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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71. [역경의 열매] 박춘희 <1-10> 행정 경험 없는 구청장… ‘밥상머리 소통’으로 돌파
예수님의 소통과 공감 능력 본받아… 공무원 1400여명과 식사하며 대화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은 “분식집을 하며 어려웠던 시절, 사법시험에서 계속 떨어질 때도 하나님은 늘 함께하셨다”고 말했다. 송파구청 제공순풍만범(順風滿帆). 민선 5·6기 서울 송파구청장으로서 지난 6년여 시간을 돌아봤을 때 든 생각이다. 순풍에 돛 단 배가 순항하듯 ‘대한민국 대표 행복도시’를 꿈꾸며 송파 구석구석을 챙겼더니 여러 구정 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 결과 감사하게도 송파구는 국제상을 많이 받았다.
지난 2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2016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 시상식에서 송파구는 3개 부문을 동시 수상했다. 스티비 어워즈는 비즈니스 분야의 오스카상으로 불린다. 아시아·태평양 22개국 기업·단체·공공기관의 경영업적 등을 평가해 시상하는 국제적인 상으로 송파구는 우리나라 자치구 중 유일하게 ‘출판물 혁신’ ‘서비스산업 혁신’ ‘이벤트활용 혁신’ 3개 부문에서 금상 2, 은상 1개를 받았다. 이번 상은 지역주민과의 소통·아이디어·열정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나는 어른들로부터 ‘제2의 박순천이 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여느 여인들처럼 나이가 들어 혼인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결국 아이들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한 대학가 앞에서 분식집을 차리고 생계를 이어갔다. 고된 일상 가운데서도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해 결국 아이들을 아빠에게 보내고 몇 날 며칠을 울며 지냈다.
그때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을 선물로 주셨다. 뒤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도전해 10년 만에 합격한 ‘9전10기 변호사’로 6년을 일했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기회. 송파구청장 선거전에 뛰어들었고 행정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송파구청장에 취임했다. 처음 6개월은 힘든 적응 기간을 보냈다. 공무원 조직에 들어와 보니 굉장히 폐쇄적이란 것을 알게 됐다. 딱 부러지는 말투, 깍듯하게 인사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때 찾아낸 해결책이 소통이었다. 송파구 직원 1400여명과 돌아가면서 식사했다. 이 같은 ‘밥상머리 소통’으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세세한 것들까지 얻게 됐다. ‘대한민국 대표 행복도시 송파’는 그렇게 시작됐다.
예수님만큼 소통에 능한 분이 또 계실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눈높이 맞춤 대화를 하셨다. 간음한 여인을 비롯한 낮고 천한 이들까지 친구로 삼으셨다. 소통하고 공감하지 않고는 이들을 품을 수 없다. 성경도 죄인인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언어로 설명한 하나님의 소통 편지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을 닮고 싶다.
오늘도 출근길에 묵상기도를 드렸다. 구민 모두 행복하게 해달라고. 직원들 모두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개인적으론 하나님께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간구했다.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복을 나눠주고, 나 또한 그들에게 복을 나누길 원한다. 그렇게 서로 축복하면서 만나고 소통해야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비로소 하나 돼 일할 수 있다. 내가 순간순간 기도드리는 이유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춘희 <1> 행정 경험 없는 구청장… '밥상머리 소통'으로 돌파
* [역경의 열매] 박부원 <2> "어릴 때 무엇이든 칭찬해주는 교회가 즐거워"
* [역경의 열매] 박춘희 <3> 속상할 때마다 위로의 천사를 붙여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박춘희 <4> 남학생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미스터 박' 별명
* [역경의 열매] 박춘희 <5> 분식집 운영하면서 약자의 설움 톡톡히 경험
* [역경의 열매] 박춘희 <6> 두 아이를 아빠에게 보내고 나서 깊은 절망
* [역경의 열매] 박춘희 <7> 주님 만나고 달라진 삶… 사시 도전할 용기 생겨
* [역경의 열매] 박춘희 <8> '3박자 시험공부'로 사시 1차에 합격했지만…
* [역경의 열매] 박춘희 <9> 금식기도 응답 받고 마침내 '최고령 사시 합격'
* [역경의 열매] 박춘희 <10·끝> 구청장 재선 성공에 대단한 뒷배?…"그분은 하나님"
◇약력=△1954년 경남 산청 출생 △부산대 의류학과·행정대학원 졸업 △건국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2002년 사법시험 합격(44회) △2003∼2005년 사법연수원 자치회장(34기) △바른선거시민모임 법률자문위원, 한나라당 지방선거 클린공천감시단 위원 등 역임 △현 서울 송파구청장, 새벽교회 권사.
