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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본(주기도문) (마태복음 6:9-15)
그리스도께서 잘못된 것을 책망하셨을 때 그는 더 잘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책망은 교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문장으로 나타냄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유대인들은 이 기도의 의무에 잘못된 많은 변조들을 몰래 삽입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하여 새로운 규범서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는 기도를 한 모형으로, 우리기도의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요약 내지는 그 내용으로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한 문장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주기도문이 다른 기도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처럼 이 형식에만 언제나 얽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와 같이, 이러한 말들로, 이런 취지로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누가복음에 있는 것은 이와 다르다. 이 주기도문이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후에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부어졌을 때 도래하였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주기도문을 한 모형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다.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교제의 간구이며 휘트비(Whitby) 박사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3세기 이후에서부터는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이며, 그가 만드시고 지정하신 기도이다. 그것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알기 쉬우며, 기도에 약한 우리의 약점을 동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 내용은 정선되고 필수적인 것이며, 그 방법은 교훈적이며, 그 표현은 간결하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의미와 뜻을 익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사려분별이나 중언부언 없이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들도록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도문(모든 기도도 실제로 마찬가지이지만)은 땅에서 하늘로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제명(題銘)을 보면 수취인은 "우리의 아버지," 장소는 "하늘나라," 그 다음에는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적은 내용, 맺는 말은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보증인(印)은 "아멘"이다. 만일 여러분이 원한다면 날짜는 "오늘이다."
다음과 같이 주기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Ⅰ. "머리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용건에 이르기 전,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는 그 용건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엄숙한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한 일원이며, 서로가 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도들이나 천사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잘 모르며, 우리가 기도에서 드리는 영예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은혜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인사하며, 그에게 붙일 수 있는 근사한 이름보다는 자애스러운 칭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그에게 말해야 한다. 또한 그를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는 창조에 의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신다(말 2:10; 행 17:28).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양자와 중생에 의해 성도들에게도 아버지가 되신다(엡 1:5; 갈 4:6). 또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에서 그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에 대한 좋은 생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과 내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기도할 때 대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라면 그는 연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시 103:13), 우리를 아끼실 것이며(말 3:17),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행동에 만족하며, 우리에게 좋은 것은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눅 11:11-13). 우리는 아버지이신 그에게 담대히 나아가며, "아버지와 양자의 영으로 더불어 대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탕자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눅 15:18; 렘 3:19). 은혜와 평화, 아들의 유업과 축복을 구할 때, 우리는 화복하지 못하고 복수하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은혜스러우며 화목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게 나아간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렘 3:4).
2.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다." 각처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도 계시다. 하늘은 그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과 그 밖에 도처에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보좌이기 때문이다(시 103:19).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의 보좌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우리의 기도를 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히 8:1).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은 영적이어야 한다. 하늘은 높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세상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5:1). 하늘은 완전히 정결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손을 들어 올려야 하며, 거룩한 분이시요, 거룩한 장소에 거주하시는(레 10:3) 그의 이름을 거룩케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자녀를 보신다(시 33:13, 14). 또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를 보시는 그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부족함과 무거운 짐, 소원, 연약함에 대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계시다. 하늘은 그의 조망(眺望)의 궁창일 뿐만 아니라 "권능의 궁창"이기도 하다(시 150:1).
그는 기꺼이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수 있으며, 우리가 구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그것으로 채우신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선물은 위에서부터 온다. 그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에게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전 5:2).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기독자인 우리의 큰 목적이 되는 것과 일치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일치해야만 한다. 우리의 모든 대화의 목표이신 하나님과 하늘은 모든 기도에서 특별히 주시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가 모두 향하는 중심이 있는 것이다.
Ⅱ. "간구."
