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困
오군과 표마양의 결혼식 일자나 장소를 나는 모른다. 다만 신랑인 오근실군과 신부 표마자도양 그리고 주례선생님인 나와 세 사람이 대기실에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장면부터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지 하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굵직굵직한 유지들의 얼굴도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호화스러운 결혼식이 될 모양이었다.
신랑과 나와는 같은 직장의 동료 사이라는데 전에는 별로 만난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어째서 나를 주례로 세웠는지 그 이유도 나는 모른다. 다만 오군의 요청을 내가 쾌히 승낙한 모양이고 오군은 이 일을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결혼식은 3시 20분부터 40분 사이에 시작하면 되는데 20분만 되면 바로 시작하자고 신랑이 서둘렀다. 성혼선언문은 준비해서 탁자 위에 갖다놓았다고 그는 덧붙여 주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양가의 어느 편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혼주인 듯싶은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주전자와 유리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우선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적당한 우리말이 생각이 안 났는지 그분은 분명히 일본말로"마에이와이"라는 말을 하면서 잔을 권했다. 그런 뜻이라면 별로 사양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유쾌한 마음으로 컵을 잡았다. 그런데 더 유쾌한 일은 을 한 잔 든 뒤에 일어났다. 컵에 담겨진 술은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보통 가정에서 담그는 흔한 포도주로만 생각하고 아무런 마음의 부담없이 마셔버렸다.
그런데 나의 짐작이 잘못이었다. 딱 한 잔의 술이 그렇게 금시 전신을 훈훈하게 취하게 해줄 수 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술을 잘못 마시고 또 술의 진미도 잘 모르는 축이지만 술에 약한 체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번에는 술 잘하기로 호가 난 어떤 의사 한 분과 큰 컵을 가지고 1대 1로 대작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다섯 컵에서 떨어졌고 그 뒤 나는 자작으로 세 컵을 더 비운 뒤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분이 먼저 술 시합을 하자고 도전해 왔기 때문에 오기로 퍼마신 것이다. 어느 잔칫집에서였기 때문에 쌍방이 서로 어떤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실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날 내가 덕을 본 일이 있다면 결코 내가 술에 약한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무료로 실험해 본 셈이다. 그런데 그 실험이 별로 정확성이 없었다는 것을 오늘 다시 확인한 셈이다. 역시 무료로 한 실험이라 실효가 적었던 것일까? 단 한 잔의 술에 이렇게 자신을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들떠 있었지만 다리의 힘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신랑이 시작 시간을 알려왔고 나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가누면서 단위에 올랐다. 단에 올라와서 느낀 일이지만 오늘의 식장의 배치가 다른 경우와 아주 다른 것을 어렴풋이 알 수가 있었다.
첫째 주례의 서는 자리가 달랐다. 다른 예식장에서는 주례가 내빈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옆으로 서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뒤 신랑 신부의 입장이 끝나서 주례와 마주셨다. 이어서 사회자가 들러리의 입장을 알리자 키가 크고 늘름한 청년들 십여 명이 일렬로 서서 단 위로 올라왔다. 모두 신랑의 친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내빈과 결혼 당사자인 신랑 신부 그리고 주례인 나의 사이를 가로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내빈들은 그들에 가려서 결혼식의 장면을 볼 수 없고 다만 주례의 말소리만 듣고 식의 진행을 알 뿐이다.
세상에 별 기묘한 식장의 배치도 다 있구나 싶었지만 별로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사회자가 높은 억양으로 식순을 불러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물 교환이 끝나고 주례가 성혼선언을 할 차례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내는 다소 소연해지기 시작했다. 식장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엄숙하다기보다는 대체로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희화적(戱畵的)이라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았다.
나는 되도록 근엄한 태도를 꾸미려고 애를 썼지만 전체적인 공기를 바로 잡지는 못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성혼선언문을 집어들었다. 결혼식 중에서 이 대목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봉 속에서 알맹이를 뽑아든 순간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신랑 신부의 이름이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바라보니 처음부터 이름을 빼놓은 것이 아니라 이름이 써있던 자리를 모조리 불로 태워서 구멍을 뚫어놓은 것이었다.
취중에서도 나는 누군가가 주례를 골려주기 위해서 장난을 한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따지기 위해서 식을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랑의 이름 오근실은 이내 생각이 나는데 신부의 이름이 도무지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이름을 생략하고 그대로 모양이라고만 어물어물 넘길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용기(?)를 내어서 사회자를 불러서 이름을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 앞에 있는 신랑 신부에게 묻지도 않고 떨어져 있는 사회자를 부르게 된 까닭은 나도 모른다.
내 옆으로 바싹 다가온 사회자는 신부의 성은 '표마' 이고 이름은 '자두' 라고 귓속말로 속삭여 주었다. 나는 처음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나의 귀를 의심했었다. 대체 우리나라 성씨 중에 그런 성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또 이름도 과실 이름을 그대로 땄으니 망측하지 않은가. 나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사회자에게 거듭 이름을 다짐했지만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석연치 않은 대로 나는 하는 수없이 오근실 군과 표마자두 양의 이름을 크게 읽으며 성혼을 선언한 것이다.
그때 내빈석에서는 한바탕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회자가 눈치를 채고 달려와서 신부의 이름을 '자도'라고 한자로 써서 정정해 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쾌감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식이 시작되기 전에 마신 그 이상스러운 술기운이 이제사 더욱 훈훈하게 퍼져서 전신을 노곤하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한 기분 속에서 나는 잠을 깬 것이다.
이미 아침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이렇게 숙면을 취해보기는 이 며칠새 처음 있는 일이다. 아마 '봄' 의 탓인지도 모른다. 내빈석의 폭소라고 생각했던 것은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우리 식구들의 웃음소리였던 것이다. 지금 부엌에서는 이 집 내무장관 겸 취사부장인 안주인과 막내아들인 대학 1학년생 사이에 한창 어떤 즐거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무산된 결혼식장과 성혼선언문을 읽으며 당황하던 꿈 속의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혼식이 중도에 깨져 주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못내 서운했지만 그러나 결코 꺼림칙한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식구들에게 잠에서 깼다는 신호를 해두는 것이 좋을것 같았다. 무슨 결혼 청첩장 같은 거라도 받아둔 것 없느냐고 주방 쪽을 향해서 말을 던졌다. 그런 일 없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면서도 신호를 보내는 셈치고 한 말이다. 아직도 나의 목소리는 주례를 보던 억양이 다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취사부장은 역시 예측한 대로 그런 것 없었다는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전정사가 아침 일찍 올 것이라는 추가 보고도 전해왔다. 그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전정사 박씨가 오면 나도 함께 과수원에 나갈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올해 첫 수학을 보게 될 사과와 '자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른하게 기지개를 켜본다.
지금 우리 둘레에 가득히 밀려오는 봄기운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나는 몇 번이나 거듭 기지개를 켜보는 것이다.
(韓國隨筆,1976. 봄호)
첫댓글 지금 우리 둘레에 가득히 밀려오는 봄기운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나는 몇 번이나 거듭 기지개를 켜보는 것이다.-..
1976년 수필인데도 지금 읽어도 재미있네요. ^^ 주례를 서는 꿈. 결혼식장에서의 황당한 실수..
단숨에 몰입감있게 잘 읽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봄 기운이 밀려오기를 .
소중한 글 퍼오신 조성순 선생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