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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칼빈,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라
장코뱅 추천 4 조회 248 24.07.25 07:32 댓글 2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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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7.25 08:17

    첫댓글 <매튜 헨리 주석>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나이까(시편 88:10-18)

    이 문단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시편 기자는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비참한 처지를 들어 하나님께 충간한다(10절-12절).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적의 일을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겠나이까? 죽어 매장당한 자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아닙니다. 자기들 방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하리라고는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만을 위해 어찌 그들이 부활해야 하며, 뭣 때문에 그들이 살아나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맨 처음 태어날 때 얻은 생명과 맨 나중 부활하여 얻을 것이라고 희망을 두는 생명은 물론 그와 같이 당신께 대한 찬양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에게 대한 주의 인자하심이 무덤에서 선포될 것입니까? 즉 거기 매장돼 누워있는 자들에 의해서나 아니면 죽은 자들에게 선포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약속에 대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가운데에서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당신의 기사가 흑암 중에 베풀어지거나 거기서 알려집니까?

  • 작성자 24.07.25 08:17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또 인간들 스스로도 기억되지 않는 망각의 땅에서, 즉 무덤에서 당신의 의가 알려질 것입니까? 참으로 영혼은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을 선포할 수 있으나 육체는 죽으면 그뿐입니다. 죽은 육체는 안락한 중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며, 자기가 받은 은총에 답하여 찬송으로 되돌려 드리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 기자가 마치 하나님이 그를 도울 수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려던 분으로 생각하기라도 한양 이 간언의 말씀들을 절망의 언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며, 더욱이 이 말씀들이 마지막 날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더 더구나 안된다. 그는 구속한 구원을 바라서 하나님께 이와 같이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선하시고 충실하시며 의로우십니다. 이와 같은 당신의 속성들은 나를 구원하실 때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대한 구원이 속히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구원이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늦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고

  • 작성자 24.07.25 08:18

    그렇게 되면 구원도 사후 약방문이 되어 내가 아무런 위안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도 종종 이 같이 탄원하였다(욥 7:8; 10:21).

    Ⅱ. 그는 기도를 계속하겠다고 결심을 하는데 구원이 지체됨으로 인해서 더욱 그리하였다(13절). "주께 나는 몇 번이고 부르짖었사오며 그러는 행동 속에서 위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행하겠나이다. 아침에 내 기도는 당신을 가로 막으리이다." 비록 우리 기도가 즉각적인 응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는 정한 때가 있고 결국에 가면 그것이 말해 주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늦추심은 우리의 인내심과 기도의 투지력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의 심기가 활발히 움직이고 하루의 일과가 산더미처럼 밀려 들기 전인 아침 일찍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즉 걱정으로 부대낀 뒤 슬픈 상념들이 밤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은 아침에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내 기도는 당신을 가로막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가?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먼저 깨서

  • 작성자 24.07.25 08:18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일상적인 기도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겠다고 하는 것. 즉, 자기의 보통 기도 시간에 "앞서서 행하겠다"(즉 앞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역경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도 더욱 더 간절해지고 진지해져야 하는 것이다. "내 기도가 주 앞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어 때를 늦추지 아니하고 당신과 함께 할 것이며, 자비의 실마리가 풀리도록 촉진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이 새기도 전에 믿음과 기대로 자비를 향해 나아가리이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여러 가지 자비로써 우리의 기도와 기대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바램으로써 그의 자비보다 앞서 나아가자.

    Ⅲ.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일들을 그의 기도 안에 정해둔다.

    1. 그는 자기가 그때에 처해있던 비천하고도 고통스런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그 이유를 묻고자 하였다(14절).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시나이까? 나를 포기한 자처럼 취급하실 만큼 당신에게 노여움이 일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찌해서 당신은 나와 다투시는 지 내게 이유를 나타내어

  • 작성자 24.07.25 08:19

    보이소서. 그는 왜 하나님께서 오래된 종을 버리시며 하나님을 버리지 않기로 작정한 자를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 하는지 궁금히 여기면서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여호와여, 당신은 당신의 은사와 소명을 주신 자에게 후회하지 않는 분이신데 어찌해서 저를 버리십니까? 주께서는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숨기셔서, 내게 화를 내는 자같이 하시며, 나를 총애하는 마음이 없거나 당신이 내게 대한 은총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내게 알리지 않으려고 하는 자같이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보다 더 비탄스런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영혼을 버리시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 만약 태양에 구름이 끼여 있다면, 지구는 어떤 감옥이 될 것인가!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진 전에 했던 하소연과 꼭 같은 호소를 겸손히 반복할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께 자기의 불행이라고 묘사해 드리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포가 되셨다는 것. "나는 주의 두려움을 당하나이다"(15절). 그는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또 그 진노의 결과에 대한 염려로 계속 놀램을

  • 작성자 24.07.25 08:19

    당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지는 일과 하나님의 존전에 대죄하여 자기 운명을 선고받는다는 것을 생각만 하여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그의 존엄무쌍하신 공포에 대한 염려로 식은 땀을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하였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도록 지정된 자들도 일시적으로는 그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수 있다. 양자의 마음도 처음에는 두려움에 예속된 심정이다. 불쌍한 욥도 "자기를 치려고 열을 지은" 하나님의 공포에 대해 불평하였다(욥 6:4).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자기 생각을 확연히 털어 놓으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포가, 곧 그의 "맹렬하신 진노"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그러한 두려움들이 그에게 입힌 무서운 흔적은 무엇이며 그가 입은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인지 살펴 보자.

