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복궁 터 분석
조선왕궁터는 북악산이 주산(主山)이 되고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안산(安山)과 남산(南山)의 안산이 잘 짜여진 전형적인 명당터이다. 그런데 낙산(125m)이 인왕산(338m)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 결과 종묘사직에 항상 문제가 나타나 장자의 정통성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낙산(125m)은 장자산이고 인왕산(338m)은 차자의 산 그릇이다. 그런데 산세를 보면 백호산(338m)이 청룡산(125m)보다 그 형세가 더 높다. 이 지형적 특성에 따라 조선은 적자 계승이 늘 어려움에 처했다. 나라가 안정되려면 적자승계가 잘 되야 하는데 반정으로 인한 적자승계의 단절이 많다보니 정치가 불안정하였다. 풍수로 비유하니 전부 이해가 된다.
또한 남산(262m)은 주작이라 주산(북악산342m)보다 낮아야 하는데 남산(262m)이 주산(북악산342m)을 능가할 정도의 위세이다. 주작(남산)은 군주가 앉아 일을 보는 탁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주작(남산)의 높이가 군주의 턱밑에 이르니 탁자가 군주의 얼굴을 가린다 이것은 군주의 위엄을 훼손하는 상이라 신하가 배신하고 반역을 꾸미는 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곧 남산(주작)이 주산을 넘보는 것은 위태로운 것이다. 항상 왕권이 도전받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가 역모하여 왕권을 빼았으려는 반정이 많았다. 결국 낙산(125m)의 위세가 인왕상(338m)보다 떨어지니 반정으로 장자가 아닌 차자가 왕권을 계승하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또한 관악산 터가 문제가 된다. 관악산은 그 형세가 화산(火山)이다.
관악산(632m)이 경복궁을 멀리서 쳐다보는 불의 형상이라
그 불씨가 자주 넘어 오므로 조선이 전란과 화재 발생이 끊임이 없었다고 풍수가들은 믿었다.
그래서 해태상을 광화문 입구에 조성하여 그 화세를 막아 주었다.
관악산은 그 산세가 뽀쪽하여 남을 넘보는 기운이라 외구의 잔존 세력과 비유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을 탐하던 많은 왜척들이 관악산의 탐하는 기운을 받은 남산의 용산터에 집결을 한다.
관악산의 기운이 경복궁을 범하기 전에 머무는 장소가 용산인 셈이다.
그래서 용산터는 항시 살기를 품은 자들이 집결하였다.
여의주를 탐하는 잡룡들이 모인 곳이 용산이다.
몽고군대, 청나라 군대, 일본군대, 러시아, 미국 군대의 거주지가 되었다.
용은 용인데 여의주를 탐하는 잡룡인 것이다.
다행히 남산타워가 박히면서부터 용산의 살기를 눌러 외국 군대철수가 서서히 진행이 되고 있다.
용산의 살기가 철심에 눌려 힘을 잃으니 군인들이 물러간다는 말이다.
2. 청와대 터의 건설 배경을 알아보자.
앞서 인용한 <태조실록>을 보면 조선 개국과 함께 지금의 청와대 터(남경 궁궐터)는
정궁인 경복궁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과거 회맹단이 설치되었다.
회맹단은 경복궁의 북문(신무문) 너머, 즉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해당이 된다.
회맹은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을 모아(會) 충성맹세(盟)를 받는 의식이다.
즉 궁궐터가 아니라 군주와 신하가 충성맹약을 하던 터였다.
의심이 많던 군주들이 신하를 겁박하여 강압에 의한 충성맹세의 터이니
군주의 일방적인 고집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 군신이 맹약하던 터에 청와대가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이 맹신의 터에 들어선 군주는 당연히 일방통행의 길을 가게 된다.
조선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은 여러 차례 공신회맹을 통해 충성서약을 받았다.
개국공신(1392)은 물론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다.
1417년(태종 17) 4월 7일 회맹단(청와대터)에서 거행한 회맹은 특별했다.
개국·정사·좌명공신은 물론 그들의 적장자(아들)까지 총출동하여 충성을 다짐했다.
