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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수준을 넘어서 | |
Gabrile | |
2013-12- 1 오전 10:40 |
<서론>
의식이라고 불리는
어디에나 퍼져 있는 보편적 에너지 장은
무한한 힘과 시간 너머의 차원을 가지며
구성상으로 비선형적이다.
의식은
세계의 빛인데
그것은 의식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부터 나타난 것을 향해
비선형적 무한한 잠재성으로부터
창조의 펼쳐짐을 으로 나타난
선형적 영역을 향해 방사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무한한 장이 지닌 힘과
무한한 잠재성은 물질로 나타난다.
나중에 의식의 장으로서
신성의 빛이
물질과 만나는 접점은
결국 생명이 지닌 독특한 성질과
에너지 자체의 출현으로 귀착된다.
비록 물질은
막대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지만
생명이라 명명된 존재의 장으로 진화해 나갈
타고난 성질이나 힘은 결여되어 있다.
물질 더하기 진화은 시간차원을 낳으며
물질 더하기 시간은 공간으로 표현되고
그뒤 시간 공간 물질의 존재는
생명으로 표현된 신서의 한 측면이
지성을 통해 식별할 수 있다.
생명의 오직 신성의 귀결로써
방사된다는 것은
절대수준의 의식인 100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창조는
오직 존재의 모체 자체인
의식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인식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의식은 환원 불가능한 선험적 실상이며
이로써 선형은 비선형의 주관적 앎을 통해 지각된다.
- 운동역학 기법 -
생명의 없는 과학적 도구를 통해서는 복제될 수 없다
무한히 강력하고 오직 현존하는 의식의장은
정전기 장에 비견될 만한데
정전기 장은 현존하는전하를 접촉시켜
활성화시키지 않는다면 움직임이 없고
또한 전하의 접촉에 대하여는 동등한 반대 전하로
정확히 같은 정도로 반응한다.
정전기 장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반응하고 기록할 뿐이다.
정전기 장과 달리
영원한 의식의 장은 항구적이며,
그리하여 시간/공간/진화안에서
발생하였거나 그 속에서 존재한 전부를 기록한다.
그 장 자체는
시간과 공간 혹은 알려진 모든 차원을 넘어서 있으며
오히려 모든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그로 인해 변경되지 않는다.
그 무한한 장은
편재 전능 전지하며 유일무이하게 절대로서
확인할 수 있는데
진화나 존재의 모든 표현은 그것 절대와 비교할 수 있다.
<의식의 진화>
의식의 측정 수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에서 의식의 출현에 대해,
그리고 동물계를 거쳐
인류로서의 표현으로 진화해 온것에 대해
요약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관심의 첫 초점은 에고의 진화인데
영적작업에서 에고라는 용어는
심리학적 정신분석학 용어와 다른의미를 갖는다.
에고를 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적으로 보아서는 절대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
에고는
사람이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산이다.
에고가 없었다면
누구도 살아서
그것의 한계에 대해 한탄하지 못할 것이다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부터 나타난것을 향해
의식에너지 자체가 물질과 상호작용을 하였으며
신성의 한 표현으로서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이 일어났다.
그 최초의 형태에서
생물의 동물학적 표현은 매우 원시적이었고
타고난 내적 에너지원이 없었다.
따라서 생존은
외부에서 에너지원을 획득하는데 달려 있었다.
이것은 식물계에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물의 엽록소는
태양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화학 과정으로 자동적으로 변형시킨다.
동물은
주변환경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야 했는데
이러한 원리가 에고의 주요 핵심을 성립시켰다.
에고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자기이익, 획득, 정복, 다른 유기체와의 경쟁에 주로 관여한다.
하지만 에고는 또한 호기심과 탐색,
그리하여 학습이라는 특성을 갖추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생명은
점차 높은 생명 형태로 진화해 나갔는데
이것을 시간의 우대한 지화의 서사시상에서
도표화한다면, 동물계에서의 생명표햔은
명백해지게 된다.
200이하의 의식수준에서는
생명의 육식성으로 묘사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남을 희생시켜 에너지를 얻어내는 것을
생존이 획득기초로 하기 때문에 남을 적수, 경쟁자, 적으로 본다.
따라서 의식수준 200에 이르기 까지
생명은 매우 경쟁적이고 이기적이다.
이들은
남을 잠재적인 적으로 보기 때문에
요즘 쓰는 말로
소유욕이 강하고 경쟁적이며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
공격적이고 야만적이라 할것이다.