***[역경의 열매] 박부원 <2> “어릴 때 무엇이든 칭찬해주는 교회가 즐거워”
헌금했다고 어머니에게 야단 맞기도… 지금은 함께 기도 다니며 굳게 의지
1985년 아버지 회갑 때 어머니, 언니, 오빠 등 가족과 함께한 박춘희 구청장(왼쪽 두 번째).나는 경남 산청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름에 대한 추억에 웃음부터 난다. 부모님은 아들이 태어나길 지극정성으로 빌었는데 딸이 태어나자 차일피일 출생신고를 미루셨다. 옆방에 세 들어 산 총각이 부모님을 대신해 출생신고를 했다. 이름도 ‘춘희’로 직접 지어서 말이다. 언니 이름이 ‘옥희’였으니 부르기 쉽게 ‘춘희’로 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네 이름은 옆방 ‘자범’이가 지어 그렇다”며 놀리곤 한다.
부모님은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오일장 근처에서 살림집이 딸린 구멍가게를 하셨다. 작은 ‘점방(店房)’이었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가게 돌보는 것도 모자라 산에서 나무를 해오시고 메밀묵도 쑤어 파셨다. 아버지는 면서기로 일하셨지만 한량 같은 분이셨다.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하는 것을 좋아해 집안 살림에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하셨다.
어머니 대신 점방을 보다가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딴 짓이라도 하면 혼쭐이 났다. 친구들은 “느 엄마 느∼무 무섭다”며 들로 산으로 함께 도망쳤다. ‘싼돌이’란 별명답게 하루 종일 싸돌아다녔다. 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 벌을 서고 회초리를 맞은 뒤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맛있게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모범을 보여야하는 신앙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교회 근처에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 눈을 피해 나는 친구들을 따라 동네 교회에 나갔다. 성탄절 때 떡이나 과자를 먹고, 무용이나 연극을 하는 게 좋았다. 무엇이든 잘한다고 칭찬해주니 교회에 가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두 살 많은 오빠가 문제였다.
