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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실
진실을 말하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하는 인간도 없고 말하는 인간도 없다.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없다. 슬픔이 그 가운데 있다. 왜 말하지 않을까? 애초에 진실에 흥미가 없거나 진실을 말하는 기술이 없거나다. 너스레나 떨고 있을 뿐 진지하지 않다.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대의 압박 때문이다. 무대공포증을 극복하려면 일단 뭐라도 액션을 해야 한다. 무대를 휘젓고 뛰어다니면 다리가 떨리지는 않는다. 액션이 앞서므로 대본은 뻔하게 된다. 이겨먹으려 하는 자, 남을 차별하는 자는 어른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짐승본색을 들킨다. 동물의 서열본능이다.
이겨먹으려고 한다면 적이다. 적과의 대화는 없다. 대화는 같은 편이라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대화하려면 마주 앉아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보지도 못한다. 이겨먹으려고 하고 차별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게 쉬운 대본이기 때문이다. 무대 공포증 때문에 자신에게 쉬운 역할을 주려는 것이다.
괴력난신을 추종하는 자는 대화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흥분해 있다. 대화하려면 일단 앉아야 하는데 그들은 서 있다. 거리에서 할 수 있는 대화는 잡담 뿐이다. 씩씩거리는 자도 대화상대가 아니다. 동물의 사냥본능이 발동하여 투쟁하려고 한다. 권력게임에 빠져 있는 똥파리들은 진정시켜야 한다.
회의주의자, 불가지론자, 허무주의자는 발언권이 없다. 회의주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검증할 뿐 독립적인 자기주장이 될 수 없다. 의심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초딩 역할이다. 어린이가 의심하지 않고 함부로 남을 따라갔다가는 유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초딩 행동을 하면 병맛이다.
불가지론은 모르겠다는 건데 모르면 닥쳐야 한다. 1+1을 2+2로 복제하는게 지식이다. 복제 도구가 없는 사람은 지식을 논할 자격이 없다. 불가지론은 칼이 없는 사람이 나는 칼을 모른다고 말하는 셈이다. 칼을 논할 자격도 없다. 짐승도 아는게 없지만 모른다고 광고하지 않으니 짐승보다 못하다.
허무주의도 입을 열 자격이 없다. 남의 게임을 기웃거리는 자가 허무한 것은 당연하다. 허무주의는 '내게는 발언권이 없어.' 하고 탄식하는 말이다. 남의 제사에 구경꾼은 당연히 발언권이 없다. 감놔라 배놔라 하면 안 된다. 의미는 당연히 자기가 설계한 게임에 있고,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에 있다.
유물론자도 발언권 없다. 사건은 원인 측이고 물질은 결과 측이다. 원인 측을 장악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는다. 소프트웨어를 파는 사람이 기술자라면 하드웨어를 사는 사람은 소비자다. 상품에 대한 설명은 물건을 파는 기술자의 역할이다. 주는 사람에게 발언권이 있다. 유물론자는 받는 사람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지하지 않은 이유는 남의 게임에 들러리를 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치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을 시킨다. '네가 노래해 봐.' '네가 춤 춰 봐.' 대본은 없고 애드립만 풍성하니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될 뿐이다. 기운이 빠지는 이유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함께 할 사업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주최측은 손님을 초대하고 말을 건다. 게임은 단체전이라야 한다. 개인전은 발언권이 없다. 산중에 혼자 사는 자연인은 누가 와서 말을 걸어줘야 하므로 비참을 면하지 못한다. 세상을 향해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령, 꼼수, 처세술, 얌체, 반칙, 특권은 혼자 알면 되지 그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역시 발언권 문제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은 혼자 알고 있는게 맞다. 모든 사람이 함께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고 부른다.
남을 망치고 혼자 잘 되는 방법은 맞든 틀렸든 의미가 없다. 강자가 약자를 조지는 기술을 교과서에 반영할 수는 없다. 지정학적 구조에 가둬먹고, 계급구조에 가둬먹고, 차별의 표지로 가둬먹는 악의 기술로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없다. 가두면 격리되고 고립된다. 인류의 진보에 반하는 역주행이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 자랑거리도 발언권이 없다. 누가 물어봤냐고? 사랑, 행복, 쾌락, 돈, 장수, 명성 따위 자기소개 언어로 말을 걸면 안 된다. 그런 것은 초딩이 엄마한테 하는 말이다. 초딩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는다. 초딩은 파수꾼 역할을 맡고 있다.