의식수준 200에서 보다 온건한 쪽으로 전환이 일어나는데
즉 육식동물에서 초식동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의식수준 200이상부터
생명의 본성은 보다 조화로워진다.
모성적 돌봄이 나타나고
더불어 남에대한 관심
무리에 대한 충실성
타자와의 동일시가 출현한다.
또한 관계 사회화 놀이 가족 및 부부 결합 같이
나중에 인간본성으로 표현된 것과 공동체 활동을 통한 생존과
같은 공동의 목표를 위한 집단적 협력이 시작된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두팔을 쓸 필요가 없는 이족동물이 출현했다.
그래서 이들은 직립하여 자유로운 두팔로 손 재주를 발전시켰고
엄지손가락 발달의 귀결로 도구 제작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높아진 복잡성은
인간 지성의 해부학적 소재지로서의
전뇌와 전전두 피질의 출현으로촉진되었다.
하지만 동물 본능의 우위로 인해 지성은
처음에 원시적 본능에 봉사했다.
그리하여 전전두 피질은
동물의 생존이라는 동기부여에 영합하게 되었다.
대강만 관찰해 보아도
진화는 창조를 나타내고
창조의기본적 성질의 진화임이 명백한데
그것은 진화와 창조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추정상 300만전년 루시를 시초로 진화의 나무에서 싹으로 나타났다.
훨씬 나중에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호모 에렉투스 등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모두가 의식수준 대략 80-85사이로 측정된다.
가장 최근인 약 6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현대인의 조상으로 출현되는 호모사피엔스 이달투가 출현했는데 이들이 의식수준 또한 80에서 85사이였다.
인간 내부에서 원시적 에고의 지속은 자만심이라는 자기애적 핵심으로 지칭되는데
이것은 200이하 측정수준에서 자기 이익, 타인에 대한 동맹이아닌 적과 경쟁자로 보는 원시성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은 안전을 위해 집단으로 뭉쳤고 상호관계와 협력의 이로움을 발견했는데
이것 역시 포유류와 조류 내에서 집단 무리 가족형성이 이루어지는 동물의 세계의 귀결이었다.
인간의 측정된 의식 수준은 서서히 진화했다.
붓다의 탄생 당시 전인류의 집단적 의식은 90으로 측정되었다.
그 다음 예수그리스도 탄생시에는 100으로 상승했고
지난 2천년간 서서히 진화되어 190으로 도달한 뒤
1980년대 후반까지 수세기 동안 그상태로 머물러 있엇다.
그 다음에 1980년대 후반 조화로운 수려의 시기 무렵 갑자기 190에서 204-205로 도약했다.
이후 2003년 11월까지 그 상태로 머물다가 205에서 현재의 수준 207 갑자기 도약했다.
현재는 전 인류의 78% 가량이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지만
미국에서는 그 수치가 49%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80%에 가까운 세계인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200이하이고
따라서 원시적인 동물본능, 동기, 행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뇌 생리 또한 의식수준 200에서 극적으로 변한다는것인데 200은 생명의 성질이 인간뿐 아니라 동물계에서도 포식성에서 온건함으로 변하는 수준이다.
이것은 사적 자기에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타인의 복지 생존 해옥애 대한 관심이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돌봄과 영적성장에서의 진화가 같는 이로움은 다음 도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자부심(175)의 수준 행복률 22%불과하지만 용기(200)의 수준 행복률은 55%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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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절망>
이 수준은 위험스러울 만큼 죽음에 가깝다.
이 수준에서는 방치나 무관심 부주의 사고에 의한 죽임이 흔하다.
누구나 창피를 당하고 명예를 잃어버리고 혹은 존재를 무시당한 사람이 된것같은 고통에 대해 알고 있다.
사람들을 수치심에서 목을 메달고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방치나 신체적 감정적 학대,성적학대와 같은
어린시절이 경험은 수치심으로 인도되며
나중에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편성 성격을 왜곡한다.
<죄책감, 보복적 증오>
죄책감은 조종과 처벌을 위해 우리사회에서 비난의 형테로 흔히 이용된다.
이는 후회, 자채ㄱ, 피학, 성애 및
피해자역활의 그 모든증상과 같은
각양각샐릐 표현으로 그 자체를 나타낸다.
무의식적 죄책감은
사람의 평생에 걸쳐서 조책감과 싸우는 반면
어떤이들은 도덕관념 없이 죄책감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그것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한다.
