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섬
성공과 좌절
'노년엔 무조건 친구를 만나라'는 인생고수들의 충고 때문인지 생각지도 못한 단톡방에 초대받은 아내는 하루하루가 그들과 더불어 즐거운 모양이다. 카톡 멤버들은 결혼 전 한일합섬에서 만난 동료와 선배까지 4명으로 그 중엔 내가 아는 얼굴도 들어 있었다. 팔순에 이른 신달자 시인이 미국에 있는 딸과 매일 공짜전화를 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는데 아내의 카톡 친구들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카톡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황혼인생을 지낼 수 있어 서로 행복감을 맛볼 것 같았다. 반세기 전 그땐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기에 대기업에서 만난 인연도 더욱 특별했을 것이다.
당시 마산이 전국 7대도시에 든 것은 한일합섬이란 대기업이 그곳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마산 양덕동 메트로시티공원엔 지금도 ‘한일합섬 옛터’란 표지석이 서있다. 우리나라 산업화와 궤를 함께 한 반백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라 숙연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1964년 마산의 변두리 농경지와 띄엄띄엄 있던 집들을 헐어낸 9만여 평에 공룡 같은 메머드 공장을 지어 입주한 기업이었다. 잘살아보자는 국민적인 염원이 담긴 공장은 연중무휴로 돌아가며 제품을 산더미처럼 생산하여 나라의 굴뚝산업을 선도했다. 한일합섬은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하면서 여타 산업체들의 부러움을 샀다.
한일합섬에 몰린 사람들도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지독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었다. 내남없이 궁핍했던 그 시절 소녀들 수천 명이 밤낮으로 맞교대하며 피땀 흘려 일하던 서러운 역사의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10대 20대의 소녀이자 청춘들이었다. 처음엔 단순여공이었으나 공장 안에 실업고교가 들어서면서 주경야독으로 일과 배움을 이어갔다. 반세기 세월이 흐른 지금 학교는 교명을 전산여고로 바꾸어 공장부지 한쪽에 애처롭게 남았다. 하지만 학교 운동장엔 암울했던 시절 서럽게 현실을 이겨나가던 소녀들의 꿈이 지금도 푸르고 굳세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당시 설이나 추석이면 수십 대의 버스가 소녀들을 싣고 전국으로 떠나면서 진풍경을 이루었다. 그때 추석에 소녀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한 장씩 가져와서 심었다는 팔도 잔디가 주인공인 소녀들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으로 여전히 꿋꿋하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한일합섬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2004년 드디어 문을 닫았다. ‘섬유산업의 요람’이라던 자존심도 하루아침에 접은 채 흉측한 괴물덩이로 전락했고 2006년 마지막 하나 남은 굴뚝마저 헐리고 말았다. 공장부지는 마산 제일의 집단주거지로 떠올라 초고층 아파트가 연이어 들어서면서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공장의 혈맥인 생산라인에서 피땀 흘린 소녀들을 오늘 다시 소환하여 ‘이름 없는 영웅’으로 불러도 과함이 없으리라. 이젠 그들도 세월에 밀려 어느덧 고희의 언저리에서 세월을 헤아리고 있을 터이다. 전통적인 농어업에서 산업화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 노동집약적인 섬유산업인지라 한일합섬도 산업발전을 위한 터전을 다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1960년대 부산 서면교차로 인근 전포동엔 경남모직이 있었고 가끔씩 난 업무로 그곳을 들를 때마다 공장이 있기엔 아까운 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일합섬을 세운 창업주가 동란이 끝난 3년 뒤 지은 생산시설이었다.
공장을 지을 때만 해도 부산에서 서면은 변방으로 농지가 많아 쉽게 부지를 사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일합섬은 경남모직 10년 후 설립했으니 이곳이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세시대를 외치는 요즘으로 따지면 한일합섬 창업주의 60년 삶은 참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에 김해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6남4녀의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포목상으로 시작하여 양복지를 수입하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섬유수출이 호황을 누리던 1970년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래 1973년에는 국내업계에서 최초로 ‘1억불 수출의 탑’까지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고향에 경일중학을 세웠으며 학교법인 한효학원도 설립하였다. 한효학원 산하의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마산공장 근로자들을 위하여 설립하였는데 뒤에 대구와 수원까지 확장되어 현재는 국내 최대의 실업학교로 성장하였다. 산학협동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으로서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한일합섬은 교육부문의 5·16민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의료취약지구에 의료시혜를 베풀기 위하여 경남 함양군에 안의의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난 창업주가 뒤늦게 부산 서구 쪽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한 걸 지켜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본인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권력 쪽의 압력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씨는 S대 법대를 나온 정치인이자 체육인으로 대한체육회장과 정당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형의 사업체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부와 권력을 두루 지녔던 제씨였지만 그도 57세의 나이에 이승을 떠나 주위에 안타까움을 남겼다. 초기의 한일합섬엔 나의 직장 선배도 중견간부로 부름을 받아 직장을 옮겨간 기억이 난다. 당시 대기업이나 신생기업에서는 공직이나 국영기업 직원을 특별 채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당시 떠도는 소문으론 모셔간 쪽에서 효용가치가 끝나면 비참하게 내친다고도 했다.
어느 날 출근하니 근무할 책상이 없어졌다면 당사자는 얼마나 당혹했을까. 한일합섬이 사라지면서 마산도 동반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마산이 한일합섬 사태로 곤두박질했을 때 난 처가 형제들이 힘들지 않을까를 걱정했었다. 한일합섬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사람들은 창원보다 공기도 좋고 집값과 물가도 싸서 마산이 더 살기 좋다고 입을 모은다. 노년에 드니 사는 곳에서 머지않은 마산인데도 걸음이 뜸해진다. 처가 쪽 형제들이 여럿 살지만 장인장모 떠나시니 서로 만나기가 어렵다. 눈앞의 코로나가 좀 진정되면 마산부터 찾아 형제들과 함께 옛 한일합섬 자리 공원도 둘러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