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직하고 애국적이고 용기있는 분 두분을 꼽으라면 박대표님과 지만원
박사님을 꼽습니다.
** 시간이 나시면 좀 길지만 한번 읽어 보세요 게시판이 너무 어둡고 침울하여 올려봅니다. 감동 받으실 겁니다. (박사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박사가 아닙니다. 정운찬 총리, 김동길박사,또는 판사, 검사 와는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 대한민국 최고의 필력과, 최고 많은 양의 글을 쓰신분입니다.
그리고 최고로 논리적이고, 최고로 말씀을 잘하시며 최고로 연설을 잘 하시는 분입니다.
** 그리고 최고의 애국자 중의 한분입니다.
** 자녀들에게 읽히면 많은 도움을 얻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 지만원 박사 프로필>
■ 1947년, 내가 여섯 살 나던 해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상에는 노란 좁쌀밥과 짠김치, 물김치 그리고 구수한 숭늉이 올라 있었다. 문풍지 사이로 뽀얀햇살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피오오르는 좁살밥 위를 평화롭게 비추었다. 촌 겨울 의 아침상은 통상 10시경에차려졌다. 아침겸 점심이었다.
형들은 한참 먹을 나이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을 해치우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군둥이에 손을 대고 입으로 방귀 소리를 낸 후 거무튀튀하고 투박한 손을 내 밥그릇 위에 갖다 덮었다. 나는 숱가락을 내팽개치고 발버둥을치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형들에게 눈을 흘기며 매 성미를 잘 알면서 그런다며 나를 달랬다. 내가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내 밥그릇을 가지고 부엌으로 나갔다가 다시 가져와서는 밥을 바꾸어 왔으니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밥을 검사해보고는 나를 속였다며 신경질을 더 부렸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풀기 없이 부서지는 조밥을 커다란 바가지에 넣고 내가 보는 앞에서 씻어주었다. 김치쪽을 물에 헹궈서 밥숟갈에 올려주면 그제서야 몇 술 먹고는 말았다. 오돌오돌한 조밥이 어린 나에게 맛이 있을 리 없었다.
■ 육사에서는 학과공부보다는 위인전과 고전 명작들을 읽는데 50% 이상의 자습시간을 사용했다.
좋은 책을 빌려다 놓으면 주말이 무척 기다려졌다. 매 10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저자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했는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다시 10페이지를 읽고나면 한없는 상상력이 나래를 폈다. 읽는 시간보다 상상하고 요약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러한 훈련은 훗날 복잡한 사회현상에서 줄거리를 찾아내고 나의 전공인 응용수학을 깊이있게 음미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분명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나의 육사 시절, 사관학교 화장실 소변기 밑에는 언제나 소변방울이 떨어져 냄새가 났다.
금요일마다 염산으로 청소를 하려면 위험하기도 했지만 독한 염산 냄새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장실 사용에 대해 주의를 준다는 것은 좀스런 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사관학교 창설이래 화장실의 고통은 계속돼왔다.
어느 날 나는 교실로 향하기 위해 집합해있는 하급생들에게 엎드려! 일어서!라는 얼차려를 반복시켰다. 머리끝까지 긴장한 채 용수철 처럼 기합을 받던 하급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상상만 분주했다. "귀관들!" 나는 천천히 입을 열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무슨 심각한 지시가 떨어질까 아니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생도들의 눈망울이 나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화장실에 가거든 한발짝 더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최후의 한방울까지 철저히 관리하라". 겁을 잔뜩 먹고 있던 하급생들의 입이 한참 후에야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화장실의 고통은 사라졌고 "최후의 한방울론"은 두고두고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 월남전에서 나는 중위를 달자마자 포병 대대 상황실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지휘 장교가 됐다.