여섯 조목이 있다. 절반에 있는 세 조목은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연관되어 있고, 후반에 있는 세조목은 우리 자신의 현세적인 관심과 영적인 관심에 연관되어 있다. 십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반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후반 여섯 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이 기도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의"를 찾을 것을 가르치며,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이 부가되기를" 희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른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sanctified)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고어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hallowed)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주기도문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것은 간구가 아닌, 예배(찬미)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소서. 영화롭게 하옵소서"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모든 완전성의 위대함이나 영광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 시작해야 하며, 우리가 그에게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려고 기대하기 전에 그가 먼저 섬김을 받아야 하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먼저 그의 완전함을 찬양하자. 그 다음에 그 완전함의 유익을 소유하자.
(2)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고정한다. 그것은 목적된 바른 목표이다. 또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주요하고도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간구는 이것에 부속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여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내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 등 모든 것은 그에게 속하며, 그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를 향해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대개 하나님께 대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그들의 기도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이것을 중점에 두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시옵고, 나에게도 그리 하소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것에 한해서만 행하옵소서."
(3)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자신이 알게 하신 모든 것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 특히 그 자신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영화스럽게 되어야할 것을 바라고 기도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아버지로서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영화스럽게 여김을 받도록 하시옵소서. 당신의 선하심과 지고하심, 위엄과 자비를 영화스럽게 하옵소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왜냐하면 당신의 이름은 거룩하시기 때문이옵니다. 우리의 타락한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주여, 당신의 위대한 이름에 무엇을 행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스럽게 되기를 기도할 때에는,
[1] 우리가 필연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 자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열방 중에서 높힘을 받으리라"(시 49:10).
[2] 우리는 확신하는 바가 주어지도록 기도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으며, 그것은 즉시 응답되었다. "내가 그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또한 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2. "나라에 임하옵시며." 이 간구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전파하였던 교리에 대한 언급으로서, 이것은 전에 세례 요한이 전파하였고 또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전파하도록 보낸 메시지였다. 즉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나라, 즉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으니, 그것이 임하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을 기도로 돌려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정녕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대답해야 한다. 교역자들은 말씀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아버지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들은 기도를 폐지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또한 약속의 성취가 가까이 있거나 문 곁에 있을 때 하늘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구출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을 때 그는 그때 가까이 이르렀다고 이해하였다(단 9:2; 눅 19:11 을 보라).
"그로 하여금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그의 구속이 번창케 하시며, 그의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케 하시옵소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였다(휘트비 박사, ex Vitringa).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기록에 찬동(서명)케 하시며, 그를 그들의 구세주와 통치자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복음적인 교회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하시며,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충족되며 그들의 특성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옵소서."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우리와 다른 사람이 그 나라의 모든 법률과 규칙에 순종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 뜻이 "하늘나라"로 오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그것이 "지상 천국"을 도입케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단지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왕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기도하고 난 후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그의 지배를 받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기도할 것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다. "주여, 나와 내 것으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시옵소서(삼상 3:18). 나에 관한 당신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당신에게 말씀드리며 만족하나이다."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나로 하여금 당신을 즐겁게 하는 바를 행할 수 있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에 합당한 순종에 필요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성실하게 행해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거나(ut nihil nostrum displiceat Deo)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쾌함이 되지 않도록(ut nihil Del displiceat nobis)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뜻이나 육신과 마음의 뜻, 또는 사람의 뜻(벧전 4:2), 더욱이 사탄의 뜻(요 8:44)이 행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2) 그것의 모형은 하나님의 뜻이 휴식과 즐거움의 장소인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시련과 시험의 장소(이곳에서 우리의 행위가 행해져야 하며 혹은 결코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준수함으로서 더욱 천국과 같이 되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이 땅은 사탄의 뜻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거의 지옥과 같이 되어 버렸다). 또한 성도들이 그들의 헌신과 순종에 있어서 더욱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되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땅 아래"(under the earth)에 있지 않고 "땅 위에"(on the earth)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침묵 속으로 내려가 버린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행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뜻을 구한 후에는 이 세상의 현실적인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남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일용한 양식"(To.n a[rton evpiou,sion, 가까운 날을 위한 양식)을 그에게 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장차 올 때를 위한 양식, 또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조건에 맞는(잠 30:8)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 우리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 편리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는 그 안에 교훈을 가지고 있다.
