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양윤영(梁允永) - 천국은 놀라운 음악의 세계 8. ‘맹세’가 작곡되기까지
1 장충동에 있던 교회가 청파동으로 옮겨가자 내게는 허전한 마음뿐이었다. 예전처럼 마음 내키면 교회로 치달려 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 울적해지는 때가 많다 보니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한번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놀라고 나서는 새벽 3시까지 항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 매일 저녁 가정 예배를 보기도 했지만 우울한 심정은 어쩌지 못했다. 밤을 새우며 하늘을 사모하는 심정이 극에 달하다 보니 그런 심정을 곡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3 그래서 작곡한 것이 ‘맹세’였다. 그 노래는 2개월 동안을 거쳐 1956년 1월 15일에야 만들어진 곡이었다. 선생님 탄신을 기념해서 발표하려고 새벽 2~3시에 주로 작곡을 했고 작사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이었으며, 그 많던 식구들과 선생님이 청파동으로 떠나버려, 그리움과 그리고 하늘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부르며 지은 곡이었다.
4 그 노래는 선생님 탄신일에 내가 독창을 했고, 그 후 해마다 탄신 축가로 불리다가 1961년에서야 ‘성가’에 올려지게 되었다. 언젠가 지방 식구들이 이 노래로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선생님께서, “양윤영 씨 일대의 역작이다”라고 칭찬해 주신 적이 있었다.
5 ‘맹세’ 작곡 이후로 항상 오선지를 옆에 두고 잠에 들다가 몽시에 음악이 들려오면, 테마를 옮겨 쓰기도 하고, 몇 가지 노래를 작사•작곡해서 성가에 올렸다. ‘원리용사가’만이 선생님의 작사에 곡을 붙인 것인데, 그 노래는 수련생들을 위해 지어 주신 노래이므로 제1회 40일 수련부터 매일 첫 시간에 가르치면 했으며 매 수료식 때마다 제창했다.
6 그 외에 ‘찾으신 영광’ ‘고난의 예수’ ‘영광의 날’ ‘놀라우신 그 사랑’ ‘사랑의 봄동산’ 등은 내가 만든 노래로써 하나같이 역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노래들이다.
7 은행에서 은행장이 바뀌고 나더니, 사택을 내놓으라는 독촉이 오기 시작했다. 나갈 곳도 없고 집을 마련할 처지도 못 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더니 1958년 10월 18일에 집달리가 와서 집안 살림을 모두 대문 밖에 내놓고 대문을 잠가버리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그날 밤은 길가에 짐을 챙기고 잠을 잤다. 다음 날은 비가 오기 시작했다.
8 유(劉) 선생님께 전화를 했더니, 선생님 차에 덮는 텐트를 가지고 김한수(金漢洙) 씨와 함께 오셔서 비를 막게 해주었다. 다른 식구들도 찾아와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날씨는 추워지고, 피아노 배우러 오는 학생들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식구들이 애들을 분산시켜 각자가 데려갔지만 나는 짐들을 길가에 놓아두고 어디로 갈 수도 없었다.
9 그렇게 길가에서 기거한 것이 12월 25일까지였다. 선생님께서 종로 정 장로님 댁에 선생님 사무실로 마련했던 방으로 짐을 옮기게 해주셨다. 종로 선생님 방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매일 은행 돈을 구해 보려고 애쓰다가 조그만 집을 담보로 해서 삼선교 쪽에 130만 원짜리 집을 사서 1959년 2월에야 이사를 하게 되었다.
10 생활대책이 막연했던 탓으로 다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예전의 장충동에까지 출장을 가서 교수하는 곳도 있었지만 생활 유지를 위해 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식구들이 좋긴 좋았다. 식구들이 삼선교 쪽에까지 날마다 찾아와 함께 웃고 노래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11 그러나 생활비 탓은 아니었지만 내가 크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애들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 해 겨울에 동두천 고아원에 애들을 보내고 말았다. 내게 왜 부모의 정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내게는 하늘의 절박한 뜻이 더 크게 부딪쳐 오곤 했었다. 애들에게는 미국 보내 준다는 말을 하고…….
12 끝내 애들은 강순애(姜淳愛) 씨와 한순실 씨의 후행으로 한상길(韓相吉) 씨가 빌려 온 스리쿼터에 옷장과 이부자리까지 실려 미국 아닌 고아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두삼(斗森)이가 중 3, 두림(斗林)이가 중 1, 두영(斗榮)이가 국교 4, 영란(榮蘭)이가 국교 1년 때였다.
13 내게는 하늘의 뜻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애들은 하늘이 무사하게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애들을 보낼 때는 웃으며 보냈다. 그러나 밤을 새우며 애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밤을 울음으로 지샜던가. 나는 애들 앞에서 좀처럼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14 지금도 애들은 내가 정이 없고 강하기만 한 엄마로 알고 있지만, 아빠 없이 자라는 애들 앞에서 약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을 지나서 큰 아들 두삼이만 돌아왔다. 그곳에 중학 과정이 있지만, 중학 3학년 반이 아직 없다고 돌려보낸 것이다. 하는 수없이 배재중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다.
15 두림은 만 5년 만에, 두영은 만 10년 만에, 영란이는 만 8년 만에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하늘은 다시 돌려보내 주었다. 모두 지금은 최고학부의 교육은 못 받았지만 하늘의 축복 속에 순탄하게 뜻길을 걸으며 하늘의 중임들을 부여받고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게 다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하니 하늘 앞에 눈물겹게 감사할 따름이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