각종 정보 부대에서 전파돼오는 첩보내용이 날마다 수십 쪽의 상황일지를 채웠다. 다른 장교들은 상황일지를 한번 쭉 훑어보는 것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나는 기록병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을 지도위에 점으로 표시하게 했다. 초저녁 상황은 초저녁 상황판에, 밤중 상황은 밤중 상황판에 표시하도록 했다. 이렇게 표시된 점들이 모이자 각 시간대 마다 베트콩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나중에 수집한 베트콩 포로 문서에는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위 때, 나는 월남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통제 장교였다. 한국에서 고문관을 지냈다는 미군 소령이 내게 복종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장군들도 자기에게 꼼작 못했는데 중위가 왜 말을 안듣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내 병사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그 친구 발뒷꿈치 모래 사장에 집중사격을 시켰다. 내게 큰 소리를 치던 그는 체면도 내던지고 삼쌀개 처럼 달아났다. 병사들은 달아나는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나의 상관은 내게 큰일을 저질렀다고 겁을 잔뜩 주었다. 미군이면 꿈벅 죽는 그런 선배 장교들이 정말 못나보였다. 그 다음날 미군 중령이 내게 찾아왔다. 겁을 잔득 먹고 있는 나의 상관 앞에서 그 미군 중령은 오히려 내게 정중히 사과를 표시했다.
■ 30살 때, 나는 임시 대위로 월남에서 포대장을 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내 병사가 헌병초소에서 C-레이숀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헌병에게서 뺨을 맞고 들어왔다. 내가 분을 참지 못해 할 때, 상사와 중위들이 나를 위로했다. "포대장님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쫄병들은 원래 다니면서 헌병에게 얻어 밪고 다니게 돼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더욱 더 화가 났다. 덩치가 좋은 병사 열명을 뽑아 완전 무장을 시킨 후 트럭에 태우고 어두 컴컴한 길을 40분간 달려 갔다. 중간에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 병사를 때린 헌병을 끌어내 내 병사에게 용서를 빌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가 빼앗으려 했던 것보다 더 많은 C-레이숀을 주었다.
"앞으로 C-레이숀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하라, 만일 내 병사에게 손을 또 한번 대면 그 때엔 주먹과 무력으로 다스릴 것이다". 전쟁터에서 존중돼야 할 전투병들이 옷이나 깨긋히 다려입고 지내는 헌병 따위에게 뺨을 맞고 다닌 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까불던 헌병들이 그날 전투병들의 맛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후 그 초소를 지나는 내 부대 차량들은 언제나 기분좋게 프리패스됐다.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들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나는 일에 바쁜 병사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병사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기로 했다. 병사 개인별로 신상기록 파일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보내는 편지를 요약해 놓았다. 그들의 편지는 지휘관이 직접 읽도록 규정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그 일을 주임상사 등에게 맡겼다.
병사들에게 오는 편지는 보낸이의 주소와 이름만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의 한 개 한 개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쌓여지면 신상면담이라는 형식적인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깊은 내용들이 시의적절하게 파악될 수 있었다. 병사들의 고민도 즉시 즉시 파악됐다.
어느 한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옛날의 면허증은 지금처럼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데다 갱신기간을 넘기면 면허증이 송두리 채 날아가 버렸다. 그 병사의 면허증은 파월기간중에 갱신기간이 걸려 있었다. 나는 경남 도지사에게 앙청하는 편지를 썼다. 도지사로부터 약속장이 담겨진 편지가 날아왔다. 귀국해서 도지사의 편지를 교통운수과에 제출하면 문제 없이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번병을 시켜 그 편지를 병사에게 전달했다. 내가 직접 전달한다는 건 매우 쑥스런 일이었다.
나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뒤에서 생색내지 않고 여러 건 처리해 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생색내지 않듯이 그들도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병사들은 나를 귀신이라고 불렀다. 포대장이 비록 그들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어디에선가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취임시에 내개 들어내 놓고 반항하던 간부들이 불과 2-3개월이 지나자 과분하리 만큼 내게 충성을 다했다. 내가 내 사무실을 나가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본 병사들이 봉화 전달 식으로 주임상사에게 나의 거동을 알렸고 포대 귀퉁이에서 병사들과 함께 했던 나이 50이 넘은 상사는 땀을 있는대로 흘리면서 먼 거리를 달려와 차려 자세로 거수 경례를 했다. 나는 인구 150명의 조그만 부대에서 일종의 카리스마가 돼 있었다.