원시사회에서 초딩은 마을 경계선에서 이웃 부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으므로 보고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자가 어른이 되어서도 초딩 보고를 계속하니 피곤하다. 미성숙한 자의 공통점은 '나는'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 한다. 왜 진리 생각을 말하지 않고?
부자들은 좋은 집을 짓고 정원을 멋지게 가꾸려고 한다. 외로움을 들키는 행동이다. 먼저 방문하지 않고 초대하려고 하는게 세상과 각도가 틀어진 증거다. 부럽지? 약 오르지? 이런건 초딩의 언어다. 자기가 먼저 말을 걸기에는 아이디어가 없으므로 얄궂은 것을 전시해놓고 상대가 말을 걸게 한다.
신세한탄, 넋두리, 자학개그, 집 자랑, 자동차 자랑,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은 친구와 술 마시며 하는 푸념이 될지언정 어른의 진지한 말은 아니다. 말은 의미를 태운다. 의미는 사건을 연결한다. 단체전이어야 하며,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권력을 발생시켜야 한다. 정상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이다.
큰 불을 지르면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큰 사건이 일어나면 모두가 관련된다. 큰 게임을 개설하면 모두가 참여한다. 우리는 문명의 게임, 진보의 게임, 역사의 게임, 진리의 게임, 자연의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태계는 진화하고, 인간은 최후에 핸들을 잡고 성과를 보고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게임을 개설하고 운전대를 잡으면 승객에 대한 통제권이 발생한다.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명령할 수 있다. 인디언의 독수리 깃털 장식은 이웃 부족과 대결하며 첫 번째 타격을 성공시킨 증거다. 비로소 전사의 무리에 들어서 발언권을 얻는다. 이기는 자가 이기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언어는 이전의 것을 계승해야 한다. 갑자기 생겨난 생각은 개소리다. 개소리는 집단에 위험을 알리는 자기방어 행동이다. 방어한다는 것은 게임에 져 있다는 말이다. 신과, 진리와, 문명과, 역사와, 진보와, 자연과, 우주와 연결되어 관성력을 얻어야 하며 갑툭튀는 보나마나 그게 비명소리다.
있는 것을 계승하면서도 내가 가담하면서 새로워져야 한다. 새롭지 않으면 내게 역할이 없으므로 말을 걸 수 없다. 이미 트렌드에 반영된 것을 재탕한다면 신문이 아닌 구문이다. 새로운 것은 공격적이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부정적, 방어적, 수동적 사고는 재탕이므로 가치없다.
무대가 주는 압박감이 문제다. 동료의 옆구리를 찔러 억지로 대사를 조달하려고 하므로 망한다. 액션을 먼저 해놓고 나중에 대사를 채워넣으려 하므로 망한다. 자신에게 쉬운 대본을 주려고 하므로 망한다. 동물은 본능이 대본이므로 그래도 되지만 멀쩡한 인간이 동물행동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쉽게 배역을 따내는 방법은 악역을 맡는 것이다. 악당의 대사는 난폭해도 되고 욕설도 허용된다. 자동으로 적군이다. 이겨먹으려고 하고, 차별하려고 하고, 위세부리려고 하고, 방어하려고 하는게 적군의 고함소리다. 그들은 흥분해 있다. 그들은 사람을 격동시키려 한다. 울리려 하고 웃기려 한다.
얕은 수법으로 사람을 흔들어보려 하는게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짓이다. 그게 사실은 비명소리다. 말을 걸기는 하는데 내용은 '네가 내게 말을 걸어줘.' 하는 부탁의 말이다. 자체 엔진이 없으므로 남을 흔들어 되돌아오는 반작용 힘에 의지한다. 자체 엔진을 가져야 긍정주의와 낙관주의가 가능하다.
개미떼를 관찰하면 집단이 합의해서 일정한 방향으로 먹이를 끌고가는게 아니라 제멋대로 가는데 우연히 방향이 결정되며 엉뚱한 쪽으로 잡아당기는 자는 항상 있고 매우 비효율적인 것을 알게 된다. 무리는 모였는데 깃발이 없으니 방향이 없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굴러온게 용하다.
