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
마치 성인과도 같은 삶을 살다간 선각자들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자기의 재능과 부를 이 세상에 기부하고 떠난 수많은 위인들이 있다. 반면에 생각은 하면서도 끝내 실천하지 못하고 티끌처럼 사라지는 사람도 많다.
인간이 태어나 이 세상을 위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보여 준 사례는 언제 들어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그들로 인해 우리의 삶의 내용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문명과 문화의 품격도 향상된다.
그 중에서도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 적지 않다. 먼저 우리는 익히 일제치하에서 민족혼을 보존하는데 온 재산을 바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선생을 기억한다. 그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을 만나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았으며, 그의 조언으로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세창」은 「추사」의 제자였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아들로 당대의 명필이고 문화재에 대한 빼어난 감정가로도 유명한 분이다.
인사동에 소재한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고서적과 서화, 화첩 등을 수집하였고 한국의 중요한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수집한 문화재 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 11,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화첩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학자들인 「최순우」, 「최완수」, 「오주석」 등이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2013년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전반적인 운영과 지원을 하고 있다. 한편 지난 한국전쟁 당시 이들 수집품들이 북으로 넘어가려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독일군의 침공 시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들의 시베리아 대피작전, 「히틀러」의 파리문화재 파괴명령을 거부한 「콜티츠」 장군의 역사의식, 한국전쟁 시 해인사 폭격을 거부한 「김 영환」대령 등의 보이지 않는 문화재 사랑은 문명인다운 교양에 관한 잔잔한 교훈을 전해준다.
무엇보다 중국문화의 진수는 바로 대만에 있는 『대만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장 개석」 총통이 대륙에서 퇴각하면서 함께 가져온 중화민족의 혼이 담긴 곳으로 전통문화예술품에 관한한 최고의 수준급 문화재가 가득하다. 문화적으로 대만은 전 중국을 대표하면서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이에 버금가는 또 다른 인사가 있다. 바로 「손세기(孫世基,1903~1983)」선생과 「손창근(孫昌根,1929~2024)」선생 부자이다. 그 유명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수집하여 보관하다가 국가에 기증한 분이다. 아들인 「손창근」 선생은 선친의 작품에다가 자신의 수집품을 더해 역시 국가에 기증하였다.
이들 서화는 「김정희」, 「정선」, 「심사정」, 「장승업」 등의 작품뿐만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등 다양한 화목(畵目)의 회화와 서예, 전적, 전각류가 망라된 국보급의 유물이었다. 이중에서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不二禪蘭圖)』는 1883년 과천에서 시중을 들던 「달준」에게 그려주고 써준 작품으로 청아한 난초를 그린 최고수준의 명작으로 꼽힌다. 역대의 소장자들이 자신의 낙관을 찍었지만 이들 부자는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에서 손을 대지 않았다.
이들 부자는 이미 1973년에 서강대학교에 고서화 200점을 기증하였다. 2008년에는 중앙박물관에 연구기금으로 1억 원을 기증했고, 2017년에는 카이스트(KAIST)에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1억 원도 기부하였다.
사실 이들 부자는 문화예술 뿐만 아니라 독림가(篤林家)로도 살았다. 1960년부터 용인에 임야를 가꾸어 손세기선생의 호인 ‘석포(石圃)’를 따서 ‘석포 숲 공원’으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이들 부자가 1960년부터 잣나무와 낙엽송을 심고 가꾼 숲이다. 약 200만평의 사유림을 2012년에 산림청에 기부하여 만든 공원이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국가현충원의 안장도 거절하고 가족의 선영에 잠들고 계신다. 이 나라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하고서도 소문내지 않고 덕행을 실천한 뒤 조용히 떠나갔다. 그러나 이름만은 만고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기증한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미흡한데 이는 후대의 몫이라 생각한다.
잘 알고 지내는 한 사업가는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물론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하여 성공한 것이라기보다 외국의 기술을 돈으로 사들여 성공한 경우이다. 서울 근교에 수 만평의 숲을 가꾸고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일반 직원들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회사를 매각하여 졸지에 다수가 평생직장을 잃고 생고생을 하게 하였다. 장기간에 걸쳐 어려운 회사를 회생시킨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거액의 지분만 챙긴 것이다. 메아리 없는 탐욕에 노동자들의 애꿎은 시름만 늘어간 셈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이니 이득의 창출은 누구도 이해하지만 최소한 직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준수했어야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전에 그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는 방안을 찾아보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말로는 동의하면서도 그 실행에는 선뜻 자신하지 못한다. 곤 황혼의 낙조는 어김없이 찾아와 이 세상을 빈손으로 떠날 것인데 무슨 미련이 남아 미적대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성경 말씀처럼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확실하게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자식에게 상속하는 것 보다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모른다. 더구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돈벌이에 모든 힘을 쏟고 있으니 보기에도 안타깝다.
얼마 전에 만났던 한 친구의 삶은 그야말로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한 인생이었다. 서울의대에 입학했으니 보통 평범한 길을 걸었더라면 오늘 날 부와 명예를 걸머쥐고서 인생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신체제에 항거하며 험로를 걷다가 늦은 나이에 복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는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본분을 다하고 은퇴 후에는 해외의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한 인술을 베풀고 살아간다.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슈바이처」와도 같은 삶에 경건한 박수를 보낸다.
이는 마치 아르헨티나의 의사였던 「체 게바라」가 가난과 굶주림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생각으로 혁명에 뛰어들었던 자발적인 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명예와 부를 버리고 재차 볼리비아의 혁명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아마존의 정글에서 꿈을 접고 말았다. 그 의지와 불굴의 투지는 이후 많은 젊은이들에게 미래세대와 타인을 위한 삶에 투자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교훈으로 남겼다.
타인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를 쉽게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고 떠나는 삶이 진정한 교훈과 가치 있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어떤 특정한 인생이 우위에 있는 생활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일에 기여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며 이를 사회에 헌납하는 정신은 위대한 결단이다.
상기한 사례와는 그 동기와 기증의 이유는 다르지만, 최근의 「이건희」 컬렉션은 무려 23,000점으로 우리 미술사에 획기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그동안 남의 나라의 일처럼 여겨왔던 외국의 유명작가의 작품이 유입된 사례는 우리 국격에 걸 맞는 바람직한 징조이다. 우리는 지금 고급문화재 유무로 문명국가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일에 헌신하는 무언의 선각자들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의 따뜻한 성원과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수가 침묵할 때 최고수준의 지성을 표출한 걸출한 행동으로 지금 우리는 문화강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24.10.1.작성/11.27.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