죄책감의 지배는
결국 죄에 사로 잡히게 만든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용서할 줄 모른 감정적 태도인데
강압과 통제를 위해
죄책감을 이용하는 종교 선동가들은
이러한 태도을 남용한다.
처벌에 사로잡혀 있는 그거한 죄와 구원의 상인들은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행동화하거나 혹은 그것을 남에게 투사할 것이다.
<무감정>
무감정의 수준은
태만,무관심,가난, 보다 심하게는
절망과 희망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세계와 미래는 활량해 보이고
비애가 삶이 주체이다.
무감정은 무력함의 상태인데
모든면에서 결핍되어 있는
무감정의 희생자들은
자원뿐 아니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결여 되어 있다.
희망없는 이들은
살려는 의지없이 대상을 쫓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제공된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에너지 조차 모자란다.
무감정는
노숙자 하회 낙오자들 수준이다.
그것은 또한 만성질환이나 진행성 질환으로
고립된 수많은 노인과 여러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사회에는 무감정 수준에 있는 문화나 개인에게 어떤 충분한 동기부여가 결여된 경우가 많은데 인도 콜카다수준을 생각하라
<슬픔>
생애 초기의 큰 상실은 나중에 슬픔의 수동적 수용에 대해
취약하게 만든다.
비록 슬픔은 인생의 무덤이지만
그래도 이것은 무감정에 비하면 많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무감정 환자들이 울기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안다.
일단 우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다시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며
끝없는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이 수준의 관점에서 볼때
세상은 위험해 보이며 함정과 위협으로 가득한 듯 하다.
두려움은 억압적인 전체주의적 ㅣ관들에게 애용하는
공식적 통제 수단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볼때
인간의 샮은 영이기 때
이미 경험하는 두려움 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욕망>
욕망은 경제를 포함하는 인간활동의 방대한 영역에 동기를 부여한다.
욕망은 중독의 순준이기도 한데
이 수준에서 욕망은 생명 자체보다 더 중요한 갈망이 된다.
욕망이 희생자들은
자신의 동기의 밑바탕에 있는 것을 사실상 알지 못할 수가 많다.
어떤이들은 주목을 받으려는 욕망에 중독되어
끊임없는 요구로 타인들을 쫓아버린다.
성적으로 욕망받으려는 욕망이
매력과 유혹을 찬양하는 거대한 화장품 산업을 창출해냈다.
욕망은 획득 및 축적과 관련되고
이러한 것은 만족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욕망은 진행중인 에너지 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얻기 위해서는
먼저 '원'하려는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분노>
분노는 건설적이거나 파괴적인 행위에 이를 수 있다.
삶의 한 방식으로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감정과 슬품에서 빠녀 나올때
사람들은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로 인도되고
좌절은 차례로 분노로 인도한다
그래서 분노는 하나의 발판일 수 있으며
억늘린 이들은 이것을 딛고 마침내 자유를 향해 도약할 수 있다.
하나의 감정으로서 분노는
일시적 반을으로서 사회전반에 만연해 있지만
하나의 의식수준으로서 분노는
에고의 왜곡된 지각을 반영하는 침투하는 부정적 에너지의 장을 가리킨다.
자기애적 에고는
경쟁적이며 최소한의 도발에 대해서도
무시나 모욕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자부심>
사람들은 이 수준에 도달 할때 긍정적으로 느끼는데
이 수준에서는 자존감 상승은 그보다 낮은 의식수준에서 경험되는
모든 고통에 대한 진통제이다.
자부심은 그보다 낮은 수준과 대비될 때만 좋게 느껴진다.
자부심에는
멸망이 따르기 때문에
방어적이고 상처받기 쉬운데
그 이유는
자부심이 외적인 조건에 의존하므로
그것 없이는 보다 낮은 수준으로 갑작스레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습관적으로 자부심을 위해 죽었고
'군대는 자부심을 위해 여전히 정기적으로 서로를 학살한다.
종교전쟁, 정치테러, 정치적 열광, 그리고 중동과 중부유럽의 무시무시한 역사는 모두 자부심과 증오의 값이며 그 비용은 전 사회가 지불한다.
자부심의 그늘은 오만함과 부정이다.
자부심은 종종 사회적 이미지에 의존하며
또한 소유물 명성 로칭 부 등을 매개로 하나는 자부심의 표현에 의존한다.
사회적 지위 및 그것의 상징은 성공에 대한 독자적이고 고유한 증표를 가지고 있는 하위문화들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러한 성공의 증표에는
거주지 집의크기 자동차 부의 부속물은 물론이고
언어와 옷차림에서부터 누구를 알고있나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자부심은 자기예찬이다.
