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째 공유]
[ 넷째 등급의 무한 – 정위 불가능한 일방적 포함 ]
75. 우리는 네 번째 종류의 개념에 도달하였다. 개체적 개념 또는 모나드는 더 이상 가능한 사물이 아니라, 가능한 실존자(실체)이다.
76. 그러므로 완전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동일성(자기-포함, 형상들), ②외연(상호적 포함, 크기들), ③내포(정위 가능한 일방적 포함, 사물들), ④개체성(정위 불가능한 일방적 포함, 실체들).
77. 최종적인 것들은 여전히 단순한 개념이며, 개체적으로-단순한 것일까? 어쨌든 주어로 간주된 이러한 개념의 술어들은 하나의 극한으로 향하는 수렴하는 무한급수를 여전히 형성한다. 이러한 이유로 개체는 본성상 현실적으로 무한한 내포를 가지며, 무한을 포괄한다.
78.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개체적 개념, 모나드는 정확히 신의 逆이다. 즉 역은 분자와 분모를 바꾸는 수라는 의미에서 2, 즉 는 역으로서 을 갖는다. 그리고 신의 정식은 이며, 신은 역으로서 모나드, 을 갖는다.
79. 그러므로 과제는 모나드 안에서, 개체 안에서 수렴하는 무한한 계열이 내포의 수열과 같은 유형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경우, 다른 유형의 포함, 네 번째 유형이 문제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80. 확실히 개체적 실체들을 요건들, 내적 특징들을 갖는 것으로서 나타낼 수 있고 또 나타내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복원하며 형상과 질료,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을 실체의 요건들로 만든다.
81. 하지만 사물과 실체, 사물과 실존자 사이에는 못지않게 큰 차이들이 있다.
(1)첫 번째 차이는, 여러 내적 특징들 x, y ……를 가진 사물이 그러므로 여러 계열들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 여기에서 이 계열들 각각은 극한, 이유 또는 사물 안의 계열들의 연관으로 향하며, 이 연관이란 유형의 미분율이다.
- 세계는 수렴하는 유일한 계열이고 무한하게 무한하다는 점을, 비록 그 계열의 일부만을 명석하게 표현할 뿐이긴 하지만 각 모나드는 온 전체를 표현한다는 점을 앞서 보았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어떤 모나드의 명석한 지역은 다른 모나드의 명석한 지역으로 또 같은 모나드로 이어지며, 명석한 일부는 애매한 구역으로 무한하게 이어진다. -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수렴하는 계열들의 이어짐 또는 계속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공존 가능성’의 조건이다. 이는 무한하게 무한한 수렴하는 단 하나의 계열을, 모든 계열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유일한 변수를 가진 곡선을 매번 구성할 수 있게 한다.
- 그러므로 ‘차이적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계열 안에 있는 어떤 계열의 분석적 이어짐을 표현하며 각자는 수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에는 발산하는 계열들의 통일성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의미를 달리 하는, 항상 현실적인 네 번째 의미를 갖는 무한이다.
- 이것은 이제 자신에 의해서, 원인에 의해서, 계열의 ‘극한’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으며 극한에 등급을 매기거나 또는 ‘집합’(세계의 현실적으로 무한한 집합, 초한수)의 계열들을 변형시키는 질서나 연속의 법칙에 의해 정의된다.
- 각 모나드가 온 세계를 표현하는 것처럼, 주어에 대해서 단 하나의 개념 이외에는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주어-모나드들은 이제 세계를 표현하는 그들의 내적 방식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것이다.
- 충족 이유의 원리는 식별불가능자의 원리가 될 것이고, 유사한 두 주어도 없고 유사한 개체도 없다.
(2)모나드에게 유리해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차이가 있다.
- 자신의 텍스처 안에 있는 사물은 당연히 자신의 특징들이 들어 있는 계열들의 법칙, 극한들 사이의 차이적 관계를 포함한다. 반면, 이런저런 질서 안의 같은 세계를 포함하는 자신의 주름 안의 모나드들은 이 무한한 계열을 포함하지만, 이 유일한 계열의 법칙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 차이적 관계들, 서로 다른 질서들은 모나드 외부에 남아 있는 질서 전체의 집합을 지시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모나드 안에 있는데, 반면 모나드는 세계를 향해 있다.