■ 나는 한국 나이 37세에 박사과정을 치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첫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나의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반팔로 1년을 지낼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였는데도 무릎과 발이 시리고 쩌릿해서 차라리 다리가 없는 편을 선택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뒷골이 무거워 지고 나른해서 잠만 쏟아졌다. 몇 차레 한국 교포로부터 침을 맞긴 했지만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 차례에 20달러씩 지불하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지만 가는 데 20분, 오는데 20분, 침맞는데 20분이라는 시간은 더욱 더 감수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침술사에게 사람하나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가 싸준 침뭉치를 가지고 그가 가르쳐 준 요령에 따라 배, 손 그리고 발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배에 꽂는 실침의 수는 30개 내외였다. 침을 맞으면 체력이 소모됐다. 가누지 못할 만큼 몸이 까부러졌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2층 계단을 내려와서는 비틀거려지는 몸을 가누며 뛰기 시작했다. 3년을 하루 같이 뛰었다. 뛰고 나면 지쳤던 몸에 생기기 돌았다. 박사과정이 끝난 시점에서의 내 건강은 그때까지의 내 일생 중에서 가장 건강했다.
비가 와도 뛰었고, 새벽 두시가 돼도 뛰었다. 매일 같이 뛴다는 것은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태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걸르게 된다. 열흘을 거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를 거르지 않아야 했다.
뛸 때에는 반드시 생각할 거리를 미리 준비했다.
뛰면서 수많은 수학 이론을 터득했다. 뛰면서 수학문제 푸는 과정을 칠판에 표시한다면 칠판 한 두 개쯤은 수학기호들로 빼곡히 들어찼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상상력과 논리력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생각하는 습관이 길러졌다.
■ 새로운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나는 3~5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같은 이론이라 해도 이를 다루는 석학들에 따라 시각을 달리 하고 다루는 요령 및 기법을 달리 한다는 것은 학문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이 희열은 주말 공부를 위한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남들은 교과서 하나도 다 소화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보느냐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문이 주는 희열을 알지 못한 채 성적과 학위만 딸 뿐이다.
처음부터 큰집으로 시작하면 큰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공부 방법은 수학에 대한 해석력을 낭만적이라 할만큼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게 길러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내가 만든 수학공식, 세 개의 정리, 알고리즘은 각기 나의 성을 따서 [Jee's Formula], [Jee's Theorem], [Jee's Algorithm] 으로 인용되고 있다.
다소의 이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교육의 질과 국력을 비례관계로 본다면, 미국은 세계 최강의 대학군을 거느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국가는 아낌없는 지원으로 준재들을 길러내고, 그 준재들이 다시 국가를 살찌운다. 이러한 선순환의 메커니즘이 계속 작동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건실한 교육환경과 합리적인 신입생 선발 시스템에 있다 할 것이다.
대체로 미국 명문대학의 입학 난이도별 등급(college admission selector)은 1. most competitive, 2. highly competitive, 3. very competitive, 4. competitive, 5. less competitive, 6. non competitive 이상 6 등급으로 나눔이 보통인데, 최상위 most competitive 급에는 대략 30 여 개의 대학이 포함된다.
최상위 30 개 대학의 수준은 우리나라의 서울대가 400 위 정도로 평가받은 전력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그 교육의 질과 학생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상위의 30 개 대학은 어떤 대학들이 포진해 있을까? 저 유명한 예일과 하버드, 프린스턴과 스텐포드 그리고 그 이름도 생소한 라이스(Rice)나 스미스(Smith) 등등, 총 등록 학생 수가 불과 2~3천명 안팎의 소규모 귀족명문 대학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다소 놀라운 것은, 최상위의 30 개 대학 중에 무려 6개의 군사관련 대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군사관련 대학은 신입생 선발 조건에 있어서 일반 명문대학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격하다.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학교성적과 봉사활동 경력뿐 아니라, 리더십, 체력, 기타 국가의 동량이 될 자질과 자세를 고루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거주지역 상원의원의 추천도 필수다. 가장 고난도의 입학 요건을 요구하는 학교들이 바로 군사관련 대학인 것이다. 이들 군사관련 6개교를 나열해 보면,
1. United States Air Force Academy........................... [ 공군 사관학교 ] 2.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 육군 사관학교 ] 3. United States Naval Academy................................... [ 해군 사관학교 ] 4. United States Coast Guard Academy........................ [ 연안경비 사관학교 ] 5. United States Merchant Marine Academy................. [ 상선 사관학교 ] 6. Webb Institute of Naval Architecture........................ [ 웹 해군 조선공과 대학 ]
인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6개 군사학교 중에서 4개가 해군관련 학교라는 사실이다. 총 6개의 군사학교 중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67%에 이른다. 이는 전체 미국 대학의 상위 1% 중에서 군사학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고, 또 그 군사학교 중에서는 해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니, 대학만 두고 보더라도, 과연 "미국은 해군의 나라"라 불릴만하다.