개미떼도 페로몬을 공유하여 다수결을 끌어내지만 최악을 면할 뿐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사람의 종교행동, 터부행동, 관종행동은 동물의 본능에 의지하는 것이며 개미떼의 페로몬 기술과 다르지 않다. 왁자지껄 떠들며 중구난방으로 움직여도 어떻게든 굴러가는게 세상이긴 하지만 답답하다.
혁명이 유효한 것은 내 손에 총이 쥐어져 있을 때다. 총을 들고, 깃발을 세우고, 동료를 불러모아 함께 왕을 죽이러 가자고 외치는 언어라야 한다. 일찍은 우울증이 다수, 이찍은 정신병이 다수다. 탐미주의자인 척하면 강박증, 자유주의자인 척하면 중독자다. 표정이 진지하면 창조과학회나 환빠다.
멀쩡해 보이면 꼴통,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 PC, 나사가 빠져 있으면 히피, 실실 웃고 있으면 주사파 혹은 개독에 도를 아십니까다. 인상쓰고 째려보면 성찰 공격, 진정성 공격, 관념 공격을 하려고 희생양 찾는 애정결핍증 환자의 히스테리 발작신호다. 이런 자들과 대화는 커녕 마주 앉지도 못한다.
말을 걸기 앞서 무대의 압박을 극복하고 엔진을 공유해야 한다. 아군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삐딱한 자세로 팔짱끼고 딴전 피우며 '네가 나를 설득해 봐.' 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진리에 굶주려 있어야 한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 어색한 연극을 하면서 환멸을 느꼈다면 그럴 법도 한데 말이다.
무대를 처음 개설한 사람에게 발언권이 있다. 원점에서 출발하여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사유를 빌드업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가 지금까지 지나온 경로를 아는 사람이 앞으로 진행될 스테이지를 예측할 수 있다. 비로소 군중의 선두에 설 수 있다. 무리를 대표하여 나아갈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인생의 의미
1. 인생은 게임이다.
2. 이기면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간다.
3. 이기게 하는 것은 관성력의 힘과 가속도의 힘이다.
4.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사건의 앞은 관성력이고 뒤는 가속도다.
5. 사건을 연결하려면 집단 속에서 역할을 맡으며 맥락을 따라야 한다.
6. 삶의 동기와, 목적과, 의미와, 성과를 연결하여 빈 칸을 메우는 것이 맥락이다.
7. 종교의 교리는 거짓말이지만 맥락을 연결하고 루틴을 만들어주는 것은 진실이다.
8. 사건의 흐름에 올라타서 사실주의로 관성력을 얻고 탐미주의로 가속도를 얻어야 한다.
9. 남을 이겨먹기 위한 거짓 승리나 남들 앞에 전시하기 위한 거짓 탐미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10. 온고지신을 실천하여 원래부터 작동하고 있는 일대사건의 커다란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11. 종교의 거짓 맥락을 따르는게 편의주의라면 사소하고 즉흥적인 사건에서 에너지를 얻는게 인상주의다.
12. 편의주의를 극복하는 사실주의로 가고 수동적 인상주의가 아닌 능동적 탐미주의를 설계해야 한다.
게임은 발견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문명과 야만, 인간과 비인간의 싸움은 영원하다. 내가 게임을 지어내면 안 되지만 대본은 내가 자유의지로 써야 한다. 공자가 좋은 매뉴얼을 제공한다. 괴력난신 행동은 남들을 이겨먹기 쉬운 거짓 게임을 개설하는 삽질이다. 술이부작은 거짓 게임을 개설하지 않고 이미 있는 게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온고지신은 원래부터 있는 게임에 올라타서 관성력을 얻되 거기에 나의 대본을 더하여 가속도를 얻는다.
인생은 게임이고, 게임에 가담하는 것이 맥락이고, 게임을 계속하게 하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 탐미주의다. 임의로 게임을 개설하지 말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진리의 게임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주의다. 거짓 게임을 만들어내면 그게 종교다. 이겨먹으려고 쉬운 게임을 개설하는 것이 각종 음모론과 괴력난신 행동이다. 성찰, 진정성, PC정책의 터부도 마찬가지다. 유물론, 회의주의, 불가지론, 허무주의는 게임을 부정하고 맥락을 부정한다.