(1) 우리는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온건과 절제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진미(珍味)나 여분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맛은 좋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건강에 유익한 것을 구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직과 근면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부터 양식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속이고 취한 식물"(잠 20:17)이나 "게을리 얻은 양식"(잠 31:27)이 아닌, 정직하게 얻은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일용한"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34절) 그날 벌어 그날 지내는 자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꾸준히 신뢰해야 한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비는 것이다. 그것을 팔거나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가장 우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일용한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5) 우리는 기도하기를,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주시옵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자비와 또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대한 동정심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와 우리 집안 식구들은 함께 먹고 있으며 따라서 함께 기도해야 한다.
(6)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의 결핍이 새로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영혼의 소원이 새롭게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날이 더디오느니 만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우리는 양식 없이 한 날을 잘 지낼 수 있는 것처럼 기도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일까?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전자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위로나 양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용한 양식"은 만일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도살한 어린 양"으로 키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못지 않게 일용한 "사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씻음 받는 자"는 "그의 발"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1) "간구"가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죄(빚), 당신에게 대한 죄를 용서하신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의 죄는 우리의 빚이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에게 대한 빚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면제되기를 기도하지 않으며, 그것을 갚지 않으면 형벌의 빚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쉽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빚을 진 자는 소송을 당하기 쉽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인은 율법에 대해 빚진 자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2]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에게 대한 마음의 소원과 기도는 매일 행해져야 하며,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형벌에 대한 책임이 취소되고 무효가 될 수 있도록 또한 우리가 "정죄에 이르게 되지 않도록, 또한 면제되고 그 위로를 가질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구하여 얻을 때 우리가 신뢰를 두어야 할 큰 증거는 우리의 죄에 대한 방면(면제)을 떠맡으신 우리의 보증인(오히려 행동에 대한 담보인)이신 주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사람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던 속죄(satisfaction)이다.
(2) 이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논거.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이다. 이것은 공로의 빙거가 아니라 은혜의 빙거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의 용서를 위해 그에게 이르는 자들은 그들을 거스린 자들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기도문을 말할 때 그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돈의 빚에 관하여 우리는 그들 자신이나 가족을 파산하지 않고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 빚을 달라고 강요할 때에 가혹하거나 엄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해(傷害)의 빚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고," "우리를 때리는 자이며"(마 5:39, 40), 법의 엄격성에 호소하여 벌받아야 할 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욕과 우리에게 행해진 허물을 참고 견디며,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용서와 평화를 위한 조건(자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북돋아 준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스러운 성벽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생기며, 따라서 그 자신 안에 두드러지고 초월적으로 있는 완전성이다. 그것은 그가 용서의 조건을 우리에게 작동함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 증거일 것이다.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간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1) 소극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죄의 하물이 옮겨지기를 기도하고 난 후에 우리가 다시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시험을 받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죄에로 유혹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여, 사탄을 우리에게로 풀지 마소서. 울부짖는 사자를 잡아매소서. 왜냐하면 그는 간교하고 사득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자신에게 내버려두지 마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시 19:13). 주여, 우리 앞에 거침돌이나 덫을 두지 마시고, 또한 넘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마소서"이다. 시험은 기도로서 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시험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는 시험에 의해 정복되고 이에 뒤따르는 죄와 슬픔을 맛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 적극적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한 자에게서"(avpo. tou/ ponhrou/), 마귀 즉 시험하는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마귀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또한 그러한 공격에 의해 정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또는 "악한 일," 즉 사악한 것들 중 가장 나쁜 죄에서, 또는 사악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악한 일이나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고 그들을 빠뜨리는 사악한 일에서 구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세상의 악, 정욕을 통해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에 있는 여러 상태의 악에서, 죽음의 악에서, 죄악인 사망의 쏘는 것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구하시며, 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거침이 되지 않고 또한 우리가 그들에게 미끼가 되지 않도록 그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Ⅲ. 결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윗의 송영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이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주기도문의 송영은,
1. 앞서 언급한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청원의 형식이다.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백한 말을 입에 채우며(욥 23:4), 기도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고,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 또한 그 둘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가장 좋은 호소 제목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거나 또한 그가 그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신 것에서 취한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청원의 성질과 또 그 탄원의 절박성 때문에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청원은 첫번 조목의 세 가지 간구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라가 임하옵시며(나라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뜻이 이루어지며(권세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영광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특별한 임무에 관하여 이러한 것들은 격려가 된다.