이들은 “만약 맹세를 바꾼다면 그 죄는 본인 뿐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맹약을 다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맹터가 지금의 청와대터이니
군주가 신하를 겁박하여 일방 충성맹약을 권하던 자리가 지금의 청와대 터인 것이다.
어찌 불신과 배신의 기운이 감돌지 않겠는가?
그래서 청와대 터를 불통의 터라 말하는 것이다
풍수사들의 말에 의하면 북악산-경복궁-광화문 라인은
백두산의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용으로 보면 북악산은 용의 몸통이 되고 청와대는 용의 목이 되고 경복궁은 용의 입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일제는 용의 입에 해당하는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 집무실(구 국립박물관)을 조성했다.
목에 해당 되는 회맹단터에는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겠다는 의도가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른 결과가 어땠을까?
곧 자기 발등을 찍었다.
자기들이 조선의 실세로 들어서는 마당인데 그 핵심터에 입과 목을 조른 형국을 스스로 만들 었으니
자기들이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주인이 바뀌면 그 터의 흉은 그 바뀐 주인에게 몰려간다는 기본적인 풍수이론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1926년 집무실을 지은 3·5대(1919~1927, 1929~1931)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1936년 2·26사건으로 비참하게 피살된다.
1937~39년 사이 지금의 청와대 터에 관사를 지은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1936~1942)는
2차대전 후 전범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습았다.
다른 총독들도 비슷한 말로를 겪었다.
용의 목을 누르는 이곳에 청와대가 들어선 것이니 그 대통령의 운명도 나름 비슷한 것이다.
3. 역사에서는 용산이 궁궐터로는 길지(吉地)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1101년(고려 숙종 6) 10월 8일 남경의 지세를 조사한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1036~1115)의 보고를 소개한다.
“신 등이 (남경의) 노원역, 해촌(도봉산 아래), 그리고 용산 등의 산수를 살펴보았는데 도읍을 세우기에는 적당치 않고 오직 삼각산의 면악(북악산) 남쪽이 산 모양과 물의 형세가…부합합니다. 그곳에 도읍을 건설하시기를….”
풍수사상이 극성을 이뤘던 고려 시대에는 용산이 길지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셈이다.
용산이 청와대터가 된다는 말은 주산(主山)이 남산(南山)이라는 말이다.
남산(262m)이 용산(79m)을 병풍처럼 둘러주고 남산에서 둔지산(65m,48m)까지 용맥이 흐른다.
그런데 남산에서 시작된 능선이 크게 좌청룡·우백호를 형성하려면 산의 높이가 적어도 200m는 넘어야 한다.
그런데 65m 48m라는 말은 구릉지란 말인데 낮은 언덕이 좌청룡, 우백호가 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것은 외세 방어도 안 되는 낮은 언덕이라 좋은 터가 될 수가 없다.
작은 성곽의 요람지는 될 수가 있다.
그러나 한 나라를 세울만한 그릇이 못된다.
궁궐을 방어하는 좌우측 산맥이 구룽지라 너무 낮은데 한강의 수맥은 너무 강렬하다.
비율이 안 맞는다.
일단은 산맥과 수맥의 조화가 불균형하다.
거기다 남산(262m)에서 보면 주작인 안산이 없다.
주작이란 임금이 다리를 쭈 펴고 쉴 수 있는 낮은 구릉지가 좋다.
만약 한강을 넘어 바라다보는 관악산(632m)이 주작이 된다면 이건 큰 문제이다.
곧 남산(262)보다 안산(관악산)이 월등히 높다는 것인데
풍수에 의하면 주산(262m)보다 높은 안산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작(632m)이 주산(262m)보다 월등히 높아지면
군주를 넘보는 상이라 반역하는 무리가 많아져 나라가 태평하질 못한 것이다.
4. 청와대 집무실을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방안
북악산에서 이어져 인왕산을 타고 남산으로 흘러내리는 줄기는 용산의 둔지산 아래에서 멈춘다.
그곳이 혈지가 되는 셈이다. 북한산에서 시작된 '핵심의 혈처'이다.
그곳에 몽고군, 청군, 일본군, 미군이 차례로 거주하면서 한반도를 실세 지배하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혈지 중에 혈지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둔지산 아래를 차지한 집단이 한반도를 지배 했었다.
