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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고문헌(古文獻, 옛 고·글월 문·드릴 헌: 옛 기록)과 현대 연구를 서로 대조해 보니, 한국사에서 승군(僧軍, 중 승·군사 군: 승려로 이루어진 군사 집단)·승병(僧兵, 중 승·병사 병: 전투에 동원된 승려)의 존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단순히 ‘나라가 위급할 때 승려가 자발적으로 싸웠다’는 수준을 넘어, 사원에 소속된 승도(僧徒)를 국가가 군대로 차출하거나 별도의 군사조직에 편제한 제도적 흔적까지 확인됩니다.
다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증거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삼국시대에는 전투를 지휘한 승려는 확실히 확인되지만 ‘승려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승군 조직’까지 입증하기는 어렵고, 고려시대부터는 승군·승병의 조직적 존재가 문헌상 명백해집니다. 이 구별이 가장 중요합니다.
1. 먼저 ‘승군’과 ‘승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승군(僧軍)은 문자 그대로 ‘승려의 군대’, 승병(僧兵)은 ‘군사로 활동하는 승려’입니다. 그러나 고려 사료에서는 항상 ‘僧軍’이라고만 쓰지 않고 승도(僧徒, 중 승·무리 도: 승려 무리), 종군승(從軍僧, 좇을 종·군사 군·중 승: 군대를 따라간 승려), 수원승도(隨院僧徒, 따를 수·집 원·중 승·무리 도: 사원에 소속되어 사원을 따르던 승려 집단)** 같은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김창현의 「고려시대 승병의 성격과 역할」은 고려의 수원승도를 단순히 수행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이들은 사원의 노동력·방위력을 담당하다가 국가가 전쟁을 벌일 때 군인으로 차출될 수 있었으며, 스스로 장비와 식량을 마련해 출정하기도 했습니다. (KCI)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가 인용한 『고려사』 병지(兵志, 병사 병·뜻 지: 군사제도를 기록한 부분)의 내용은 훨씬 명확합니다.
고려 초기 안팎의 사원에는 수원승도가 있었으며, 국가가 군사를 일으키면 여러 사원의 수원승도를 징발하여 여러 군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즉 승려들이 전쟁 때 우연히 무기를 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동원 대상이 되는 인적 자원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삼국시대: ‘승려 장수’는 확인되지만 ‘상설 승군’은 확인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612년 살수대첩 때 승려 7명이 수나라 군대를 유인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승군」 항목에도 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 『삼국사기』의 살수대첩 기사에는 이 ‘7명의 승려’ 이야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근거로
“고구려에는 612년에 조직된 승군이 있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비판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국사기』에서 직접 확인되는 가장 분명한 사례는 백제 부흥운동의 승려 도침(道琛)입니다.
3. 660~661년 백제 부흥군의 승려 도침
백제가 660년에 멸망한 뒤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는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유인원이 지키던 웅진성을 포위하였다.
고 기록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더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입니다.
661년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 거느릴 영·군사 군·장수 장·군사 군: ‘군대를 거느리는 장군’)
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복신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세력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따라서 도침은 단순한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실제로 군대를 지휘한 승려 장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도침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 전체가 승려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백제 승군 수천 명’과 같은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즉 삼국시대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승려가 군사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가한 사례가 있었다.”
까지입니다.
4. 고려시대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고려에 들어오면 승군의 존재는 여러 독립된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특히 다음 기록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1104 항마군 → 1174 조위총의 난 → 1216~1217 거란 침입 → 1232 몽골 침입 → 1254 상주산성 → 1359 홍건적 → 1378 화통방사군
이라는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5. 1104년 윤관의 별무반에 ‘항마군’ 편성
이것이 고려 승군 제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숙종 9년인 1104년 여진에 대비하여 윤관(尹瓘)이 별무반(別武班, 다를 별·무사 무·무리 반: 특별 군사부대)을 창설했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신기군·신보군 등 여러 병종을 편성한 다음
“또 승도(僧徒)를 선발하여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았다.”
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항마군(降魔軍, 내릴 항·마귀 마·군사 군)은 글자 그대로 하면
“마귀를 굴복시키는 군대”
입니다.
불교적인 이름을 붙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승려를 선발해 군사조직에 편입한 부대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1104년 고려에서는
승군이 국가의 공식 군사 편제 안에 들어갔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고려사』 병지는 고려 초기부터 사원에 수원승도가 있었으며, 국가가 군대를 일으키면 이들을 징발하여 여러 군에 나누어 배속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따라서 항마군은 느닷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존 사원 인력을 국가군으로 활용하던 관행을 더 명시적인 군사조직으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6. 1174년 조위총의 난 ― “사원의 승병 1만 명”
친구가 말씀하신 바로 그 사례입니다.