니체의 초인, 공자의 군자, 석가의 해탈은 게임에 이긴 사람이다. 예수의 구원도 의미는 같다. 작은 일에만 분노하고 작은 게임에 빠져드는 자신을 이기고 남을 이겨먹으려는 동물적 서열본능을 이겨야 한다. 이긴다는 것은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전에 결정과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다음의 결정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도 집단의 상호작용을 감소시켜 다음 게임을 방해하는 결정은 곤란하다.
맥락은 사건을 연결하여 빈 칸을 채운다. 인지부조화 행동이 그러하다. 이유없이 행동을 먼저 하고 없는 동기와 의미를 나중에 만들어낸다. 집단의 눈치를 본 것이 동기지만 창피하므로 거짓 동기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액션이 먼저다. 액션을 뒷받침하는 것은 힘이다. 힘은 관성력과 가속도에서 나온다. 거짓 연결은 힘을 조달하기 쉽다. 보수는 노무현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무현을 조롱한다. 변덕을 부려도 추궁이 없다.
진보는 박정희를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번 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두환, 이명박에 박근혜, 윤석열까지 모두 박정희 의 씨앗 뿌린 책임이기 때문이다. 일관성을 지키려는 것이다. 보수는 거짓 관성력을 만들고 거짓 가속도를 만든다. 거짓 관성력은 기득권의 힘이고 거짓 가속도는 조중동을 앞세운 거짓 유행이다. 우리는 인류의 하던 일을 계속하고 그러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문명의 진보다.
탐미주의자의 삶
인생은 아무런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맥락이라는 대본이 있을 뿐이다. 한번 시작하면 계속 가야 하므로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하다는게 탐미주의다. 돈이든, 명성이든, 권력이든, 미인이든 유치하다. 행복을 원하면 대마초가 답이다. 자연인의 행복 자랑은 불쌍하다. 섹스를 해봤자 타인의 몸을 빌리느냐, 오른손을 빌리느냐의 차이 뿐 자기 뇌를 속여먹는 것은 같다.
어렸을 때는 허무주의자였고, 우울증이었고, 인간혐오증이었다. 혁명이 가슴을 뛰게 한 적도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가 사는 이유는 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신이 약속을 지켰으므로 내가 의무를 다해야 할 차례다.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무대다. 들어와 버렸고, 어쩌다 살아져 버렸고, 하차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나는 그렇고 남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궁금했다.
관찰해 본 결과 인간의 행동은 맥락을 따른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어렸을 때는 종교를 타도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종교의 동력원을 연구해야할 판이다. 똑똑한 사람은 과학을 믿고 멍청한 사람은 종교를 믿지만 어떤 관점에서보면 종교야 말로 인간다움의 출발점이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증명하고 있다. 먹고 살만하게 되어 남는 시간에 종교와 문화를 한다?
반대로 종교와 문화가 먼저였다. 남는 시간에 심심해서 조각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문화를 하다보니 일이 커져서 이를 뒷받침하는 도시가 발생한 것이다. 종교의 교리를 삭제하고 다시 살펴봐야 한다. 교리는 그냥 지어낸 말이다. 어떤 바보도 교리 따위를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이게 먹힌다고 봤다는 거다. 예수의 말솜씨에 베드로와 바울이 잘도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의 결기를 보고 먹힌다고 확신한 것이다. 왜? 삶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맥락은 사건의 흐름 속에서 어색한 구멍을 메운다. 예수의 눈빛과 연기력이라면 이거 먹혀. 먹힌다고. 바이럴이 흥한다고. 베드로는 무식해서 속았다고 쳐도 바울은 알만한 지식인이 그런 행동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흥분했기 때문이다. 흥분한 이유는 맥락 때문이다. 인생에 많은 구멍들 메우지 않고 뭐하냐고?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그 중에 하나가 빠져 있다. 앞니가 하나 빠져도 보기가 흉한 판에 사건이 하나 빠지면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은 마치 사전에 정해진 대본이 있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야 동료와 합이 맞기 때문이다. 문화라는게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춰주는 것이다. 서양과 일본의 공통점은 과거시험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알아보고 선발하지? 구멍이 있었다는 거다.
