하였던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의사이셨고 두 아들을 둔 여자 집사님이셨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와 예일대에 진학하였던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교회 친구가 아버지 차를 몰고 나오자 친구 넷과 함께 탔다가 사고가 발생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운전한 아이만 살고 동승했던 친구 네 명이 사망하였는데 모두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기에 교회의 침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집사님과 상담하는 중에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맡겨야지요.”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집사님께서 맡길 수 없다며 화를 내셨습니다. 하나님 뜻에 맡긴 결과 결국 아들을 잃게 되었는데 남은 아들도 데려가시면 어떡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믿음이 없으시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그 말씀이 크게 공감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남은 아들도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집과 교회밖에 모르던 아들이 하필이면 교회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죽게 되었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더는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는 마음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서 세상일을 잊어버렸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안 뒤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간인 사도 바울도 세상의 가치들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경험한 베드로도 세상일을 까맣게 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천국이 이 정도일진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요? 배설물과 같은 세상에서 황홀한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일까요? 바꾸어 생각해보면 오히려 천국에 최연소로 합격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죄인 취급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의 생각이란 이치에 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고가 나거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면 대단한 불행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불행한 일인지 오늘 세례 요한의 순교를 보면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갇혔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가 고작 감옥에서 풀어주시는 것이었을까요? 혹은 감옥에서 나와서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으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었을까요? 천국의 주인으로써 천국의 좋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목 베임을 당해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치의 은혜이고 선물이었습니다.
행여나 세례 요한의 마음이 세상을 향했다면 실족하여 하나님의 주권의 단두대에 마음이 베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는 세상을 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집사님과 그 말씀에 공감했던 저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실족하지 않았고 그 주권의 칼날에 마음을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갈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천국에 가는 것을 원했고 향하고 있다면 죽음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살아있는 것을 아쉽게 여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일찍 죽을수록 큰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안 죽으려고 아우성치는 삶은 기독교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적이 뛰어나서 조기졸업과 동시에 유망한 기업에 취직이 가능한 대학생이 있다고 해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졸업도 싫고 취직도 싫다면서 모든 기간을 채우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의 모든 좋음을 모아놔도 거름더미처럼 여겨질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그곳에 빨리 들어가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자 하는 사람에게 돈을 못 벌게 하셨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이나 건강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삶이야말로 어리석고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가치들이 거름더미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를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 없는 삶에 하나님의 주권은 단두대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 때문에 괴롭고 자녀 때문에 괴롭습니다. 돈이 없어서 괴롭고 건강이 나빠서 괴롭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음은 단두대에 올라선 것처럼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칼날입니다. 몸으로 사는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임하는 곳일 뿐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아야 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와 베풀었던 세례는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서 육체를 따라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주권의 칼날에 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해도 마음은 베이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천국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으로 빠져나간 마음을 끊임없이 죽이는 십자가를 생활화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무지하고 어리석어 마음이 육체를 따라 세상으로 향해 기쁨과 만족과 평강거리를 찾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례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하셔서 다시 살아난 마음으로 주님 따라 천국에서 기쁨을 누리는 동안 스데반 집사님처럼 순교를 하든지 다윗처럼 왕이 되든지 우리의 마음이 조금도 세상을 향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