하루는 어머니 하얀 속치마를 머리에 두르고 종이 왕관을 쓴 채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동생의 무대를 재밌게 지켜본 오빠는 “춘희가 교회서 춤췄다”고 일렀다. 돈을 모아 헌금이라도 드린 날이면 “춘희가 하늘에 돈 던졌다”며 고자질했다. 어머니에게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면 ‘우리 어무이는 참 못 됐다’라며 서러워 울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누구보다 듬직한 분이셨다. 점방에서 5원에 열 알씩 과자를 팔았다. 아이들이 빈 병을 가져오면 어머니는 반 움큼씩 과자를 주셨다. 한 번은 텃밭에 계시느라 아이에게 돈만큼 과자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과자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놈을 찾아내 따지겠다”고 우기는 내게 어머니는 “놔둬!”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 엄마가 찾아와 미안하다고 할 때도 어머니는 “고마 됐어예∼”라고만 하셨다. 어머니는 이튿날 조용히 말씀하셨다. “춘희야, 입으로 먼저 사달을 내지 않으면 큰일도 작은 일이 된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던가. 나는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 말 없고 무뚝뚝한 것까지도 말이다.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어머니는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없으셨다. “어무이∼. 와서 내랑 같이 좀 살자”고 했을 때도 이유를 묻지 않고 “알았다”고만 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살며 힘이 돼 주신다. 아예 새벽교회 옆에 살며 매일 교회에 나가신다. 찬양하고 기도하시면서 어머니는 교회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예수님과 나눈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3> 속상할 때마다 위로의 천사를 붙여주신 하나님
마음속 화 참으며 이겨내는 법 배워… 긍정의 마인드 심어주심에 늘 감사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이 1974년 부산대 재학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웅변을 하고 있다.경남 산청에서 부산 도회지로 옮겨온 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입학시험을 본다고 하니 시골 사람들은 “춘희가 되겄나”라며 한마디씩 했다. 보란 듯이 400점 만점을 받아 공동 수석으로 입학했다.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공부 음악 미술 체육 등 가리는 게 없었다. 특히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 중·고교, 부산대 재학 중에도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받았다. 대학생 때는 국회의원 찬조연설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어른들은 “춘희는 말 잘하니까 나중에 정치해라. 제2의 박순천이 돼라”고 말씀하셨다.
한때는 문학소녀의 꿈도 키웠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를 가르쳤던 윤 선생님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감수성들을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삼봉이는 잘한다’라는 수필을 읽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삼봉이처럼 개구쟁이였던 막내 동생에 대해 글을 썼다. 선생님은 “춘희 니가 글을 잘 쓴다”며 다른 학생들도 볼 수 있게 교실 벽에 붙여 놓으셨다.
윤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뒤 오신 선생님은 사뭇 달랐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쓴 나의 일기장을 외면하고 내 것을 가져다 베낀 친구의 것에 더 후한 점수를 줬다. 발표를 할 때도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발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골뜨기라고 샘(선생님)이 차별한다’며 속상한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깡촌 시골 초등학교에선 더한 일도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중간고사를 볼 때 결석하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반평균’을 그 친구가 깎는다는 게 이유였다. 성적을 놓고 반과 반의 경쟁이 심하다 보니 선생님들도 교육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그 친구가 할머니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럽고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친구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밤 어머니는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일일 달력에 정성껏 싸주시며 친구랑 실컷 놀다오라고 하셨다.
돈 없고 가난했던 나는, 또 내 친구는 왜 차별을 받아야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는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다 표출하고 살지는 않았다. 만약 선생님께 차별 받는 것 때문에 화를 내고 대들었으면 어땠을까. 학교를 다니는 게 싫었을 테고, 그만뒀을 지도 모른다. 당연히 좋아하는 웅변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천사를 붙여주신다. 나는 어머니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통해 위로 받았고, 친구는 누룽지를 나눠 먹는 동무에 기대어 속상한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우리 모두 더우면 걷어차고 추우면 끌어다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은 친구요, 부모가 됐으면 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게 참 많지만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것이다. 긍정의 마인드를 심어주신 것.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 성격이 먼저였는지, 긍정적 마인드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화를 내본지 참 오래됐다. 그래서 화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은 지금의 박춘희를 만들기 위해 그 시절부터 그렇게 나를 다듬으신 것 같다. 화를 참아내는 법까지도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4> 남학생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미스터 박’ 별명
대학 땐 교회 뒷전 사회활동에 열심… 이혼 뒤엔 돈 버느라 정신 없이 살아
부산대 의류학과에 재학하던 시절의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 ‘미스터 박’ ‘박군’이라 불렸던 그는 사회활동이나 봉사에도 열심이었다.초등학교 때 어머니 몰래 잠시 교회를 다닌 나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교회를 다시 찾았다. 입시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에 갔던 것 같다. 그땐 그래도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학생회 부회장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기도는 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학 합격에 관한 기도뿐이었다.