"나라가 당신에게 있사옵나이다. 당신을 세상을 지배하시며 성도를 보호하시나이다. 당신을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하시옵니다." 하나님은 왕과 같이 베풀고 구원하신다.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그 나라를 유지하고 보존시키며,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모든 좋은 약속을 맺기 위해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영광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또 그들을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목표인 "영광이 주의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찬양"이 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위로와 거룩한 신뢰의 주제이다.
2. 이 송영은 칭찬과 감사의 형이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간구는 그에 대한 칭송이다. 그것은 더욱 자비를 얻는 방법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기에 합당케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청원에 있어서 칭송은 괄목할 만한 몫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칭송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평하고 평등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은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천사의 세계에 의해 칭찬을 받는다),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그의 계획에 순응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의무이다. 칭송은 하늘 나라의 일이며 행복이다.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그들의 하늘나라를 시작해야만 한다. 이 송영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살펴 보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여러 가지 말로 찬양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충분히 영광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말씨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영원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것은 영원히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또한 위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로 더불어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진지한 소원을 암시하기도 한다(시 51:14).
끝으로, 여기에서는 이 모든 것들에 우리의 "아멘"(그렇게 되시기를)을 첨가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멘"은 허락이다. 그의 "명령"은 그것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아멘"은 요약된 소원일 뿐이다. 그렇게 말함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어주시리라는 우리의 소원과 확신의 증거이다. "아멘"은 앞서한 모든 간구에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동정에서,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종결함으로써, 세부적인 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실언했던 것을 총괄적으로 함께 모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유쾌한 마음으로 경건한 의무를 마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소 온화하고 힘있게 그 의무들을 결론짓는 것이 좋다. 옛적에 선한 사람들은 모든 기도의 끝에 크게 "아멘"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그것이 사도가 지시하는 것과 같이(고전 14:16) 이해심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해진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관습이 된다.
주기도문에 있는 간구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또는 그 기도와 같은 취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말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간구에 있는 구절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것을 첨가한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비록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까다로움과 소송하기 좋아함, 심술궂음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비난에서가 아니라 이 일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때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 자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다. 따라서 우리가 사죄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이 그 의무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속박되기 위해서 그 의무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 비유를 보아(마 18:23-25). 이기적인 성품은 이것에 순응하기를 싫어하며, 따라서 여기에 비난되고 있다(14, 15).
1. 약속에 있어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실 것이다." 이것이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회개와 신앙, 새로운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미덕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는 남을 용서하는 미덕도 있게 되는 것처럼, 이 미덕은 우리들의 다른 미덕의 진지성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의 형제를 향하여 가엾게 여기는 자는 이로서 그가 그의 하나님을 향해 회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빛"이라고 불리운 것이 여기에서는 "과실," 즉 손상의 "빛," 우리의 육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향한 잘못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과실"은 허물(paraptw,mata 거침, 미끄러짐, 넘어짐)을 경감시켜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손상을 보다 경감해서 말하고 이해해 주는 말로 칭찬하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데 대한 좋은 증거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을 "큰 죄"라고 부르지 않고 "과실"이라고 부르며, 고의적인 손상이 아닌 우연한 실수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연한 착오로다"(창 43:12). 그러므로 그 결과를 선용하라.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하는 한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를 품거나 보복을 계획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한 손상을 나무라거나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상해를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돕고 그에게 선행을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그가 회개하고 다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전과 같이 그와 더불어 허물없이 친숙하게 되어야 한다.