구멍을 메우는 방법은 무도회다. 무도회를 열어 춤을 한번 추어보면 모셔야 할 신사인지 상종못할 잡놈인지 알 수 있다. 당나라 때도 과거시험은 있었지만 신언서판이라며 면접이 중요했으며 그나마 과거로 선발하는 인원이 적었다. 당나라 문화가 크게 발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제왕은 무치라 했다. 어렸을 때는 노숙자 비슷한 행색으로 백화점이나 빌딩가를 돌아다니는 상상을 많이 했다.
내가 만화를 그린다면 내 만화의 주인공은 영구 같은 복장으로 빌딩가를 돌아다니는데 알고보니 재벌 회장이었든가 하는 식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의식이 그런 객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옛날에 왕들이 발가벗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런 왕들은 반드시 폭주한다. 노숙자 행세하는 귀족은 없다. 한 명 있다면 키아누 리브스인데 이 인간은 그게 다 뻥이라는 사연이 있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계급과 신분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 맥락 때문이다. 종교는 맥락을 제공한다. 인생이 목적이 있고, 동기가 있고, 결과가 있고,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이나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의 대결로 맥락을 제공한다. 그래야 집단 속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지 쉽게 알아챈다. 그러다가 잘못되어 외통수에 몰리면 집단 전체가 빌런 역을 맡아서 망하는 수가 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이 그렇다. 관습법 카눈에 따른 복수의 대물림이다. 거대한 집단적 연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니체의 초인, 공자의 군자, 석가의 해탈, 예수의 구원은 그런 동물적 연극을 탈출하는 것이다. 괴력난신 행동은 명백히 권력적 의도가 있다. 이상한 대본을 쓰는 것이다. 음모론은 어른들의 대화를 방해할 의도가 있다.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일으키는 짓이다.
역시 맥락 때문이다. 인간은 진보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런 반동을 타격하는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결론은 탐미주의다. 탐미주의도 잘못하면 강박증이 된다. 방어적 탐미주의가 강박증이다. 공격적 탐미주의라야 한다. 공격적 탐미주의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페인트가 그러듯이 작품을 완성한 다음에 부숴버리는 것이다. 좁은 바닥을 탈출하고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곳에 깃발을 꽂고 머무르면 안 된다. 탐미주의는 자신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탐미하기 위한 탐미는 강박증이다. 우리는 부단히 이겨야 한다. 이기는 목적은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려는 것이지 이겨서 트로피를 받고 확인도장을 받고 다른 사람 앞에 전시하고 자랑하고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생의 빈 구멍을 메우기다.
그래서 사건을 연결한다.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그러나 도달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더 큰 신세계를 발견하는게 중요하다. 가다가 중도에 주저앉아 가게를 열고 벌이하면 안 된다. 어떤 탐미주의자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여서 괴베클리 테페에 신전을 지은 것이다. 힘이 딸리자 후원금을 요청했는데 돈 내는 사람이 없어서 거짓말 조금 보탠게 뜻밖에 바이럴이 흥해서 종교가 된 것이다.
농업이 흥한 결과로 시간이 남아돌아 종교를 만든게 아니다. 종교가 흥해서 신전을 짓다보니 식량이 필요해져서 농사를 지었다. 그것도 아니다. 어떤 고집센 탐미주의자가 끝까지 밀어붙여서 갈데까지 간 것이 신전의 완성이다. 종교는 그 후폭풍이다. 신전의 건축이 후대로 갈수록 조잡해진 것이 그 증거다. 종교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며 미학이 중요하다. 불교든 기독교든 미학이 답이다.
불교가 흥한 것은 군주가 흥분해서 거찰을 지을 야망을 품어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흥한 것도 마찬가지로 큰 교회를 지을 야심이 먼저 있었고 재원을 확보하다 보니 도시가 발달한 것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초기에 바이샤 계급이 주도한 이유다. 왕과 상인들이 아니면 누가 돈을 내서 모스크를 짓겠는가? 인간에게는 원래 탐미주의가 있었다. 문제는 자신에게 설명 못하는 것이다.
