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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으로 만난 적 없는 예수 그리움>의 줄거리:
그리움이란 마음으로 지속하여 보고 있는데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의 심리 상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는 반드시 실제로 만난 본 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움이 예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워 시선이 하늘을 향합니다. 그러면 몸으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을 우리는 무슨 수로 그리워합니까?
몸으로 만난 적 없는 예수 그리움
(누가복음 18장 35절~43절)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몸으로 만난 적 없는 예수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몸으로 만난 적 없는 예수 그리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방향입니다. 신앙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마음이 이 땅을 등지고 하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을 향하지 못한 채 이 땅에 있는 것들이나 이루어질 미래의 상황을 향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만날 수도 없고, 천국을 내 지구로 가질 수도 없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아무 연고도 없이 하늘을 향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으시고 들리지도 않으시고 만져지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향하기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늘을 향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움이 있는 자만이 하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움에는 연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하늘에 대한 그리움의 연고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던 인간세상을 탈출하셔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연고로 삼을 수 없다면 누구도 하늘을 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이제 이 땅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서만 우리의 마음과 의식은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미국 뉴욕에 따님이 가있는 두 가정이 있습니다. 이분들께서는 서로 모르는 분들입니다. 최근에 한 분이 강릉에 오셔서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서너 시간 이야기할 것을 예상하고 커피도 큰 것으로 시켰는데 그 분은 바쁘셨던 모양인지 한 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도 뉴욕에 있는 따님에게 화상으로 전화를 걸어서 저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뉴욕에 자녀가 나가 있는 가정에서는 항상 뉴욕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저 같은 경우는 뉴욕에 연고가 없기에 마음이 항상 뉴욕을 향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사돈의 팔촌이 뉴욕에 가 있더라도 마음의 관심이 뉴욕을 향해 흐르기에는 동기가 약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연고로 삼고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 대한 연고가 되어주시는 영향력이 있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사돈의 팔촌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늘 하늘로 향하게 하는 그리움의 이유가 될 수 없다면 결코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자들의 예수 따름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은 몸으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을 함께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몸으로 함께하는 동안 예수님과 친분이 쌓이고 정이 들었고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에 대해 강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교회의 태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성령이 하필이면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백이십 문도에게 내렸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문도는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마음을 향하게 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연고로 삼아 하늘을 그리워하게 된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연고가 되어주셔서 하늘을 향하게 하는 그리움에서 교회는 출발하게 됩니다. 성도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속에 약속된 모든 은총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성도의 삶 또한 하늘을 향하는 그리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땅을 떠나 하늘을 향하는 그리움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미래에 이룰 찬란한 성공이나 업적이나 혹은 환경의 변화를 바라며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을 그리워하며 이 세상 자체를 떠나는 것으로부터 성도의 삶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복음 속에 약속된 모든 은총 또한 내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만난 적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워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승천하셨기에 우리는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는지를 그림을 그리듯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몸으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야 되고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움이란 의식에서 지속적으로 바라봄이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의 심리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지만 그리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은총의 세계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연고로 한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복음 속에 약속된 모든 은총 중에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때 길에서 구걸하던 한 맹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반복하여 외쳤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염두에 두면 좋은 배경지식을 먼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첫 번째로 정복했던 여리고가 아닙니다. 그곳을 구 여리고라고 부른다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구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헤롯 대왕이 만들었던 신 여리고입니다. 구 여리고에는 대부분 유대인이 거주었으며 신 여리고는 헤롯 대왕이 세운 탓인지 이방인의 거주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한편 본문에 등장한 맹인은 마가복음에서는 바디매오라 언급됩니다만 본문에서 이름은 제외된 채 맹인이라고만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바디매오라는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닌 보편적인 진리로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맹인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건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실 때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구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시던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고, 누가는 구 여리고를 떠나 신 여리고에 가까이 오신 것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신 여리고에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곧 누가가 이방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크게는 예수님을 몸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앞으로 오게 될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몸으로는 만날 수 없으나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가질 수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인의 외침이 그리움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요? 기록되어 있듯이 맹인은 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구 여리고와 신 여리고를 잇는 길에서 평생을 구걸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습니다.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소문을 통해 예수님을 처음 접하게 된 맹인의 모습은 교인들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접하게 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맹인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접하면서 마음에 어떤 확신을 갖게 됩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들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맹인은 이러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며 예수님께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에만 흥미가 있었습니다. 메시아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예수님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메시아 운동이 일어났고 로마군에 의해서 탄압당하고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맹인 또한 메시아 운동의 소문을 수없이 접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이번에야말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던 것은 평소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해 왔음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꾸짖고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사생결단의 저돌적인 자세로 예수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맹인을 부르시고 만나주십니다. 맹인으로서는 꿈에 그리던 메시아와 마주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특이한 질문과 대답이 오갑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맹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매우 불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맹인으로서 구걸을 하고 살던 처지에서 필요한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맹인이 사생결단으로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눈을 뜨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맹인은 41절 하반부에서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순한 대답을 합니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에 대한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이것을 물으셨던 이유는 다른 맹인들과 같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8장 22절에는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은 사람들이 데려왔고 예수님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려가신 후에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셔서 고치십니다. 