2. 경고에 있어서. "너희가 너희를 손상시킨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희가 그 밖의 다른 필수적인 조건을 가지지 못하고, 또한 사죄 받기에는 전혀 부적합하다는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또한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합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너희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장점들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용서하는 것이 크게 부족하다면 너희는 사죄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자비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들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딤전 2:8) 거룩한 손을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은혜의 손을 펼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분노 가운데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분노 가운데서 응답하실 것이다. 분노 가운데 행해진 기도는 쓸개에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한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빚진 1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화평 조성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화목하기 위함이며, 이것에서 우리는 그를 쫓아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강조한 것을 경시하려는 것은 그릇된 가정이며 위험스러운 오만이다. 사람의 걱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호크마 주석』, 마6:9.
첫댓글 어제 아래 댓글에 주기도문에 대한 답글을 올렸는데, 양이 a4 용지 10 페이지 분량이라서 일부만 올렸습니다. 오늘은 모든 내용을 다 올린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1107/Z4mc/72
네, 알겠습니다.
<박윤선 주석>, 마태복음 6장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시다 함은 모든 피조물들과 다르시고 절대적이시고 그 권능이 무한하시고 또 지극히 높은 주재가 되시고 지극히 성결하시다는 내용을 가진다.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가 헛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은 중요한 뜻이 있다. 비록 "하늘 "의 주재이시지만 그와 우리와의 관계가 사랑의 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 사실에서 우리의 기도문은 열릴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본질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마6:33)으로 본질을 삼는다. 곧 이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다스리신 나라와 및 그를 중심한 생활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구함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구건과 및 그 아래 두 가지 기구건은 직접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을 구함이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의를 구함이다. 클로스텔만은 여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구가 현세 관계의 사항이 아니고 내세 관계의 것을
구함이라고 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끝날의 심판으로 우주의 죄악을 일소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그의 성결을 깨닫게 함을 구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 기구를 현제 관계의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이 기구가 인간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게 해 주시기를 구함이라고 하였으니 합당한 해석이다. 여기 "거룩히 여김"은 제사행사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신론의 오만한 생활을 하기 쉽다. 신자들이라도 그 시련기에 있어서 참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면서 경외심을 상실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땅 위에 극히 요구 된다.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 클로스텔만은 이 조목에 와서는 더 확신 있게 이 기구의 목표가 내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구의 목표를 내세에만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눅17: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으니 그
것은 현세에서부터 천국이 벌써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중요시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기 이 기구전에서도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임제와 통치가 우리의 생활에 이르게 됨을 구함이 이 문구이 기구건이다. 나는 나 자신을 통솔하기 어려우며 내 죄악을 이길 수 없으니 하나님깨서 영적으로 나를 다스리시며 내 죄를 정복하실 그 때에 나의 행복은 가장 큰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이 무엇인가.? 우리느 이점에 있어서 하늘의 속성을 전부 생각하여 말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것이 장소성에 대하여 여기에 한 마디만 하려 한다. (1)성경이 하늘 나라의 생활을 진술함에 있어서 그 생활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집단적인 것으로 되었으니 그것은 간접적으로 장소성을 가리킨다.
