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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 직원신앙부흥회 01-버림 받지만 버림 받지 않습니다. - 박상길 목사 - 2024.4.15(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말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만 저는 우리 아직도 저는 부산위생병원이 훨씬 익숙한 사람입니다만 귀한 가족들을 뵐 수 있는 특별한 기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초청해 주신 우리 원장님과 또 우리 원목실 목사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병원은 정말 저에게 참 좋은 추억 또 감사함이 가득 담겨 있는 그런 곳인데요.
여러분 여기 저희 아이들입니다. 91년 11월 5일에 찍은 사진, 92년에 찍은 사진인데 얘들이 다 우리 삼육부산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병원에서 느낀 행복과 감사함은 제 평생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저희 어머니가 부산위생병원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세요. 1990년에 아주 위중한 상태에서 그때 울진에 계시던 어머니를 제가 대구에서 목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경북대학병원으로 모셨는데
응급실이 꽉 차서 도저히 진료가 진행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뭐 정말 위급하고 그래서 불연듯 부산위생병원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당장 오라고 그래서 그날 또 부산으로 내려왔고 다음 날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가 50대였는데 92세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어머니 모시고 벚꽃 구경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그러니 정말 제게는 이 병원이 참 감사하고 소중한 병원입니다.
이 병원에서 일하시는 여러분들도 정말 저에게 감사하고 따뜻한 분들입니다.
이 귀한 분들과 한 주일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어서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연수원이 참 먼데 우리 삼육구산병원에서 늘 연수에 참여해 주시고 또 원장님 연수 오신 분들이 있을 때마다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그 귀하고 따뜻한 사랑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한 주일 동안 제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내시는
5통의 편지를 전달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버림받지만 버림받지 않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함께 하나님이 주신 편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구글에서 슬픈 낱말을 검색하면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작별, 그랬을 수도 있었는데, 외로움, 잘 시간이야, 이것도 슬프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열심히 노는 애들에게는 슬프죠. 잘 시간이야 외롭습니다.
병원에서 사용되는 ‘터미널,이라는 낱말도 굉장히 슬픈 말이겠죠.
그다음에 비통, 후회, 계약,도 슬픈 말이랍니다. 계약 ‘출근’도 슬픈 말인가요?
혹시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울’ 그다음에 ‘짝사랑’도 슬픈 말에 들어갑니다.
아주 슬픈 말입니다. 혹시 다 해보셨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슬픈 말 이건 구글에서 추천해 주는 슬픈 낱말이고, 제가 아는 가장 슬픈 낱말은 ‘버림받음’입니다.
버림받음 세상에서 제일 슬픈 개는 버림받은 개입니다.
고속도로에 버려진 게 제일 슬픈 아기는 버림받은 아기입니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제일 슬픈 남자와 여자는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이죠.
직장에서 버림받는 것도 슬픈 일이고, 그리고 그 종류가 무엇이든 버림받는 것은 정말 아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철저하게 버림받고 가장 많이 버림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30살이 되기 전에 무려 세 번이나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자기 좋다고 막 따라다니던 어떤 여자에게 버림받았고, 그리고 그가 충성을 다하던 주인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여러분 버림받는 데도 약간의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버림은 받으면 받아도 별로 큰 데미지가 안 오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너 저리 가!’ 이렇게 했을 때 섭섭하고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고 싶어 그런 마음은 안 들죠.
왜냐하면 다시 엄마가 안아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버림받음이 있습니다.
다 압니다. 이건 끝이다.
요셉이 30살이 되기 전에 경험한 세 번의 버림받음은 전부 그런 것들입니다.
철저한 버림받음이고 완전한 버림받음이었습니다.
근데 요셉이 도대체 뭘 잘못 해 왔길래 그렇게 거듭거듭 버림받는 인생의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셉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 번이나 버림을 받았으니 이 세상에 요셉보다 억울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제가 성경에서 요셉이 버림받은 이유를 좀 찾아봤습니다.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요. 첫째는 요셉이 사랑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사랑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았다 역설인데 사실입니다.
여기 창세기 37장 3절에 요셉은 노년의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헬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으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우리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은 야곱이 일평생 일편단심 사랑한 여인 라헬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아들이죠.
게다가 11번째 아들이니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그런데 이 야곱의 사랑이 조금 지혜롭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랑을 너무 막 대놓고 표현했습니다. 채색옷을 지어 입힌 것이죠.
이렇게 너무 눈에 띄게 사랑을 표현하는 바람에 열 아들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요셉이 버림받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않았더라면 형들에게 버림받는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사랑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다 사람이 사랑받고 싶어해요.
누구에게든지 사랑받고 싶은데 여러분 사랑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다가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받지 않은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버림받을 일도 사실 없을 것입니다.
하여간 요셉이 왜 버림받았는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특별한 사랑을 받으신다면 좀 긴장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버림을 받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요셉은 고결한 품성 때문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힌 이유가 그가 노년에 낳은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늦게 태어난 아들이 있어요. 베냐민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에게는 채색옷을 입히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야곱이 왜 요셉만 특별히 사랑했는가? 그 이유가 부조와 선지자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한 사람, 곧 라헬의 아들 요셉이 있었다.
