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영혼의 해도(海圖)
바다와 별이 빚은 영원의 해도
A. 기억과 등대
The years teach much which the days never know. "세월은 하루하루가 결코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에머슨)
무수한 밤낮을 바다와 함께 살다 보니 천추객에게 어느 날부터 직업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항해사는 더 이상 직업이 아니라 그의 몸이 되어 있었다. 그의 피부에는 소금이 스며 있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과 오래된 상처가 겹쳐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딘가 먼 대양의 조수가 함께 들어왔고, 숨을 내쉴 때마다 오래된 항구 하나가 그의 몸 밖으로 떠나갔다.
그는 수없이 많은 항구를 보았고, 갑판 위에서 수많은 이별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왔고, 어떤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그 모든 것을 잊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기억은 과거에 묻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은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과거였다. 어제의 슬픔은 오늘의 항로를 흔들었고, 오래전의 사랑은 어느 날 문득 낯선 항구의 바람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때 그는 알았다. 인간의 마음에는 죽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다만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기억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칠흑 같은 밤이었다. 천추객은 혼자 갑판에 서 있었다.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선박의 주변에는 오직 검은 바다가 있었고, 그 위에 배 하나가 작은 불씨처럼 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등대의 빛이 한 번 회전했다. 어둠이 잠시 갈라졌다가 다시 닫혔다. 그 짧은 빛 속에서 천추객은 문득 자신의 생애를 보았다.
폭풍에 찢긴 날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자신이 떠나온 집. 떠나보낸 사람들. 끝내 자기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생각들.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등대는 어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B. 상처는 항로표지가 되었다
Out of suffering have emerged the strongest souls. "고통 속에서 가장 강한 영혼들이 태어났다." (칼릴 지브란)
웃음과 슬픔. 희망과 그리움. 사랑과 배신. 승리와 실패. 그 모든 것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긴 세월 동안 서로의 모서리를 닳게 하며 하나의 무게가 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들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늙어갈수록 반대로 알게 되었다. 인간은 상처를 지워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상처까지 자기 안에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존재라는 것을. 그의 상처들은 더 이상 흉터가 아니라 항로표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종이 해도를 내려놓았다. 수십 년 동안 해도를 믿었다. 위도와 경도. 침로와 거리. 별의 고도와 방위. 모든 것이 정확한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그러한 숫자가 없었다. 어디에서 태어나야 하는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지. 그 어느 것에도 해도에는 숫자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알았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해도는 종이가 아니라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라고.
C. 별을 바라보다
Nature always wears the colors of the spirit. "자연은 언제나 정신의 빛깔을 입는다." (에머슨, 《자연》)
그때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별 하나가 있었다. 아주 멀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웠다. 저 별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저 별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질문처럼 보였지만, 그 질문은 그의 생애 전체를 흔들었다.
별은 수만 광년의 시간을 건너 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빛이 그의 눈에 닿는 순간, 별은 더 이상 저 먼 우주의 한 점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별이 없으면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이 없다면 그 별빛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별과 인간. 하늘과 눈. 바깥과 안. 그 오래된 경계가 그 순간 아주 가늘게 흔들렸다. 어쩌면 인간이 평생 찾아 헤매는 것은 바깥에 있는 진리가 아니라, 바깥의 진리가 자기 안에서 진리가 되는 그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그는 한 사람을 만났다.
D. 대령혼(大靈魂) 앞에서, 에머슨을 만나다
Nothing can bring you peace but yourself.
"그대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뿐이다." (에머슨, 《자기 신뢰》)
갑판 뒤쪽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검소한 검은 외투. 조용한 얼굴. 그러나 그 눈에는 이상할 만큼 넓은 하늘이 들어 있었다. 천추객은 그를 알아보았다. 랠프 왈도 에머슨. 미국 콩코드의 사상가. "선생이시여, 저는 지금 별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별이 제 밖에 있는 것인지, 제 안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머슨은 웃었다. "그대는 이제야 아주 오래된 문 앞에 도착했군. 인간과 우주를 갈라놓았던 문일세." 그는 바다를 가리켰다. 파도 하나가 솟아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저 파도는 바다이면서 바다 전체는 아니지. 바다가 잠시 그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이네. 인간도 그러하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독립된 섬이라 생각하지. 그러나 섬 아래에는 하나의 대륙이 이어져 있네.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존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제가 평생 겪은 고독도 결국 고독이 아니었습니까?"