(2) 요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가 가실 곳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은 명백히 하늘 나라의 장소성을 가진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한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선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이루고 있지만, 땅의 인간들은 죄악이 많아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들은 이 기도를 올려야 한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이 귀절 끝의 사죄는 근본 사죄 곧, 믿은 이후에 늘 범하는 허무에 대한 용서를 이름이다. (요일1:8,9). 그러면 이 일반적 사죄에 대하여 기억할 것이있으니 그것은 내가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하여야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여기 이 기구의 목적은, 그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것에 이르게 하는 열쇠 곧, 남의 사하여 주는 일을 조건부로 말씀하셨다. 근본 사죄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 사죄의 은혜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조건부로 주신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시험중에 빠뜨리시는 일이 있는 고로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 시험하시는 일이 없다.(약1:13). 이 말씀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주시기를 구함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시험에 빠져 떨어지지 아니하면 그만이다. 시험을 당하지도 않게 되기를 기도할 수는 없으나 시험에 빠지지않게 하시기를 기도함은 지혜롭다.(마26:41)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은 그 윗 말씀에 대한 중보문구이니 시험에 빠지지않도록 도와 주실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거기서 붙잡아 이끌어 안전한 자리에로 인도하여주시기를 원하는 기구이다. 시험에 겨우 빠지지나 않게 도와 주심도 좋지만 그보다 그 시험에서 멀리 떠나 안전한 자리에 서게 하심은 더욱 요구된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에 겨우 거기에 빠지지 않고 있음도 놓으나 장기적으로 그런 소극적 방면의 전투 중에만 있게 되면 영적 생명이 너무 시달려 나중에는 그 시험에 넘어질까 두렵다. 시험을 당했다가 이기고 거기서 떠나는 즐거움은 우리의 신앙과 영적 생명을 몇배 더하여 주는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문구는 권위가 작은 소서 사본에 있을 뿐이고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베사 사본에는 없다. 그러므로 학자들 중에 이것을 사도 원본의 부분으로 보지 않는 자들도 있다. 클로스텔만은 이것을 후대에 가입된 공기도의 예식적
송영사로 보았다. 그러나 크로솨이테는 이것이 원본의 일부였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Indien de doxlogie een gewon slot ws ann te gebed dat ook diir Jezus is gebruikt)
@장코뱅 기구건이라는말이 생소한데, 기도로 구하는 건이라는 말 같습니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마태복음 6장”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것과는 다르게, 누가 본문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미리 짜여진 형태의 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라고 명하지 않으시고, 단지 우리의 모든 소원과 기도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만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구해도 되는 것들을 여섯 가지로 포괄하신다. 이러한 가르침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은 없다. 기도는 가장 중요한 경건의 훈련인데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려야 하고 어떤 것들을 우리의 소원들로 아뢰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입술과 마음이 하늘의 주인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의 규범을 제시해 주신 것인데, 하나님께 인정받는 합당한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규범을 기준으로 삼아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도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도는 우리가 어떤 문구들을 사용해서 기도해야 하는지를 규정해 놓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가 명한 형태의 기도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원하여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그 지침을 제시하여 우리의 소원들을 규율함으로써 그 소원들이 그 테두리와 한계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신 규범은 그 기도문을 구성하는 자구(字句)들이 아니라 내용 자체에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점을 꼭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이 두 개의 돌판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첫 번째 돌판은 경건의 의무들(pietatis officia)을 담고 있고, 두 번째 돌판은 사랑의 의무들(caritatis officia)을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도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하고 구하라고 명하심과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유익들을
구하는 것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우선시하는 마음이 되어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만 마음이 팔려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외시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말(本)이 전도(顚倒)된 정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장코뱅 주기도문이 십계명의 두 돌판의 요약이라는 칼빈의 설명에 공감하며 감탄합니다.
@장코뱅 주기도문의 내용이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과, 두번째로 우리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한 칼빈의 설명이 쉽고 명쾌합니다.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
주기도문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쓴 내용이네요. 두고두고 읽으며 그 진가를 음미하겠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의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한데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읽기가 쉽지 않네요. 대강 건너 뛰면서 읽다 보니 내용이 아까운 점도 있고요.
구구절절 무난하고 유익한 해석입니다. 조금 더 날카로웠으면 하는 아쉬운 감은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확실히 짧지만 모든 것을 포괄한 풍부한 내용이 압권이며, 기도의 교본인 것 만큼은 틀림 없군요.
솔직한 댓글에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