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를 알면 궁금증이 생긴다
3) 일제의 독립군부대 토벌계획과 훈춘사건 조작
❰3.13❱용정만세시위 이후 일본은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진입작전에 위협을 느꼈다. 일제는 1920년 5월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하여 동북3성 순열사 장작림과 중일공동 ❰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성과 간도일대의 조선독립무장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수사반❱은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유하 등지에서 수백 명의 독립지사들과 독립군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남만주에서는 장작림의 협조로 독립군 부대를 마음대로 토벌할 수 있었으나 간도방면에서는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완강한 반대로 중일공동 수사반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까즈까 총영사는 5월 29일 봉천총영사관에서 마찌노 고문, 마루야마 총독부사무관, 히라마쯔 군참모 등과 함께 북간도 일대의 무장독립부대에 대한 토벌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마찌노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사령부와 총독부 관계자들과 상의하고 ‘길림성장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들의 정황이 악화되면 일본이 철저한 토벌을 주도한다.’는 결의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은 조선인들의 독립군부대를 발본색원할 계책을 세웠다.
먼저 화룡현 관할지역내의 두만강 나루터를 모조리 봉쇄하고 교통을 단절시켰다. 또한 조선 변경지대 회령에서 삼봉까지 통하는 경편철도 열차의 승객과 화물 운송을 중지시키고 일본군대만 수송하였는데 6월 12일까지 총 3천여 명의 육군을 수송하여 종성, 동관, 창수, 삼봉 등지에 주둔시키고 수시로 월경 토벌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⁴
6월 9일, 북경주재 일본공사 오하다는 죽경정부 외교총장대리를 회견하고 ❮봉천, 길림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당지 일본 영사와 시급히 협력하도록❯압력을 가하도록 강요하였다.
7월 16일, 조선주재 일본군참모장 오노, 관동군참모장대리 기시, 군사고문 사이또, 마찌노, 조선총독부 경무과장 구니도모, 조선주둔군 참모 히라마쯔 등은 봉천총영사관에서 회의를 열고 아까쯔까총영사가 토벌기한은 2개월로 하고, 출동 병력은 1개 연대로 하며, 토벌지역은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 것을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 고문으로 사이또 대좌가 동행하며 만약 중국군대가 토벌 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대도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⁵
8월 15일, 조선주둔군 참모장 오노, 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와 사이또 고문은 서울 회견에서 ❮간도지방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토벌은 사이또 대좌의 감독아래서 진행하되 중국관헌이 토벌에 성의가 부족하거나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경고를 주며 필요시에는 중국관원에게 일중협동수사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중협동토벌은 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중국정부를 강박하여 우리의 출병을 요구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므로 형세의 발전에 따라 중국관원과 협정에 의해 실시되도록 하여야 하며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군당국의 금후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전략을 세웠다.⁶
길림당국은 일본이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을 위해 중국에 출병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중국군대를 출동해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국군경들은 토벌할 때 마다 토벌 소식을 사전에 누설해서 독립군들로 하여금 미리 이동하게 하였으며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가옥과 병영을 소각하였다. 이런 정황을 포착한 일제는 중국군대의 토벌에 불만을 품고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에 직접 나서기로 하였다.
6월 17일, 일본 대장성(재정성)에서는 용정 일본총영사관 산하의 경찰인력을 2배로 증가할 것을 비준하였다.
7월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토벌계획서❱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8월 20일, 조선주둔군 사령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 간섭군으로 파견한 군사령부와 연락하여 일부 부대를 춘화의 토문자, 초모정자, 동녕현의 삼차구, 왕청현의 라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의 작전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⁷
8월 말에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 계획서❯일체를 완성하였다.
계획서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토벌기간은 2개월로 첫 단계는 주로 독립무장부대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잔여부대를 소멸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제19사단의 제37, 제38여단을 주력으로 하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제 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의 일부를 훈춘과 동녕 일대에 포진하여 독립무장부대의 러시아행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연변을 두개의 토벌구역으로 나누고 훈춘, 왕청, 용정, 두만강연안 사면에서 포위하여 일시에 토벌하여 하였다. 그리고 관동군(북만주 주둔군)에게도 토벌계획서에 따라 만약의 경우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립군무장부대를 도륙하도록 해림 방면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⁸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중국정부가 항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론이 출병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920년 9월 12일, 9월 30일 그리고 10월 2일 두 번에 걸쳐 비적을 동원하여❮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920년 9월 12일, 동녕현 로흑산에 근거지를 둔 왕사해와 기꾸꼬라는 일본인 애첩을 거느리고 사는 친일비적 고산의 수하인 만순 등은 300~400명의 비적을 동원하여 훈춘현 소재지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아침 5시경에 훈춘현 소재지를 포위하고 변방 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 현공서, 세무국, 전부국에 쳐들어가 재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일본 경찰서와 영사관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 비적들은 세 시간 정도 성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퇴각하였다. ❮갈장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들의 습격으로 상가지역 내 가옥 200 간이 불에 탔고 80여 명의 중국인과 6명의 조선인이 납치를 당하였고 약탈당한 재물은 1,500만조에 달하였다.⁹
그 후 9월 30일에 친일 비적 고산의 수하인 비적 진동이 훈춘현 대황구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군 공병영 제4련을 습격하여 20여 명을 납치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갔다.
두 차례의 비적들의 훈춘현 습격사건은 문제가 되었으나 중국인, 중국군대 및 조선인에게만 피해를 주었고 일본 영사관이나 일본 거주민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제 2의 새로운 사건을 조작해야 했다.
10월 2일 새벽 4시 비적 400여 명은 두목 진동과 만순 등의 지휘하에 기관총 2정, 대포 1문을 가지고 동서로 나뉘어서 훈춘현 소재지를 공격하였다. 비적들은 대포로 서북성문을 통제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일본영사관을 포위하고 폭탄을 던져 불태웠다. 이어서 6개의 상점을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그들은 현금 12만원을 약탈하였으며 일본인 경찰 1명, 일본인 11명, 조선인 6명을 살해하고 200여 명의 백성들을 납치하여 철수하였다.¹⁰
두 번째 ❮훈춘사건❯의 사망자, 중상자와 경상자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고 영사관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본은 ❮최근 훈춘에서 발생한 흉변은 전적으로 불령선인들이 마적 그리고 과격파 로씨야인들과 손을 잡고 일으킨 것이다.❯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조성한 후❮일본인의 생명안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간도에 25,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불령선인❯이라 불리는 무장독립군에 대한 대토벌이 시작되었다.
무장독립부대는 중국군의 사전 고지를 따라서 이동을 시작하였다. 청산리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한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군부대들은 산약지대이며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화룡현 2도구와 3도구로 집결하였다.
2. 청산리전투
1)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무장독립부대들
3부에서 계속됨
미주
4. 김춘선 외 2인, ❰최진동장군❱, 150쪽
5. 현천추,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반일부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계획❯, 501쪽
6. 앞의 책, 501쪽
7. 앞의 책, 503쪽
8. 김철수, 김중하,❰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230쪽
9. 심영숙,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훈춘사건❯, 506쪽
10. 김철수, 김중하,❰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 281 쪽