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희궁 마당에 설치한 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로젝트의 일부인 ‘프라다 스커트 전시회’가 5월24일 끝났다. 개막 당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축사를 하고 14개 나라 외신기자 167명까지 왔다. 그런데도 전시 기간에 세계적인 포털 사이트에 ‘프라다 트랜스포머’ 검색어를 치면 프라다 전시와 디자인계 거장 렘 쿨하스의 건물 이야기만 나올 뿐, 경희궁이나 서울 이야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유 장관이 고대한 국가 홍보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들러리만 선 듯 찜찜하고 속은 느낌이다. 그럼, 프라다 전시회는 좀 창조적이고 획기적이었나? 됐다. 600년 왕조의 ‘마당’ 사용 논란을 일으키고, 뻑적지근하게 홍보한 전시니까 적어도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라도 창조적인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시는 프라다 스커트 탄생 뒤의 더 조악하고 허접스러운 물신화 과정의 자체 폭로로 끝나버렸다. 프라다는 1931년 창업해 1970년 창업자의 손녀 마우이치 프라다가 경영에 참가하면서 새 명품으로 탄생한, 도시의 ‘악마’가 좋아하는 브랜드다. 이 악마는 44사이즈의 활동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으로, 일도 하고 패션 감각이 있고, 무채색 계열의 시크한 감각을 즐기며, 마음껏 부를 누린다. 또 신흥 귀족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속성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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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스커트 전시회(위)는 어설프게 예술품 흉내를 낸 스커트를 ‘호기심과 분석력, 즉 과학적 탐구심을 갖고 보아달라’고 호소한다. |
이 전시는 이런 브랜드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 치열한 글로벌 패션 경쟁에서 선두에 올라서기 위해, 자기들의 물건을 잘 사주는 디자인 후진국에서 그 나라 대기업과 정부의 협찬을 받아 100억원이나 들인 홍보전이다. 이 과정 자체가 물신화 과정의 토대인 셈이다.
그럼 자본이 스커트 하나를 어떻게 물신으로 만들어가는지 전시를 들여다보자. 자본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확장밖에 없어서 이를 위해 자본은 그 어떤 것도 다 잠식하고 추상화하며 동시에 육화한다. 오죽했으면 마르크스는, 자본가는 육화된 자본일 뿐이라고 했을까. 이 전시에서 사용한 물신화 방법은 다양하다. 포크·나이프·시계태엽의 극소한 미니어처를 주렁주렁 붙인 스커트가 있는가 하면, 구슬 장식을 들여다보라고 커다란 돋보기를 여기저기 설치해놓기도 했다. 맨눈으로 보아도 다 보이는데 제발 지나치지 말고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고 섬세한지 보아달라는 장치이다.
어설프게 팝 아트 흉내낸 스커트
이미 실험성 다 끝나버린 팝 아트, 즉 예술품 흉내를 어설프게 낸 스커트를 ‘호기심과 분석력, 즉 과학적 탐구심을 갖고 보아달라’고 호소하다니, 이거, 도도한 프라다 맞아? (그리고 예술품 비슷한 그림이나 오브제를 갖다 붙인다고 스커트가 예술이 되면, 고흐의 그림을 인쇄한 평범한 우산이 예술품이라는 말인가?) 병뚜껑 수백 개를 망치로 두들겨 염색해서 만든 소리 나는 스커트. 요즘 잘나가는 이슈 에코 디자인, 재활용 콘셉트이다.
바람이 부는 코너에서 흔들리는 스커트는 성적 욕망의 표현이다. 바람 부는 날 한들거리는 스커트를 입어본 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감추어진) 욕망들. 이렇게 자본은 과학적 탐구력, 자연, 예술, 친환경 이념, 역사, 성적 욕망을 이용하는데 그것의 최정점은 언어다. 하얗고 앙증맞은 산호를 다닥다닥 붙인 흰 스커트의 설명문을 보자. “인공 비즈(구슬)로 만든 이것들은 바닷가에 몰려온 백산호 조각처럼 시적 정감을 불러일으키고… 능직의 치맛감은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흔들 때마다 사각거리는 응원용 수술의 유머러스한 소리를 연상시킨다.”
이 외에 “생명력 있고, 기품 있고, 극도의 정교함을 자랑하고, 열정적 실험·향수를 자아내고, 시각적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위장하는 새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아주 특별하고, 아주 정교하고, 정말 혁신적이고….” 기가 찰 정도로 자기와의 사랑에 빠져버린 이 스커트들은 자기 지시적인 이 현란한 언어를 통해 신으로 트랜스포머하고자 한다. 마치 신자유주의가 자신들의 정책을 그럴듯한 단어로 위장하는 전술과 비슷하다. 게다가 옷마다 붙어 있는 이 설명을 보고 관람자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색다르다고 감탄한다. 감히 누가 프라다의 권위에 도전하랴.
프라다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정도의 것들, 약간 색다르고 약간 아이디어가 참신한 것들을 보고 즐겁고 창조적이라고 호들갑을 떨 만큼 스스로의 재미와 건강성을 만들어낼 자율성을 상실한 이 시대의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무어가 되었건 허약한 신이라도 이용하면 한 번이라도 눈길을 더 받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진짜를 살 수 없는 여성들은 짝퉁이든, 이코노 숍이든, 세컨드 핸드(빈티지)건 가리지 않고 쌈짓돈을 털어 프라다와 말 그대로 ‘접신’ 하려고 병이 나는 것이다.
‘자본의 악마적 시스템’이 만든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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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트랜스포머 구조물(위)은 전시회 이벤트 일정이 바뀔 때마다 모양을 바꾸었다. | 프라다는 이것을 잘 알기에 100억원이나 들여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붙이고 아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그리도 주장했지만 결국 스커트의 구조나 개념을 바꾸는 진정한 창조성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면에서 자기 지시적 주술마저 수행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전시였던 것이다.
<죄와 벌>의 도스토옙스키는 “진정 아름다움은 신비스러울 뿐 아니라 전율을 일게 한다. 이것을 두고 신과 악마는 전쟁을 벌이고, 그 전쟁터가 인간의 가슴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만든 것들의 아름다움이 실현되는 장소 중 하나가 디자인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에 달라붙어 자본이 몸 불리기를 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악마의 수중에 떨어진다. 프라다가 자기에게 달라붙은 장치를 다 버리고 이 시대 최고의 장인적 시스템, 최고의 상상력, 자본력 등을 이용해서 여성들만의 놀이터, 스커트는 스커트일 뿐인 그 사실만을 두고 진정 유쾌한 디자인 잔치를 벌이는 진정한 디자인의 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할까?
생산가 5만원짜리 스커트를 200만원의 물신으로 둔갑시키는 자본의 악마적 확산 메커니즘을 거부하는 순간 프라다는 프라다가 아니게 되는데, 그것을 영접하는 악마들 또한 웬만한 노동의 대가로는 어림없는 부동산, 금융자본, 독점자본의 광기 어린 잉여 시스템의 수혜로 그것을 누리는데,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결코 못하는 것이 자본의 역사이다. 결국 프라다 스커트는 자본의 악마적인 시스템이 만든 아름다움이라는 태생의 낙인이 찍힌 채 탄생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프라다는 악마들만 입는 옷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