吏曹正郞永川尹公就善 墓碣銘,이조정랑 영천윤공 취선 묘갈명
公의 諱는 취선이요 字는 경장(慶長)이며,성은 윤씨(尹氏)로 관향은 영천이니 고려의 호장 휘 절생(切生)을 시조로 화여 거기에서 生한 이가 휘 득지(得之)로 태자첨사를 하였다.
二代를 傳하여 휘 승관(承琯)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당문학을 역임해서 고을백에 봉해지고 문도공 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再傳하여 휘 위보(渭保)는 삼중대광으로 문하찬성사 겸 집현전 태학사 로서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四傳하여 휘 순(淳)은 한양조(漢陽朝)에 들어와서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하고, 또 再傳하여 휘 긍(兢)은 호가 줒재(竹齎)로 문과 급제하여 이조참의 겸 경연 참찬관을 역임하고 신원사(新源詞)에 봉안하니 公에게 오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가 무형(畝亨)이니 호는 혜성(慧星)으로 충무위 부사직을 지냈고, 증조는 휘가 찬(贊)으로 호는 옥당(玉堂)이요, 강예원 습득을 역임했다.
祖의 휘가 원좌(元佐)로 순능참봉이고, 考의 휘가 빙(聘)으로 남명 조선생 문하에서 수업 하였으니 호는 송파(松坡)로 통정대부에 올라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이조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妣는 숙부인으로 창녕조씨이니 참봉 복원(福元)의 따님이다, 조선 명종 임술 1562년 12월 25일에 영천 완산리 고택에서 公이 출생하여 선조 무자 1588년에 생원에 올랐다, 임진년 1592년에 이르러니 왜란이 일어나니 왜적들이 바다를 덮고 조선에 침범해서 육상하여 북으로 침공해 올라가니 각주군현들은 바람에 쓰러지듯이 무너지고 영천군성도 함락 당하여 모두가 불살라지고 무법천지가 되어 살육과 약탈을 일삼아 세상이 무인지경으로 변하니 향당에서는 유생들이 궐기하여 창의 토적 하자고 일어나자 송파공도 분발하여 의거 할세, 公도 아우 종선(從善)과 더불어 부공을 따라서 의여에 참여해서 향진에 입진하여 호수(湖叟) 오천정공 세아(世雅)를 영천의장으로 추대하고 부공은 중위장이 되어서 합력해서 모병하여 참여하니 의병이 900여명에 이르렀다.
이윽고 영천城을 점령해서 둔취(屯聚)해 있는 왜적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도모하여 신녕 의흥 하양 경산 자인 경주등 읍의 관병과 의진들에게 원군을 청해서 합력하여 적을 공격할때 본군의진은 城의 東南 양방을 맡고 이웃의 의진들은 西北을 맡아서 사방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서 마현산에 올라보내 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을 따라 회사(灰砂)를 날리게 하니 적들은 당황하여 옥사(屋舍) 안으로 난입해서 숨어니 아군들은 城을 넘어 드러가서 그 옥사들에 불을 질러 왜적들은 태반이 소사(燒死)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혹은 명원루로 달아나서 물에 뛰어들고 혹은 동남문을 통해서 도망하니 아군의 의병들이 포위해서 모두를 참살하여 왜적 한놈도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으니 이날은 바로 7월 27일의 일이였다, 곳이어 8월에는 의진이 심야행군을 해서 21일의 여명(黎明)에 직로(直路)로 경주성으로 진격해서 서문으로 부터 우뢰같은 고성을 울리면서 성내로 쳐들어가서 적을 맞아 혈전을 벌려서 왜병들의 사자(死者)가 무수 하였다.