물론, 미 국방예산의 소모 퍼센티지를 보더라도 해군예산이 압도적이니 당연한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미국 정부와 전체 미국민의 정신에 자리한 해군의 위상은 참으로 대단하다. 미국의 가시적인 힘은 항공모함 전단으로 그 위용을 드러내지만, 보이지 않는 실질적인 힘은 미해군 천문대에 의해 행사된다. 매해 신년, 세계 각국은 미해군 천문대에세 제공되는 자료로 새해 책력을 작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할 것이다. 우주와 항공기술도 공군을 능가하며, 의료설비와 기술 수준도 최강이다. 미 대통령의 건강검진과 의료처치는 주로 베네쓰다 해군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사관학교 졸업생의 경우, 대다수는 일선의 초급장교로 근무하게 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소수의 장교들은 MIT등 미국 유수의 전문연구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요원이 되거나 교수요원의 길을 걷는다. 이런 MIT 같은 전문연구대학원 중의 하나가 바로 미해군대학원NPS(Naval Postgraduate School)이다. 전문연구대학원의 교과과정은 실무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난이도와 철저함은 수재들에게 조차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예전 MIT 유학기를 읽다 가슴 아팠던 대목이 있다. 성실하고 총명한 학생이었지만, 결국 중도 탈락되어 눈물을 뿌리며 짐을 꾸리는 장면이었다. 문과계통은 열심히 노력하면 못 따라 갈 일이 없는 '의지의 문제'이지만, 이과계통은 노력 만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재능의 문제'이기에 이과 탈락생은 "하는 수 없이 하버드에 가서 경영학 석사 과정 MBA나 이수해야겠다고 했다. MIT 석사과정에서 중도탈락한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차선으로 택하는 곳이 하버드 경영대학원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하버드 MBA가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MIT의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NPS는 위에 열거한 군사학교 출신 장교를 포함한 고급장교를 대상으로 하는 엘리트 군사교육 기관이다. 미국군 뿐 아니라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전 세계에서 선발된 영관급(대개 소,중령급)장교를 그 교육 대상으로 한다. 미 정부의 예산으로, 강도 높은 교육으로 미래 자유세계를 지켜낼 엘리트를 배출하는 곳이 바로 미 해군대학원인 것이다. 대충 이정도면 미국의 군사관련 교육기관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만원 박사의 모교가 바로 이 Naval Postgraduate School 이다. 1980년 그가 졸업하던 해, 그는 NPS가 그 해 배출한 유일한 이학박사였다. 3년의 짧은 수학 기간 중, 문과 석사에서 이과박사로 과정 변경하여 박사를 단 한 번에 따낸, 미해군대학원 사상 유례 없는 최우수 생도였다.
