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낙동강 병산서원 앞 인금리
그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불혹을 넘어 반백이 되었네.
봄이면 소쩍새 울어
진달래꽃 떨어지고
여름이면 천둥소리에
녹두꽃 피어나네.
가을 들국화 향기에 취해
고추 잠자리도 하늘에서 춤추고
무서리에 오동잎이 떨어지면
초가집 굴뚝위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는
겨울이 시작된다네.
이제는 추억을 넘어
전설처럼 되어 버린
그리운 나의 초등시절이여!
암스트롱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 여행을 할 무렵 난 나의 우주 풍산들을 가로질러 안동으로 가서 공부를 했다. 금곡동 골짜기 언덕집에 작은 아배, 큰 형님과 같이 3명이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중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촌놈은 안동 와서도 할 수 없어. 평화동이나 당북동 이런 큰데 놔두고 하필이면 산골짜기 집을 얻을 게 뭐야. 하긴 그 때 평화동 철도 관사 있는 데는 요즈음 서울로 치면 강남 비슷한 데지.
금곡동에는 그 당시 상수도가 없어 동네 우물터에서 물을 길러 날라 밥짓고 빨래를 했다.
경안고 뒷동산 대저택에 앰블란스 비슷한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미국 선교사는 우물가에서 지하수를 먹는 우리를 무슨 아프리카 토인 비슷하게 보았을 꺼야.
이래 저래 안동에서 때가 묻고 안동 아이들 비스무리하게 물들 때쯤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강바람 맞으며 법흥교 지나 마뜰벌판을 가로질러 다니기를 3년 세월은 후딱 지나가고
열심이 공부한다고는 했지만 서울 ㅂ대는 실력이 안되고 논팔고 소팔아 육남매 교육시켜야 할 형편에
사립대학은 엄두도 못내어 할수 없이 대구로 왔다.
고난의 길은 이제 시작이다.
사법고시와의 싸움이다.
요즈음은 1000명 정도 배출되지만 그 당시는 100명 내외로 선발되던 시절
어려운 전투였다.
지금은 신림동에 가면 무슨 고시학원이 있어서 쪽집게 처럼 잘도 가르쳐 준다는데
그때는 순전히 학교에서 좀 기본을 익히고 나면 산속 절로, 마을 정자로, 사설 고시원으로 책보따리, 이불 보따리 싸들고 다니면서 공부했다.
다른 대학생들은 미팅이다, 뭐다 하면서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빨면서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무렵
난 회색빛 담장 법대 부속 기숙사 청운재에서
고향의 정자 인천서당에서
팔공산 도학동 권씨 고시원에서
경기도 청평 호반 송강고시원에서
흘린 땀의 대가로 1980년 9월 1일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차시험에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그래도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 없다.
3전 4기라고나 할까.
매를 맞으며 맺집이 생겨나고
떨어지면서 담금질이 되어
더욱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되었다.
그 때는 140명을 선발했는데
난 열손가락 안으로 합격하였다.
풍천 시골에서 태어나
안동으로 중고등 나와
지방대 졸업하여 서울 올라와
유수의 명문대생을 제치고
상위권에 합격했던 그 짜릿함이란 몽매에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서울 덕수궁 앞 사법연수원에서 2년간,
경기도 포천에서 3년간의 군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1985년 9월 1일 강원도 원주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원주 기차역 앞 법원에 내려
판사실에 들어갔을 때의 감회란 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년간 원주에서 판사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구로 왔다.
그 때 서울로 갈 수도 있었는데
내가 대구 사람으로 인식된 것도 그 때 부터이다.
그 때부터 난 대구 지역법관이 되었다.
1993년 2월 대구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98년 2월부터 2년간 경남 밀양지원장으로 근무하였고
2000년 2월부터 6년간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였다.
이상이 총 25년 6개월의 법원 경력 명세서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된가 보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길을 가자.
외부와 격리되어 담장 없는 철창 속에 갇혀 있는
생활은 이제 청산하자.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쉬고 싶을 때는 한 열흘을 제키고
놀러 떠날 수 있고
가입하고 싶은 사회단체가 있으면
눈치보지 않고 가입할 수 있고
좀 헐렁하게 살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법관이기에 입방아에 오르는 생활은
이제 마무리 하자.
그 길이 때론
가시밭 같은 길이라도
사막 같은 길이라도
새로운 정열을 불태우며 길을 개척하자.
이제는 법관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공직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더 늦기 전에 들판으로 나아가
재야의 법조인이 되자.