법대나 정치학과에 가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제2의 박순천이 돼라’는 이야기는 어느새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다. 법대에서 공부하는 오빠도 부러웠다. 하지만 예비고사 성적이 좋지 않았고 결국 내 뜻과 상관없이 부산대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다. 막걸리 한 잔에 밤새 토론하는 걸 좋아했다. 법대나 의대에 가서 청강도 했다. 동기나 선후배들은 나를 ‘미스터 박’이나 ‘박군’이라 불렀다. 여학생보다 남학생들과 어울리며 사회활동이나 봉사에도 열심이었다.
교회와는 점점 멀어졌다. 오히려 기독교 불교 가톨릭 등 ‘종교 쇼핑’을 하고 다녔다. 가끔 창조론에 맞서 진화론을 이야기하며 목사님과 논쟁을 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고 ‘잘한다’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니 정말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던 것 같다.
이런 착각을 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정당 선거사무소에서 일하며 행정대학원에 다녔다. 이후 결혼해 딸 아들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에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남편과는 여러 면에서 맞지 않았다. 결국 결혼한 지 8년여 만에 이혼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1988년 두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딸의 처지가 안쓰러웠던 부모님이 부산 살림을 정리하고 동행했다. 그렇게 서울로 이사와 도봉구 방학동에 터를 잡았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주부로 오래 살다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쉽게 빨리빨리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요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자주 도와드렸던 나는 요리만큼은 자신 있었다. 혼자서 20명분 음식은 거뜬히 차려낼 수 있었다.
서울 홍익대 앞에 ‘식사시간’이라는 분식집을 오픈했다. 김밥 라면 떡볶이 비빔밥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대학가 앞이라 장사가 잘됐다. 정말 학생들이 ‘식사시간’만 되면 물밀듯 학교에서 빠져나와 우리 식당으로 들어왔다. 앞치마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돈이 차고 넘쳐 바닥으로 쏟아져내릴 정도였다. 그러면 잠시 허리를 펴고 ‘학생들이 그만 좀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하루하루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새벽시장에서 장을 본 물건을 두 손 가득 들고 방학동에서 홍익대 분식집까지 출퇴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겨놓고 온종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느새 주객이 전도됐다.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시작한 일 때문에 나는 오히려 아이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잠든 아이들을 보고 출근한 나는 언제나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에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5> 분식집 운영하면서 약자의 설움 톡톡히 경험
아이들을 아빠에게 보내고 힘든 시간… 주님, 인생역전할 환경으로 바꿔주셔
1978년 부산대 졸업식 때 여동생, 친구들과 함께 한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오른쪽 두 번째).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 앞에서 ‘식사시간’이란 분식집을 1년여 동안 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힘없는 약자의 서러움을 특히 빼놓을 수 없다.
며칠 동안 우리 분식집 앞으로 덩치 큰 사내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 날 골목 끝에 술집 하나가 떡하니 들어섰다. 나를 비롯한 인근 가게 주인들과 상의도 없이 ‘식사시간’ 간판을 거의 가릴 듯한 크기로 술집 간판이 내걸렸다. 골목 끝에 간판을 걸어봤자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상의하는 게 도리였다. 중간에 상가 일을 맡아주던 분을 통해 수차례 간판을 치워달라고 요청했다. 술집 측에서도 ‘알겠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일을 맡아줬던 분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았고 각목 등에 맞아 다친 것이다. 심증만 있고 확실한 물증이 없어 사건은 확대되지 못했다. 결국 술집 간판에 관한 일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한 번은 아침에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분식집 출근을 위해 버스에 탔다. 장을 본 가방은 앞에 가지런히 세우고 한 손엔 두부를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론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했고 나는 저 뒤에서부터 앞으로 시장 가방과 함께 휩쓸려 넘어졌다. 두부는 뭉개지고,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요즘 같으면 버스 기사에게 따져 사과를 받았을 것이다. 치료비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른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그땐 왜 그렇게 못나게 굴었는지…. 