그리고 실제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권99 현덕수열전에 따르면 명종 4년인 1174년 조위총(趙位寵)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위총 측 운주 낭장 군우(君禹)가 연주를 회유하며 이렇게 위협합니다.
서경에서 보낸 관리들이 40여 성의 군사와 사원들의 승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공격하려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번역에도
“40여 성의 군사 및 사원들의 승병(僧兵) 10,000여 명”
이라고 명확히 나옵니다. (db.history.go.kr)
이 기록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순히
“승려 몇 명이 싸웠다”
가 아니라,
“사원들의 승병(諸寺院 僧兵)”
이라는 군사집단이 구체적인 병력 단위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확하게 고쳐야 할 부분
친구가 말씀하신
“조위총의 난 때 고려 정부가 승병 1만 명을 동원하려 했다.”
는 표현은 약간 고쳐야 합니다.
정확하게는
“1174년 조위총 측이 40여 성의 군사와 여러 사원의 승병 약 1만 명을 동원하여 연주를 공격하려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입니다. (db.history.go.kr)
그리고 이 숫자는 실제 전투에 1만 명 전원이 출전했다는 전투일지가 아니라 조위총 측이 연주에 보낸 위협·회유 문서에 등장하는 병력 수라는 점도 밝혀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장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사원 승병이 대규모 군사자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7. 무신정권과 사원 승병
고려 무신정권기에는 승병이 외적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개입합니다.
1170년 무신정변 뒤 일부 왕실 사찰의 승려들이 무신 세력에 저항했고, 이후에도 사원 세력과 무신정권의 충돌이 반복됩니다.
1217년에는 더욱 분명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거란유종이 고려에 침입하자 승려들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사절요』 고종 4년 정월조는
흥왕사·홍원사·경복사·왕륜사·안양사·수리사 등의 종군한 승려들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고 기록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에도 같은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려들은 거란군에게 패해 도망쳐 온 것처럼 꾸미고 선의문을 돌파했으며 수문군을 죽이고 최충헌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최충헌의 가병에게 진압되었는데, 전후로 살해된 승려가 약 80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1217년 당시 개경 주변의 대형 사찰들은 적어도 수백 명 단위의 무장 가능한 승려 집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8. 1216년 거란 침입 때 승군 수백 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토대로 1216년 고종 3년 거란군이 서북지역을 침입하자 고려 조정이 군대를 동원했고, 이때 승군 수백 명이 참가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도 이 시기 개경의 종군 가능한 사람들을 군대로 편성할 때 승려도 함께 동원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역사넷)
그리고 바로 이들이 다음 해 1217년 최충헌 제거 사건에 등장하는 ‘종군 승려’들과 연결됩니다.
즉
외적 침입 → 승려 군사동원 → 승군의 조직적 존재
가 사료에서 연속적으로 확인됩니다.
9. 1232년 처인성 ― 승려 김윤후와 몽골군 살리타
승병사의 가장 유명한 사례입니다.
1232년 몽골 제2차 침입 때 살리타[살례탑]가 처인성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현원(白峴院)에 있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처인성에 피난해 있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근거한 연구에 따르면 김윤후는 처인부곡민과 승려들과 함께 몽골군에 맞서 싸웠고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가 전사하면서 몽골군이 철수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만 한 가지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김윤후가 직접 활을 쏴 살리타를 죽였다.”
고 알려져 있지만, 관련 사료에는 표현의 차이가 있고 김윤후 자신도
“싸울 때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는 취지로 공을 사양한 기록이 전합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안전한 표현은
“김윤후가 지휘·참여한 처인성 항전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가 전사하였다.”
입니다.
김윤후가 승려였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1254년 상주산성의 승려 홍지
몽골 침입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승병 사례입니다.
고종 41년인 1254년 몽골군이 남하하다 상주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관련 고려 사료를 바탕으로 황령사 승려 홍지(洪之)가 상주산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역사넷)
따라서 몽골 침입기의 승려 전투 참여는 처인성 김윤후 한 명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는 현상이었습니다.
11. 1359년 홍건적 침입 ― 국가가 승병을 지휘관에게 맡기다
고려 공민왕 때에는 국가가 승군을 공식적으로 지휘관에게 맡기는 매우 명백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1359년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사절요』는
전 찬성사 권적(權適)에게 명하여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가게 하였다.