자부심은 겸손함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며
겸손함은 대부분 자기기만의 오류에 대한 해독제이다.
<선형적 마음 200-499>
낮은 의식수준에서 에고는
일차적으로 동물 생존의 기술과 감정들을 바탕으로 하는 삶을 지배하는데
이러한 삶은 쾌락, 포식, 이득과 정렬되어 있다.
세월롸 함께 의식의 진화함에 따라
인류의 일부는 물론이고 어떤 돌물의 종은 의식수준 200까지 상승했다.
이 수준은 낮은 힘이 아니 힘의 대하 의존을 에고하는 주요 경계선이다.
<용기>
용기는 탐험 성취 불요불급 결단의 지대이다.
용기는 새로운 일들을 시도하고 삶의 부침에 대응하려는
자발성을 의미한다.
200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식의 진화 및 그에 조응하는 내외적인 삶의 성질으 진화에서
가장 중대한 한 걸음이다.
이득이 아닌 진실과의 정렬은
에고 팽창대신에 능력,자기존중, 진정한 힘의 부여를 가져다 준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책임능력은
200수준의 이상에서 일어난다.
<중립>
에너지가 중립으로 불리는 수준에서 매우 긍정적이 되는 것은
낮은 수준들의 위치성이 풀려났기 때문이다.
200이하 수준에서 의식은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고
고정된 위치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눌수 없는
복잡하다 다원적인 세상에서 방해물로 작용한다.
중림적 수준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글쎄 이 일자리를 못 잡으면 다른일을 잡지 뭐"
이것은 내적 자신감의 시작이다.
<자발성>
매우 긍정적인 이 에너지 수준은 앎의 더 높은 수준들에 이르는 관문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중립의 수준에 잇는 이응 일을 적당히 하지만
자발성 수준에 잇는 이들은 일을 잘하고
모든 노력에서 성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발성은 사람의 삶에 대한 내적 저항을 극복했다는 것과 참여에 몰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준에서는 자존감이 높은데
이는 인정, 이해, 보사의 형태로 사회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강화된다.
자발성은 자부심을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결함을 보고
타인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
<수용>
수용이라는 앎의 수준에서는
자기자신의 자기 삶의 경험으 근원이자 창조주라는 이해와 더불어
큰 변형이 일어난다.
의식수준 200이하에서는
자신을 삶에 휘둘리는 피해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행복의 근원이나 문제의 원인이 저밖에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힘을 되찾는 엄청난 도약은
행복의 근원은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각성과 더불어
이 수뇽ㅇ의 수준에서 완성된다.
수용의 수준은
갈등이나 대림으로 양극화 되지 않는다.
이 수준에서는
타인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따라서 평등을 존중한다.
낮은 수준들은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이 수준에서는 문제 해결의 한 형태로 사회적 다원성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성>
지성과 합리성은 낮은 수준의 감정주의가 초월될 때
전면으로 부상한다.
이성은 대량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고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이성으 ㄴ추상적 개념이 중요성을 더해감에 따라
상징을 능숙하게 조작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의학의 수준이며
전반적으로 높아진 합리성, 개념화, 이해능력의 수준이다.
그래서 교육은 높게 평가된다.
이성은 논리의 방법론이 지배하는 기술적 세계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이성 그 자체는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수준에 이르는데 큰 장애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와 마음이 동일시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영적실상>
<사랑>
500수준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으며 영속적이 되는 한 에너지 자의 발달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이 아니며
마음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은 가슴에서 흘러나온다.
사랑의 타인을 고양시키고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은
그 동기의 순수성 때문이다.
<무조적적 사랑, 기쁨 황홀경>
사랑의 점덤 더 무조건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그것은 내면의 기쁨으로 경험되기 시작한다.
기쁨은 그 어떤 외적 근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매순간
내면에서 솟아난다.
540수준은
또한 치유의 수준이자 영성에 기초한 자조모임들의 수준이다.
이 상태의 품질증명은 연민이다.
임사체험의 특징은
변형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에 잇는데
사람들은 임사체험을 통해 540-600사의 에너지 수준을 경험한다.
<빛 비춰진 깨달은 상태들>
빛 비춤, 참나 각성, 깨달음은
역사적으로 최고의 의식수준을 입증했던 신성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는
에고가 선형성의 속박이라는
한계를 초월했음을 나타내고,
무한한 실상이자 존재의 근원의 광휘가
출현했음을 나타난다.