이 땅에서 힘없이 산다는 건 하염없이 처량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간판을 떼어달라고 말하는 게 분명 맞는데도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게 약자로서, 자신감 없이 그 시절을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려고 시작한 분식집 일이 결국 나와 아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엔 돈 버는 재미가 있어 힘든 상황들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분식집을 오픈하고 우리 아이들과 눈 맞추며 함께 놀았던 게 언제인가 싶었다. 온종일 일하고 밤늦게 들어와 겨우 자는 애들 얼굴을 쓰다듬는 게 전부였으니 엄마 마음이 어땠겠는가. 당시엔 일한답시고 친청 부모님에게 아이들 맡기는 것도 주변의 눈치가 보였다. 물론 부모님은 누구보다 손자손녀를 잘 키워주셨지만 말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이혼한 애들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는 “분식집을 하느라 바쁘니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 안정되게 키우겠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변명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데려왔지만 막상 돈 버느라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을 아빠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지금보단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게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힘든 결정이었다. 품안에서 자식을 떠나보내고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힘든 시간을 ‘기적의 드라마’로 만드셨다. 온전히 주님을 만나게 하셨고, 새로운 역전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셨다. 눈물이 웃음이 되고, 절망을 소망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사는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6> 두 아이를 아빠에게 보내고 나서 깊은 절망
부흥회 참석 후 매일 새벽 회개 기도… 주님과 교제하며 삶의 의욕 되찾아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오른쪽 여섯 번째)이 지난 18일 열린 송파구청기독교신우회 수요예배에서 회원들과 특송을 부르고 있다. 박 구청장은 신우회 수요예배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엄마, 자주 와.”
아이들을 부산에 있는 아빠에게 데려다 주고 뒤돌아 나오는데 작은 아들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은 머리를 숙이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손만 만지작거렸다. 아마 딸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는 쓸쓸이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에 갔다 온 뒤 꼬박 사흘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지냈다. ‘내 삶의 전부였던 아이들이 없는데 돈은 벌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떠올렸다.
‘엄마 자주 와. 엄마 자주 와.’ 꿈이었을까. 의욕을 잃고 누워만 있을 때 아들의 음성이 저만치서 들리는 듯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선 안 된다. 정신을 차리자.’ 어머니가 만들어준 죽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찬 공기를 들이키며 얼마나 걸었을까. 전봇대에 붙어있는 부흥집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부흥강사인 고 최자실 목사님의 집회였다.
3일 연속 부흥집회에 참석했다. 집회 마지막 날 최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시간부터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자 하는 사람은 일어나세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나도 모르게 스르르 일어섰다. 그리고 집회가 열린 도봉순복음교회(현 순복음한성교회)에 등록하고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함동근 담임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지금의 상황을 고백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많이 슬프다고 했다. 삶의 의미가 없어 일할 맛도 안 난다고 했다. 함 목사님은 정말 따뜻하게 위로해주셨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벽에 교회로 가는 시간도 즐거웠다. 주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마음의 상태를 전하기도 하고, 찬송가도 흥얼거렸다. 새벽에 무릎을 꿇고 지나온 과거들을 낱낱이 고하며 회개기도를 드렸다. 특히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같이 눈물 뿌려 기도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 내 모습은 정말 보잘 것 없었다. 이혼했고 아이들도 아빠한테 보냈다. 여자 혼자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남들 보기에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했을까. 하지만 그때가 가장 성령충만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해 보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을 소개하는 재미로 살았다. 안수기도를 하면 다 나을 것도 같았다. 실제로 배가 아프다는 조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정말 낫기도 했다. 그땐 주님에 대한 첫사랑으로 불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이겨냈다.