-교양과정-
+ 1966
육사 22기 졸업
+ 1974~75
행정과학 (Administrative Science)석사 (U.S.NPS)
+ 1977~80
경영과학 (Operation Research)박사 (U.S.NPS)
+ 1967~71
월남 참전 : 관측장교, 작전장교, 포대장
+ 1972~74
정보본부 해외정보 모집장교
+ 1976~77
국방 PPBS 도입 연구요원
+ 1981~87
국방연구원 책임연구 위원
+ 1987
육군 대령 예편
+ 1987~89
U.S.NPS 부교수
+ 1990~현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군사평론가
+ 1998.7.2~99.10
서울시 시정개혁위원
+ 1998.11.1~99.10.30
지요하
*주요 경력
1967년 5월 <현대문학>지 장편 소설 현상 공모에서 당선 후보에 오름
1969년 7월 육군 입대, 논산 훈련소 제28교육연대 9중대 조교로 근무
1970년 9월 파월, 백마 9사단 28도깨비연대 1대대 1중대 전투병
1971년 10월 귀국
1972년 5월 최전방 중동부 전선 15사단 38연대 철책선에서 분대장 근무 중 제대
1972~1982년 개인 사업, 회사원
1981년 8월 <흙빛문학회> 창립
1982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소설 당선
1982년 10월 <소설문학>지 신인상 단편 소설 당선
1983년 1월 <흙빛문학> 창간
1985년 10월 <흙빛문학회> 회장
1989년 6월 <흙빛문학>을 제10집까지 발간하여 기반을 다져놓고 회장을 그만둠
1992년 1월 지역 잡지 <갯마을 창간>, 편집인 겸 주간
1992년 5월 <충남예술>지 편집위원 (현)
1992년 9월 이래수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 총무 간사)
1993년 3월 <충남소설가협회> 창립, 초대 회장 (현)
1993년 4월 <한국문인협회 충청남도지회> 부회장 피선
1993년 8월 <소설충청> 창간 (2001년 현재 9호까지 발간)
1993년 9월 <대전 충남가톨릭문우회> 창립, 부회장 피선 (현)
1993년 9월 지역 신문 <새너울> 창간, 논설 주간
1996년 5월 '태안군민헌장' 제정위원, 헌장 기초
1998년 4월 <동학혁명태안기념사업회> 부회장 (현)
1998년 6월 <태안문학회> 창립, 초대 회장 (현)
1998년 11월 <태안문학> 창간. (2002년 6월 현재 8호까지 발간)
1999년 3월 공주영상정보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1999년 5월 정부로부터 '특별창작지원금' 1천만원을 받음
2000년 3월 공주영상정보대학 문예창작과가 방송극작과로 바뀌면서 산문(소설)실 기 담당 겸임교수직을 그만둠
*상벌
1991년 1월 제2회 <동양문학상> 수상 (동양문학사)
1992년 10월 <문예중흥유공자> 표창 (충남도지사)
1992년 12월 제8회 <충남문학대상> 수상 (충남문인협회장)
1994년 10월 <한글선양유공자> 표창 (충남도지사)
1999년 11월 제43회 충청남도 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 (충남도지사)
2002년 4월 제10회 황희문학상 수상 (국제문화교류협회)
*작품 연보
◎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추상의 늪」당선. <신동아> 2월호에 작품 전재. 여성잡지 <엘레강스> 2월호에 고백 수기「망망계곡의 피라미, 동트는 로마로 오다」를 발표하다. <신동아> 9월호에 수필「신앙의 매개물」을 발표. 10월, <소설문학> 지의 제7회 신인상에 단편 소설「정려문」당선.
◎ 1983년
1월 <흙빛> 창간호를 발간하고 단편「제비·하늘·꿈」을 발표하다. <엘레강스> 1월호에 단편「일어서는 빛」을, <경향잡지> 7·8월호에 단편「어느 친구의 죽음 앞에서」를 발표. <가톨릭신문> 9월 11일자부터 장편『들려오는 빛』연재 시작. <소설문학> 12월호에 단편「투사와 구렁이」를 발표하고, 동지 84년 1월호에 전영태 평론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 <가톨릭신문> 의 고정 칼럼『일요한담』을 10회 집필하다.
◎ 1984년
1월 <흙빛> 2집에 단편「고향타령」을 발표. <현대문학> 9월호에 단편「죽기 전에」를 발표하고, <월간문학> 10월호에서 이명재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다. 장편『신화 잠들다』를 <청한문화사> 에서 펴냄. 사보 <매일유업> 가을호에 단편「연애 소묘」를 발표. 한국 천주교《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전5권) 의 필자로 참여, 17분의 이야기를 쓰다. <주부생활> 5월호에 수필「친구의 죽음」, <전일방직> 사보 5월호에 꽁트「친구 떠난 날」, <삼부토건> 사보 7월호에「어느 날 고향집에서」, <고려합섬> 사보 <고합> 7월호에 꽁트「세상 차암」, <한신공영토건> 사보 8월호에 꽁트「알고보니 그 사람은」, <소설문학> 8월호에 꽁트「그 친구」를, <씨름> 8월호에 수필「여름과 여성」을, <한국화약그룹> 사보 <다이너마이트> 9월호에 꽁트「여자 나이 서른둘」을 발표. 8월과 9월 두달 동안 <대전일보> 문화면 칼럼『한밭춘추』를 9회 집필하다.
