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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딤후 4장6- 8)
성경본문: 디모데후서 4: 6-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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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한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hot issues”의 마지막 시간에 ‘죽음’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제가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은 죽음 앞에서 말한다! 잘 산자만이 잘 죽을 수 있다!”
“잘 죽었다!”라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는 가장 반대편에 있는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인데,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가장 가까운 문제라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길지 않은 목회를 했지만,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군대에서 군목으로 있던 시절, 자살한 병사들, 사고로 죽은 병사들.미국 유학시절 병원에서 C.P.E.를 공부하던 때, 매일 접해야 했던 죽은 자 또한, 그 시신을 처리하며 손을 얹고 기도하며 축복하고 가족을 위로해야 했던 일,그리고 목회하며 병원에서 수없이 죽어가던 교우의 모습 하지만, 무엇보다 제 눈앞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그만 하라는 결정을 하며 돌아가시던 아버님의 모습을 보아야 했던 저에게 죽음은 늘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얼마나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으며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수년 전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며 수십만이 죽었다고 우리가 통곡하는 일은 없지만, 나의 자식이나 부모가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픔과 눈물, 상처 난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이 다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나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존재는 나의 능력을 벗어날 때, 내가 절대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찾아옵니다.
죽음이 바로 그런 놈이지요.
죽어본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그 죽음에 대한 준비에 대한 확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중에는 죽어본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미지(未知)의 영역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기대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또한, 죽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격려와 기대도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러한 사도 바울의 믿음이 부럽지 않으신가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 때문에 죽음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오늘은 믿음 안에서 이런 죽음을 생각하며 남은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죽음을 생각하는 짧은 드라마로 말씀을 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여러분의 설문 결과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직면하는 몇 가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존엄사!
사실 우리에게 꿈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한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고”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도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꿈이 있다면 멋지게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하지만, 우리가 멋진 삶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멋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항간에 유행하는 <CF Song>이 있습니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
그런데 아무리 내가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 우리가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뜨고, 입을 벌리고 열고, 팔을 들었다 올렸다. 그런데 우리의 심장이 뛰고 안 뛰고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심장이 멎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원한다고 한없이 심장을 뛰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주간에 의사이자 목사인 김종성 씨가 쓴 [의사 예수]라는 책을 보았는데,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고백하는바 인간의 인체 신비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부분이 20%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ABC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한 Talk show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12살 아이가 8살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심장을 이식받았습니다.
그런데 방송 도중에 방청객 중에 한 사람 앞으로 가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말입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바로 죽은 아이의 심장이 이 아이에게 이식된 것입니다.
그래서 Paul Pearsall 팀이 조사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심장에는 뇌와 같은 기능을 하는 뉴런이 있어서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숫자는 작지만 50배가량 강력하게 말입니다.
심장 이식 수술을 한 사람들이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성격이 변하는데, 조사해 본 결과 이식을 받은 사람들의 성향으로 바뀐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혹시 “심장암”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의 조사된 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심장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다른 장기들이 심장을 보호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이 병을 안고 의사를 만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만, 병과 생명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해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음의 문제가 신앙의 문제인 것은 우리의 영역을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열규 교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음을 잊으면 삶도 덩달아 잊혀진다.”
죽음을 우습게 보면 삶도 우스워집니다.
가장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자만이 가장 진지하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가 존경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가톨릭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예견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 즉, 그분이 살아계실 때 행하셨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통해 그분의 죽음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이 선택한 죽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엄사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에 어떠한 인공적인 생명연장 수단을 쓰지 말 것을 당부하셨고 그것이 그대로 지켜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존엄사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난 것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있는 ‘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논쟁입니다.
김 할머니의 가족은 그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법정투쟁을 벌였습니다.
비록 죽음 앞에 있지만, 산소마스크를 뗄 수 없다는 병원 측을 상대로 가족이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가족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6월 23일 산소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할머니가 생존해 계십니다.
이 사건으로 계속해서 존엄사 논쟁이 계속될 것이고 사람들 스스로 죽음을 진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봅니다.
가족이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환자가 평소에 병원에 있는 사람을 문안할 때면 치료받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는 점과 평소 깔끔하게 살고자 했던 성품을 들어 가족이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이분에게서 호흡기를 떼고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심장이 멎지 않는 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죽음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들어할 수 있는지, 이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최선을 다해 살다가는 것이 가장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죽음은 결정사항이 아니라 그것을 맞이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산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자살!
지난 주간에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이 우울증으로 자살했습니다.
이제는 자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회를 가장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두 가지의 자살이 아직도 여러분의 뇌리에 분명하게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 그리고 전 대통령의 자살.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앙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현 사회의 문제로 제기된 자살의 문제를 가지고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분이라고 생각되는 강지원 변호사와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단순히 사회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논란의 여지를 많이 남겼습니다.
많은 크리스천을 당혹스럽게 한 것 중의 하나는 화면에 비치는 십자가와 함께 “성도 최진실”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살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과연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 것인가?