그런데 둔지산 혈지가 아닌 삼각산 쪽의 국방부 건물은 주인이 안방을 빼앗긴 형세라 좋을 리가 없다.
국방부 청사는 받쳐주는 주산이 없어 외세 간섭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용산 삼각지에 자리한 국방부는 둔지산(65.5m) 뒤편에 입지해서
남향으로 만족하나 터를 받쳐주는 주산이 없다.
주산이 없으니 배산임수를 이루지 못하였고 좌청룡 우백호도 없다.
풍수에서 요구하는 장풍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방부 자리로는 안좋다.
국방부가 외세에 밀려 늘 힘을 못 쓴다.
또한 그런 곳에 청와대집무실이 들어가면 마찬가지로 청와대도 힘을 못 쓴다.
삼각산 국방부를 용산기지(둔지산 혈터)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만약 외국 군대가 거주하면 외세에 의한 침탈과 병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주 국방이 결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만약 자국 군대가 거주하면 힘을 받은 군인이 무신정권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고 본다.
만약 둔지산의 혈터로 국방부 건물이 들어서면 군장성들의 정치기반이 돈독해 질 것이다.
외세가 한반도를 장악한 것처럼
국방부 출신들이 정치인으로 나서서 한반도를 장악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국방부가 용산기지로 들어서면 군인들의 입지가 폭 넓게 향상됨은 말할 나이가 없겠다.
다행인 것은
남산타워의 철심이 깊이 박혀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용산의 살기를 눌러주는 효과라 군인들이 철수한다는 말이 된다.
당분간은 외세의 군인 거주같은 흉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오성취류를 실현하기 위해 남산타워가 들어선 것 같다
5. 어디를 집무실로 추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내 개인적인 사견임을 먼저 밝힌다.
제1차는 세종시를 권한다. 그러나 여건이 안되면
일단 광화문정부청사가 용산기지로 이전해 오면서 좋을 것 같다.
대신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둔지산의 혈지터는 주산이 남산(262)인데 관악산(632)은 상대적으로 너무 높아서 손님이 되는 것이다
너무 높아 감당할 수가 없다면 머리 숙여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주인의 도리인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관악산의 반정으로 쫓겨 나갈 수도 있다.
둔지에서 목에 힘을 한번 주고 머리를 뻣뻣하게 올려 쳐다보면
바로 관악산의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
이 자리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지나 다녀야 하는 동네가 된다
둔지에 외국 군대가 거주할 적에는
관악산의 회초리가 외세를 끌고 와 경복궁을 매질하던 곳이다.
그러나 정부청사가 들어서면
관악산의 회초리는 매질할 경복궁(청와대터)가 없으므로
정부청사에 있는 수장들을 매질할 것이다.
문민정부가 입주해야 할 마땅한 장소가 바로 이 둔지혈터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실제로 둔지혈터에 거주했던 단체들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인들이 많았다.
이것은 관악산 엄한(호랑이) 기운의 영향 탓일 것이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가 없다.
구릉지가 너무 낮아서 큰 재능있는 사람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즉 여기 들어오는 사람은 도와줄 재상(宰相)이 없으므로
스스로 일을 처리해 나갈 각오를 하고 입주해야 한다.
곧 이곳은 재상(宰相)의 터이지 군주(君主)의 터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재상(宰相)의 터에 들어와서 군주(君主) 노릇하다간
관악산 서리발에 밀려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둔지혈터는 명재상(名宰相)이 날 자리이다
과거 경복궁터 안에 총독부가 설치되어 있을 때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의 청와대 밑에 있었는데
총독실이 헐리면서 중앙박물관이 용산 둔지쪽으로 이전해 왔다.
그런데 만약 다시 이곳으로
청와대가 들어서면 그 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자리하는 셈이라
우연치고는 기연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용산기지 반환이 늦어지고 오염된 토양을 제거한 후
설계하여 건축하려면 적어도 몇년이 걸릴 것이다
용산기지로 이전하는 일은 당대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져야 할 상황인 점을 염두해 두시길 바란다.
그래서 임인년의 20대 당선인은
"이 재상터에 주인이 아니다" 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