엄밀히 말해서 깨달은 상태들은
의식수준 600에서 출현하는데
이는 휘황한 참나의 빛으로 비춰진 무한한 평화와 지복의 수준이다.
참나로서 내재적 신의 출현은
보통의 인간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 잦으며
이는 결국 세상에서의 물러남이나 심지어 육체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데
육체를 떠나는 것은
600수준에 도달한 이들 중 절반이 택하는 선택지이다.
지복상태에서는 완전하며
모든 원하는 것이나 필요 욕망 혐오의 사라짐을
특징으로 한다.
700에서 850까지의 수준들은 지극히 드물며
참나각서의 상태로 표시되는데
이 수준들은 매우 앞선 스승들의 특징이고
이들은 평생동안 일정한 수준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전 역사에 걸쳐 가장 드문것은 850을 넘는 의식수준들의 발생인데
이것은 그 어떤이름으로든
신성을 완저히 각성했음을 나타낸다.
무엇을 삶의 지침이 될 궁극적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평화 지복 빛 비춤>
깨달음의 상태들은 선형이 비선형으로 대체된 결과
의식수준 600에서 출발한다.
이 에너지 장은
빛비춤, 지복 신의식과 같은 영어들이 가리키는 경험과 관련된다.
이 수준에서서는 일반적으로 공식적 종교는 초월되어
모든 종교의 원천을 다루는 순수한 영성으로 대체된다.
현재 지구상에 600이상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12명이 있다.
600-700대 3명
700-800대 1명
800-900대 1명
900-1000대 1명
<참나 각성>
이 수준은 현인들 참나 각성 영적실상을 묘사한 위대한 스승들 수준이다 700=819
이것은 강력한 영감의수준인데
왜냐하면
이깨달은 현인들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끌개 에너지장을 설치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신성은 마음너머에 잇는 참나로 각성된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의식진화의 정점에 가깝다.
위대한 가르침은
대중을 향상시키고 전 인류의 앎의 수준을 높여준다.
그러한 통찰을 갖는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데
은총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무한한 평화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으며 언어 너머에 잇다.
<완전한 깨달음>
600이상의 의식수준들도 통계적으로 매우 드물지만
850이상은 더욱더 드물다
지난 천년간 그중 50%의 시기에는
850수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중 20%의 시기에는
측정수준 600이상이 아무도 없었다.
깨달음의 매우 높은 에너지 주파수는
인류 일반의 집단 의식의장에 어떤 진동을 전달하고
무언의 전달을 통해 영적으로 정렬된 사람들의
오라의 장(에테르적 영적 에너지체)속에 새겨지게 된다.
이 에너지의 주파수 진동은
매우 오랜기간 동안 영적 에테르체 안에 남아
청구되기를 기다리며
25차례 환생하는 동안이나 심지어 1000년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의식측정 연구에 따르면)
지극히 높은 수준들의 장이 갖는 독특한 힘은
또한 세계인구 대다수를 지배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상쇄시키는데
앞서 언급한것 처럼
세계인구 78%는 측정수준 200이하이다.
위대한 스승들 자신은
오직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진실을 가르쳤다.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매우 앞선 깨달은 현인들의 실제 숫자는
여러세기동안 줄곧 한정되어 있었던 반면
그들의 기르침은 설령 세계의 다른 부분 다른문화
다른 시대에 독립적으로 일어 났다 하드라도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그래서 진실은
항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발견되어야 할 진실은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스승들과 그 가르침은
지극히 강력한 고주파 에저지 장을 인류의 집단 의식속으로
내뿜는데 이것이 없엇다면 인류는 십중팔구 자멸했을 것이다.
(진실 측정)
예배, 헌신, 몰두, 선언,
혹은 사심없는 봉사를 통한 신에 대한 사랑은
촉매이자, 진지하고 편재하며,
전능한 의식의 비선형적 장 자체의 힘을 매개로
신성의 중재를 공식적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저항을 내 맡김으로써
이강력한 비선형적 장은
점차 지배적이 되고 결국 전부를 둘러싸는 현존이 된다.
<초월>
패러다임 변화 전화
페러다임의 중요성은
의식수준 200에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뉴턴적 페러다임에서 양자 역학 이행에서 가장 현저하게
그 다음의식수준의 500의 사랑이라는 주솬서의 출현에서
다시 드러낸다.
그 다음의 중대한 도약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의식수준 600에서 일어나는데
이 수준은 선형적 영역의 초월 및 비선형적 차원의 출현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아래 분류에서 나타나는 것 처럼
내용(선형) 맥락9비선형)의 구별을 반영한다.