고 기록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증거입니다.
왕이 직접 명령하여
권적 → 승병 → 출정
이라는 군사지휘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려 말에 승병은 비정규적인 자원병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필요할 때 공식 장수의 지휘 아래 출전시키는 군사력이었습니다.
12. 1378년에는 사원별 ‘화통방사군’까지 배치
승군의 군사 기능은 고려 말 화약무기의 등장과도 연결됩니다.
우왕 4년인 1378년 『고려사』에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국가가 개경과 지방의 각 사원에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 불 화·대롱 통·놓을 방·쏠 사·군사 군: 화통을 발사하는 군사)
을 정해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규모는
대사(大寺) 3명, 중사(中寺) 2명, 소사(小寺) 1명
이었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기록은 고려 승군의 성격이 얼마나 제도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찰이 단지 종교시설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 군사인력을 제공하는 조직 단위로도 활용된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이러한 항마군·화통방사군 편성이 고려 사원 승도의 군사적 기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KCI)
13. 그렇다면 고려의 승병은 ‘수행하던 스님들’만이었을까?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승려’라고 하면
삭발하고 절에서 수행하는 전문 종교인
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려 사원의 승도 구성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사원에는 고승·학승뿐 아니라
수원승도·공역승·사역승·공장승·종군승
등 다양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김창현의 연구는 수원승도 가운데 상당수가 사원을 유지하고 노동하며 필요하면 군사로 동원되는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KCI)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도 이른바 재가화상들이 평소에는 생업을 유지하다 국가 공역에 참여하고, 전쟁이 나면 자신의 식량을 가지고 종군해 용감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이를 고려 승군의 중요한 기반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역사넷)
따라서 고려의 승병을 모두 선방에서 참선하던 고승들이 갑자기 칼을 들었다고 상상하면 실제 역사와 다릅니다.
사원의 인구집단 가운데 군사동원이 가능한 하급 승도와 사원 종속 인구가 승군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14. ‘호국불교 때문에 승려들이 싸웠다’만으로 설명하면 부족하다
승병을 흔히
“불교의 호국정신 때문에 나라를 구하려고 승려들이 나섰다.”
고 설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고려 승군을 설명하면 부족합니다.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적어도 네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사원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인적·경제적 기반
사원을 지키기 위한 무장력
국가가 사원 승도를 군역이나 공역에 동원하는 제도
외적 침입 때의 종교적·정치적 호국 의식
이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승병은 국가를 위해서만 싸운 것도 아닙니다.
1174년에는 조위총의 반란군 측에도 승병 1만여 명이 등장하고, 1217년에는 종군 승려들이 최충헌을 죽이려는 무장봉기를 벌였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따라서 고려 승군을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적인 승려군”
으로만 정의하면 역사적 현실의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승군은 국가·왕실·사원·지방세력·정치세력 등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동원할 수 있었던 실제 무력집단이었습니다.
15. 『삼국유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친구가 특별히 『삼국유사』도 말씀하셨기에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고승들의 국가적 활동, 호국적 불교 신앙, 왕실·전쟁과 관련된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고려사』의 항마군이나 조위총 때의 ‘승병 1만 명’처럼 독립된 승군 조직의 규모와 동원을 직접 보여주는 확실한 기사는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승군을 설명할 때는
『삼국유사』의 호국불교 이야기와 ‘승군이라는 군사제도의 존재’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삼국시대에 가장 확실한 군사적 승려 사례는 현재로서는 『삼국사기』의 도침과 같은 사례입니다.
16. 조선으로도 승군은 이어진다
고려에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휴정·유정·영규·처영 등의 의승군(義僧軍, 옳을 의·중 승·군사 군: 나라를 위해 일어난 승려군)이 활동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승군의 역사는 임진왜란의 ‘자발적 의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뒤에는 산성 방어·축성·군량운송 등을 맡는 승군역(僧軍役)이 제도화되었습니다. 17~18세기 승군역과 의승방번전제를 연구한 논문에서도 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의 방어체제와 승군 동원이 장기간 지속된 사실이 확인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더 놀라운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입니다.