- 신 자신도 개체적 개념들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들이 표현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도 세계의 미적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모든 계열이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이어지면서, 법칙 또는 이유는 초한수의 집합에서 무한하게 무한한 계열의 집합, 즉 세계에서 밀려나 또는 극한들 또는 극한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인식하고 선택하는 신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것과 같다.
- 이상으로부터 계열에서 집합으로, 그리고 집합에서 신으로 나아가는 신 실존의 우주론적 증명이 등장한다. 모든 계열은 물론 모나드 안에 있지만 계열의 이유는 그렇지 않다.
- 그리고 이 계열의 이유로부터 모나드는 단지 특정한 결과만을, 즉 자신의 부분을 실행하는 개체의 능력을 받아들일 뿐이다. 극한은 외부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으며, 모나드들 사이의 예정된 조화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 하지만 아마도 모나드는 여기에서 무능력보다는 힘을 끌어낼 것이다. 이유의 외부성은 서로의 안으로 계열들을 이어가는 적극적인 가능성의 귀결에 다름 아니다. 계열이란, 각 모나드의 명석한 표현에 상응하는 유한한 계열만 아니라 극 각각의 질서 또는 시선점에 상응하는 무한한 계열들까지를 말한다.
- 그러므로 네 번째 유형의 포함, 세계가 모나드 안으로 포함된 것은 물론 일방적인 것이지만, 정위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극한은 모나드 밖에 있기 때문이다.
82. 네 가지 무한이 있듯이, 네 가지 포함이 있다.
(1)원초적 형상들의 무한한 집합(= 신),
(2)극한 없는 무한한 계열들,
(3)내부적 극한을 가진 무한한 계열들,
(4)외부적 극한을 가진 무한한 계열들,
그리고 이것은 무한한 집합을 회복시킨다(= 세계).
83. 이제 처음의 모호한 점들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1)첫째, 본질은 직관적이든 공리적이든 문제적이든 간에 언제나 무한 안에 잡혀 있다. ‘동일적인 것들’ 자체가 직관적 본질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한 형상이다.
- 본질의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멈춰 세울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정의를 궁극적인 ‘동일적인 것’인 것처럼, ‘요건’을 정의인 것처럼, ‘극한’을 마치 도달된 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 실존의 영역 안에서는 반대로 우리를 멈춰 세울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계열들은 이어질 수 있고 이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며, 포함은 정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2)둘째, 모든 분석은 무한하며 무한 안에, 분석 안에는 오직 현실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 언제나 이중의 선행이 있다. 세계는 잠재적으로 우선하지만, 모나드는 현실적으로 우선한다.
- 그러므로 잠재적이라는 말은 어떤 본질 명제들에, ‘요건들’과 관계하는 명제들에도 역시 적합하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 이 말은 포함의 일방적인 특징을 지시한다.
- 포함은 잠재적이다. 라이프니츠가 명확하게 말하듯이 ‘포함’은 추출되어야 하며, ‘술어’는 오직 ‘어떤 잠재태 하에서만 주어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 적절한 예는 무리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출되어야 하는 제곱근, 또는 차라리 차이적 관계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같은 거듭제곱에 속하지 않는 양들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라이프니츠는 상호적이지 않은 포함의 두 경우, 즉 무리수들과 실존자를 한 데 재분류한다.
- 사물의 분석은 사실 술어들을 요건들로 규정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규정은 내부적 극한의 관념에 따라, 제곱근으로부터의 추출 내지는 크기의 탈잠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 실존자의 분석은 술어들을 세계로 규정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규정은 외부적 극한의 관념에 따라 거듭제곱의 계열의 이어짐을 통해 이루어진다.
- 우리는 항상 어떤 불확실성, 그러나 객관적인 불확실성을 재발견한다. 주름은 본질들과 실존자들 사이로 지나가는가, 아니면 한편으로는 신과 여기에 뒤따르는 것의 본질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실존자들의 본질들 사이로 지나가는가?