200이하 | 200-499 | 500-600 | 600-1000 |
선형적 내용 | 내용외 맥락 | 맥락외 내용 | 맥락 |
사실적, 구체적 | 객관적 | 주관적 | 덧없는 |
물질주의적 | 도덕적 | 사랑하는 | 연민 |
원인- 결과 | 원인 - 결과 | 의도적 | 펼쳐짐 |
지루한, 세속적 | 정교한 | 추상 | 앎/목격자 |
좌뇌생리 | 우뇌생리 | 에테프뇌외에 우뇌 | 에테르 |
정의가능,묘사가능 | 확인가능 | 경험적 | 확증가능 |
기계적, 단순한 | 다원적 | 의식작용에 따른 | 출현하는 |
동물 | 인간 | 영적 | 깨달은 |
생각한다 | 추리한다 | 감상한다. 가치 | 인식 |
육체 | 마음 | 영 | 현존 |
자기애적 | 자기외 타인 | 사심없는 | 참나 |
이상으로부터 맥락은
경험,의미, 의의, 중요성 가치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명백하다.
기대 또한 맥락의 영향을 받는데
기대는 그 자체로 부지불식간에 선별적이며
경험과 표면적 지각들 조차 물들인다.
선형적 차원은
객과적인 증명가능의영역한에 있는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비선형적 영역은
긍정할 수 있고 입증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 주관적이며 경험적이다.
비선형은 선형에 종속되지 않고
선형으로 정의되거나 묘사될 수도 없는데
그둘은 다른 페러다임이지만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이러한 대비는
고전적 이론과학(뉴턴적)과 임상과랏의 구별을 통해 주목한다.
이론과학은
결과를 예측하는 반면
임상과학은
맥락의 숱한 영향력들
예컨데 의도 목적의 온전성
참가자들의 측정수준과
수많은 확인 가능한 변수
수많은 미지의 변수에 종속되어 있다.
그래서 노련한 임상의는 경험을 통해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된 모든 적절한 양식을 다 이용한다.
학문은예측가능한 것과 통계를 다룬다.
임상의는 결과와 성과를 다룬다.
그래서 가슴을 갖는 것은
임상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학문에서 그것은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계와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
<관문들 통과하기>
<마음의 초월>
<기도가 되기>
영적진실을 실용적으로 실행하는 요령을
세상속의 한 존재 방식으로 도입하여
영적 진보와 진화를 거드는 법
바람직한 변형(변화)는
'들었다'에서 '안다'로
'하다'에서 '있다'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행은 사실상
추정적 기지에서 미지로
익숙한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가는 것이다.
그에따라 영적정보의실제적 적용은 여전히 불확실해 보일 수 있다.
마음자체는
습관적 정신 작용 너머, 그리고 이성과 논리의 영역 너머
더 높은 진신의 차원의 있음을 알게될 때 진화에 관심을 갖게된다.
관심은 그 다음에 발견과 영적 깨어남으로 쏠린다.
1. 삶의 지침이 될 매우 단순한 영적원리 하나만으로 큰 진보를 이룬기에 족하다는 말이 있는데 타당한 말인지요
시작하는 방법으로 가낭 효과적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엄격하고 일관되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도구가
모든 책을 다 읽은 것이니 산발적으로 열중하는 시기를 갖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친절함의 수행을 통해 사람은 친절해 지는데
그것은 진절함 자체가 변형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것에서 저것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진화적으로 출현하는 과정입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은
창조의 진화의 산물로서
자신의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창조는 잠재성의 현실로 출현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진화일뿐입니다.
영적의도는 충분합니다.
표면적으로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은것이 나타난 것이 되었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마치 꽉 쥔 주먹을 펴서 활짝 편 손을 든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영적 진화를 위한 최적의 기회로서 큰 가치를 갖습니다.
3 자유의지에 대하여
4. 갑작흐런 큰 변화로 취착되는 드러남이나 영적경험들에 대하여
5. 앞선 영성 및 의식에 관한 정보와 친숙해지는 것 외에
어떤 성질들이 헌신자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1)높은 마음과 연관된 태도를 채택하고 그러한 미덕 가운데 어느것을 고르십시오
2)부정적 태도나 부정적 위치성은 거부하십시오
3)모든 상황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 온화하게 행동하십시오
4)단기적 이득을 위하여 영적원리를 위반하는 일은 거절하세요
5)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영화배역처럼 연습하세요
6) 마치 --인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실제로 감탄스러운 그것이 될수 있는 잠재성을 알게 해 줍니다.