뜨겁게 주님과 교제하면서 다시 의욕을 찾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보자. 어차피 다시 인생을 살 거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자. 다시 아이들을 만났을 때 ‘엄마 열심히, 성실히 잘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떳떳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7> 주님 만나고 달라진 삶… 사시 도전할 용기 생겨
시작할 땐 조기 합격 자신감 넘쳐… 시험에 자꾸 떨어지자 덜컥 겁나
2013년 새벽교회 강원도 영성캠프에서 교회 성도들과 함께한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 어머니는 이 교회 명예권사이고 박 구청장을 비롯한 딸 셋도 모두 권사다.1990년대 초, 나 박춘희는 달라졌다. 처지를 비관하던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을 만나고 든 생각이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마음과 뜻과 생각이 달라진다. 인간의 판단과 기준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법시험 도전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땐 참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법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기 때문에 감히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성령충만까지 했으니 세상 두려울 게 뭐가 있었겠는가.
분식집을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나의 이 같은 계획을 전했다.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 현재 변호사인 오빠는 대학생 때 시위 등으로 쫓기면서도 사법시험 1차에 거뜬히 합격했다. 군 제대 후에도 바로 2차 합격하는 것을 봐온 나는 ‘오빠도 저리 금방 합격하는데 나도 공부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니가 얼마나 잘난 딸인데 서빙만 하고 있노. 생각 잘했다”고 했다. 어머니도 “느그 오빠도 하는데, 니도 잘 하지 않겄나. 기본 머리는 있어가 쪼매만 하면 합격할 끼다”며 반가워했다.
그런데 막상 가족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보니 ‘이게 잘하는 일인가’ 싶었다. 당시 출석하던 도봉순복음교회(현 순복음한성교회) 함동근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목사님은 이 말씀을 주시며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내라. 다 잘될 것 같다”고 응원해주셨다.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사법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서울 방학동 집을 떠나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에게 “2년 정도 공부하고 1차 합격할 끼다. 바로 2차 합격하고. 내 3년 만에 패스 안하겠나”라고 큰 소리를 뻥뻥 쳤다.
그때 내 나이 38세. 기분 같아선 하나님이 금방 합격시켜주실 것 같았다. 당시에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첫해 시험을 쳐보니 상당히 어려웠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주변엔 한 번 시험 삼아 쳐본다고 했지만 막상 떨어졌다고 통보를 받으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많이 울었다.
두 번째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밤 12시 잠자리에 누우면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러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하루 18시간을 꼬박 앉아 공부만 했다. 잠자고 공부하는 시간을 뺀 나머지 1시간은 세수하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또 떨어졌다. 지속하는 게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시 마음을 잡았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세 번째 시험은 한 문제 차로 떨어졌다. 이럴 때 느슨해지는 심신을 경계해야 하는데, 한 문제로 떨어졌다고 하니 자만심이 생겼다.
‘한 문제야 극복 못하겠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방심하고 말았다. 네 번째 시험에선 10개 차 이상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다. ‘내 이래 가지고 평생 합격할 수 있겠나. 못 하는 거 아이가. 공부한답시고 하나님께 느무 무관심했다. 방심했다.’
사법시험 합격을 위해선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3박자 시험공부’였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8> ‘3박자 시험공부’로 사시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잇단 고배로 몸과 마음 지쳐… ‘주님께 매달려보자’ 금식기도원으로
2005년 1월 사법연수원 수료식 때 언니, 여동생과 함께한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가운데).1차 사법시험을 네 번 연속 떨어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내가 최선을 다했는가. 물론 이 이상 어떻게 더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랬을까. 이 질문에 대해선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책상 앞에 써 붙인 메모지들을 한 장씩 떼어냈다. 그러자 처음 고시원에 들어와 붙였던 성경 구절이 보였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공부에 집중한다며 조금씩 나태했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됐다. 다시 한 번 나를 정비하고 최선을 다해보리라 결심했다.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을 다하자. 둘째, 주변 사람들로부터 최선을 다했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듣자. 셋째, 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 최선을 다하자. 바로 ‘3박자 시험공부’였다.