대체재로 종교를 끌어다 쓰게 된 것이다. 종교가 솔깃해서 거대한 성당을 짓는게 아니다. 신라의 황룡사나 일본의 도다이지는 불교가 전래하고 얼마되지 않은 시기의 건축이다. 종교를 선전할 목적으로 거찰을 지은게 아니라 거찰을 지어먹을 목적으로 종교를 선교한 것이다. 탐미주의란 자신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꽃이나 새 따위를 예쁘다 하는 것은 유치하다. 혁명도 그게 탐미주의다.
모택동도 만리장성 팔달령에 올라 자뻑에 빠져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탐미주의에 빠지면 대담해지고 대담해지면 사고를 친다. 만리장성도 지어버린다.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것은 핑계고 그냥 큰 일을 벌이고 싶었던 것이다.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고 쾌재를 부른게 이유가 있다. 대형 프로젝트를 띄울 구실이 찾아진 것이다. 필자는 진정한 탐미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논하려는 것이다.
예쁘다 귀엽다 하는 생각은 유치하다. 천하인의 기개야말로 진정한 탐미주의다. 자신이 못 먹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탐미주의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진정한 탐미주의다. 나는 이런 것은 절대로 못할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되네. 자신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천하를 주유하는 것도 탐미주의다. 자신을 여러 환경에 두어보기다.
탐미주의란 자신의 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모든 것이며 무언가 보상을 받는게 아니다. 천하에 큰 불을 지르는 것이지 자신에게 상을 주는게 아니다. 대부분 탐미주의를 왜곡하여 자신에게 상을 주려고 한다.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린이가 백점 맞은 시험지를 엄마한테 자랑하려는 초딩 행동이다. 어른의 탐미주의는 다르다. 천하의 큰 바람을 일으켜 마구 흔들어놓기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저러는 것도 천하를 타격하여 뭔가 소란을 일으키려는 탐미주의 기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보상을 안기려는 얄팍한 궁리가 숨어 있다. 소란은 충분히 일으켰고 지금쯤 마침표를 찍어도 되는데 어색한 연기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에게 상을 주려는 초딩 마인드 때문이다. 종교를 믿는 것은 종교가 탐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피하기다.
인생은 연극이고 대본이 없으면 어색하므로 조잡하지만 남들이 써먹은 대본을 물려받아 쓰는게 종교다. 뭔가 자신의 인생에 동기도 있고, 목적도 있고, 의미도 있고, 성과도 있는 것처럼 연출하지만 그게 된다는 것은 지능이 낮다는 증거일 뿐이다. 하긴 강아지는 공만 던져줘도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공을 물어오는 무의미한 놀이를 반복해도 강아지는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친다.
글자 배운 사람이라면 종교라는 이름의 공놀이가 어색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결국 남는 것은 탐미주의다. 그것은 커다란 숙제다. 교회를 가도 탐미주의고 혁명을 해도 탐미주의다. 자신의 피를 끓게 하는게 있다면 그게 탐미주의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흥분한게 진짜다. 설레임이 탐미주의 진실이다. 탐미의 증거를 만들어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은 추한 것이다.
탐미주의를 증명하려는 사람은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스케일이 작기 때문이다. 큰 불을 지르면 불은 저절로 타기 마련이다.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걔들은 그릇이 달랐다. 호주의 사막에도 많은 암각화가 있지만 조잡하다. 야망의 크기가 중요하다. 만나야 야망이 생긴다. 호주의 캥거루보다는 유럽의 들소와 동굴곰이 제대로 마주친 사건이다.
1. 인간이 사는 이유는 흥분했기 때문이다.
2. 흥분하면 일을 벌이고 시작되면 멈추지 못하는게 탐미주의다.
3. 흥분을 유지하려고 인생의 구멍들을 메우는게 맥락이다.
4. 구멍을 메우려고 억지로 맥락을 지어내면 종교다.
5.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날 때 인간은 흥분한다.
6. 인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 미학의 본질이다.
