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5월 어느날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80이 넘었지만 정정하셨던 할머니는 마산에 있는 자식과 며느리, 손주들을 보러 가셨는데 식사 후 일이 생긴 것이다. 119를 불러 근처 병원으로 옮긴 후 그 다음 날인가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어서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 아마도 큰 아들을 비롯해 나머지 모든 아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병원에서 할머니가 연로하시니 수술을 할지 말지 가족들이 상의하라고 했다. 7명의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막내 삼촌이 내과 의사라는 이유로 형들로부터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꼬박 일주일을 고민한 후 수술하지 않기로 삼촌은 결론을 내렸다. 그 사이에 나는 중환자실에 홀로 할머니를 면회하러 갔었는데 사람의 뇌가 이렇게 많이 부을 수 있구나 싶어서 무척 놀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삼촌은 환자 일이라면 곧바로 결정을 했을텐데 가족이고 더구나 어머니여서 결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만의하나 수술을 해서 살 수 있다면 수술을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냉정하게 상황을 보기가 어려웠고 고민의 시간이 며칠동안 지나갔던 것이다.
야당 대표가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피습을 당했다.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순간 가족과 민주당의 선택은 나름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정치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다행히 그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살았다. 힘들게 살아돌아와서 겨우 안정을 취하며 치료를 받고 있는 그에게 언론과 일부 대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비난하고 있다. 하늘이 도와 그가 살았으니 아쉬운 것일까? 그가 목숨이라도 잃었어야 했을까? 지방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만약 목숨을 잃었다면 언론과 일부 대중들은 서울로 이송하지 않았다고 또다시 비난했을 것이다. 즉 이들은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라 줄기차게 비난 구실만 찾을 따름이다.
불과 얼마 전인 지난 연말에 공권력과 언론, 일부 대중에 의해 우리는 한명의 연예인을 잃었다. 수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은 수사 내용을 흘리고 언론은 신나게 기사를 썼으며 일부 대중은 이미 범죄자인양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 결과가 어떤 파장을 불러왔는지 보며 슬퍼하고 반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우리 사회는 광기를 시작하고 있다.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길 나는 바란다.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언론과 일부 대중에 휘둘리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비판적 사고 없이 휘둘리게 되면 결국 논란의 피로감을 느끼며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또다시 누군가를 잃고 난 뒤 슬퍼하고 후회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 자명하다.
지금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이번 사건의 범죄자가 제대로 처벌 받는지 지켜보아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