『고종실록』에는 프랑스군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군을 각각 총섭이 거느리고 양주진으로 출동시키라
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다음 날에는 실제로
북한산성 승군을 양주 진영으로 보냈다
는 보고도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즉 승군은 임진왜란 때만 잠깐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형태를 달리하며 장기간 존속한 군사·노역 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7. 사료로 확실히 확인되는 승군 사례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연도사건승군·승려의 활동사료적 확실성
| 660~661 | 백제 부흥운동 | 승려 도침이 영군장군을 자칭하고 군 지휘 | 매우 높음 |
| 1104 | 윤관 별무반 | 승도를 뽑아 항마군 편성 | 매우 높음 |
| 1174 | 조위총의 난 | 조위총 측이 40여 성 군사와 사원 승병 1만여 명 동원 계획 | 매우 높음 |
| 1216 | 거란유종 침입 | 승려들이 종군 | 높음 |
| 1217 | 최충헌 제거 시도 | 여러 사원의 종군승들이 무장 봉기, 진압 과정 약 800명 피살 기록 | 매우 높음 |
| 1232 | 몽골 2차 침입 | 승려 김윤후 등이 처인성 항전 | 매우 높음 |
| 1254 | 몽골 침입 | 황령사 승려 홍지 등이 상주산성 항전 | 높음 |
| 1359 | 홍건적 침입 | 왕이 권적에게 승병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명령 | 매우 높음 |
| 1378 | 왜구 대응기 | 각 사원에 화통방사군 배정 | 매우 높음 |
| 1592~ | 임진왜란 | 휴정·유정·영규·처영 등 의승군 활동 | 매우 높음 |
| 17~19세기 | 산성 방어 | 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을 중심으로 승군역 지속 | 매우 높음 |
| 1866 | 병인양요 | 북한산성·남한산성 승군 동원 | 매우 높음 |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결론
친구야, 이 자료들을 연결해 보면 한국의 승군은 임진왜란 때 갑자기 생긴 조직이 아닙니다.
삼국시대에는 도침처럼 승려 개인이 군대를 지휘한 사례가 먼저 보입니다.
고려에 들어오면 사원에 많은 수원승도가 존재하고, 국가가 전쟁 때 이들을 차출하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1104년에는 아예 항마군이라는 국가 군사편제에 승려가 들어갑니다. 1174년에는 조위총 측 문서에 ‘사원 승병 1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등장합니다. 1216~1217년에는 여러 대형 사원의 승려들이 실제 종군하고 수백 명 단위로 무장 행동을 할 능력을 보여 줍니다. 몽골 침입기에는 김윤후·홍지와 같은 승려들이 실전에 참여했고, 1359년에는 국왕이 장수 권적에게 승병을 맡겨 출전시키며, 1378년에는 사원마다 화통방사군을 배치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래서 고려의 사찰을 종교 공간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대규모 사찰은 토지와 물자, 노동력을 가진 경제조직이면서 많은 승도를 거느린 사회조직이었고, 유사시에는 그 인력을 군사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이 고려 승군의 핵심입니다. 현대 연구 역시 고려의 승군을 ‘호국불교의 정신’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원의 인적·경제적 기반과 국가의 군사동원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KCI)
요점 정리
① 삼국시대에 승려의 군사활동은 사실이지만, 조직적인 상설 승군의 존재까지 단정할 자료는 부족합니다. 가장 확실한 사례는 백제 부흥군의 장군 도침입니다.
② 고려에서는 승군의 존재가 명백합니다. 사원 승도는 전쟁 때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자원이었습니다.
③ 1104년 윤관의 별무반에는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이 공식 편성되었습니다.
④ 1174년 조위총의 난 당시 『고려사』에는 “40여 성의 군사와 사원 승병 1만여 명”이라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다만 중앙정부군이 아니라 조위총 측 병력입니다.
⑤ 1216~1217년 거란 침입 때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실제 종군했고, 1217년 최충헌 제거 시도에서는 약 800명의 승려가 희생되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⑥ 몽골 침입기에 김윤후·홍지 등의 승려들이 실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⑦ 1359년 홍건적 침입 때 국왕은 권적에게 승병을 맡겨 출정시켰고, 1378년에는 전국 사원에 화통방사군을 배치했습니다.
⑧ 따라서 승군은 임진왜란기에 갑자기 출현한 ‘의병 승려’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이미 상당히 제도화되고 조직화되어 있던 군사적 존재였습니다.
친구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신라의 진호사찰(鎭護寺刹, 누를 진·도울 호·절 사·절 찰: 나라와 지역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찰) 문제와 연결하면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삼국·통일신라의 진호사찰이 고려의 사원 승군처럼 실제 군사력까지 보유했는가?”입니다. 이 문제는 문경의 대승사·사불산 일대 사찰과 산성망의 관계를 판단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다만 이것은 사료상 신중하게 따로 검토해야 하며, 고려의 승군 제도를 그대로 6~7세기 신라에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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