노 대통령의 자살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주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면 그것이 자살인가, 사회적인 타살인가의 논란에서부터 그의 죽음 앞에 펼쳐진 여러 종류의 종교의식을 놓고 특히 기독교식 기도와 찬송을 들으면서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아니, 너무나 자명하게 생각했던 죽음의 문제, 특히 자살에 대한 정죄에 대하여 우리는 무척 곤혹스러울 때가 잦습니다.
특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장례를 집례 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의 문제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삶과 죽음의 영역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하나님’의 영역임을 인정할 때 어떻게 이 부분을 다루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군대와 병원에서 사역할 때는 참 simple 한 정의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의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삶과 미래를 격려하는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쉽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며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한 답을 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먼저 이 사회에서 자살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보겠습니다.
2007년 9월에 내 놓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6년 한 해 동안 1만 688명이 자살로 사망했는데, 이것은 하루 평균 29명이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즉 10만 명당 사망자수 23명의 자살은 30개의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좀 더 심각한 통계를 보겠습니다.
2005년 한국 사람들의 사망원인에서 자살을 4위를 차지합니다.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 자살, 당뇨병의 순위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수치보다 심각한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순위가 아니라 20-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 2위가 운수사고라는 사실입니다.
40대에서 20%가 넘는 자살, 50-60대에서도 자살이 사망률 5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심각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체 자살 사망자 중에서 60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40%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라 그 심각성이 얼마나 달라지느냐를 보게 됩니다.
좀 더 심각하게 볼까요.
10만 명당 사망자수를 보면 자살이 60대에서 54.6명, 70대에서 80.2명, 80세 이상에서 127명으로 심각하게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점점 자살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가족의 해체, 경제적인 어려움 등을 유발하는 가족공동체의 붕괴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남자들이 여자보다 평균자살이 2.2배 정도 되는데, 40대에서는 2.5배, 50대에서는 3.4배에 이릅니다.
모든 사람이 자살의 이유를 가졌지만, 이 사회 속에서 남자들이 가지는 압박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드는 그 요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이제 이런 현실과는 별개로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물었을 때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양한 답변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대답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다.”“사단이 목숨을 가져갈 것이다.”
좀 더 논리적인 답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죽이는 것은 살인이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라는 답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주변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 아니 구원의 확신을 하고 교회에서 신앙생활과 봉사하던 사람들도 목숨을 끊는 경우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합니다.
물론 자살에 이르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다고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통해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살의 경우에 대하여 “지옥에 간다.”라는 두려움이 자살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하나님일까?’라는 생각,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아픔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지만,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
우리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현상이 ‘자신의 의지적인 자살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가져봅니다.
암으로 죽는 것처럼 우울증이라는 증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죽음 역시 병으로 죽는 것 같다는 사실 앞에서 아니 영적인 차원에서 우울증이 악한 영의 세력에 의한 죽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정죄가 아닌 좀 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울증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앙인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아니 왜 우울증으로 힘들어할까요?
단순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황장애로 힘들어할 때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목사인 저로서도 공황장애가 찾아올 때의 고통과 공포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질병이 육체적인 탈진으로 몸의 기능이 정성적이지 못했기에 약물을 통해 진정시키는 것과 저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면서 치유의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저에게 주어진 설교라는 사명을 감당하며 강남 금식기도원에서 설교와 더불어 매달 3일씩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무척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믿음의 방식으로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스트레스, 나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 가운데, 상처받지 않기로 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요?
우울증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한 성경적 해답은 무엇이며 그들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울증이나 암과 같은 질병이 조금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스트레스가 와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방법을, 아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살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울한 감정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부터 시작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존감의 부족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라면, 철저하게 믿음 안에서 자신을 보도록,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긍정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절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지금 고민한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의 삶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지난 주간에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우리 딸과 아들이 함께 시험을 보는데,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더 걱정하고 염려하는 아이였습니다.
걱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걱정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처음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잘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겠지요.
이제 조금 더 깊이 잘 죽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는 ‘웰 다잉’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고 삶의 완성이라는 걸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어요.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죽음준비를 충분히 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 이게 바로 웰 다잉이죠”
저 자신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일찍 태어나면 형님이요, 일찍 죽으면 큰 형님이 되지요.
죽음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잘 살다가 갈 때, 존엄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노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노인이라는 말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요, 그 마지막 삶의 질이 “well-dying”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 노인 문제가 많이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는 많은 노인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노인의 시기를 지나면서 당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70을 넘어 산다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평균이 80을 다가서고 있기에 많은 노인이 이전 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노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묘지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것을 쉽게 접하게 됩니다.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다!”
이것이 죽음을 올바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묘비에는 추모의 글이 간단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혹시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신 분이 있으신가요?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묘지를 돌다가 한 묘비의 글이 흥미로워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단 세 줄로 되어 있는데,“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 두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조금은 심각해졌습니다.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그렇습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만큼 엄숙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진지하게 사는 것입니다.
죽음의 준비는 삶의 준비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남아 있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꿉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제안하겠습니다.
