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임덕기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그들은 삼십년지기로 젊은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아직도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친구가 한 명 있고, 나머지 세 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 동네를 떠났다. 자식들도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분가하는 과정을 서로 훤히 꿰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둥지를 떠났고, 이제 늙은 부부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동네에서 아직도 터줏대감이 되어 살고 있는 친구는 요즘 치솟고 있는 아파트 값 때문에 생각지 않은 표정관리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 결혼시키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했는데, 미적거리다 움직이지 않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엄마가 지금껏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게 이사 안한 거야.”
얼마 전, 친구 아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웃음 뒤에 숨은 아들의 속내를 짐작하며 우리는 그 말에 한바탕 웃었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도, 부모의 남은 재산이 언젠가 자식들 몫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더 잘 알고 있겠지 싶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다. 친구들이 명품관에서 옷을 보고 그곳에서 차를 마시자고 한다. 나이가 들어도 옷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아직도 유별나다. 예나지금이나 관리를 잘해 체형이 별로 변하지 않은 그들은 걷는 걸음마저 당당하다. 나는 야금야금 불어난 체중 때문에 옷 사는 일이 고역스럽다. 옷에 대한 열정이 나도 모르게 사그라졌다. 젊은 시절에는 옷에 대한 욕심이 있고 그들처럼 걸음이 가벼웠는데, 이제는 어깨도 아파 날개를 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명품관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부터 남다르다. 은은한 향이 퍼지며 안내원이 문 앞에 서서 친절히 고객을 맞이한다. 이름난 상표의 옷과 가방, 화장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구경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비싼 명품을 찾는 이들은 따로 있으니,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도 별 상관없어 보인다. 상점 앞을 지나가도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나는 편한 옷과 가벼운 가방에 마음이 끌린다. 값비싼 옷을 사서 장롱 안에 보관하는 일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입었던 이런저런 정장이 아직 장롱 안에 남아있지만 잘 입지 않는다.
어느새 피부는 버석거리고, 몸은 세월의 더께로 삐걱댄다. 친구들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호소한다. 내남없이 눈가와 목에 생긴 주름으로 야심찬 날개가 차츰 망가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들은 날개를 새로 달고 창공을 향해 다시 힘차게 날고 싶은 눈치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 크로마뇽인은 기상의 변화로 아프리카 땅을 떠나서 살 곳을 찾아 유럽으로 향했다. 고대인류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보다 아프리카를 미리 떠나 유럽에 왔지만 그들은 빙하기에 멸종했다. 바느질을 할 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낼 옷이 없어서였다. 뒤늦게 찾아온 크로마뇽인은 빙하기에 짐승 뼈 조각으로 바늘을 만들어 털가죽을 꿰매 입고 동굴 속에서 혹독한 추위를 이겨냈다.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가죽 옷이 결국 현생과 고대 인류의 존망存亡을 결정한 셈이다.
현대에는 옷이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용도뿐 아니라 부富의 척도가 되고 일종의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명품을 걸치면 자신이 명품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비싼 옷을 걸치고 싶어 한다. 물론 자신의 분수에 맞춰 비싼 옷을 사는 이들도 있지만,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명품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여인들에게 옷은 과연 날개일까.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젊은 여인이 지나간다. 짝을 찾기 위해, 오로라처럼 환상적인 꿈을 좇으려고 몸에 걸치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태양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경고를 무시했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허황된 욕망이 때론 추락으로 이어지곤 한다.
취업을 위한 면접시험에도 얼굴이나 머리모양, 체중과 차림새를 본다고 한다. 비주얼visual시대이다. 시각적인 면을 중시하는 외모지상주의 덕분에 성형외과가 성시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너도나도 겉치장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겉모습만 신경 쓰면 내면은 자연히 부실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린 시절에 입었던 기억나는 옷이 있다.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자주색 코르덴 원피스다. 어머니가 사다주신 그 옷을 입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날 마당에서 식구들이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다. 펌프가 있는 마당에는 화단에 화초들이 자라고, 남동생 누비처네 앞에서 나는 앞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서 있었다.
“우리 딸내미 춘향이 같네.”
어머니가 흐뭇해하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기뻐하시는 목소리에 어린 나도 덩달아 마음이 환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날 입었던 코르덴 원피스는 날개달린 옷처럼 내 마음을 부풀게 했다.
작년 가을 이사하면서 장롱 안에 잠들어 있던 옷을 한 무더기 내다버렸다. 의류함에 넣는 대신 종이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옆에 두었더니 누군가 금방 가져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가져가 입는다면 그 옷은 다시 활기가 넘칠 것이다. 한결 널찍한 옷장 안을 들여다보니 가슴이 후련하다.
언젠가 새 날개를 준비할 것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구절처럼 통찰력을 키워 더 멀리 내다보고 싶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아니라, 멀리, 높이 날 수 있는 조나단의 날개를 준비하리라.
첫댓글 어느새 피부는 버석거리고, 몸은 세월의 더께로 삐걱댄다. 친구들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호소한다. 내남없이 눈가와 목에 생긴 주름으로 야심찬 날개가 차츰 망가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들은 날개를 새로 달고 창공을 향해 다시 힘차게 날고 싶은 눈치다... 현대에는 옷이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용도뿐 아니라 부富의 척도가 되고 일종의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명품을 걸치면 자신이 명품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 언젠가 새 날개를 준비할 것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구절처럼 통찰력을 키워 더 멀리 내다보고 싶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아니라, 멀리, 높이 날 수 있는 조나단의 날개를 준비하리라.(본문 부분 발췌)
이카루스의 날개가 아닌 조나단의 날개를 준비하는 이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우리 안의 진짜 날개를 생각해보게하는 좋은 글이네요 ^^
조성순 선생님의 노고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