7) 하나의 학습도구로서 바람직스런 바로 그 성질인 '척' 하는 것은 놀랍도록 효과적인 경우가 많은 데, 그 다음에 더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잠재성에서 활성화 되지 않고 잠복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8)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자기개발을 첫번째 우선순위로 삼고 감탄스러운 인물을 시기하는 대신 그들과 동일시 합니다.
9) 실용적 연습을 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돌이켜 보고 그런식으로 행동하겠다고 결정하세요
10)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에 자신이 친근하고, 사려깊고, 온화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에 주목하십시오
11)겉만 번지르하고 감각적인 것의 유혹과 시험은 사절하세요
12) 감정교환에서 '앙갚음'이나 '승리를 거두는' 일이 미심쩍은 쾌락은 내맡기십시오
13) 유쾌한 연습 삼아서 의식적으로 일부러 남들을 이기게 해줌으로 써 자신의 내면의 넓은 도량과 관대함을 발견하십시오,
14) 감정적으로 인색하게 구는 것은 감정의 빈곤을 낳습니다.
15) 타인에게 선사하는 모든 승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며 수행을 통해 사람은 결국 감정적으로 풍요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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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색함과 작은 나에 대하여
영적은총에서 나온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아량이 넓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은총의 근원은 사랑이며
이것은 한계가 없고 내면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인색함으로 인해 속좁고 비열하게 행동하는 것은
영적 빈곤을 드러내는 일이며
참나로서 이미 현존하는 무한한 은총의 근원에 대해
문을 닫는 것입니다.
작은 나는 한계에서 나온 행동을 하며
스스로를 궁핍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작은 나는 방어적이고 이득을 노립니다.
그것은 초대와 동의에 의한 활성화를 기다리고 있는
참나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지요
작은 나는 두려워하며
참나를 신뢰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초월하기 위해선
믿음과 용기가 공희 요구됩니다.
7 유머에 대하여
호킨스 박사님은 강연이나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유머를 자주 사용하므로 사람들은 자주 놀랍니다.
왜냐하면
영적스승 이미지는 진지하고 경건한 인물이거나
기운을 붇돋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웅변가이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지요
역설적인 것은
유머는 사실상 영적감들과 딜레마에 대한 대단한 진지한 접근법이며
진부한 설교보다 훨씬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유머는 넘치는 선의에서 우러납니다.
유머는
감정적 고통과 불안을 상쇄하고 예방하며
다른 방식으로는 접근 불가능함 감춰진 허위를
노출시키므로서 부정적인 것을 초월합니다.
허위가 자기 성격의 숨어 있는 한 측면임을
인정함으로써 그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유머는
과장법으로서 진실에 대한 합리화 된
왜곡이 제공하는
타당성 없는 신념 체계를 노출시킵니다.
유머는
레스 인테르(코키탄스)나
레스 엑스테르나(있는 그대로 세계)
사이의 간격의 다리를 놓습니다.
따라서 유머는
마음의 지각하거나 믿는 바와
저변에 잇는 실상의 본질 사이에
눈에 뛰는 대비를 만들어 내지요
유머는
이렇게 해서 에고의 사리 추구적 속임수를 노출 시킵니다.
유머는
대안적 관점과 선택지를 드러나게 해주고
따라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임상적으로 유머는
건상 및 상수와도 관련이 됩니다.
해학가들은 <유머를 직업으로 갖는 코메디언들은)
특징적으로 400대 후반으로 측정되고 장수하며
만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유머는
심령의 억압된 측면들은 노출시켜 줍니다.
그래서 그거한것을 확인 될 수 있고
보다 쉽게 인정되고 고백 될 수 있으며
그 허위의 투명성으로 인해
초월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약점과 결함이 인지되고
수용되고 고백된다면
사람은
그것에 대해 방어적이 될
필요가 없지요
참된 영적 앎은
본질의 인지에서 일어납니다.
위대한 해학가들의 사랑받는 것은
인간적 약점을 고백하고, 직시하고, 그에대해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그 강함이
듣는 이들에게 똑같은 일을 할 수 잇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유머의 효과는 치료적이며
또한 상호 인지를 매개로 인간적 결속과 연민을 드 높여 줍니다.