사실 ‘3박자 시험공부’는 훗날 인터뷰하면서 한 잡지사 기자가 붙여준 것이다. 하나님 보기에, 주변사람 보기에, 나 스스로 보기에 최선을 다하자는 결심은 합격을 위한 나만의 전략이었다.
구체적으로 3박자 시험공부를 실천에 옮겼다. 시간이 많아 교회에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헌금을 많이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보자고 다짐했다. 100일 새벽기도를 드리며 공부했다. 교회에서 하는 40일 새벽기도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4시30분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드렸다. 마치면 산에 올라가 간단하게 운동을 하고 내려와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책상에 앉으면 점심을 먹을 때까지 공부만 했다. 그렇게 3식을 먹을 때를 빼곤 화장실도 안 가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10년 치 사법시험 기출문제를 분석해 나만의 노트에 정리했다. 두 달 동안 그 작업을 끝내자 주변에서 “오페라(‘춘희’란 이름이 오페라 제목과 같아서 붙여진 별명)씨 대단하다”며 인정해줬다.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3박자 시험공부를 했다. 그리고 5번째 도전에서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2차 주관식 시험은 두 번을 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했으니 공부 양도 많이 쌓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실패. 이듬해에 부쩍 욕심을 내 다시 3박자 시험공부에 도전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1차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40여일쯤 지났을까. 고시원 식당에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가 그대로 상에 쓰러지고 말았다.
희미하게 ‘춘희’를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얼굴에 온통 반찬이며 밥알 투성이였다. 급속도로 몸이 쇠약해진 나는 짐을 싸들고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제발 나 좀 한 번 봐달라”는 절규였다. 겨우 몸조리를 끝내고 막판에 온힘을 쏟았지만 한 번 남은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꼭 가야할 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시 1차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잘될 거란 자신감도 없었다. 내가 결정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한 번 더 매달려 보자.” 3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경기도 청평에 있는 강남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9> 금식기도 응답 받고 마침내 ‘최고령 사시 합격’
국선변호·무료 법률상담 활동 중 송파구청장 후보 출마 제안 받아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이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세를 하고 있다. 그는 2010년에 이어 민선6기 재선에 성공했다. 송파구청 제공
“하나님 제가 사법시험 공부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만할까요. 그만두면 제3의 길을 알려주세요.” 경기도 청평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이 문제를 놓고 집중 기도했다. 하나님은 3일 금식기도를 더해 7일째 새벽기도에서 환상을 보여주셨다.
눈앞에 빨간색 스탠드가 확 지나가는 게 아닌가. 나는 이 빨간색 스탠드를 켜놓고 매일 공부했다. 7일 금식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이었다. 다시 3박자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해 1차 시험은 떨어졌고 잠깐 실망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 공부를 하라고 했지, 올해 합격 시켜주신다고 응답한 적은 없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1차만 세 번 합격했다. 2차는 6번 만에 통과했다. 최종 합격자를 발표할 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이왕 합격시켜주실 거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알려주세요.”
보통 사법시험 최종 합격은 오후 5시쯤 알 수 있다. 3시쯤 휴대전화가 울렸다. 신문사 기자라고 밝힌 그는 “박춘희씨가 최고령으로 합격했다”며 소감을 물어왔다. ‘2002년 44회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 48세 박춘희.’ 그게 나였다.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다.
변호사 일은 오빠와 선배가 함께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시작했다. 나는 사법시험 공부를 오래한 것에 비해 변호사로 활동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5년 정도 일했으니 말이다. 국선변호를 많이 했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무료법률 상담을 했다. 그러다 2010년 6·2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지방선거 클린공천감시단’ 위원에 위촉됐다. 위원장은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이었고, 위원 대부분은 변호사들이었다. 회의 때마다 서울 송파구가 화제였다. 대부분 지역에서 후보를 냈는데, 송파구만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여성전략공천지역으로 선정돼 여성 후보를 찾는데 난항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심 위원장이 “박 변호사는 집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우리 집이 송파 아닙니까”라고 별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러자 심 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말했다. “박 변호사가 송파구청장 나가면 되겠네.” 당연히 농담으로 넘겼다. 심 위원장은 이후로도 몇 차례 송파구청장 후보를 제안했다.