城 동문과 남문쪽에는 관군 경상좌도 박진.은 동문을 경주근해 의병들은 남문쪽을 맏아 공격하고
영천 호수 정세아 의군은 서문을 맏아 공격하여 城內에 들어가서 서로 함류하여 경주성을 회복하기로 의결하여 각각 맏은 성문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하였으나 경상좌도사 박진이 왜놈들에 대패하여 후퇴 명령하여 후퇴하니,서문으로 진격한 영천 호수 정세아 군영 만이 이사실도 무르고 힘껏 전투를 하였던 것이다, 경주성 1차전투였다,
그러자 왜적들은 기습부대를 북문으로 잠출 시켜서 영천의병들이 있는 서문으로 엄습하여 밖에서 들어옴으로 해서 아군의 선봉에 섰던 제의사(諸義士) 영천의진 호수 정세아 군들이 역전중 성중(城中)에서 전순(戰殉)하였으니,아~ 안타까울 따름이라 이전투에 영천의진 17현사(十七縣士) 였으니, 곧 公과 더불어 生員 망정최공(晩亭崔公) 인제(仁濟),生員 백암정공(柏巖鄭公) 의번(宜藩),노항김공(魯亢金公) 연(演),남전이공(藍田李公)일장(日將),대재이공(大齎李公)득인(得麟),
쌍계이공(雙溪李公)영근(榮根),사촌이공(沙村李公)지암(之馣),추계이공(楸溪李公)득룡(得龍),남계손공(南溪孫公)응현(應晛),영천이공(永川李公)정분(廷芬),도천정공(道川鄭公)석남(碩男),신야전공(新野田公)흥제(興霽),소곡김공(召谷金公)대해(大海),청주한공(淸州韓公)득의(得義),담양전공(潭陽田公)억수(億壽),밀양박공(密陽朴公)사념(士恬)등 十七의사 였다,
永川尹公도 여기에서 함께殉死 하였으니,軍功으로 처음에는 호조정랑의 증직이 내려지고,후에 통훈대부 이조정랑으로 개증(改贈)되었다,
묘소는 청통 중신원리 후산 신좌원에 안장하였다, 公의 配는 숙부인 경주김씨 참봉 한(澣)의 女이다, 을축1565년 모월 모일에 출생하여 모갑 7월8일에 졸하니 합폄이다,
2남을 두었으니,종돈(宗惇)은 통덕랑이고,상돈(尙惇)이다, 종돈의 아들은 연번(延番)이고,상돈의 아들은 석린(石麟)이다,연번은 무후 하고,석린은 응삼(應三),중삼(重三),기삼(起三)은 효행의 소문이 있고, 또 성삼(成三),형삼(亨三)이 있다,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하루는 그 주손 장환보(章煥甫)가 나를 찾아와서 公ㅂ의 갈명을 청하며,말하기를" 오호라 부군의 世가 지금에 격(隔)한지가 400여 성상(星霜)이요,창상지변(滄桑之變)을 여러 차례나 겪으면서 자손들이 쇠잔하여 선조께서 세우신 功을 한번도 현양하지를 못했고,묘소에 조각돌도 아직 세우질 못했으니 이는 우리 후손들이 불인하고 불명한 죄가 극에 달해있습니다, 원하옵건데 공께서 붓을 잡으시고 영원히 이지러짐이 업ㅅ게 조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불영(不纓)이 고루하여 이 역사를 감당할 수 없으나 차제(此際)에 추념을 해 보니 이 임란 때는 우리 호수선조께서 公의 삼부자와 더불어 동고동사의 맹서를 같이 하신 삽혈지계간(歃血之契間)이요, 또 경주전투에서는 우리 가문의 백암공이 공과 더불어 함께 순절한 세의가 있으므로 도의상으로 고사 하기가 어려움으로 나도 경앙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으로는 인손의 위선지성(爲先之誠)도 감동 되어서 나의 분수에 넘치게 망동됨도 잊고 삼가 右와 如히 撰해서 이어서 銘을 짓노니 가로되 ...
아! 위대 하도다, 우리 공께서는 맑고 깨끗한 구족 이로다, 祖先의 代를 이어 정충을 세웠음이 역사에 엄연하도다,
그 음덕 영원히 내려 후손이 장래에 德을 헤아리도다, 신원의 옛 언덕에는 오직 公의 까마득한 유택이노라, 존령께서는 千秋에 영원히 여기 강림하시어 평안하소서, 公을 추모하여 그 행적을 새겨서 이 표석을 세우노라,
기묘 1999년 4월 芒種철에
오천(烏川) 정희영(鄭喜永)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