이 맹인이 고침을 받는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보이고 다시 안수하실 때에야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으셨고 맹인도 보기를 원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확인하셨다는 언급도 없으며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말씀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럼 보기를 원하지 무엇을 원할까?”라는 생각만 하신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맹인과 나를 동일시하였을 때에 우리의 대답이 이 맹인과 같을 수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은 정말로 시력회복의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력이 회복되어서 세상을 보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면 이 맹인의 믿음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질문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에는 다른 대상이 아닌 바로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그리움의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맹인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선민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도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들을 전제로 한다면 맹인의 바람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에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인의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던 사건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병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때 아홉 명의 유대인은 자신들이 세상과 격리된 것을 저주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과 격리됨을 저주의 내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열망하고 있었고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세상을 열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맹인은 주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생결단하고 목이 터져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이러한 맹인이 예수님 앞에 나가게 되었을 때 세상을 보기 원했으리라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맹인이 보고 싶었던 대상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누가복음 2장에서도 나왔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정결예식을 위해 부모가 아기 예수와 함께 성전에 올라왔을 때 성령이 가르쳐주심으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게 됩니다. 29~30절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에게 있어서 눈의 용도는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임하실 메시아를 보기 위한 눈이고 시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만났기에 이제는 평안히 죽음을 맞이할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됩니다.
맹인이 육체의 눈으로 메시아를 보기 원했다는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그리움이란 의식에서 지속적으로 바라봄이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심리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맹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습니다.
맹인의 심정을 기도로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 나사렛 예수로 불리시는 당신께서 다윗의 자손이자 모든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아이심을 압니다. 제가 비록 맹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십 년을 구걸하며 사느라 이 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지금의 삶을 팔자라 여기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사람도 세상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메시아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게 된 뒤로는 제 마음에 보고 싶은 대상이 생겼습니다. 꽃은 못 보아도 좋고 가족의 얼굴도 못 보아도 좋지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만은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외치던 맹인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앞서 예수님의 별세를 다시 한번 예고하심과 제자들의 따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비록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지만 공생애 동안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음을 드러냈습니다. 진정한 따름은 예수님의 세상 탈출과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기에 그리움만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미래에 이루어질 다윗 왕국의 재현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이유는 바로 친분이 두터워지고 정이 두터워짐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셨을 때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이 바로 본문의 맹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맹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메시아로 확신하고 그리워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들어 예수님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소문의 말씀을 통해서 맹인은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그리움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움이란 잠깐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생각하고 늘 마음에 떠올리지만 볼 수 없기에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못 보고, 요단강은 못 보고, 꽃은 못 보고, 가족은 못 볼지라도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처럼 예수님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맹인의 그리움이었습니다.
맹인은 이 그리움에 사무쳐서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수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지를 물으셨고 주님이 보고 싶다는 맹인의 대답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믿음으로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여러분께 퍼트리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야만 합니다. 맹인은 마음으로 그리워하던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게 됩니다. 다만 우리는 몸으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만남의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증거는 마음에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43절을 보면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맹인을 향해 예수님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보게 하는 조명이 비춰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항상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도 예수님을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보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움의 상태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마음에서 배우자에 대한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제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배우자 대신 하나님을 보는 빛이 비춰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우자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활성화되는 현장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만날 때에 그 만남의 증거로 세상에 대한 죽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영광의 조명을 경험한 사람이 전하는 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문을 자꾸 들으면 마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물론 소문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신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문을 듣지 못한다면 그리움이 생겨날 여지는 아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제대로 예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전할 때에는 아직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될 것들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런 말씀이 소문으로 전해질 때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 예수님 믿으면 삶이 형통해진다, 예수님 믿으면 이런저런 복을 받는다는 모든 말들은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되는 것들이 영광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들어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될 것들에 대한 그리움들만 생기게 됩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는 세상에 대해 깜깜해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빛이 비춰지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여러분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음으로써 몸으로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십자가를 통해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단순히 말이 아니라 그 소문을 퍼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소문을 통해서만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은혜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 아버지를 보게 하여 주셔서 예수님의 소문을 전합니다. 이 소문을 통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시고, 그들이 만나고 경험한 예수님의 소문을 통해 또 다른 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되는 역사가 줄을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