선거는 얼마 남지 않았고 송파구에선 여전히 여성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심 위원장은 작심한 듯 당시 인재영입위원장인 남경필 현 경기도 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송파에 사는 여 변호사가 있으니 한 번 만나보시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7시까지 한나라당 당사로 꼭 가보라고 당부했다.
일단은 알겠다고 답했지만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오전 8시였다. 의뢰인과 10시에 약속도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로 가는데 의뢰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급한 일이 생겨 날짜를 미뤘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약속도 취소됐고 사무실에 가야 할 일도 없어 생각난 김에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로 향했다. 도착 시간은 오전 11시. 휴식 중이던 공천심사위원들을 만났고, 급한 대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사법시험 9전10기’ 열매에 이어 또 다른 나의 도전이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박춘희 <10·끝> 구청장 재선 성공에 대단한 뒷배?…“그분은 하나님”
지지기반은 새벽교회 성도님들… 내가 걸어온 길 위에는 그분 손길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해 여름 지역경제살리기 일환으로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며 구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송파구청 제공“당신의 지지기반은 무엇입니까.” 면접에서 공천심사위원들의 질문을 받고 참 당황스러웠다. 내게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말이다. 그런데 불쑥 이런 답이 나왔다.
“제가 송파2동에 있는 새벽교회 권사입니다. 등록 성도가 1만명쯤 되는데, 우리 이승영 목사님 리더십이 아주 대단하십니다. 만약 제가 후보로 확정되면 우리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저를 지지하고 응원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제 지지기반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러면서 “송파구청장 후보로 나오려는 사람이 교회 이야기를 하면 되는가”라며 핀잔을 줬다.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사실이라 그렇게 말 한 것”이라며 재차 강조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전혀 무겁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떠밀려 나간 자리였고, 단 한 번도 송파구청장 자리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면접을 그렇게 망쳐도 속은 후련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송파구청장 후보로 공천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공천심사와 관련해 후일담을 들었다. 역시 지지기반을 묻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을 놓고 위원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교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후보로 낼 수 없다는 반대 측과 달리 찬성하는 쪽에선 “사법시험 9전10기가 경쟁력이다.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며 나를 밀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천을 받게 된 나는 2010년 6·2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선5기 송파구청장에 당선됐다. 4년 뒤 재선에도 성공했다.
송파구청장에 당선되고 이런 질문을 가끔 받았다. “뒷배가 누구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으니 대단한 뒷배를 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두 팔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이라고 콕 짚어 전했다. 하나님이야말로 든든한 백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 위에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선거운동 현장에선 어렸을 때부터 갈고닦은 웅변 솜씨가 통했다. 분식집을 하고 사법고시에 도전한 스토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감케 했다. 이런 히스토리를 누가 만들겠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행정을 모르던 사람이 송파구청장이 된 지도 6년이 되어간다. 행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편의와 편리를 위해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통하는 자리를 자주 만들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다수공약수를 취합해 구정을 이끌어가는 데 반영했다. 요즘엔 청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오죽하면 내 역점사업이 ‘책을 즐겨 읽는 송파’ ‘청소년이 행복한 송파’를 만드는 것일까. 바로 이들의 미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내 미래가 행복하다고 가정해보자. 노력을 안 해도 어차피 행복한 미래일 텐데, 지금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 반면 미래가 불행하다고 가정해보자. 어차피 노력해도 불행하긴 마찬가지일 테니 지금을 그냥 흘려보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행히 미래에 대한 꿈만 갖게 하셨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라고 조건을 거셨다. 나는 행복한 송파구의 미래를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뛸 것이다. 할 일이 많아 행복하고 꿈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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