☞1.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시면 죽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병동이 생긴지 40년이 넘었지만, 제도화는 걸음마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 기준도 의료보험도 혜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10년 전 하늘다리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지부에서도 2009년 호스피스 제도화 작업을 활발히 벌여 활성화한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무엇일까요?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
☞2. 맑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때 유언장을 만들어 놓으십시오
이때 건강한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유언장을 쓰면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식에게 지금 부모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만나교회에서는 겨울에 ‘will seminar’를 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유언장을 작성하는 방법에서부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유언장을 작성하다 보면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지막 생명이 있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십시오.
시한부 생명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이자 허상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직 건강할 때 꼭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작성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4.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살아서 모아놓은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식에게 아무런 것도 남겨주지 않겠다는 것이 일견 훌륭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녀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감사에 대한 사회적인 몫, 자녀의 몫, 하나님의 몫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부할 때 재산의 50%를 넘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부를 하고 가세가 기울어진다면 진정한 행복이 없어서 그리고 자녀의 마음에 분노를 남기는 기부를 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려고 준비된 삶을 사는 신앙적 결단이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품위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신앙적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꿈이 있습니다.
누군가 저의 죽음을 보고 “목사처럼 죽었다!”라는 말을 듣는 것, 그것은 “목사처럼 살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선 우리가 바로 진정한 ‘나’입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가 있습니다.
장례식 때마다 멋진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가 살아왔던 것보다는 훨씬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에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그래서 우리의 죽음의 과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축복하는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당신의 후손이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죽는 것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물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옴을 보면서 행복할 수 있는 이유, 후회함이 없이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 인간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면,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면, “무엇 때문에 사느냐?”라는 질문은 곧 “죽을 준비를 하고 사느냐?”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르틴 루터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우리의 건강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에라도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마치 이 땅 위에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말하자면 한 발 들고 한 발로 서서 사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를 알려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삶의 의미와 목적, 인생의 소중함, 궁극적인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시작이시며 삶의 근원이시기에 세상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 자신을 찾아야 하고 정립해야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은 5가지의 유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목적을 아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 의미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2)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3)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됩니다.
목적을 알면 우리의 노력과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4)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고 했습니다.
목적은 열정을 낳습니다. 분명한 목적은 위대한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5)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완성임과 동시에 좀 더 친숙한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차옥숭 목사의 [죽음과 친해지기]라는 설교 중에서…
몇 해 전에 죽은 동료 교수 중에 선순화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임학을 공부하다가 신비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전공을 바꾸어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 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유방암 수술을 하고 3년 후에 재발하여 결국 49세에 갔습니다.
그분을 만난 것은 서울대병원에서 암이 온몸에 전이되었다고 진단을 받던 날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가망에 없다고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살렸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도 받을 수 있는 곳을 권유했던 저에게 선목사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하느님께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드릴 명분이 없어. 다른 사람처럼 결혼을 해서 가족이 있는 것도 키워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한 가지 나는 후진들을 키워야 하니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것도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할 것이고.”
그 후 한 섬에서 통증에 시달리면서 요양하고 있던 그를 찾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선 목사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도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그를 살려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하루 저녁 목사님이 요양하는 섬에서 잠을 자며 기도하는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그분은 조용히 웃으며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니세요.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선배 하나가 암에 걸려 죽어갈 때 그를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어요. 그리고 선배는 얼마 후에 죽었지요.”
나중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몹시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진통제 한번 맞지 않고 갔습니다. 저는 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은 우리의 삶을 철저히 내맡기려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한 자기 비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던 사람들도, 갖은 보약에 좋은 것은 다 먹고 오래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던 사람들도 끝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하게 죽습니다.
최후의 시간이 이르렀을 때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과 영향력이 커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난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씀처럼 죽음이라는 가난 안에는 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두 같은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로 만들어주는 복입니다.
…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단 곡예사와의 대담한 내용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중 날기를 할 때 공중을 나는 사람은 자신을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합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은 1초의 몇 분의 몇까지 맞출 정도로 정확하게 공중 나는 사람이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팔과 손만 뻗고서 붙잡아주는 사람이 그를 잡아 안전하게 끌어주기를 기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사람이 붙잡아 주는 사람의 손목을 잡는다면 둘 중의 한 사람의 손목이 부러지게 되고 둘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중 날기를 하는 사람은 붙잡아 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믿고 팔을 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이 임박했을 때, 예수님께서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걸 잘 생각하세요. 당신이 길게 점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그 자리에 와 계실 겁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분이 당신을 붙잡아 주실 거예요. 그러니 그저 팔과 손을 앞으로 내밀기만 하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믿고 또 믿으세요.”라고 말합니다. “운반해주는 복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미국 영화에서 장례식에 가장 많이 읽히는 말씀이 시편 23편임을 보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도, 우리가 삶을 떠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죽음 앞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분명하게 나뉩니다.
테레사 수녀님께서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주여, 이제 당신이 확실히 보입니다!”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