그의 드문 아름다운 인품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 미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순결하고 활동적이고 기쁨이 충만한 이 젊은이는
또한 도덕적으로도 성실하고 확고한 증거를 나타내었다.
그는 아버지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야곱이 지어준 채색옷은 단순한 몸을 보호하는 피부를 덮는 옷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고결한 품성의 옷을 상징하는 거예요.
채색옷은 그냥 이런 옷이 아닙니다. 요셉이 입은 채색옷은 품성의 옷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지어주신 거룩한 옷이죠.
그래서 요셉은 일평생 이 채색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버지 심부름으로 헤브론에 있는 집에서 세겜까지 직선거리로 100kg가 넘는 길을 가면서도 걸어갔겠죠.
그런데 그때 채색옷을 입고 갑니다. 바보 같은 일이죠.
여러분 양복 입고 혹은 한복 입고 산에 가면 그거 좀 웃기는 일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불편한데요. 근데 요셉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왜 했는가?
요셉이 그 채색옷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입혀주신 고결하고 순결한 품성의 옷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사실 요셉은 일평생 이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서 그 옷이 벗겨졌지만 그러나 요셉은 그 옷을 벗지 않았어요.
평생 그 옷을 하나님이 주신 옷을 입고 산 것이죠. 왜냐하면 그 옷이 벗을 수 없는 벗어서는 안 되는 품성의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결한 품성의 옷 때문에 요셉이 버림받은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정말 미워한 것은 아버지가 지어준 옷이 아니라 그놈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에요.
자기들은 다 거짓말 하는데 거짓말 안 하거든요. 자기들은 다 음담패설하는데 안 하거든요.
자기들은 다 적당히 적당히 해서 뭐 이렇게 하는데 정직하거든요.
그건 너무 싫은 거죠. 요셉이 왜 버림받았는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품성 원칙 그 옷을 벗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참 고약한 일을 당할 때도 요셉이 그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잠깐만 벗었더라면 뭐 그렇게 힘든 일 당하지 않고 오히려 안주인 마님의 아주 따뜻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뭐 행복하게 살았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 절대 안 갔겠죠. 근데 요셉이 왜 결국 그 왕의 죄수의 감옥에 들어갔는가 옷 때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그 품성의 옷을 안 벗으니까. 그래서 요셉은 그걸 하나님의 은혜로 개발한 또 하나님의 은혜로 입혀주신 그 고결하고 거룩한 품성의 옷을 입고 살았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위험합니다. 세 번째로 요셉은 온전히 순종하다가 버림받았습니다.
여기 창세기 37장 16절 17절에 요셉의 충성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요셉을 심부름 보내죠. 저기 너희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으니까 세겜에 가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해 오너라.
요셉이 채색옷 입고 세겜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세겜은요 사실은 무서운 곳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세겜에서 야곱의 가족들이 세겜 족속들과 분쟁이 생겨서 시므온과 레위 세겜 남자들을 막 싹 죽여버리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그걸 요셉이 다 알아요.
왜냐하면 그 현장은 요셉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요셉이 세겜으로 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형들이야 10명이 막 떼를 지어 갔지만 혼자 못 갑니다.
근데 아버지가 보냈고 요셉은 갔습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세겜까지 갔는데 세겜에 가니까 형들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버지가 세겜에 갔다 오라고 그랬으니까 세겜에 형들이 없으면 빨리 집에 가서 아버지 형들이 없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그렇다고 심부름 안 한 것도 아니고 근데 여기 보면 요셉이 거기서 형들의 소재를 묻습니다.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도단은 세겜보다 더 북쪽입니다. 그냥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죽기를 각오해야 갑니다.
얼마나 무서운데요. 여기서 세겜에서 도단까지가 한 30kg 정도가 되는 거리인데 여러분 이거 뭐 그냥 설렁설렁 걸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정말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정말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지금 그런데 거기를 요셉이 간 거예요. 충성스럽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하다가 그만두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그에게 명한 것 이상으로 한 것이죠.
세겜까지 갔다 오라고 그랬는데 도단까지 올라갔으니까 만약에 요셉이 세겜에서 돌아왔으면 험한 꼴을 안 당했겠죠.
왜 아버지 심부름도 하고 형들에게 버림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꾸역꾸역 도단까지 올라갔다가 형들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적당히 순종했으면 미움받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온전히 끝까지 순종하다가 버림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요셉이 버림받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고결한 품성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온전히 끝까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버림을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요셉. 그런데 이것은 요셉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고 각 시대의 모든 하나님 백성이 겪어온 일이며 특별히 마지막 때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이 사실이 계시록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3장 15절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또 17절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남은 자손, 하나님이 입혀주신 고결한 품성의 옷을 입은 남은자손,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끝까지 순종하는 남은 자손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서 처절하게 버림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에요.