에머슨은 한참 뒤에 말했다. "고독은 사라지지 않네. 고독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지. 젊을 때의 고독은 '나는 혼자다'라는 말이네. 그러나 깊어진 영혼의 고독은 '나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으나,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
천추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평생의 항해를 설명하고 있었다. 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항해를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의 말과 사랑과 상처가 그의 안에 남았다. 혼자이면서 함께였다. 그것이 인간이었다.
E. 투명한 눈알
I become a transparent eyeball; I am nothing; I see all. "나는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본다." (에머슨, 《자연》)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령혼'은 신과 같은 것입니까?" 천추객이 물었다.
에머슨은 별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에는 함정이 있네. 신을 인간 바깥에 하나의 거대한 존재로 세워놓는 순간, 우리는 이미 둘을 갈라놓게 되지. 내가 말하는 대령혼은 인간의 자아보다 훨씬 크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만나는 것이네. 파도 하나를 가리켜 '이것이 바다 전체다'라고 말할 수 없듯이, 그대는 전체가 아니지만 전체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네."
"나는 한때 숲 속에서 자아가 투명해지는 순간을 말한 적이 있네." 에머슨이 말했다. "창문에 먼지가 쌓이면 사람은 창밖이 아니라 창문에 붙은 먼지를 보게 되네. 인간의 자아도 그러하지. 욕망과 두려움과 자만이 마음에 쌓이면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네."
"그렇다면 투명해진다는 것은?"
"자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네." 에머슨이 말했다. "자기를 더 이상 세상의 중심으로 세우지 않는 것이지."
자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 그때 비로소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가, 별이, 타인의 슬픔이,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까지 보인다. 그리고 그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보게 된다.
F. 별빛과 진리
To believe your own thought, to believe that what is true for you in your private heart is true for all men — that is genius.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의 마음속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이라 믿는 것 — 그것이 천재다." (에머슨, 《자기 신뢰》)
밤바다가 깊어졌다. "별빛은 별에서 출발하네." 에머슨이 말했다. "그러나 별빛이 '보이는 것'은 그대의 눈에서 완성되지. 별과 눈은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네. 진리도 그렇다네. 바깥에 있다고만, 안에 있다고만 말할 수 없네.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보는 순간 인간의 존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지."
천추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훗날 그가 이 책 전체를 쓰게 될 이유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에머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대는 이제 항해를 기록하려 하지 말게. 항해가 그대 안에서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기록하게. 배의 항로는 해도에 남지만, 인간의 항로는 마음에 남는다네. 그리고 기억하게. 등대는 배를 대신하여 항해하지 않네. 등대가 하는 일은 단 하나, 그대 안에 이미 있는 방향을 잊지 않게 하는 것."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에머슨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오래 남았다.
G. 별과 마주하다
It is not down on any map; true places never are.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다. 진짜 장소는 결코 지도에 없는 법이다." (허먼 멜빌, 《모비 딕》)
천추객은 혼자 남았다. 그는 다시 별을 보았다. 조금 전과 똑같은 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별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천추객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별빛이 바다 위에서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가 평생 찾아 헤맨 것이니라."
"나의 항구인가?"
"아니다."
"나의 고향인가?"
"그것도 아니다. 네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너 자신이니라."
천추객은 숨을 멈추었다. "나는 네 밖의 등대가 아니니라." 별빛이 그의 눈동자에 맺혔다. "나는 네 안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하늘이니라."
첫댓글 영혼의 해도(海圖),
바다와 별이 빚은 영원의 해도를
공부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변한없이 정을 남기시는 선생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사공님 페이지가
너무 좋아서
흐믓한 만족을 흘리고..또 흘리고.
초록비(綠雨)님^^
방가방가
이제야 여름이 물러가나봅니다.
역시 항해는
별과 파도와 하늘인 것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