84. 무한 형상들 또는 일차적인 본질들의 경우에서가 아니라면, ‘술어는 결코 속성이 아니다.’ 아니 이것은 차라리 신의 개념의 가능성의 조건, 가능한 모든 관계를 조건 지을 비-관계이다.
85. 사실 다른 모든 경우에서 ‘술어는 오로지 관계 또는 사건’이다. 관계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며, 사건도 일종의 관계이며, 실존과 시간을 가진 관계이다.
86. 주어와 같은 개념에 포함된 것은 바로 항상 동사로 표현되는 사건 또는 전치사로 표시되는 관계이다. 나는 쓴다, 나는 독일로 간다,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
87. 일방적인 포함이 명제를 속성의 귀속 판단으로 환원하게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88. 반대로 귀속 작용은 바로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 프랑스의 신학자)가 라이프니츠에 반대해 내세우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는 포함을 비판하고 실체에 대한 데카르트의 개념화를 보전하고자 한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각하는 사물이다……)
89. 속성은 하나의 질을 표현하며, 하나의 본질을 지시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질을 통해 술어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며, 또 실존하는 주어를 ‘가능태의 이유에 따라서’일지라도 어떤 본질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90. 주어는 자신의 통일성에 의해 정의되며, 술어는 행동이나 정념을 표현하는 동사로서 정의된다.
91. 라이프니츠의 포함은 주어-동사-보어라는 도식에 의존하며, 이 도식은 고대 이래로 귀속 작용의 도식에 저항했다.
92. 바로크의 문법, 여기에서 술어는 무엇보다 관계와 사건이지 속성이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속성의 모델을 사용할 때, 이것은 종과 유의 고전적 논리의 관점에 의한 것이며, 오로지 명목상의 요구 사항에 따른 것이다.
93. 술어작용은 귀속작용이 아니다. 술어란 ‘여행의 실행’이며 행위, 운동, 변화이지 여행하는 상태가 아니다. 술어는 바로 명제 자체이다.
94. “나는 여행한다.”를 “나는 여행하고 있다.”로 환원할 수 없듯이, “나는 생각한다.”를 “나는 생각하고 있다.”로 환원할 수 없다.
95. 사유는 지속적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넘어가는 부단한 이행으로서의 술어이기 때문이다.
96. 술어가 동사라는 것, 그리고 동사가 계사나 속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라이프니츠가 사건을 개념화하는 것의 기반이다.
(1)첫 번째로 사건이 개념의 상태로 상승될 만하다고 판단되었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사건을 속성이나 질이 아니라 명제의 주어의 비물체적 술어로 만들었다(‘나무는 푸르다.’가 아니라 ‘나무는 푸르러지다.’). ‘있다’라는 동사는 ‘뒤이어 일어나다’로 대체되고, 본질은 양태로 대체된다.
(2)두 번째 위대한 사건의 논리학은 라이프니츠가 작동시켰다. 세계 자체는 사건이며, 비물체적(= 잠재적) 술어인 한에서 심연으로서의 각 주어 안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각 주어는 이 심연으로부터 자신의 시선점에 상응하는 양태들(양상들)을 추출해낸다.
①세계는 술어 작용 자체이며,
②양태들은 특수한 술어들이며,
③주어란 세계의 한 양상에서 다른 양상으로 이행하는 것처럼 하나의 술어에서 다른 술어로 이행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심연-양태들의 쌍이 형상 또는 본질의 지위를 박탈한다.
(3)스토아학파와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의 본질주의에 반하는 ‘마니에리슴’을 발명한다. 바로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마니에리슴은 스토아 마니에리슴으로부터 상속받아 이것을 우주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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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manière)
: ①일반적으로 ‘방식’, ②예술에서는 ‘양식’, ③철학에서는 ‘양태’를 뜻함.
마니에리슴(manièrisme, 매너리즘)
: 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 약 1520-1600년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운동을 지시한다. 마니에리슴은 르네상스의 균형과 조화를 거부하고 감성적인 강렬함과 모호함을 선호한다. 마니에리슴은 또한 라이프니츠와 같이 본질주의에 대립하는 ‘양태주의’다.
(3)세 번째 위대한 사건의 논리학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와 더불어 올 것이다.
첫댓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