그래서 재림 성도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일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신 고결한 품성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여기.
여러분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악의 세력에 의해서 버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버림받는 것은 누구에게 당하도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버림받고 행복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고 진리를 따라 살아간다고 하지만 진리를 갖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공격하고 조롱하고 미워해도 아파요.
힘들어요.
여러분 안식교는 이단이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습니까?
요즘은 좀 덜 하는지 모르지만 율법주의다. 이상한 여자를 믿는다더라 그런 말 들으면 아파요.
힘들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사탄은 여자의 남은무리 소수의 진리를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돌림으로 외롭게 만듦으로 버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길에서 떠나서 죄와 세상과 연합하게 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대접, 그런 따돌림, 그런 비난 버림받는 것 불편하고 힘들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불편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입혀주신 거룩한 품성의 옷을 감춰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포기해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재림 성도들이 점점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편하게 살아야 되냐 여러분 사실 그렇잖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가 예쁜 옷 사주면 좋은데 그 예쁜 옷 입었다고 해서 형들에게 10명의 형들에게 그렇게 미움받을 바에야 차라리 그 옷 안 입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옷을 벗어버리는 사람들이 발생하는 것이죠.
오늘 아침에 우리 삼육93병원 믿음의 가족들께 우리 하나님께서 전해드리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여러분 요셉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입혀주신 채색옷을 벗어버리거나 그 옷 위에 다른 옷을 입어서 감춰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여자의 남은 자손의 신분을 정체성을 선명하게 지키면서 살아가시는 일하시는 우리 삼육부산병원 모든 믿음의 가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자의 남은 자손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채색옷, 하나님이 펴주신 채색옷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기쁘게 입으시기 바랍니다. 병원에 오셔서 병원의 근무복 여러분 혹시 부끄러우십니까?
안 그렇지 않습니까? 자랑스러운 옷입니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옷입니다.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옷입니다.
재림 신앙의 옷도 그렇습니다. 채색옷이 바로 그런 옷입니다.
우리가 그 옷 입고 살아갈 때 우리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이고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가 확인되는 것이고,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러분 하나님 우리에게 입혀주신 이 재림 신앙의 채색옷을 언제 어디서나 기쁘게 입고 살아가는 재림 성도가 되십시다.
집에서도 입어야 되고요. 직장에서도 입으셔야 되고, 근무할 때도 입으셔야 되고, 휴가 갈 때도 입으셔야 되고, 예배당에서도 입어야 되고, 시장에서도 입어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입어야 하고,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도 입어야 합니다.
요셉이 그 채색옷을 일평생 입고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한 핏줄을 타고난 형들은 요셉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한때 요셉에게 연정을 품었던 어떤 여인은 요셉을 매몰차게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의 신실함과 충성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보디발은 자기의 신실한 청지기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철저히 버림받은 요셉은 사실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요셉입니다.
앞으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요셉처럼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하고 고결한 품성의 옷을 나누어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버림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의 증표인 예언의 신의 증언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또한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은 무리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각 시대의 대쟁투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정말 너무나 깊은 은혜와 감동을 누렸습니다.
이와 같은 시련의 때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잊어버리실까?
그분께서는 홍수 전 세상을 심판하실 때 충성된 노화를 잊어버리셨는가?
그분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평원의 도시들을 태워버리실 때 롯을 잊어버리셨던가 그분께서는 애굽에서 우상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요셉을 잊어버리셨던가 그분께서는 이세벨이 바알의 선지자들의 운명과 같이 만들겠다고 엘리야를 위협하는 맹세를 했을 때 그를 잊어버리셨던가 그분께서는 풀무불에 던져진 훌륭한 새 청년을 잊으시거나 사사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잊어버리셨던가 여러분 이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신실한 자녀를 잊어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림 성도로 살아가시면서 삼육부산 병원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시면서 때때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받고 버림받으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나를, 우리를, 우리 병원을, 우리 교회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 박해 때문에, 신앙 때문에 박해와 모욕을 당하는 자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에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느 모로 보든지 그들의 원수가 자기들을 압도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결코 양심을 거스리지 않도록 하라. 그들을 대신하셔서 고생하시고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주신 주님께서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한 주일,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옷을 잊고 신실하게 충성하며 살아가는 재림성도, 또 삼육부산병원 공동체의 가족들이 되기로 결심합시다.
하나님 주신 채색옷을 입고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버림받지만 버림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지만 버림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버림받지만 버림받지 않는 재림, 성도로 버림받지만 결코 버림받지 않는 삼육부산병원 공동체의 일원으로
오늘도 기쁘게 살아가시는 믿음의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귀한 아침에 또 저희들에게 편지 보내주셔서 버림받기 쉬운 세상에서 아니 버림받은 상처가 많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앞으로도 버리지 않을 것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저희들 버림받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 당당하게 기쁘게 열심히 주를 섬기고 우리들에게 맡겨진 귀한 영혼들을 섬기는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하루 병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진료와 봉사와 회의와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 저희를 당신의 손에 귀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