    [1] 그것들은 그의 생명을 거의 취해가 버렸다. "내가 그것들에게 너무나 고통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이 단어는 그런 뜻이다) "혼령조차 버리게 되었나이다.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16절). 저 영원한 단절이란 지옥은 무엇이냐? 저주받은 죄인들이 그 단절에 의해서 하나님과 모든 행복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 작성자 24.07.25 08:20

    두려움이 죄 많던 저희 양심을 죄며 먹이로 삼는 데가 아니냐?

    [2] 그 두려움들은 그의 이성을 거의 못쓰도록 탈취해 가버렸다. "내가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는 황망하였나이다." 여호와의 두렵게 하는 일은 많은 자들과 몇몇 선량한 자들에게 이런 슬픈 효과를 자아냈으며 그들은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의 영혼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극히 애처로운 일로서 크나큰 동정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3] 이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소시로부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하나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해 왔으며, 슬픔이란 학교의 규율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 왔다. 설사 우리의 날이 고통으로 시작하고, 슬픔의 날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생이 되더라도 인내로 이겨내자. 저명한 현자이자 선인이었던 헤만이 "소시로부터 곤란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두렵게 하심을 당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멍에를 멘다고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한 일임을 발견하였고,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으며, 젊을 적에 많은 고생을 당하고

  • 작성자 24.07.25 08:20

    종종 빈사의 지경에 처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습관적인 진지성을 터득하게 되며, 세상을 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평생토록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크게 쓰시기로 작정하는 자들에게도 때때로 이와 같은 종류의 훈련을 예비해 두신다.

    [4] 그의 고난은 이제 극에 달하였고, 여늬 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하나님의 두렵게 하시는 일이 이제 그의 주위에 둘러서 그는 사면 팔방으로부터 각양 각색의 고통에게 공격을 당하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고는 바늘 구멍 하나 없었다. 환란은 물이 범람하듯 그에게 덮쳐왔으며 그것도 매일, 하루 종일 습격하였다. 그에게는 휴식도 유예 기간도 없었고, 숨쉴 틈도 없었으며, 잠간 평정을 되찾는 시간도 없었고, 희망의 빛이라고는 전혀 비취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것이 지혜가 뛰어나며, 아주 선량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공포로 빽 둘러 쌓여서 어떤 피난처도 찾을 수 없었고, 바람받이에서 누울 곳도 찾을 수 없었다.

    (2)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친구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18절).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나이다."

  • 작성자 24.07.25 08:21

    어떤 자는 죽었고,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마 대개는 몰인정하였을 것이다. 종교의 위로 다음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정과 사교에서 오는 위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없다는 것은(이 생에 대해서는) 거의 위로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친구들이 있다가 없어진 자들에게는 재난이 더 한층 고통스런 것이 된다. 시편 기자는 이것이 그의 비애를 종결시키고 이 우울한 일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기라도 한 양 이 말씀으로 여기에서 자기의 호소를 끝맺는다. 만일 우리의 친구들이, 이산시키는 섭리로 인하여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게 된다고 할 때, 아니 우리의 지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암흑 속으로 옮겨지는 경우, 우리는 그 일을 쓰라린 고통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그것에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24.07.25 12:03

    @장코뱅 내용이 너무나 풍성하네요. 칼빈의 본문과 함께 같이 잘 읽고 은혜를 받습니다.

  • 작성자 24.07.25 08:25

    <박윤선 주석>

    시88:14-18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 이 탄식은 언뜻 보기에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하고 슬픔으로 가득찬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탄식 속에는 무언(無言)의 기도가 들어 있다. 시인은 교만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환난에서 건짐 받기를 비통하게 간구한다. 이러한 종류의 탄식은 바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선지자가 하나님께 배척을 당해 미움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 자기가 그토록 격렬하고 고결하게 투쟁했던 육적인 판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육적 판단이 결국 그가 결코 헛되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결과로서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시가 감사로 끝나지 않고 슬픈 탄식으로 끄을 맺어 마치 긍휼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을지라도 이 시는 우리가 계속하여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보다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선지자는 이 탄식의 짐을 하나님의 품에 풀어 놓음으로써 감각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표적도 볼 수 없는 구원에

  • 작성자 24.07.25 08:26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 시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에게서부터의 모든 구원 소망에서 멀어져 버렸을 것이다.
    선지자가(15점에서) 왜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라고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로 극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어서 그의 생명이 사실상 여러 가지 공포와 떨림 가운데 엉켜 있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16절에서 말한 "주의 진노와 두려움"이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적지 않은 동안 계속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17절에서 이것들이 '날마다' 자기를 에워 쌌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환난을 '홍수'에다 적절히 비교하고 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의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느낌이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어 쓰라린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요동함이 어떻게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날 수있다. 마음의 의심과 혼란을 일으켜

  • 작성자 24.07.25 08:26

    이리저리 방황하게 될 때에는 믿음이 삼키움들 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소란으로 동요되는 중에도 믿음은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며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믿음은 질식할 지점에 이른다 할지라도 기필코 보호와 일깨움을 받는다. 아무리 맹렬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믿음을 갖게 하시어 자기 자녀들이 결코 실망하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사실, 이것이 성도들의 방패인 것이다.

  • 24.07.25 12:16

    @장코뱅 어려운 가운대에서도 절망을 포기하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겠습니다.

  • 24.07.25 16:24

    @노베 아멘!

  • 24.07.25 12:18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기복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믿음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짧지만 당연하고 좋은 내용의 글에 공감하고 감사합니다.

  • 24.07.25 16:17

    네, 공감합니다.

  • 24.07.25 14:47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이자 도리이며, 또한 큰 축복일 것입니다. 더위에 지치고 심신이 피곤하여도 일신하여 경건의 시간을 가집시다. 아멘 🙏 🙏

  • 24.07.25 16:13

    아멘!

  • 24.07.25 17:03

    아멘22

  • 24.07.25 17:03

    칼빈의 신실함과 경건에 공감하고 규칙성에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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