첫댓글 격려는 감동이고요 이해입니다
때는 기다림을아는자만 물러 설줄 알지요
오늘 이글을 보고 있노라니 어릴때 시골 하늘을 수놓던 여름밤의 <별똥별>의 찬란함을 보는듯 합니다. 이럿듯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이어온 그대가 진정으로 부럽소이다. 한가지 더 기대해 본다면 인금리의 아들임을 잊지 않는 변호사가 되기를 빌어 봅니다.
오랜만에 안동고 23카페에서 감동이묻어나는 편지를 읽어고갑니다.... 갑자기 여고시절 법상동에서 언니랑 자취하던 법상동86번지 김해운님댁이 뇌리에 스쳐지네요... 제가 기억력이 좋아서 아직도 주소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답니다...
친구야! 오랫 공직 생활 영광스럽게 퇴임하게 되어 축하한다. 자유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개척자가 되시길.
장소(이름)만 다르지 모두 똑 같은 지역의 똑 같은 모습들로 살아 온 지난 어린 추억...그러나 그 뒤의 피나는 노력은 서로가 많이 다르겠지. 내일 저녁 개업식에서 만나세. 이젠 재야에서 만나세~~~
동규, 태호,진헌, 항덕,성수,동욱이하고 여관에서 뭔 일로 술먹다가 현호가 하는 말 생각나다. 너들하고 놀면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 그럼 난 시험은 없다. 나중에 붙어서 같이 놀자는 말 생각나는군. 다른친구들도 다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가 잇엇지만 니는 바라는대로 되서 좋앗다.
자랑스럽습니다..... 성님..^^* 살면서 성님 얼굴을 그 안(법원)에서 안보고 산기 다행이씨더..ㅎㅎㅎ. 이제, 자연, 자유, 어쩌면 더욱 큰 의무감에 메일진 모르지만... 눕고 싶을 적에 두다리 쭈욱 뻗고 누워 보시이소.. ^^*
감탄사가 절로 , 이제 돈 좀 벌어 잼나게 살어라.
현호오빠!! 돈 마니마니 벌어서 좋은일에 쓰시구요. 서민들을 보호하는 멋진 변호사님으로 거듭나시길 바라며 자유인(?)으로 돌아오심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ㅎㅎ.
여보, 도끼자루가 좀 썩더라도 쉬었다가 가...... 법관이 최고 일수도 있지만... 시장 아지매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웃고 사는 법.... 일식집 사시미나 시장바닥의 생선회나 먹는 사람에 마음에 따라.....
황 변호사 당신은 역시 시골 친구라서 낭만이 있고 멋이 있고...그 무언가 또 다른무엇이 있는것같에... 그거이 고향을 친구들의 냄새가 아닐까싶네... 오늘 비록 개업엔 참석치 못하지만 ...참석치 못하는 친구들 모두의 마음이 이런것일까싶네그려..열심히 멋잇게 살다가세...
살아온 길 자랑 스럽습니다....그런 길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못다한 일이 있었다면 앞으로 모다 이루시기 바라며 새로운 인생길 축하드립니다..앞날의 축복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황변호사! 파란만장했던 25년 6월간의 판사생활을 알차게 마무리함을 축하드리고 그동안 수고 굉장히 많이 하였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야법조인으로서 명성을 날리시길 이 친구는 굳게 믿겠네. 변호사 개업 진심으로 축하드리겠네. 개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미안하게 되었네. 이젠 더 자주 연락하세나.
축하하네. 황판사님 아니 변호사님 감동적인 글입니다. 기억나나? 중(2-3학년 때 한 반)고등학교 때 친구 용구다. 나 지금 봉화봉성중 교감이다. 봉화오면 봉성 한 번 들러라. 돼지 숯불 갈비로 ---. 인간미가 배어있는 가슴으로 쓴 글, 잘 읽었네. 이번에 못 가서 미안하네. See you!
부장판사님이 변호사로 거듭났다고? 축하한다. 그 동안 공직생활에서 명예롭게 퇴임함을 축하하며 앞으로 우리 서민들의 지팡이가 되기를 빈다.
명에로운 공직 생활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 멋집니다..85년 원주에서 판사 하셨을 즈음 저도 원주 관설초교 근무 했었네요.. 넓고도 좁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리오며 더 큰 발전과 영예 기원합니다 ^^
짜릿한 글을 읽고 우리의 어린 시절이 아름다움으로 변화된 드라마 같은 당신의 삶이 자랑스럽습니다. 남은 제2의 인생은 더욱 우리를 감동시키고 당신의 뜻을 펼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