유머는
내면의 고통 수치심 조책감을 덜어주며
그럼으로써 보다 온건한 선택지들을 드러내 주지요
심리적 부정은
죄책감에서 비롯되는데
죄책감이 완화될 때
비로소 내적 정직성이 일어납니다.
유머는
감정적/심리적/영적빈곤에 대한 해독제이자
그 속좁음, 비열함. 성장 결핍 성향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합니다.
유머는
내면의 자유, 정직성, 해방으로 이끌어 주는
치료적.영적 기법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유머는
수치심 두려움 죄책감에 대한 해독제이며
사람이 타고난 발생기에 있는 큼에 대한
인지를 허용해 주는 내적 강함의 능력을
미묘하게 드러내 줍니다.
접근 불가능 한것이
유머를 통해 인지되고 인정되며
초월될 수 있지요
유머는
내적 온전성을 촉진합니다
이와 대조적을
수정되지 않은 에고는
유머가 없으면 험악합니다.
헌신은
진실과 사랑에 대한 봉헌이고
유머는
목표실헌을 거드는 시녀가 됩니다.
유머는
진실과 거짓을 병렬시켜 대비함으로써
허위의 가치를 감소합니다.
유머의 밑바탕에 있는 의도는
사실상 대단히 진지한데
그것은 환상, 두려움, 증오, 죄책감으로 부터 해방입니다.
유모는
에고의 가면을 벗기고
그것으로 에고의 지배를 약화시키지요
유머는
자기에서 참나로 데러갑니다.
10
에고의 프로그램은 선형적이며
내용의 제약으로 구성되고 한정됩니다.
영 혹은 참나는 비선형적이며
맥락을 나타내줍니다.
에고의 제한된 선형적 내용은
에고의 지각과 위치성들의 실재하지 않음이
노출될 때 포기하지요
사람은
에고의 지각이 정복과 이득에 정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고의 명제들의
허위가 앎이라는 햇빛을 쬘때 환상의 지비는 사라집니다.
참나의 각성은
이득도 획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장애가 내캊겨지거나 제거될 때
저절로 펼쳐지는 각성입니다.
노력함은
저항의 귀결일 뿐이고
저항은 차례로 환상의 산물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면
저절로 빛이 발합니다.
11
자신의 목적지에 이끌리고 있음을 받아들이세요
과거가 사람을 몰라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진화가 사람이 물려받은 카르마적 유산인 까닭은
그것이 인간 의식 자체가 타고난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몰두에서
그리고 정렬과 봉헌의 온전성에 일어납니다.
봉헌의 귀중한 특징은
강렬한 행복감인데
결국 이것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내면의 열정으로서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주의 깊은 목격함이 갖는 가치는
에고의 결함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해소시키는 경향이 있다는것이지요
내맡김과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신성한 의지는 작은 것에서 큰것으로의 이행을 촉진합니다.
왜냐하면 참나는
수월하게 의도를 뒷받침하고
의도에 에너지를 불어 넣기 때문이지요
참나는
자석의 인력과 같으며
이를 통해 사적인 의지는
점진적으로 내맡겨지고 저항은 약화됩니다.
그리하여 길 자체는
자기충족적이고 만족스러우며 점진적 보상을 드러납니다.
내딛는 걸음 하나라나가
표면적으로 아무리 작아 보여도 똑같이 귀중합니다.
12
스승의 의식수준은
무언의 전달을 통해서도
정신적인것에서 주관적 경험적 실상으로 정보 변형을 촉진합니다.
스승의 오라의 의식수준과 진동하는 에너지 장은
의식진화의 산물이지 개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비언어적 수준에서
제자안에 있는 발생기의 성질들을 활성화시킵니다.
신이라는 단어가 기피되는 것은
그말의 정의상의 오류 및
다수의 상반되는 신념체계들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거기에는 신을 인격적으로 묘사하는데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 진보를 거둘려거든
검증 가능한 스승과 가르침을 선택하되
스승과 가르침에 대한 충실함이나 정렬을 통해
이익을 어들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피하기 바랍니다.
궁핍하고 욕심이 많거나
통제하는 집단이나 스승들은 피하기 바랍니다.
참나는
완전히 충족시켜주고 아무런 필요가 없으며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승은 진실의 종이지
진실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신에 이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모두 신에게 봉사합니다.
영적 문헌 곳곳에는
다양한 문화에서 다양한 언어로 거듭 진술된 선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성은 충성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개
나를 인정하는 이들은 나의 것이다라는 식으로 진술됩니다.
이러한 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사람이 길을 얼마나 갔느냐가 아니라
길위에 있다는 사실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