진정성은 없다
베트남 인민군에 생포된 미군 병사는 북베트남 방송에 출연하여 미국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때 진정성 있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어떤 거짓말이 진정성 있는 거짓말일까? 얻어맞은 상처 자국을 보이며 공산당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라고 진실을 폭로해서 관객을 웃겨야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미제를 타도하고 공산혁명에 앞장서자며 매소드 연기를 펼쳐서 공산당식 선전술을 과시하고 관객들이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게 진정성이 있는가? 거짓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한 거짓말은 형용모순이다. 진정성은 진실을 의심받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거짓 속에서 진실찾기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거짓말이다.
1. 진실일 경우 -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2. 거짓일 경우 - 진실한 척하는게 더 진정성 없다.
맹물에 소금을 얼마나 넣든 그 물은 소금물이다. 이미 오염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성이라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정용진의 사과가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정용진의 매소드 연기를 기대한 것일까? 정용진이 멸콩놀이를 한 것은 일베 무리의 집단적 연극을 개막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약자를 타겟팅하고 공격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연극은 연극으로 받는게 맞다. 정용진이 고개 숙인 것은 자신이 약자가 된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연극이다. 왕년의 멸콩놀이는 진정성 없는 거짓말이고 이번의 사과는 진정성 있는 거짓말일까? 둘 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대본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진정성 개념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식적인 행동으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행동은 질타하는게 맞다. 김민석, 김용남, 이언주들의 행태 말이다. 한 번 배신자는 또 배신한다. 조조가 허유를 죽인 데는 이유가 있다. 위표가 유방의 부하들에게 맞아 죽은 이유와 같다. 의심되는 자는 처단하는 것이 진정성이다.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 집단적 연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본질이다. 대본에 맞게 행동하는게 진정성이다. 거짓말을 하려고 했으면 제대로 된 거짓말을 하는게 진정성이다. 정용진은 어차피 보수정권 들어서면 이 일은 전부 없던 일로 할 자이므로 가식적으로 쇼를 하는 것이 오히려 기회주의자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1. 배신자의 진정성은 두 번 배신하는 것이다.
2. 기회주의자의 진정성은 정권에 따라 박쥐행동을 하는 것이다.
3. 똥파리의 진정성은 갈라치기 하다가 자멸하는 것이다.
정용진이 이재명에게 진짜로 충성하면 피곤해진다. 진짜로 충성하면 우리가 긴장을 풀어버리게 되고 그때부터 사태가 꼬이는 것이다. 나는 똥파리들이 과거에 이회창 찍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반드시 배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친명팔이를 나는 막지 않았고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데 당황하지 않는다.
김민석 같은 배신자는 본색을 드러내는게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김민석이 진짜 이재명과 민주당에 충성하면 그게 진정성 없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만 봐도 알게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밀러 대위가 풀어주자, 후반에 밀러 대위를 죽인 독일군 빌리다. 그런 새끼는 단매에 쳐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자가 진짜 미군에게 충성한다면? 헐리우드는 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귀족이 평민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드물게 있지만, 그건 주제가 다른 경우이고 차라리 자기 신분을 찾아가는게 맞다. 평민이 자력으로 귀족세력을 타도해야지 귀족이 자선을 베풀어 평민을 우대하면 러시아 꼴이 나는 것이다.
러시아는 짜르가 농노를 해방했다. 이 경우 착한 짜르에 대한 환상에 빠져 괴물 푸틴이 등장하고 중국은 시진핑이 등장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표트르 황제와 에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환상 때문에, 중국은 강희, 옹정, 건륭 연간의 강건성세에 대한 환상 때문에 일제히 바보가 되었다. 민중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은 죽이는게 맞다. 민중이 자력으로 귀족의 압제를 이겨내야 한다. 귀족과 평민이 화해하는 그림은 그게 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국이 왕을 때려죽이지 못하고 영국병에 걸려버렸고, 일본이 왕을 때려죽이지 못한 결과로 일본병에 걸려버렸다. 인간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성장해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제때 왕을 처리하지 못하면 시녀병에 걸려서 박근혜 시중들다 인생 끝난다. 왕은 죽이라고 있다. 정용진은 기회주의자 캐릭터로 미는게 진정성이 있다. 과거 멸콩놀이로 이재명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으니까 어쩔 수 없이 굽히는 척 쇼를 하는게 진정성이 있다. 물론 정권 바뀌면 본래로 돌아간다. 우리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