<내일을 여는 작가> 봄호에 단편「고백」을, <어린이동산> 4월호에 단편 동화「아빠의 눈물」을, <문예와 비평> 여름호에 단편「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찰」을, <월간문학> 7월호에 단편「길 위의 흉터」를 발표. <내포문학> 창간호에 단편「망둥이를 아시나요」를 재발표. <대전·충남가톨릭문우회> 작품집 3호에 단편「성령 세미나의 밤」을, <농민신문> 에 단편 「추석에 온 손님」을, <충남문학> 27집에 단편「시와 해프닝」을, <대전예술> 11·12월호에 단편「양반과 불상놈」을, <문예한국> 겨울호에 단편「일회용 면도기에 대한 집착」을 발표. <소설충청> 4호에 중편「깨어 있는 사람」을 재발표하고, <오늘의 문학> 연재 장편『등불』을 10회(1부)로 연재 마침.
◎ 1997년
<오늘의 문학> 봄호에 단편 동화 「매와 까마귀」를, <새농민>6∼9월호에 단편 「지렁풀 연가」를, <한국소설> 가을호와 <충남문학> 28집에 단편「도둑에 대한 명상」을, <내일을 여는 작가> 11·12월호에 단편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을 발표. <소설충청> 5호에 단편「지렁풀 연가」와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을 재발표하다. <대전·충남가톨릭문우회>작품집 4호에 에세이 「특이한 선교」를, <야곱의 우물> 2월호에 에세이「그저 매사를 하느님과 결부시키며」를 발표.
◎ 1998년
<월간문학> 2월호와 <태안문학> 창간호에 단편「하느님 집의 전화 번호」를 재발표하다. <오늘의 문학> 여름호와 <충남문학> 29집에 단편「그 시절의 작은 굴곡 하나」를, <대전·충남가톨릭문우회> 문집 5호에 단편「신비한 체험」을 발표하고, <소설충청> 6호에 단편「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찰」을 재발표. <태안문학> 창간호에 KBS대하사극 『용의 눈물』 작가 이환경씨와의 문청 시절 추억담「사람과 술을 좋아하던 호남아」와 동학혁명 관련 도보 수상「백여 년 전의 그 길 60리를 걸으며」를 발표.
안티조선 운동 사이트인 <우리모두>에 참여하고,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고정 코너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가 생성되어 다수의 글을 발표. 인터넷문단 <작가네트>에 '개인 서재'를 갖게 됨.
◎ 2002년
격월간 문예지 <문학과 세상>에 3·4월호부터 장편소설 『인생』 연재 시작. 장편소설 『죄와 사랑』을 <제3의 문학>에서 펴내다. <충남예술> 봄호에 명인 탐방기 「발굴·보존·전승·저술·연기 등 일인 다역의 불꽃 같은 삶, 민속학계의 거장 심우성 선생」을 쓰다. 계간 <제3의 문학> 여름호와 가을호에 단편소설 「글쟁이가 가난한 이유」를 발표. <태안문학> 제8집에 장막 희곡 『김 의원, 정계를 떠나다』를 발표. 최관수 처녀시집 『귀향하는 새』에 평설 「귀향, 그것은 소망과 추구의 다른 이름」을 쓰다. <충남예술> 가을호에 명인 탐방기 「세계로 나아가는 충남 음악의 큰 나무 양기철 교수」를 쓰고, <대전·충남가톨릭문우회> 문집 제9호에 에세이 「또 한 명 친구를 떠나보내고」를, <태안문학> 제9집에 장막 희곡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을, <소설충청> 제10집에 육성소설 「지역감정, 그 무지와 미망의 늪」을 발표하고, <불교문예> 겨울호에 단편소설 「망둥이를 아시나요·2」를 재발표하다.
1948년 충남 태안 출생. 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8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과 '20인 명인 탐방기' 『명맥』이 있음. 92년 충남문학대상, 99년 충청남도문화상, 2002년 황희문학상 수상. 공주영상정보대학 문창과 겸임교수 역임.
첫댓글 38대손 안산에서건설업을하고있는 지용현입니다 . 솔직히 지만원씨가 애국자라고요? 충주지씨에 내세울만한사람이 그렇게없는가 성을바꾸고싶습니다. 돈으로명예와권력은살수있으나 존경심은살수없습니다. 여러사람께 존경받을수 인물좀찾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